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355화 (355/422)

충성의 가치 (2)

동점골 이후, 경기장의 분위기가 극적으로 바뀌었다.

선수들의 움직임이 가볍다. 5관왕이라는 대기록도, 뉴캐슬에 대한 라이벌리티도, 영국 축구의 성지라는 웸블리 특유의 분위기조차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가벼운 발놀림과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그저 공밖에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된 것이다.

물론 뉴캐슬 역시 집중력을 유지했지만, 서로 경기에 집중하는 상태라면 당연히 우리가 뉴캐슬보다 더 강한 팀이고, 동기부여 또한 훨씬 잘된 상태였다.

아마 감독의 전술이나 분석팀의 퀄리티도 우리가 훨씬 더 뛰어날 것이다. 경기장 한쪽 측면에 잔뜩 쏠린, 붉고 검은 유니폼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트. 현대 축구에서는 상식과도 같은 전개 방식이지만, 브라이언과 샐리가 만들어낸 우리 아이솔레이트는 아주 예술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베넷과 마르틴이 끊임없이 뉴캐슬을 위협해, 경기장 왼쪽 측면이 과포화 상태가 되었다. 이제 반대편 측면에 패스가 전해지는 순간 한쪽으로 쏠린 뉴캐슬은 완벽히 무너지게 될 것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팀을 무릎 꿇린 공격 전개에, 뉴캐슬 역시 나름의 대책은 준비했던 모양이다. 반대편 측면으로 공을 보내지 못하도록 잭과 베넷을 끈질기게 견제하며 마크를 유지했다.

‘그 팀’ 감독에겐 미안하지만, 기출에는 항상 변형이 있다.

순간적으로 센터백 에디가 오버래핑하며 빌드업에 가세했고, 마르틴이 건넨 공을 곧바로 길게 걷어찼다. 상대 뒷공간에 완벽하게 떨어지는 로빙 스루, 톰슨의 전매특허로 불리던 것과 정확하게 같은 동작이다.

동시에, 축구의 신이 가속했다.

그 시점에서 뉴캐슬의 수비가 결정적으로 무너졌다. 누군가는 메시를 추격했고, 누군가는 크리그를 마크했으며, 누군가는 공을 따라 달렸기 때문이다.

공 앞에 가장 먼저 도착한 선수는, 이번에도 요니였다.

라인이 무너졌기에 오프사이드는 이제 성립될 수 없다. 공간연주자 요니에게는 독무대나 마찬가지의 상황이다.

“가라!”

희주의 기세 좋은 외침을 배경음악 삼아, 요니의 짧고 빠른 땅볼 크로스가 수비 사이를 가로질렀다.

수비를 등지고 기다리던 바스티아노는, 요니의 천금 같은 패스에 곧바로 반응했다. 거구를 살려 뉴캐슬 센터백을 완벽하게 등으로 밀어낸 다음, 패스가 도착하는 타이밍에 맞춰 그대로 몸을 돌렸다.

터닝 발리다.

[선덜랜드 2 - 1 뉴캐슬]

득점에 성공한 바스티아노는 한 골 리드로는 부족하다는 것처럼 곧바로 하프라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주장 잭이 재빨리 공을 주워 달려오는 사이, 바스티아노는 가슴의 엠블럼을 주먹으로 두 번 두드리고, 손가락 6을 펴 보였다.

“여섯 골을 넣겠다는 걸··· 까?”

희주의 의문에,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그보다는, 톰슨의 등번호겠지.”

쐐기골은 바스티아노와 크리그의 합작이었다. 메시의 패스를 바스티아노가 흘렸고, 크리그가 마무리한 것이다.

팬들의 외침이 웸블리에 쩌렁쩌렁 울렸다.

He’s on fire. Your defence is terrified.

크리그를 상징하는 외침이, 평소와는 조금 다른 발음으로 울렸다.

선덜랜드 온 파이어. 응원가 가사처럼 뉴캐슬 수비가 벌벌 떨지는 않았지만, 우리 선수들에게 불이 붙었음은 명백했다.

