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를 되갚아주는 법 (2)
자신이 유리한 영역에서 싸우고, 상대의 약점을 노린다. 축구는 물론, 승부 전반에서 널리 통하는 진리다. 그리고 축구에서, 강점과 약점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선덜랜드는 절대로 빌드업이 나쁜 팀이 아니고 맨시티 역시 느린 팀이 아니다. 하지만 두 팀이 직접 맞대결하는 경우, 선덜랜드의 빌드업과 맨시티의 기동성은 상대보다 ‘약한 부분’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선덜랜드 코치진은 오늘, 노골적인 러닝 게임을 준비했다. 경기 시작 전, 감독 브라이언이 선덜랜드의 미드필더를 불러모아, 다시 한번 선언했을 정도로.
[오늘은 딱 45분 뛰고 교체할 정도로 강한 압박을 넣어. 하프타임이 되면 전부 쉬게 해 줄 테니까, 세 명 모두 빡빡하게 뛰어 줘.]
평소 감독의 지시를 무척이나 성실히 따르기로 유명한 선덜랜드의 주장은, 지시의 뒷부분은 지키되 앞부분의 내용은 고의로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보아하니 요니나 로드리게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선덜랜드의 14번, 19번 유니폼이 경기장 곳곳을 평소보다 훨씬 활발하게 누볐지만, 두 사람 다 여유가 있어 보인다.
“커버는 신경 쓰지 말고 달려, 캡틴.”
자신보다 공간 이해도가 높은 두 명의 파트너와 함께 출전했기에, 잭은 공을 추격하는 데에만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다. 특히 유스 시절부터 줄곧 함께한 요니와의 호흡은 정말로 절묘했다.
요니가 적재적소에 위치해 맨시티의 패스 루트를 제한하고 잭이 몰아붙이는 형태다.
덕분에 경기 시작 초반부터 맨시티는 자신들의 특기를 발휘하지 못한 상태로, 불편한 축구로 끌려갔다.
[시티의 빌드업은 아주 체계적이죠. 예를 들면 지난 챔스 2차전 네 번째 실점에서, 맨시티는 모든 필드 플레이어가 한 번 이상 공을 만진 상태로 득점했어요.]
경기를 앞두고 샐리가 몇 번이나 강조했던 이야기가, 잭의 귓가에 쟁쟁 울렸다.
[편하게 공을 차게 해주지 말아요. 절대로.]
코치진의 지시를 상기하며, 잭은 발로 잔디를 밀어냈다. 다행히 오늘은 몸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잭’이라고 불리는 컨디션에는 살짝 못 미치지만, 그래도 거의 근접한 정도였다.
‘아마 목소리가 닿기 때문일 거야.’
런던까지 따라온 팬들의 목소리가 그의 등을 떠민다. 선덜랜드 응원단을 상징하는 노래가 웸블리를 가득 메우고, 발걸음마다 블랙캣츠의 함성이 울린다.
Wise man say,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팬들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마다 잭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그리고 비록 스스로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먼저 달려나가는 주장의 경쾌한 발걸음은 언제나 동료에게 전염되는 법이다.
전방의 쓰리톱은 끊임없이 맨시티 수비진에 위협을 가했고, 선덜랜드 포백라인은 에디의 지시에 한 몸처럼 움직이며 상대의 공세를 막아냈다.
그런 움직임을 반복한 지 30분.
선덜랜드가 마침내 경기의 주도권을 쥐었다.
* * *
아직 전반이지만, 우리 경기력은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조금만 긴장을 풀면 입꼬리가 멋대로 올라가 버릴 정도로. 슬쩍 보니 희주는 입이 아주 귀에 걸렸고, 다미도 흐뭇한 표정이다.
다미가 박수를 보냈다.
“압박이 굉장한데요? OPTA까지 확인 안 해도, 그냥 눈으로만 봐도 알겠어요. 선덜랜드가 훨씬 많이 뛰고 있다는 걸.”
“옵타···?”
“축구 통계 사이트요.”
생소한 용어를, 그것도 뜻밖의 사람에게서 들은 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그러려니 했다. 다미가 자기 입으로 축구를 ‘조금 공부’ 했다고 말했을 정도라면, 축구 통계 정도는 당연히 섭렵했을 테니까.
