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369화 (369/422)

좋은 팀 (3)

추첨이 끝난 브리핑룸은 고요했다. 누군가가 짧게 중얼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우리 대진운 실화입니까?”

확실히,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빡센 조합이었다. 지금은 힘이 좀 꺾였지만 전통의 강호 바르샤, 명가 부활을 꿈꾸는 밀란, 그리고 최근 폼으로는 가장 유력한 16강 진출 후보 아약스를 같은 조에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조 팀들이 차지한 챔스 우승컵 ‘빅 이어’를 모두 더하면 무려 열일곱 개가 나오는 조합이니··· 그야말로 챔스 사상 최악의 조추첨, 죽음의 조 확정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아약스니 바르샤 밀란이니 떠들던 인간들이 있던 것 같은데 말이지.

다들 할 말은 많아 보였지만, 그렇다고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미심쩍은 시선이 사방에서 날아다닌다. 우리 감독, 그리고 수석코치의 뒤통수에 꽂히는 싸늘한 눈길. 말은 없었지만 의미를 파악하긴 어렵지 않았다.

‘혹시 그동안 우리가 수없이 겪었던 참혹한 대진운은, 사실 이 인간들 때문 아니었을까?’

그동안 가장 유력한 부두술 마스터로 의심받았던 희주는, 이번 추첨식에서는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혹을 벗을 기회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희주의 얼굴에는 쓴웃음이 머물렀지만, 태도는 평소보다 당당하다.

정작 우리 감독과 코치는 아주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를 드러냈다.

“저게 우리 자리였어야 했어. 헨도 이번에 편하겠네.”

브라이언이 탐욕스러운 눈으로 A조를 응시한다. 추첨은 릴, 리버풀, 샤흐타르, 그리고 말뫼다.

“규정상 우리가 A조에 들어갔으면 리버풀과 릴이 빠지잖아요? 뭐, 3, 4포트가 샤흐타르와 말뫼로 바뀌는 건 확실히 긍정적이지만···.”

샐리도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저는 그보다 F조, 뮌헨, 세비야, 제니트, 브뤼헤가 부러운데요? 저 자리에는 우리가 그대로 1포트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제니트와 세비야는 만날 때마다 이겨봤고, 브뤼헤는 전력상 아주 만만하다는 뜻이겠지. 확실히 F조는 딱 보기에도 무척 달콤해 보인다··· 아니, 그러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그랬어.

두 사람을 보다 못한 루벤이 끼어든다.

“아니, 그러면 진작 그렇게 말하지!”

내 말이.

이게 월드컵처럼 같은 조를 토너먼트 반대편 블록으로 찢어주는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굳이 죽음의 조를 뚫어야 할 메리트는 전혀 없는 상태긴 하다.

쏟아지는 비난에, 브라이언과 샐리가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다.

“아니, 레이디가 말하는 게 맨날 반대로 이루어지길래, 나도 그럴 줄 알았지.”

브라이언은 나름 해명하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샐리는 아주 뻔뻔하다.

“전 잘못한 거 없어요. 어차피 우리가 세계 최강인데, 조추첨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무리 봐도 다들 우리보다 약한 팀인데요.”

샐리가 앓는 소리라도 했다간 그건 그것대로 별일이긴 하겠다. 그나마 예전에 분석팀장으로 일할 땐 직무 특성상 우리와 상대의 전력에 대해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대답하려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수석 코치가 되고 나서는···.

뭐, 저런 모습이 샐리답긴 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합시다. 우리 조는 어느 팀이 16강에 가도 이상하지 않은 조추첨 아닙니까?”

“맞아, 오빠. 그러니까 떨어져도 변명할 거리가 있다는 거잖아?”

끼어드는 희주의 입에 츄러스를 물린 다음,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괜히 16강 토너먼트에서 만나느니, 차라리 조별에서 상대하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비교적 다양한 축구를 접할 수 있는 것도 좋죠.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명문, 그리고 네덜란드 토털 축구의 상징을 상대하는 거니까요.”

좀 더 욕심을 내자면 독일 축구의 정수도 체험하고 싶기는 했다. 최근 가장 핫한 감독들 중에는 독일계 비중이 많으니까.

그래도 조별리그에서 만날 수 있는 팀은, 언제나 세 팀뿐이다.

“이번 챔스에서 저들보다 강한 팀은 존재해도, 저들보다 자기 색깔이 뚜렷한 팀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연습 상대가 되겠죠. 트레블로 가는 길이니까요.”

옆에서 프레스팀 애니가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의미에선 확실히 운이 좋네. 최소한 대진운빨로 따낸 트레블 소리는 듣지 않아도 되겠어.”

고개를 끄덕인 다음, 선덜랜드 스태프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지침을 언급했다.

“그래도 아쉬우면, 지금 이 자리에서 마저 한탄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선수들 앞에서는 죽음의 조 운운하는 모습을 보이지 마세요. 절대로.”

