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를 되갚아주는 법 (3)
마침내 맨시티를 커뮤니티 실드에서 쓰러뜨리고, 지난 챔스에서 겪었던 패배의 아픔을 되갚아준 선덜랜드의 주전 선수들에게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선덜랜드 벤치에서도 선망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최새벽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해리슨이 주먹을 불끈 쥐었으며, 곤잘로는 몇 번이고 ‘이 팀에 오길 정말 잘했다.’며 혼잣말을 했다.
옆에서 레이 브라운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만으론 부족하지. 너희는 젊잖아? 조금쯤은 분하게 생각해야지.”
레이 브라운의 지적대로, 이번 커뮤니티 실드에서 선덜랜드의 이적생 트리오는 아무도 출전하지 못했다. 결국 이번에 출전한 멤버가 현시점, 선덜랜드 베스트 일레븐이라는 뜻이다.
“어필은 훈련장에서 하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레이 브라운은, 감독과 코치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곤잘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분한 감정을 느끼기에는, 저는 아직 갭이 커서요.”
원래 뛰던 포지션에서 레프트윙 마르틴을 밀어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바뀐 포지션에서도 레프트백 베넷과의 격차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감독과 코치진은 곤잘로와 베넷을 다른 타입의 선수로 취급하고 있지만, 곤잘로 스스로는 기량의 부족함을 느꼈다.
물론 곤잘로는 베테랑 수비수였던 코치 파비오로부터 이탈리아 특유의 끈끈한 수비를 배워나가는 중이니, 조만간 당당히 선덜랜드의 플랜 B를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베넷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최새벽 또한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이미 2년을 기다렸으니까요. 새삼 조급할 이유가 없죠. 무엇보다, 이 팀은 반드시 기회를 준다는 것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자 레이 브라운이 웃었다.
“하긴, 괜한 소리를 했군. 너는 팀에서 애지중지 키우는 선수니까 굳이 분하게 생각할 이유가 별로 없겠지.”
옆에서 해리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렇다면, 레이 선수는 분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젊으면, 이라고 했잖아. 내 나이에 분한 감정이 들면 곤란하지. 애초에 팀워크를 해치는 선수는 팀에서 원하지 않아.”
베테랑답게 얼버무리는 찰나, 옆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전혀 아니어도 곤란한데요.”
“어이쿠, 수석코치님···.”
“보통 코칭스태프라면 누구나 팀워크를 해치는 선수를 원하지 않죠. 선덜랜드는 더욱 그렇고요. 하지만 저는 경쟁심이 없는 선수도 원하지 않아요. 그리고 팀워크와 경쟁심이 공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죠.”
“그렇겠지요.”
레이는 순순히 대답했다. 베테랑이기에, 보면 금방 안다. 이 팀의 주장과 부주장, JJ 듀오가 얼마나 팀워크가 좋고 호흡이 잘 맞는 사이인지 정도는.
‘당연한 일이겠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그야말로 단짝이고 소울메이트인 거잖아.’
그럼에도 둘은 선수로서는 치열하게 경쟁하는 중이다. 상대를 의식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서로가 서로의 성장에 발판이 되어 주는 사이다.
‘나는 이제 선수로서 더 성장하기엔 너무 늦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부럽다고 느꼈다. 한창 성장할 수 있는 시기에, 축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과 좋은 라이벌을 얻는다는 건 축복에 가깝다.
레이는 자신과 나란히 앉은 선덜랜드의 젊은 선수들을 무심코 흘끗거렸다. 커뮤니티 실드 트로피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는 최새벽과 해리슨, 프랭크의 얼굴을.
어쩌면 이 세 사람 또한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며 성장할 수 있는 사이가 될지도 모른다. 옆에서 약간의 계기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저도 누군가에게 경쟁심을 느끼게 할 만큼 뛰어봐야겠군요. 출전 기회를 주실 경우의 이야기입니다만.”
그러자 샐리가 서늘하게 웃었다.