[선덜랜드 3 - 1 뉴캐슬]

선덜랜드에서 데뷔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몸담은 팀에는 늘 한결같은 충성을 다했던 미드필더가 축구계를 떠난 날.

우리는 비로소 5관왕의 왕좌 위에 서게 되었다.

* * *

시상대 설치부터 시작된 함성은, 단상 위에 우리 선수들이 도열한 순간 더욱 뜨겁게 퍼졌다.

경기장에서 뛴 열한 명은 말할 것도 없고, 후보, 그리고 교체되었던 선수들까지 전부 시상대에 올랐다.

톰슨 또한 함께였다. 비록 경기를 끝까지 뛰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다. 앞으로도 며칠간 관리는 필요하겠지만,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다.

톰슨은 자신의 건재를 알리기 위해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웸블리 서쪽 스탠드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잠시 후 주장 잭이 FA컵 트로피 앞에 섰다. 하지만 잭은 트로피를 머리 위로 치켜올리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트로피를 든 채 그의 오랜 단짝에게 눈짓을 보냈다.

순간, 톰슨은 자신의 등이 떠밀렸다고 생각했다.

“왜 이래?”

떠밀려 나온 톰슨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통적으로 트로피는 주장이 드는 거야. 그리고 나는 오늘 끝까지 뛰지도 못했잖냐. 가뜩이나 출신 때문에 오해를 살 텐데.”

보통 가장 먼저 트로피를 드는 영광은 주장의 것이라는 게 축구계의 오랜 관례이지만, 그렇다고 주장-부주장을 제쳐 두고 트로피에 달려든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트로피 강탈 중 유명한 사례는 톰슨의 친정 팀, 첼시에서 일어났었다.

보싱와의 빅 이어 강탈 사건, 당시 우승 멤버였던 톰슨 또한 옆에서 지켜봤던 이벤트다. 그랬기에 톰슨은 늘 삼가고 조심하려 노력했다.

잭이 환하게 웃었다.

“아무런 오해가 없게 해드릴 검다··· 이렇게.”

주장이 떠맡기듯 내민 트로피가 그대로 톰슨의 품에 안겼다. 톰슨은 차마 잭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했다. 신성한 우승 트로피를 땅에 떨어뜨릴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거구의 사내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선 순간, 웸블리 한쪽 스탠드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괜찮아! 괜찮아!”

은퇴를 앞둔 남자의 어깨 위에, 응원처럼 쏟아지던 허락은, 마침내 톰슨이 트로피를 천천히 머리 위로 들어 올릴 때까지 이어졌다.

* * *

경기가 종료한 순간, 웸블리의 프레스 관계자석은 전쟁터가 되었다.

[웸블리에서 시작된 타인위어 더비의 승자는 선덜랜드!]

[선덜랜드, 마침내 해내다. 5관왕 달성!]

[한편 선덜랜드 구단주 희성 썬 리는 기념 로켓 발사를 원하는 팬들의 염원을 담아, 인공위성을 쏘겠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사되는 인공위성 ‘선덜랜드 호’는 통신용 위성으로, 제3세계 국가를 위한 통신망 지원 용도로 사용할 예정이다.]

그 흐름에서, 일부 기자는 소외된 상태였다. 로켓 발사 같은 특종을 단독으로 따낼 인맥도 없고, 오늘 경기를 분석할 능력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기자들은 주로 톰슨의 부상에 주목했는데, 대부분은 은퇴 상황에서의 투혼, 역습 찬스를 살리기 위해 다친 몸을 이끌고 기어 나가는 충성심에 포커스를 맞췄지만, 개중에는 악질적인 가십을 담는 기자도 있었다.

[악연은 돌고 도는 것인가? 타인위어에서 반복되는 부상과 은퇴의 악연!]

지금 뉴캐슬 감독 시어러가 과거 선덜랜드 선수에게 입었던 부상으로 은퇴했으며, 이번에는 역으로 톰슨이 뉴캐슬 선수에게 실려 나가면서 악연이 반복되었다는 식의 질 낮은 찌라시였다.

