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의 가치 (4)
한국의 축구 팬, ‘@이스탄불_이전부터’는, 아이디 그대로 이스탄불의 기적 전부터 리버풀을 응원해온 축구 팬이었고, 사적으로는 ‘@선덜랜드_명예시민’의 삼촌이기도 했다.
그는 예전부터 열세 살 어린 조카를 퍽 예뻐하는 편이었다. 어릴 때부터 종종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 데리고 다닌 것은 물론, 유럽 축구에 눈을 뜨게 한 것도 전부 그의 작품이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축구광으로 키워낸 조카가 리버풀이 아니라 선덜랜드로 넘어간 것은 조금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좋아하게 된 계기는 있겠지만, 뭔가를 계속 좋아하는 데에는 딱히 이유가 없는 법이거든.’
사실 선덜랜드는, 오랜 리버풀 팬인 그가 보기에도 매력적인 구단이다. 일단 돈이 많고 구단에 진심인 구단주가 있다는 점부터 가점이 높았다.
구단주가 좋은 팀은 쉽게 암흑기가 오지 않는다. 성적이야 매년 변동이 있기 마련이지만, 좋은 보드진이 있는 팀은 적극적인 투자로 부진을 빨리 끝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조카는 그와는 달리 팬질하다 고통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요즘 선덜랜드는 성적까지 시원시원하게 뽑으니 더할 나위가 없다.
- 케이타 또 누움. 올 시즌에도 킹장님 고통받으실 듯.
- 미드필더 안 사냐 개객기들아 ㅠ
반면 리버풀은 이번 프리시즌에 별 재미를 못 볼 모양이다. 커뮤니티에서 울리는 리버풀 팬들의 아우성에, 그는 한숨을 쉬며 스마트폰을 책상에 엎어 놓았다.
그때 폰이 다시 울렸다. 처음에는 또 커뮤니티 쪽 알림인가 했는데, 진동이 계속 이어진다. 보니까 조카의 전화였다.
[삼촌! 저 TV 나왔어요!]
“···또?”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사이, ‘@선덜랜드_명예시민’이 목소리를 높였다.
[빨리, 빨리 켜 봐요!]
아쉽게도 그의 손은 썩 빠르지 않았고, TV를 켜서 채널을 돌렸을 때, 조카의 모습은 이미 화면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신 다른 사람들이 화면에 보인다. 선덜랜드 유니폼을 입고, 시티 오브 선덜랜드를 관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저도 직접 오기 전엔 국뽕 주작 영상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진짜네요. 여기는 정말 좋은 도시입니다.]
[태극기 망토 두른 검은 고양이! 그 인형 놓인 가게 들어가면 엄청 친절해요. 구단 제휴 가게인데, 한국인 편의성 인증을 거친 곳이래요!]
“아무래도 선덜랜드 팬 특집인 모양이네.”
[응. 삼촌! 이제 우리 팀도 빛 보는가 봐요.]
“너흰 진작에 빛 보고 있었어.”
아직 한국인 스타가 뛰는 토트넘에는 미치지 못하고, 레알, 바르샤, 뮌헨, 맨유, 리버풀, 첼시, 맨시티 같은 전통적 인기 팀과는 치열한 경쟁 중이지만, 나머지는 전부 넘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아이씨, 왜 토트넘 못 넘는 거지? 거긴 성적도 안 나오고 돈도 별로 없는데.]
“라이트 팬들한테는 구단주가 한국인인 것보다, 경기를 뛰는 선수가 한국인인 게 훨씬 먹히거든.”
조카한테 설명해 주면서, 그는 내심 생각했다.
‘뭐, 그나마도 머지않아 뒤집히겠지만. 이번 시즌부턴 한국인 선수도 뛰게 되고··· 흐름도 탔고.’
한국은 유행에 아주, 아주 민감한 국가다. 그리고 선덜랜드는 최근 3년간 한국에서의 인지도를 꾸준히 올려온 구단이다.
그동안 ‘너무 대단해서 오히려 주작같이 보이던’ 각종 미담들이 실제임이 밝혀지면서 선덜랜드 붐이 와 버렸고, 요즘은 직접 시티 오브 선덜랜드까지 날아가는 팬들도 늘어난 상황이다.
단, 선덜랜드는 인지도에 비하면 축구 커뮤니티에서의 화력은 다소 밀리는 편이었다.
‘아직은 코어팬 화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지.’
굿즈를 사고, 경기를 꼬박 챙겨 보고, 가끔은 휴가를 모아 직관을 떠날 만큼의 코어 축구팬은, 높은 확률로 이미 다른 팀의 팬이다. 그가 미니 트레블 시절부터 지금까지, 20년 넘는 세월 동안 줄곧 리버풀의 팬이었던 것처럼.
[그럼 삼촌도 넘어올 거죠?]
“그건 좀 다른 이야기고.”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미정아, 너무 조급하게 마음먹지 마.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원래 시간이 걸리게 되어 있어. 코어 팬이 갖는 충성심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없어지는 게 아니야.”