“어머, 그리 먼 이야기는 아닐 텐데요? 개막전에서는 골 폭죽을 터트릴 생각이니까요.”
명백한 암시였다. 레프트백을 교체해 팀의 컬러를 공격적으로 바꿀 것이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선수들이 기회를 잡을 거라는.
“기대되는군요.”
레이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경기 종료 후, 웸블리 믹스드 존에서 브라이언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선덜랜드는 선제골을 뽑은 이후에도 맹공을 퍼부으셨는데요. 일반적으로는 한 골 넣고 잠그는 경우가 많습니다. 굳이 추가골을 노린 이유를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어··· 맨시티 같은 강팀 상대로는, 그러니까 선제골조차 무의미할 수 있고··· 그러니까 제 말은.”
버벅거리는 브라이언을 응시하며, 나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옆에서는 희주도 같이 인상을 썼다.
“브라이언 씨 전에 보니까 인터뷰 되게 늘었던데, 오늘은 왜 또 저래?”
“그러게··· 지난번에 플루크가 터진 건가.”
시티와의 지난번 패배 때, 브라이언은 아주 완벽한 인터뷰를 보였었다. 그래서 나도, 우리 프레스팀도 안심했었는데, 오늘 인터뷰는 도로 지리멸렬해졌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혹시 프롬프터를 쓰는 건 어떨까요?”
다미의 제안에, 희주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써 봤는데, 국어책 읽기만 나왔어요.”
어쩌면 브라이언의 인터뷰 스킬은 선수를 보호해야 하는 상황, 그러니까 패배 직후에만 발동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이 스멀거린다. 브라이언은 로저스 감독에게 축구를 배웠으니까.
다행히 오늘 기자는 눈치가 빨랐고, 무엇보다 브라이언어를 잘 알아듣고 정리하는 미덕을 발휘했다.
[맨시티는 강팀이니 만약 지킬 생각으로 소극적 플레이를 펼쳤으면 오히려 역전의 빌미를 줬을 수 있다··· 그런 말씀이신 거죠?]
“네, 네, 바로 그겁니다!”
브라이언의 얼굴이 환해졌고, 희주와 애니의 얼굴도 차례로 피었다. 그리고 나는 기자의 소속을 슬쩍 확인했다··· 런던 튜브의 엘렌이란 말이지. 딱 봐도 유능한 기자 같다. 이마의 숫자만 봐도 애니의 가치에 거의 필적할 정도니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브라이언이 덧붙였다.
“사실 한 골이 더 필요해서 몰아친 것도 사실입니다.”
[네? 커뮤니티 실드는 단판 승부입니다만.]
아주 우수한 기자, 엘렌조차 브라이언의 이번 코멘트를 해석하지는 못했다. 어리둥절하는 기자들을 바라보며, 브라이언이 대답 없이 웃었다.
오늘 한 골이 더 필요하긴 했다.
80년 전, 우리는 맨시티와의 채리티 실드에서 0-2로 패배했기 때문이다. 모처럼 웸블리까지 모셔온 올드 블랙캣츠 어르신들이 경험했던 패배의 경험을 씻어내기 위해선 추가골이 필요했었다.
그렇다고 80년 전의 사연을 우리 입으로 주절주절 떠드는 건 너무 볼품없다. 그래서 브라이언에게는 절대 이유를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이번 인터뷰에서 유일하게 신경 썼던 부분이었다··· 브라이언의 인터뷰는 그 외에도 예상 못 한 문제가 많았지만.
뭐, 실력 있는 기자라면 머지않아 우리의 이유를 눈치채겠지. 기자들은 그런 거 발굴하는 게 일이잖아. 루머나 찌라시 말고.
[오늘 요나스 뮐러 선수가 KOTM을 차지했습니다. 감독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그 선수는 오늘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고 할 수 있죠.”
브라이언의 눈동자에 잔뜩 들뜬 열의가 피어올랐다. 보통 매니아들이 자기 전문분야에 토론할 때 주로 짓는 표정이다.