정상적인 기자라면 누구나 불쾌하게 느낄 만한 찌라시에, 보다 못한 노스이스트 저널 편집장이 끼어들었다.

“충고하는데, 그거 업로드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이번에 뉴캐슬이 일부러 개태클 한 게 아니라는 건, 경기 봤으면 뻔히 알잖나?”

기껏 충고했는데도, 뻔뻔한 답변이 돌아왔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다.

“아니 뭐, 나도 누가 일부러 다치게 했다는 이야기는 쓰진 않았는데?”

편집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선덜랜드는 선수 부상에 여러모로 신경질적인 팀이야. 괜히 가십 쓰다가 자극하지 말라고. 자네 운이 좋으면 무서운 누님하고 면담하게 될 거야.”

“무서운 누님?”

“리미트리스 부사장, 미스 다미.”

리미트리스라는 단어에, 조금 전까지의 뻔뻔함이 사라졌다. 겨우 가십 기사 좀 쓰자고 세계 최대의 투자회사를 굳이 적으로 돌리면 손익이 안 맞는다는 정도의 판단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운이 나쁘면 리미트리스에 털린다는 뜻이군. 이해했어. 충고 고맙군.”

편집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봐, 나는 운이 좋으면, 이라고 말했잖아. 무서운 누님은 어디까지나 리미트리스의 넘버 투야. 넘버 원은 자네가 지금 긁으려는 그 팀 구단주라고.”

슬슬 파파라치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편집장이 쐐기를 박았다.

“그래도 리미트리스는 꽤 신사적이지. 자네가 기사에 얹는 반대쪽··· 뉴캐슬 뒤에는 뭐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안 쓰는 게 좋겠군.”

파파라치가 깔끔하게 원고를 지우고 두 손을 들었다.

* * *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 돌아온 직후, 나는 톰슨과 바 블랙캣츠에서 따로 만났다.

우리가 만나기로 할 때 대체로 그랬던 것처럼, 먼저 기다리고 있던 톰슨과 눈이 마주쳤다.

“다리는 좀 괜찮고?”

인사 대신 묻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응, 별문제 없어. 애초에 경기 당일부터 걸어 다니는 거 봤잖아? 사실 결승만 아니었으면 마지막까지 뛰려고 했을 정도야. 뉴캐슬 감독과 선수에게 사과도 받았고.”

“그럼 다행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향해, 톰슨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썬, 너는 괜찮냐?”

“응? 뭐가.”

그러자 톰슨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한참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늘 단호한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다.

“그게, 나는 원래 예정된 은퇴를 딱 30분쯤 일찍 해버린 건데··· 너는 그게, 그러니까···.”

지리멸렬한 톰슨의 대사에서, 나는 그가 말하려던 용건을 짐작했다. 무릎이 아예 박살 나, 선수의 꿈을 강제로 접어야 했던 나는 괜찮냐는 뜻이겠지.

물론 나는 이제 괜찮다.

마음의 상처가 아물기 충분한 시간이 지났고, 얼마 없던 미련도 구단을 운영하며 전부 떨어냈다. 꿈을 대신 이뤄 주는 선수들도 있고.

무엇보다 후회 없는 유스 시절을 보냈기에, 나는 괜찮다.

하지만 일부러 슬쩍 딴소리를 했다. 친구란 이럴 때 서로 마음껏 놀려먹을 수 있는 관계를 지칭하는 단어일 테니.

“말도 마라.”

“역시 그랬지? 미안.”

머리 하나쯤 커 보이는 거구의 사내가 시무룩하게 축 늘어지는 진풍경에,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나저나 이제 은퇴인데, 혹시 바라는 거 있어?”

은퇴 기념 경기를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 몇 년 전 은퇴한 페르난데스가 받았던 것과 같은 예우를, 이 사내 또한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 그의 은퇴는, 경기 중 불운한 사고 때문에 예정보다 조금 앞당겨졌다. 그러니 다시 은퇴 경기 한 경기쯤 치르지 못할 것도 없다.