[삼촌이 칠버풀 시절에도 계속 콥이었던 것처럼요?]
“그렇지 뭐. 어차피 너도 휙휙 태도를 바꾸는 라이트 팬 끌어모으는 데는 관심이 없을 것 아니야.”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라이트 팬 모집에도 관심이 있긴 했던 모양이다.
사실, 조카가 커뮤니티며 SNS에서 열심히 선덜랜드 영업을 한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영업에 소질은 없어서 1년간 계속 역효과만 냈던 모양이지만···.
이제는 역효과고 뭐고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는 되게 아쉽다.”
[응? 뭐가요?]
“너희 구단주, 그 사람은 선덜랜드 유스였기 때문에 팀에 충성하고 헌신하는 거잖아?”
[그렇죠?]
“그럼··· 유소년 시절에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가 아니라 커크비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욕심이 지나치십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조카의 목소리가 퍽 냉랭했다. 상상조차 허용하지 않는 단호한 거절에, 그는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스포츠 채널을 향해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한편, 선덜랜드는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는 피터 톰슨의 은퇴 기념 경기를 발표했습니다.]
“음, 아무리 봐도 팬질하는 맛은 날 구단이다.”
새삼 갈아탈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엉덩이가 가벼운 사람이었다면, 제한맨 시절도, 칠버풀이라는 조롱을 버텨내지 못했을 테니. 다만, 그의 조카가 참 좋은 팀을 골랐다는 사실만은 흡족했다.
덤으로, 조카의 로드스터가 퍽 탐나긴 했다. 가끔 태워 달라고 장난스럽게 조를 정도로.
그사이에도 TV에서는 계속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리버풀의 헨더슨, 에버튼의 픽포드를 비롯해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유소년 출신 선수가 대거 참가하는 이번 기념 경기에서는···.]
“아니, 근데 왜 우리 킹장님이 저기서 뛰어?”
쓴웃음을 짓는 그는, 리버풀 주장이 선덜랜드 유소년 출신이었음을 상기했다.
* * *
은퇴 경기 출전을 앞둔 톰슨은, 경기 준비 대신 유소년 전원을 소집하기를 원했다.
원래대로라면 드레싱룸에서 전술을 확인하거나 워밍업을 했어야 했겠지만, 은퇴 경기를 앞둔 주인공의 요구는 어지간하면 받아들여지는 법이다.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브리핑 룸에 선덜랜드 유소년들이 모여들었고, 화면에는 십수 년 전, 톰슨이 유소년이던 시절의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화면 속에서 소년 헨도가 공을 가지고 곡예를 부리는 중이었다. 허공에 띄워올린 공이 땅이 닿지 않게 발로 받아냈는데, 발등에 닿는 순간 힘을 빼서 그대로 공이 달라붙듯 멈추는 묘기를 보였다.
일반적으로 헨도는 개인기가 뛰어난 선수라는 평가를 받지는 않았지만, 유소년 시절에는 이야기가 달랐던 것이다. 빅클럽에서 뛸 수 있는 재능의 소유자는, 유소년 레벨에서는 거의 축구의 신처럼 플레이할 수 있기 마련이다.
이윽고 영상이 바뀌었다. 유소년 리그에서 해트트릭을 넣어버리는 구단주 이희성이나, 그를 서포트하는 풀백, 지금은 선덜랜드 1군 감독 브라이언의 모습으로.
톰슨 자신의 유소년 시절 영상도 섞여 있었다. 같은 유소년 상대로는 무적에 가까웠던 미드필더는, 경기에 진 적은 있어도 중원을 내준 적은··· 손으로 꼽는다.
영상에 꽤 다양한 선수들의 모습이 흘러갔을 즈음, 톰슨이 입을 열었다.
“누가 제일 축구를 잘하는 것 같이 보이니?”
테오가 일부러 짓궂게 대답했다.
“헨도요.”
마치 옛날 축구화 광고와 똑같은 상황이었지만, 톰슨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되물었다.
“브라이언은?”
“잘하시긴 하는데, 헨도 선수가 좀 더 나은 것 같아요.”
뻔뻔하게 답하는 테오의 뒤통수를 노려본 다음, 월터가 빠르게 수습에 나섰다.
“저는 톰슨 선수가 가장 잘하신다고 생각하는데요.”
“고맙긴 한데, 그런 소릴 들으려고 너희를 불러 모은 건 아니야··· 그럼 월터, 지금 가장 훌륭한 사람은 누구지?”
“그건···.”
“솔직히 말해도 괜찮아.”
머뭇거리는 U-15 주장을 향해, 톰슨은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을 촉구했다. 결국 월터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구단주님이요.”
월터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유소년들의 대답이 나왔다. 대체로 ‘구단주님’이라는 평이었지만, ‘감독님’도 적지 않았다. 반면 톰슨이라고 말하는 아이는 극소수였다.