“요니는 공간지능이 무기인 선수라서 시티 상대로 잘 먹힌 게 아닐까요?”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자도 흔히 말하는 전술 덕후인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그렇지만 시티는 공간 활용에 아주 능한 팀입니다만···.]
“오히려 그래서가 아닐까요? 요니 정도의 공간지능이 아니라면, 시티 상대로 찬스를 잡는 것은 아주 힘들었을 겁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오늘 요니 선수의 폼이 아주 좋아보이던데요.]
“원래 재능 있던 선수가 큰 대회를 경험하면서 성장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요니가 많이 성장했다. 오늘 경기력은 완벽했고, 이마의 숫자 또한 곧 각성해버릴 것처럼 희미해졌다.
사실, 줄곧 아쉬웠었다. 잭과 요니의 가치가 조금 낮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계속 들었기에. 충성에도 가치가 매겨진다면 그들의 몸값이 훨씬 비쌌을 거란 생각을 했을 정도로.
아무래도 두 사람이 프로로 처음 데뷔했을 때의 모습을 줄곧 지켜봤던 나로서는, 아무래도 다른 선수들보다 잭과 요니를 좀 더 특별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자기 발로 선덜랜드를 찾아온 소년, 스스로가 이방인은 아닌지 고민하던 청년은, 어느새 선덜랜드의 보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이제 곧, 선수로서 한 꺼풀 벗게 될 것이다.
“하긴, 요니 선수 요즘 폼 엄청 좋더라.”
“우리 사장님이 사람은 참 잘 키우시니까요. 부끄럽지만 저만 해도 사장님이 아니었으면 이쪽 업계에서 일하지 못했을 거고요.”
사람을 잘 키웠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이마에 숫자가 높은 사람을 데려온 게 전부였으니.
그래도···.
“맞아요, 다미 언니. 오빠가 없었으면 잭 선수나 요니 선수는 줄곧 3부 리그를 전전했을지도 모르잖아요?”
“프리미어리그 스카우터가 그렇게까지 동태눈은 아니겠다만.”
살짝 부정하자, 희주가 곧바로 반박했다.
“음··· 그럴 수도 있지만,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시기는 달라졌을 거야. 저 두 사람은 어지간하면 이적도 안 하니까, 오빠 아니었으면 프리미어리그 팀 눈에 들어올 일도 없었지.”
그런가. 나도 기여한 건가.
구단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지만, 새삼, 구단주가 되길 정말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커뮤니티 실드에서 벌어진 슈가대디 더비··· 이번에 웃은 팀은 선덜랜드.]
기사를 확인한 ‘@이스탄불_이전부터’가 낮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했다.
“슈가대디 더비랜다.”
입맛이 썼다. 마침 그의 응원팀 리버풀 또한 구단주가 유명한 투자자였기 때문이다··· 팀에 쓰는 돈의 액수가 달라서 그렇지.
그때, 옆자리에 앉은 ‘@선덜랜드_명예시민’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스마트폰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얼핏 보니 축구 유튜브를 보는 중이었다.
[마침내 브라이언의 인터뷰 비밀 밝혀져. 1점 앞선 선덜랜드가 애타게 추가골을 원한 이유?]
[자, 자세히 보세요. 선수들의 세레머니가 평소와 다르죠? 관중석에 일제히 달려가는데··· 노약자석처럼 보인다고? 아니에요. 축구에 노약자석이 어딨겠어. 지하철도 아니고.]
[저거 휠체어석인데, 선덜랜드가 올드 블랙캣츠 어르신들 초청했거든. 그래서 나도 그거 보고 혹시나 해서 찾아봤지. 그랬더니 어이쿠, 기록이 딱 나오네.]
[트로피하고 영 인연이 없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붙었던 상대가 맨시티였어. 커뮤니티 실드, 당시엔 채리티 실드였는데, 아무튼 딱 두 골 차로 졌어요. 패배를 기억하는 저 노인분들 앞에서 갚아주려고 한 거다, 이거죠.]