열한 명의 선수들과 팬들에 이은, 팀의 열세 번째 플레이어임을 자처하는 우리 스태프들의 표정이 하나둘씩 바뀌기 시작했다.

킥오프를 앞둔 선수들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 * *

집에서 추첨식을 지켜보던 선덜랜드의 주장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찌나 꾹 쥐었는지 살짝 색이 변했고, 땀이 흥건했다.

‘빌어먹을.’

쉽지 않은 상대였지만, 그래도 불안한 티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는 선덜랜드의 주장이기에. 그래서 잭은 손에 난 땀을 바지춤에 문질러 닦고, 언제나처럼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 밖에 나섰다.

언제나 그에게 힘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이번에 고생 좀 하겠더라. 빅클럽들만 만났잖아.”

“상관없슴다. 어차피 선덜랜드보다 빅클럽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슴다.”

배에 힘을 주고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하자, 길거리 곳곳에서 환호가 터졌다.

“말 한번 잘했다, 캡틴!”

“올해는 챔스 결승 가 줄 거지?”

“결승이 다 뭠까. 우승도 할 검다.”

“하핫, 그럼 캡틴만 믿고 챔결 티켓 예매 풀리면 바로 살 거야. 오케이?”

“그건 좋은데, 광클하셔야겠슴다.”

대답하면서, 잭은 도시 중심에 위치한 경기장,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응시했다.

어느새 칠만 석으로 늘어난 초대형 경기장은 외관 또한 잔뜩 신경 써서 리모델링한 상태였다. 처음 지어졌을 때의 느낌을 살려 고풍스러움을 유지했지만, 곳곳에는 레이저와 홀로그램을 이용해 화려함을 함께 추구했다.

그 옆에는, 처음 지어졌을 때보다 두 배 넓어진 풋볼 스퀘어가 보였다. 영국에서 가장 큰 스크린과 무대, 온 사방에 즐비한 노점들.

그리고 새로 생긴 멀티플렉스 빌딩과 고급 호텔 건물 외벽엔, 자신과 구단주가 찍은 광고가 붙어 있었다.

이제, 이 도시는 아름답고 활기가 넘친다. 챔스 결승전을 치르기에 충분한 장소다.

‘혹시, 우리가 결승에 나가지 못한다면?’

개축 이래 처음으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홈 드레싱룸을 자신들 이외의 누군가에게 내주게 될 것이며, 블랙캣츠 스탠드와 나이얼 스탠드에 선덜랜드가 아닌 다른 팀 서포터를 앉히게 될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을 것만 같다. 무심코 이마를 손으로 문지른 다음, 선덜랜드의 주장은 거칠게 달려나가려 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그를 부르는 요니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산책 나왔어? 하긴, 대진표 보니 피가 끓지?”

“그렇지 뭐.”

애매하게 대답하면서, 잭은 속으로만 덧붙였다.

‘그보단, 무서웠는데.’

잭의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요니가 히죽 웃었다.

“잘된 일이야. 이 기회에 모두 박살 내버리고 우리가 얼마나 강한 팀인지 초장부터 보여주는 거야. 우리 상대로는 그냥 라인 내리고 수비적인 축구나 하라고.”

“지난 시즌처럼 말이지.”

요니가 말한 ‘기선제압’은 선덜랜드 무패 우승의 비결이었다. 개막 초반부터 중원 싸움에서 연달아 압승하면서, 선덜랜드를 상대하는 팀들이 전부 라인을 내리게 만든 것이다.

상대가 수비 축구를 택하면 승리를 놓칠 가능성이 다소 커지는 대신, 어이없는 일격에 발목을 잡히고 패배할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든다. 즉, 변수가 줄어드는 경기가 된다.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 반드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올곧은 믿음이 있을 때 쓸 수 있는 전법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잭은, 요니의 재능이 자신보다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까지 선수로서는 줄곧 함께 걸어왔지만, 어느 순간 격차가 벌어졌다는 것도 짐작했다.

특히 이번 시즌에는 더욱 그렇다.

요니가 이따금씩 보여주는 빛나는 센스는 잭이 따라 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특히 축구의 신과 보여주는 호흡은 환상적이었다.

전성기의 메시가 가졌던 축구 지능과 테크닉을, 요즘은 요니와 마르틴이 각각 나누어 가졌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선수로서 아무것도 갖지 못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은데.”

염려하는 요니를 향해, 잭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뛰다 말아서 그런가 봐.”

“하긴 네 체력은 워낙 전설적이니까. 그럼 이따 보자.”

잠시 후, 요니와 엇갈린 잭은 계속 달려나갔다.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선덜랜드의 주장이고, 그가 배운 축구는 휘슬이 세 번 울리기 아무것도 멈추지 않는 축구다. 그러니 계속 달릴 것이다. 동료들에게, 그리고 팬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 * *

[EFL컵 3라운드, 레스터 대 선덜랜드]

킹 파워 스타디움의 익스클루시브 박스에서, 나는 평소보다 훨씬 느긋한 기분으로 경기를 기다렸다.