데이터와 현실을 연결하는 것은, 리미트리스의 넘버 투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평소의 다미가 늘 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예전에 챔스 결승 때도 그렇고, 자꾸 18번이 눈에 띄네요.”
“축구 보는 눈이 꽤 좋아진 모양이네.”
우리 주장의 움직임은 분명히 경이적이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이외의 경기장에서는 폼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받지만, 잭은 경기장의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뛰는 선수다.
통계를 살펴본 다미라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잭은 히트맵이 남들보다 넓고, 활동량도 많으니까.
정말로 좋은 선수다. 강철 같은 체력과 빠른 발, 헌신적으로 경기장을 누비는 잭이 없었다면 우리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러닝 게임, 기동전은 성립되지 않을 정도다.
마침 요즘은 곧 각성할 것처럼 가끔씩 이마의 숫자가 흐릿해지기도 하고.
“그리고 그 파트너도 참, 멋진 선수네요.”
요니를 칭찬하는 다미에게, 나는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공부 많이 했구나.”
요니 또한 선덜랜드 기동전의 한 축이다. 그의 절묘한 위치선정이 없었다면, 잭의 활동량이 온전히 우리의 무기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잭이 달려나가며 생긴 빈자리를 역으로 공략당하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요니의 공이었다.
그리고 공격 상황에서는···.
“꺄악! 공 뺏었어!”
희주의 비명 같은 환호에, 나와 다미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잭의 슬라이딩이 공을 건드린 순간, 선수들이 일제히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우리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카운터프레스다.
흘러나온 공을 로드리게스가 확보했고, 다음 순간 공은 파고드는 요니의 발아래에 있었다. 언제나처럼 절묘한 위치선정, 그리고 절묘한 패스다.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갈 정도로.
“달려!”
“파고들어요! 패스 앤 무브로!”
희주와 다미의 외침에, 우리 팬들의 목소리가 덮였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 * *
공을 넘겨받아 치고 달리며, 요니는 어째서인지 축구공의 얼룩이 살짝 신경 쓰인다고 생각했다.
진흙 자국 같았다. 누군가 넘어졌을 때 그라운드 어딘가가 살짝 파헤쳐진 모양이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치열한 경기로 고조된 감각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상태라 그런지, 모든 것이 너무나도 선명하다. 발아래 바스러지는 잔디의 감촉이. 경기장의 바람이 말해주는 것만 같다.
수비가 어디 있는지, 동료는 어디에 있는지. 기회는 어디에 생겨나고, 또 없어지는지.
마치 공간을 연주하는 악보처럼.
맨시티 골대를 바라보고 2시 방향에, 하늘색 유니폼이 어른거렸다. 요니의 침투에 대비하려는 움직임 같았다.
‘틀림없이 바스티아노를 마크하던 선수였는데.’
그것만으로도 요니는 맨시티 포백라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 것 같았다.
아크 정면에는 선덜랜드의 9번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스티아노 정도의 선수가 발하는 존재감을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 레프트백이 안쪽으로 이동해 그를 마크했을 것이다. 따라서···.
‘오른쪽에 노마크 한 명.’
눈앞에 어른거린 센터백의 모습에서, 선덜랜드의 7번 메시가 비어 있을 것임을 파악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요니는 곧바로 공을 오른발 아웃프론트로 밀어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건조한 소리가 울린다.
공을 되돌리는 소리가.
잠시 후 공이 맨시티의 페널티 박스 안쪽에 떠올랐다. 얼핏 바스티아노의 머리를 노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요니는 패스의 궤적이 살짝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공의 얼룩 때문에, 스핀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
[뛰어들어.]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패스다. 순간 요니의 눈앞에, 득점으로 향하는 통로가 환히 열린 것만 같았다.
요니가 가속했고, 동시에 목소리가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19번 잡아!”
“걱정 마! 체크하고 있어!”
“움직임만 체크해! 놈의 발 자체는 그렇게까지 빠르지는 않아!”
곧바로 하늘색 유니폼이 좁혀들었고, 가까스로 보이던 환한 통로도 순식간에 좁아졌다. 똑바로 지나갈 수 있는 길에서, 어깨를 들이밀 정도의 틈새로.
전성기의 메시나 마르틴이라면 이 정도 균열만으로도 충분히 수비를 부술 수 있었겠지만, 요니에게는 좁았다.
[달려!]