[솔직히 축구 더 재밌게 하는 팀은 많아. 많은데 나는 선덜랜드 얘네보다 축구 더 근본 있게 하는 팀은 모르겠다.]
고개를 열렬히 끄덕이는 ‘@선덜랜드_명예시민’을 흘끔거리며, ‘@이스탄불_이전부터’가 키득거렸다.
“삼촌, 갑자기 왜 웃어요?”
“너도 동영상 이렇게 만들어라. 전에 한 것처럼 괜히 국뽕 채널로 오해받지 말고.”
“오해가 아닌데··· 삼촌도 이따 보면 알 걸요.”
“그래도 네 건 너무 과했어. 네가 조회수 때문에 막 주작질할 성격은 아닌 거 아는데.”
어깨를 으쓱거리며, ‘@이스탄불_이전부터’는 물끄러미 창밖을 응시했다.
비행기는 이제 거의 영국에 도착한 참이었다. 조카가 박박 우긴 탓에 타인위어에 끌려온 것이다.
원래부터 사이가 좋기도 했고, ‘삼촌이 어릴 때 축구장에 많이 데려가줬으니 이젠 제가 모시고 갈 차례.’라는 이야기를 도저히 거부할 명분도 없었다.
그리고 수십 년간 축덕이었던 그로서는, 프리미어리그 개막전 직관은 도저히 거부하지 못할 유혹이기도 했다.
‘안필드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조카가 열성 선덜랜드 팬임을 모르지는 않았기에. 게다가 사실 팬 서비스만 따지면 선덜랜드가 훨씬 낫다는 정도는 이제 한국에서도 상식이 되었다.
‘뭐, 저 팀은 한정판 로드스터를 팬에게 선물할 정도니까.’
물론 서비스를 받아들이는 팬들의 열기도 대단하다. 그의 조카만 해도 그렇다. 세상에 두 대밖에 없는 한정판 로드스터를 팔라는 제안이 수도 없었지만, 그때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딱 잘라서 거절했었을 정도다.
그래도, ‘@이스탄불_이전부터’는 아직 선덜랜드의 팬 서비스 수준을 실감하지는 못했다. 경험하지 못한 일을 짐작하기는 원래 쉽지 않은 법이기에.
그리고 그는 곧 체감하게 된다. 심지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도착하기도 이전에.
“공항에 웬 고양이 인형이 서 있어? 태극기 망토 둘렀네?”
영국 공항에 놓여 있기엔 너무나 생소한 생김새인데, 그의 조카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인형이 서 있는 쪽으로 이동해 줄을 섰다.
보아하니 인형 근처는 다 한국인 같았다. 일단 생김새도 그렇고, 드문드문 들리는 한국어도 그렇다.
‘음··· 한국은 무비자 입국이 가능해서 따로 심사를 받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이스탄불_이전부터’는 그의 조카를 불렀다.
“아 맞다, 미정아. 삼촌 영어 잘 못하니까···.”
독해는 그럭저럭해도 회화는 영 젬병인 그와 달리, 그의 조카는 반년간 영국에 머물며 생활할 정도로 영어가 유창했다. 그래서 도움을 좀 받으려고 생각했더니,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괜찮아요, 삼촌. 이쪽 줄은 한국어 되는 창구니까.”
“한국어가 된다고? 영국 공항인데?”
무슨 국뽕 유튜버도 안 할 것 같은 소리를 하는 조카를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보자, ‘@선덜랜드_명예시민’이 깔깔거렸다.
“공항 대주주가 한국인이잖아요.”
‘그게 이유가 되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스탄불_이전부터’를 향해, ‘@선덜랜드_명예시민’ 이 명랑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 맞다. 저랑 같이 다니긴 할 건데, 혹시라도 저랑 떨어지게 되면 무조건 가까운 검은 고양이 인형을 찾아가세요. 태극기 망토 두른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