EFL컵 자체는 트레블에 카운트되지 않는 대회다. 따라서, 어떤 의미로는 올 시즌 가장 덜 중요한 대회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는 오늘 로테이션을 잔뜩 돌렸다. 포백라인은 신인 위주로 채웠고, 미드필더에도 이적생 레이 브라운과 어린 디아라를 포진시켰다.

그리고 쓰리톱은 베리와 크리그, 터너가 선발 출전했다. 스쿼드의 무게감 때문에 주장 잭이 나서긴 했지만, 대체로 힘을 뺀 라인업이었다.

누가 봐도 코앞으로 다가온 챔스 조별리그가 훨씬 중요하다고 선언하는 듯한 멤버 구성이었지만···.

“그런 것치고, 대충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네?”

“우리 감코가 어디 그럴 사람들이냐.”

나는 우리 벤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브라이언은 그렇다 치고, 일단 샐리는 멀리서 보기에도 초주검이 된 상태로 반쯤 벤치에 파묻혀 있었다.

짙은 화장으로도 다크서클을 미처 가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샐리가 저렇게 과로했을 정도면 우리 분석팀은···.

분석팀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두리번거리자, 희주가 옆에서 한숨 섞인 목소리로 설명했다.

“분석실 드링크 소비량이 평소의 두 배로 늘었다던데.”

지금쯤 자고 있겠네. 이러다 언젠가 큰일 나겠다. 그놈의 카페인 좀 그만 먹게 해야지.

물론 샐리와 분석팀에게는 나름 명분이 있긴 했다.

[선덜랜드는 선수를 혹사시키는 팀이 아니죠. 리그와 EFL컵, 챔스 조별리그가 겹치는 이 시기에는 철저한 로테이션으로 선수를 보호할 필요가 있어요. 단, 그게 경기를 포기하는 이유가 되진 않지만요.]

로테이션 멤버 내고도 악착같이 레스터에 이기겠다는 의지다. 덧붙여 루벤과 토마스는 반쯤 체념한 얼굴로 샐리를 따랐다.

[하긴, 우리는 선수를 혹사시키는 팀은 아니지만 분석관은 혹사시키는 팀이니까요.]

[이봐 토마스, 혹사라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우리는 경기 안 뛰잖아. 혹사가 성립 안 될 거야.]

[······.]

조만간 블랙유머의 모범 사례로 등록될 대사 같지만, 사실 샐리나 루벤이 블랙유머에 눈을 뜬 것은 아니다. 노동법이나 인권 따위 개나 주기로 한 것도 당연히 아니고.

그저, 오늘도 우리 선수들을 이기게 해 주고 싶은 거겠지. 샐리와 루벤의 실력이라면, 같은 리그에서 뛰는 레스터의 전력 분석에 며칠 밤을 지새울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몇 번이나 다시 검산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판단이 옳은지를 확신하기 위해서.

[분석은 몇 번이든 다시 할 수 있지만, 경기는 딱 한 번이잖아요.]

[코치님, 경기에도 가끔 재경기가 있긴 한데요···.]

[토마스, 샐리에게 NSN 소리 듣기 싫으면 그냥 츄러스나 깨물어.]

그렇게 필사적으로 준비한 성과가, 킥오프와 동시에 경기장 위에 펼쳐졌다.

우리 선수들은 시작부터 맹렬하게 몰아쳤다. 그들도 눈치챘을 것이기에. 파김치가 된 분석팀과 초췌한 샐리를 보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코칭스태프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레스터 역시 물러설 수 없다는 결의로 거칠게 맞섰기에, 경기는 초반부터 뜨거웠고 서로 끊임없이 공수를 전환하는 러닝 게임이 되었다.

“의외로 고전하는 것 같네. 조금만 더 시원하게 두들겨 패면 좋을 텐데.”

뜻밖의 시소게임 전개에 조바심에 발을 구르는 희주를 향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전하는 거 아닌데.”

최전방에 위치한 크리그는, 평소보다 아래로 내려온 자리에서 위협을 가했다. 그러자 레스터의 오프사이드 라인이 위로 올라오면서 대응했다.

그리고 베리와 곤잘로를 앞세운 우리의 측면 공세에 대항해, 레스터는 좌우 폭을 좁히며 응수했다.

한편 레스터 감독은 아주 오래전부터 점유율 축구를 선호하기로 유명하다. 자연히 전방 압박 비중도 높아진다. 특히 오늘의 우리처럼 센터백에서 후방 빌드업을 담당하는 경우, 레스터 감독 같은 전술가들은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전방 압박으로 응수한다.

결과적으로, 오늘의 레스터는 경기장을 좁게 쓰면서, 조직적인 압박과 빠른 전환을 무기로 삼는 팀이 되었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샐리에게 유도당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저건, 가상 밀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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