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를 되갚아주는 법 (1)
<우선 골대 안으로 공을 넣어라. 다른 것들은 그 이후에 의논해보자 - 밥 페이즐리>
새 시즌의 개막은 언제나 커뮤니티 실드로 시작된다.
우리로서는 꽤 오랜만에 참여하는 커뮤니티 실드였는데, 벌써부터 언론의 관심이 뜨거워지는 중이다. 특집 기사가 나올 정도로.
“다가올 커뮤니티 실드에서 선덜랜드는 프리미어리그 우승팀이자 FA컵 우승팀 자격으로 참가해, 지난 시즌 2위였던 맨시티와 격돌할 예정이다.”
희주 목소리가 이렇게 감미롭게 들리는 날도 있구나. 나는 만족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더.”
“아이참. 열 번은 더 읽었는데?”
“내 체감으로는 처음인데.”
그러자 희주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빠 올해 트레블 한다고 하지 않았어? 내년에도 이렇게 계속 읽어달라고 할 거야?”
“당연하지.”
짜릿해. 늘 새로워. 트로피가 최고야.
뻔뻔하게 계속 읽을 것을 요구하자, 구단주실에는 평소보다 훨씬 더 상냥함 비중이 높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하지만 리듬감 좋게 울려 퍼졌다.
“선덜랜드는 프리미어리그 우승팀이자 FA컵 우승팀 자격으로 참가해, 지난 시즌 2위였던 맨시티와 격돌할 예정이다. 이렇게 말이죠?”
나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다미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러자 희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저나 브라이언 씨하고 샐리 씨는 이번엔 꽤 조용하네? 평소 같으면 시티 시티 노래를 불렀을 텐데.”
“그야 조용하겠지. 그러다가 지난 챔스에서 일격을 당했잖아.”
애초에 이제는 굳이 외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커뮤니티 실드 상대는 지난 시즌 종료 시점부터 미리 확정되니까, 우리 코치진이 조용히 칼을 갈아왔음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그나저나 프리시즌 경기에서 너무 많은 걸 보여준 것 같아서 좀 찝찝하던데··· 곤잘로를 레프트백으로 쓰는 건 우리의 깜짝 카드 아니었어?”
희주의 염려에, 나는 담담하게 답했다.
“그래서 보여준 거겠지.”
희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다미가 옆에서 끼어든다.
“희주 씨, 저는 축구는 잘 몰라서 그런데, 베넷이라는 선수와 곤잘로 중에 누가 더 잘하는 선수인가요?”
희주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야 아직은 베넷이죠.”
내 생각엔 아마 앞으로도 베넷일 것 같긴 한데. 그리고 맨시티 상대로는 상성상 베넷이 훨씬 나은 선수고.
따라서 이번 커뮤니티 실드에서는 베넷이 뛸 거다.
“네, 그러니까 사장님께선 프리시즌에 미리 패를 보여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맨시티는 선덜랜드의 챔스를 가로막을 정도의 강팀이니까, 가장 잘하는 선수를 출전시켜야 하잖아요?”
다미의 설명을 듣자 희주가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이해했어요. 맨시티 상대로는 베넷을 쓸 거지만, 프리시즌에 곤잘로를 미리 보여주면서 상대 팀 판단을 복잡하게 하려는 거군요··· 다미 언니, 못 본 사이 축구 공부 많이 했나봐요?”
“사실 지난번 챔스는··· 중간까지는 챙겨봤거든요. 해설도 듣고요.”
“그럴 짬이 나요? 언니 엄청 바쁘잖아요. 듣자니 언니네 회사 사장님이 일도 다 떠맡기고···.”
“희주 씨.”
다미의 제지에, 희주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때 보면 다미는 나나 우리 부모님보다도 희주를 잘 다루는 것 같다. 이쯤 되면 거의 천적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희주가 조용해지자, 다미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붉히며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챔스 결승전 같이 볼 때 저만 너무 축구 모르면 좀 그렇잖아요? 그래서 딱, 그 정도만 공부했던 거예요.”
뭐, 지난 챔스는 우리가 맨시티에 잡히면서 전부 없었던 일이 되어 버렸지만.
지난 두 시즌간, 맨시티와 참 지겹게도 마주했다. 2년 내내 결과는 우리가 챙겨갔지만, 대신 그들은 중요한 길목마다 우리 발목을 결정적으로 잡아챘다.
이번엔 다를 거다.
우리는 트레블에 도전하는 팀이다. 비록 커뮤니티 실드는 트레블과는 아무 관련 없는 별도의 대회이지만, 상대가 맨시티인 이상 절대로 허술하게 치르지 않을 것이다.
올 시즌엔, 이제 아무것도 내주지 않을 거니까.
나는 마치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슬쩍 덧붙였다.