내 제의에 톰슨이 곧바로 응수했다.

“바라는 거? 일단 술이 마시고 싶은데··· 이제 선수가 아니니까 괜찮겠지.”

“누가 보면 언제는 내 허락받고 칵테일 마셨는 줄 알겠다. 맘대로 해.”

그러자 톰슨이 냉큼 주문한다.

“마스터? 마티니, 젓지 않고 흔들어서. 그리고 쿠바 리브레도.”

블랙캣츠 바텐더가 친절한 미소로 응대했다.

“알겠습니다. 두 분 다 평소처럼 무알콜로 드릴까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톰슨이 먼저 끼어든다. 얼핏 보니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다.

“두 잔 다 알콜 있는 거로 부탁합니다.”

뭐라고 따지기도 전에, 톰슨이 내게 시선을 보냈다.

“네가 그랬잖아. 맘대로 하라며. 이런 날 혼자서 술 마시면 무슨 청승이냐. 같이 마셔야지.”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런 날 하루쯤 같이 마시지 못할 것도 없긴 하다. 사적으로는 오랜 친구의 은퇴일이고, 구단주로서는 팀의 재건에 오랫동안 힘을 보탠 선수를 떠나보내는 날이니.

다만···.

“쿠바 리브레가 이렇게 센 술이었습니까? 어질어질한데요.”

혀에 닿는 감촉이 무알콜일 때와 변함이 없어서 생각 없이 마시다 보니, 취기가 조금 늦게 올라온 모양이다.

다시 말해, 블랙캣츠 바텐더는 평소 진짜와 맛이 똑같은 무알콜 칵테일을 내놓고 있었다는 뜻이 되는데··· 이래서 이마의 가치는 거짓말을 안 한다는 건가.

정작 바텐더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그야, 많이 드셨으니까요.”

많이 먹긴 했다. 옆자리의 톰슨은 아예 뻗었으니까. 그렇다고 주량 차이는 아닌 게, 톰슨의 마티니는 내 쿠바 리브레보다 도수가 훨씬 높은 술이다.

“톰슨을 이대로 돌려보낼 순 없겠군요. 클럽하우스에 재워야겠습니다.”

“그러시면 시설관리팀을 부르겠습니다. 구단주님도 취하셨으니까요.”

“고맙습니다.”

나는 순순히 바텐더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가뜩이나 톰슨은 나보다 훨씬 커서, 취한 몸으로 부축하기엔 버거운 상대다.

시설관리팀 스태프가 조심스럽게 톰슨을 클럽하우스 기숙사에 데려가는 사이, 나는 잠시 톰슨과 나눈 이야기를 복기했다.

[은퇴 경기? 해주는 건 고마운데, 굳이 첼시 레전드를 불러다 줄 필요는 없어. 그보다···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유소년들에게 동기부여가 될 만한 상대를 원해.]

유소년 코치로 스태프 커리어를 시작하길 원하는 톰슨다운 요구를, 나는 아주 기쁘게 수락했다.

지난번 레전드 매치에서 팬들과 약속한 게 있다 보니, 만일 톰슨의 은퇴 경기를 ‘레전드 매치’ 형태로 치르게 되면 나는 꼼짝없이 올해도 선수로 출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큰일 날 뻔했지 뭐야.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취기가 올라서인지 머리가 잘 안 돌아간다.

아무튼, 팀을 위해서도 톰슨이 요구한 방식의 은퇴 경기가 훨씬 낫다. 유소년은 팀의 미래니까. 물론 우리 팬들은 이름난 레전드들의 플레이에 더 기뻐하겠지만, 팬들은 다른 방식으로 기쁘게 만들어 주면 그만이다.

그리고.

“영입도 좀 더 해야겠지. 선수도, 스태프도.”

FA컵 결승을 마지막으로, 또 한 번의 시즌이 끝났다. 그리고 시즌의 끝은, 언제나 프리시즌을 의미한다.

구단주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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