팔소매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상대의 손끝이 닿은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곧 붙잡힐 것이다. 요니가 수비의 팔을 뿌리치기 위해 몸을 비틀자, 이번엔 반대쪽 어깨에서 또다시 상대의 감촉이 전해졌다.
어깨싸움 확정이다.
강골 잭이라면 이 정도 몸싸움은 간단히 뿌리치겠지만, 요니의 체격으로는 프리미어리그 수준의 몸싸움을 온전히 버텨내기 힘들었다. 하물며 상대가 덩치 큰 센터백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요니는 저항하는 대신, 온전히 달리기에만 집중했다. 수비도, 무너지려는 몸의 균형조차 신경 쓰지 않은 채 오직 공과 골라인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뛰어넘어야 할 목표는, 위대한 선수의 발자취가 아니다. 친구이자 라이벌의 그림자도 아니다. 지금 싸우는, 다른 유니폼을 걸친 상대 또한 아니다.
넘어서야 할 것은 언제나 자신이라는 걸, 선덜랜드의 19번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제보다 딱 한 걸음 더, 내일은 오늘보다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걸음에 힘을 주어 휘청거리는 몸을 그대로 공을 향해 날렸다.
어째서인지 공에 묻은 진흙 자국이 선명하다고 생각한 순간, 이마에 공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요니의 몸은 기세에 밀려 잔디 위를 데굴데굴 몇 바퀴쯤 굴렀다.
순간 무시무시한 소음이 웸블리를 흔들었다. 팬들의 환호인 건 분명했지만, 밀려 넘어진 요니는 아직 어느 쪽 팬의 목소리인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어느 쪽이지?’
득점을 축하하는 소리일까, 아니면 수비의 파인 플레이에 보내는 기쁨일까. 평소보다 훨씬 고조된 감각으로도, 사이드라인 밖의 일을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땅에 쓰러진 선덜랜드의 19번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고, 마침내 미친 듯 달려오는 동료들과 뜨겁게 흔들리는 웸블리의 붉은 물결을 발견했다.
그 아래에, 골라인을 확실히 넘어간 축구공도.
[선덜랜드 1 - 0 맨시티]
들불처럼 번지는 붉은 물결, 블랙캣츠의 깃발과 머플러, 플래카드 아래에서 선덜랜드의 19번이 뜨겁게 포효했다.
* * *
“들어갔어! 넣었어!”
희주의 새된 목소리가 자리에 울렸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희주는 내 손을 잡고 펄쩍펄쩍 뛰었고, 잠시 후에는 다미의 목에 매달려 깡총거렸다.
사실은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긴 하다. 무심코 다미와 뜨거운 하이파이브를 나눴으니까. 중간에 희주가 다미에게 매달려서 망정이지, 더한 것도 할 뻔했다.
다미의 얼굴은 살짝 상기된 상태였다.
“사장님, 축구는 참 좋은 것 같아요.”
“그렇지?”
“네··· 앞으로 공격적인 축구로 다득점을 추구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다미의 모습이 꽤 의외라고 느꼈다. 다미 취향은 공격적인 축구보다 탄탄한 실리 축구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평소의 업무부터가 리스크를 제거하는 역할이니, 축구 볼 때만이라도 시원하고 화끈한 공격 축구를 선호할 수도 있겠지 싶어서.
“샐리랑 죽이 잘 맞겠네.”
“내가 보기엔 샐리 씨가 아니라 리지 씨하고 엄청 죽이 잘 맞을 느낌인데.”
“희주 씨? 그 이야기 좀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다미가 눈을 빛내며 희주 쪽으로 붙어앉는 사이, 나는 경기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공을 주워들고 센터서클로 달려오는 우리 선수들, 그 가운데 있던 선덜랜드의 19번을 응시하는 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무심코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대자, 다미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괜찮아. 잠깐 피곤했었나 봐.”
대답하면서도 나는 요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의 이마에.
숫자가 눈에 띄게 흐릿해진 상태였다.
요니는 그날 경기에서 완벽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최고의 순간은 물론 선제골을 따낸 장면이었지만, 수비 상황에서도 맹활약을 펼쳤다.
이어진 맨시티의 반격을 절묘한 위치선정으로 연달아 무력화했고, 약점이라던 체력 또한 오늘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90분 내내 날뛰었다. 마침내, 경기의 끝을 알리는 휘슬이 울릴 때까지.
[선덜랜드 2 - 0 맨시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