“올해는 챔스 중계 계속 봐도 괜찮아. 어디까지나 네가 너무 바쁘지 않을 때 이야기긴 한데··· 그 회사 사장이 너 일 많이 시키긴 하니까.”
희주가 옆에서 입을 틀어막고 끅끅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다미도 이번엔 희주를 제지할 생각도 없이, 그저 내게 햇살 같은 미소를 띄웠다.
“이번 챔스 결승은 같이 보자.”
“네!”
* * *
한편 커뮤니티 실드가 열리는 중립 경기장, 영국 축구의 성지 웸블리 스타디움 주변은 벌써부터 커뮤니티 실드를 치르는 두 팀의 컬러로 물들어 있었다.
선덜랜드의 붉고 흰 스트라이프와, 맨시티의 스카이블루 깃발이 경쟁적으로 펄럭였다. 경기장 외벽을 딱 반으로 갈라 플래카드가 내걸린 모습은 마치 땅따먹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경기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이미 전초전이 시작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두 팀 모두 구단 덕질에 진심이고 부유한 구단주를 가진 팀이기 때문에, 사이드라인 밖에서의 경쟁 역시 무척이나 뜨거웠다.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서 웸블리까지! 팬들을 위한 원정 교통편을 운영합니다.]
선덜랜드가 언제나처럼 원정 교통편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히자, 곧바로 맨시티 또한 성명을 냈다. 요약하자면, ‘받고 비행기’라는 내용이었다.
덕분에 SNS에서도 블랙캣츠와 시티즌 사이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 우리는 항공사 있음. 너흰 그런 거 없지?
ㄴ 우린 공항 있는데.
당연하게도 선덜랜드는 ‘비행기 받고 호텔도’를 외쳤고, 맨시티가 ‘콜’로 받아내면서 웸블리 경기장 근처 숙박업소가 순식간에 역대급 호황을 맞이했다.
[커뮤니티 실드에 올드 블랙캣츠를 초청합니다.]
올드 블랙캣츠 조던 로스와, 손녀 니나 로스 역시 구단에서 마련한 웸블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요즘은 채리티 실드 치르려고 런던까지 가야 하는 거냐? 우리 땐 리그 챔피언의 홈을 상대가 방문하는 게 너무 당연한 거였는데.”
조던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선덜랜드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회상했다. 1부 리그 우승, 채리티 실드 우승, FA컵 우승을 순서대로 달성했던 꿈의 시즌, 영광스러운 1936년의 여름과 그 이듬해 봄을.
37년 여름까지 이어졌던, 딱 1년간의 반짝임을 조던 노인이 그리워하는 사이, 옆좌석에서는 니나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할아버지! 채리티가 아니라 커뮤니티! 지금은 커뮤니티 실드라고 불러요.”
“요즘은 뭐가 그리 자주 바뀌는지··· 너무 복잡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할아버지를 향해, 손녀가 다정한 시선을 보냈다. 그런 두 사람에게, 선덜랜드 유니폼을 입은 CS팀 직원이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조던 로스 고객님, 니나 로스 고객님, 혹시라도 비행 중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고맙구려.”
순순히 감사하는 조던과 달리, 니나는 조심스레 되물었다.
“정말 고맙긴 한데요. 이러면 대체 남는 게 있나요?”
이럴 때 보통 CS팀은 ‘팬이 남는다’는 답변을 애용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CS팀 스태프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구단주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마지막 우승을 지켜보신 분들께는, 갚아야 할 게 있다고요.”
“어··· 지난번 초청으로 충분히 갚았다고 생각하는데요.”
니나의 이야기에, 직원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조던 노인 또한 웃었다. 직원이 말한 것처럼, 무엇을 ‘갚아야’ 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상대는 맨시티였지.’
조던 노인이 기억하는 영광의 한 해는 1937년의 채리티 실드에서 끝난다. FA컵 우승팀 자격으로 참가해, 1부 우승팀 맨시티를 상대했던 37년의 선덜랜드는 두 골을 내주며 허무하게 무릎을 꿇었다.
이후 선덜랜드는 수십 년간 트로피와 인연 없는 기나긴 부진에 빠진다. 중간에 몇 번쯤 부활을 꾀했지만, 잠깐의 꿈일 뿐, 결국 모조리 미끄러졌다··· 유소년으로 뛰던 한국인 구단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안내드린 것처럼, 웸블리는 원정 경기장이다 보니 익스클루시브 박스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휠체어석에서 관람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조금의 불편함도 없도록 저희 선덜랜드 스태프가 동행하겠습니다.”
“고맙구려. 휠체어석이면 충분하오. 오히려 근처에 젊은이들이 많으면, 기운도 나고 좋지.”
조던 로스가 미소를 지었다.
이번의 결말은, 예전과는 다를 거다. 그때보다 더 힘차게 응원할 자신이 있었기에.