그런데도 톰슨은 오히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너희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톰슨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래서 월터를 비롯한 유소년 선수들 또한 진지해졌다. 줄곧 까불거리던 테오나 바르카 또한 말이 없었다.
아카데미 브리핑 룸 안에는, 톰슨의 목소리만 울렸다.
“썬, 그러니까 구단주님은 안타깝게 부상을 당했고, 결국 프로 선수가 되지 못했지. 1군 감독 브라이언은 프로까지는 되었지만, 선수로서 빛을 보지는 못했어.”
“하지만 너희가 본 것처럼, 둘 다 축구를 못하지는 않았어. 그리고 그들은 지금 선수는 아니지만, 너희가 말하는 것처럼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되었고.”
“너희를 뛰어난 프로 선수로 키우는 게 우리 목표지만, 모두가 프로 선수가 될 수는 없을 거야. 그리고 사실은 꼭 선수가 되지 못해도 좋아. 그래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행복하게 살 수도 있지.”
어느새 아이들에게서 말수가 없어졌다. 다들 톰슨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든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축구가 좋다면 늘 최선을 다해야 해. 후회가 남지 않는 시간을 보낸다면··· 너희도 저 영상 속의 사람들처럼, 오늘 뛸 사람들처럼 될 수 있을 거야.”
톰슨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느긋한, 하지만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몸을 돌려 브리핑룸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월터는 마냥 바라보고 있었다.
선덜랜드 유스는 성숙한 선수에게 주장을 달아 주는 경향이 있는 팀이기에, 월터 역시 또래보다 훨씬 조숙했다.
그렇기에 월터는, 오늘 톰슨에게 얼마나 큰 것을 받았는지를 눈치채고 있었다. 자신의 은퇴 경기를 팀의 유소년을 위해 써버릴 수 있는 선수는 아주 적다는 것도.
경기장에 향하는 커다란 등 뒤에 매달린 6번을, 죽을 만큼 원하게 된 것도 그날의 일이었다.
* * *
“만족했냐?”
아카데미를 떠나 경기장에 향하는 톰슨과 합류하며 슬쩍 물었다. 그러자 톰슨의 얼굴에 여유 있는 미소가 피었다.
“어, 그래. 덕분에 진짜 원 없이 뛸 수 있을 것만 같다. 선수로서의 마지막을 아주 활활 태울 수 있겠어.”
그런 톰슨에게 나는 살짝 불평했다.
“그나저나 이거, 너무 가혹한 요구 아니냐?”
“뭐가.”
“나보고 뛰라는 거 말야.”
내가 쓴웃음을 짓자, 톰슨에게서 뻔뻔한 답변이 돌아왔다.
“왜, 지난 시즌엔 레전드 매치도 뛰었으면서?”
“차라리 레전드 매치가 훨씬 낫지.”
진심이다. 오늘 나오는 선수 명단을 보면, 내가 아닌 누구라도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면 오늘 뛰는 선수는 대부분 현역이거나, 며칠 전까지 현역이던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선수로서의 클래스나 이름값 자체는 당연히 레전드 매치에 뛰는 레전드들이 훨씬 우세하다. 하지만 그 레전드들은 은퇴 최소 십수 년이 지난 사람들이고, 육체적으로도 정점을 찍고 내려온 상태였다.
그러니 나라도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었다. 부족한 기술과 센스를 체력과 운동능력 차이로 상쇄하는 방식으로··· 하지만 현역 선수를 내가 어떻게 상대하라고!
톰슨이 기분 좋다는 듯 키득거렸다.
“이해해 줘. 한 번쯤은 갚아주고 싶었거든.“
“하긴, 브라이언은 선수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긴 해··· 그런 의미에서 브라이언만 부르지 그랬어.”
“이봐 썬, 같은 또래 선수에게 완패했던 건 네가 처음인데.”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다. 그때는 그저 네 버릇을 읽었던 거고, 심지어 버릇을 찾은 건 브라이언이었어.”
“나도 알아.”
봐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나저나 헨도도 불렀는데··· 라인업이 좀 그런 거 아니냐?”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누가 A팀이고 누가 B팀인지는 경기 시작 전까지 비밀로 했다. 심지어 나도 모르고, 톰슨만 안다.
만일 톰슨이 정말로 내게 복수하고 싶은 거라면 나와 브라이언을 한쪽에 몰고, 반대쪽에는 톰슨 자신과 헨도를 넣을 수도 있다. 그러면 아마 잔인한 학살극이 될 것이다.
톰슨과 헨도, 두 사람의 커리어를 합치면 리그 우승 다섯 번에 챔스 세 번이라는 흉악한 기록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프로도 못 되고 은퇴한 내가 상대하기엔 너무 끔찍하단 말이지.
“걱정 마, 썬. 헨도는 다른 편이니까. 우리 유소년 애들이 그러는데, 나보다 헨도가 축구를 잘한다더라.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애들 입에서 들으니 속상하잖아?”
톰슨이 일부러 심술 맞은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마지막 한 경기 정도는 제대로 상대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