금방이라도 멈출 것처럼 시들하던 늙은 심장이 어릴 때처럼 뛰기 시작함을 느끼며, 조던 로스는 마침내 웸블리에 도착했다.
* * *
[커뮤니티 실드, 선덜랜드 대 맨시티]
킥오프를 앞두고, 잭은 웸블리의 피치 위에 섰다. 그리고 하프라인 너머에 보이는 하늘색 유니폼을 응시했다.
귓가에 환청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선덜랜드가 챔스에서 떨어지던 날, 에티하드에 울려 퍼지던 시티즌의 목소리가.
[지난주에 당한 대로, 똑같이 갚아 줘!]
몰아치던 하늘색 유니폼의 쇄도가, 연거푸 흔들리던 선덜랜드의 골네트가 아직도 생생하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선명하다. 벤치 앞 잔디에 쓰러진 채, 쥐가 난 다리를 바늘로 찌르며 연장전을 준비하던 친구의 모습이.
지친 선수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고운 입술을 피가 나게 깨문 채 서 있던 수석코치와, 분함에 파르르 손을 떨면서도 휘슬이 울리는 순간까지 지휘하던 감독의 목소리가.
마침내 패배를 알리는 휘슬에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던 팬들의 얼굴과, 돌아오는 길에 내걸린 현수막이.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영웅들, 가슴 펴고 돌아오세요.]
객관적으로 보면, 지난 시즌의 선덜랜드는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인 시즌을 보이기는 했다. 5관왕에 올랐고, 80년 만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심지어 무패 우승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하지만 잭은 줄곧 아쉬움을 느꼈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웸블리에 울려 퍼지는 팬들의 함성이, 선덜랜드 주장의 사고를 현실로 돌렸지만, 하프라인 너머에 선 하늘색 유니폼은 회상 그대로였다.
상대를 노려보던 시선을 천천히 돌려, 잭은 동료들과 눈을 맞췄다. 그러자 선덜랜드 선수들이 천천히 주장 근처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팬들의 눈물을 기억해라. 지난 챔스의 아쉬움을 떠올려라. 오늘, 그것들을 전부 갚아 줄 시간이다.”
어느새 둥글게 원진을 짠 선덜랜드 선수들이, 주장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리그와 FA컵의 기억은 잊어라. 오늘, 우리는 챔피언으로서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
잭의 목소리에, 부주장 요니의 이야기가 겹쳐진다.
“우리는 언더독이며, 도전자이고, 복수자다.”
패배를 갚아주는 방법은 언제나 하나뿐이다. 패배의 상처는 언제나, 더 큰 승리로만 지울 수 있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중립 구장 웸블리에 울리는 팬들의 한결같은 외침에 호응하듯, 선덜랜드의 주장이 포효했다. 이윽고 그 포효는 마치 메아리처럼 두 개, 세 개로 늘어났다.
열한 개의 포효가, 다시 하나의 함성이 될 때까지.
* * *
킥오프를 앞두고 피치 위에서 원진을 짠 우리 선수들에게, 팬들이 미친 듯 함성을 퍼부었다. 나도, 희주도, 심지어 다미도 함께 환호했다.
참 보기 좋았다. 우리 선수들의 모습은, 내가 기대했던 그대로였기에. 5관왕을 차지한 디펜딩 챔피언의 자신감만 남기고, 자만심은 버린 모습이다.
언제나 도전자처럼, 상대보다 더 많이 뛰고, 더 열정적으로 공을 차는 경기를 꿈꿨다. 피가 끓어오르는 그런 축구, 보는 이들이 저절로 응원하게 만드는 축구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예전에 아스널을 맡았던 명장 벵거의 말처럼, ‘단 5분만이라도 가장 완벽한 축구가 지속되는 걸 보고 싶다’는 니즈는 어쩌면 모든 축구인의 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마다 생각하는 완벽한 축구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상대에게 공을 건네지 않는 축구를 왕도로 여길 것이고, 누군가는 게겐프레싱과 강력한 전방 압박에 매력을 느낄 것이며, 어떤 사람은 역습 한 방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니까.
지금, 저 아래에서 펼쳐지는 축구가 바로 내 꿈이다.
킥오프와 동시에, 우리 선수들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맨시티의 플레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투박하지만,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많이 뛰는 붉은 유니폼을 바라보며··· 나는 목에 힘을 넣었다.
I know I am. I’m sure I am.
축구에, 발재간이 뛰어난 선수를 우대하는 규칙은 없다. 공을 많이 만지는 팀에게 가산점을 주는 제도도 없다. 전 세계가 열광하는 이 공놀이의 본질은, 처음부터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그저 상대보다 많은 골을 넣을 것. 그게 축구의 본질이다. 그리고, 골을 넣기 위한 방법은 언제나, 죽도록 달리는 것이다.
Sunderland ’til I die.
심장이 터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