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370화 (370/422)

좋은 팀 (4)

이탈리아 출신의 전직 수비수, 현직 선덜랜드 수비코치 파비오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의 완성도가 높군요. 가장 유명하던 시절의 밀란과는 다르겠지만, 이건 틀림없이 지금의 밀란입니다.”

파비오는 이번 레스터전 경기 준비에 거의 개입하지 않았었다. 객관적인 의견을 원한다는 샐리의 요구 때문이었다.

“지금의 밀란인가요?”

“적어도 제가 상대했던 지난 시즌 기준으로는 거의 똑같습니다.”

샐리에게 대답하면서, 파비오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파비오가 몸담았던 이탈리아 축구는 전술적이기로 유명하다. 특히 수싸움은 아주 예술적이다. 특정한 움직임을 강요하거나, 상대의 수를 미리 읽고 대응하는 것이 이탈리아 축구의 기본이다.

그런 이탈리아에서도 지금 샐리가 보여준 마법 같은 재주를 뽐낸 감독은 거의 없다. 정작 샐리는 초췌한 얼굴을 감추며, 애써 새침한 표정만 지어 보였지만.

“모처럼 대진운이 좋았으니까요.”

“대진운이 좋다고요! 오히려 다들 난리 아니었습니까? 대진운 형편없다고···.”

파비오의 반문에 샐리가 웃었다.

“어머, EFL컵 3라운드에 레스터를 만나는 것보다 나은 대진운은 기대하기 힘들죠. 하부 리그 팀이 상대였다면 챔스에 대비해 모의전을 치르지는 못할 거 아닌가요?”

발상이 남다르다. 적어도 보통 사람은 이런 발상 자체를 하지 못한다고 파비오가 생각할 즈음, 샐리가 웃으며 덧붙였다.

“챔스까지 생각해도, 역시 대진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저라도 레스터를 가상 레알이나 가상 뮌헨, 혹은 가상 알레띠로 만들지는 못하거든요··· 그럼, 이제 우리 감독님 솜씨를 좀 볼까요?”

받아들일 만한 상대를 유도한 것뿐이라며, 샐리가 덤덤하게 자기 몸을 시트에 파묻었다. 경기를 치르는 팀의 수석 코치라기보다는 관객에 더 가까운 태도다. 손에 포테이토칩이라도 들려주면 딱 좋을 것 같다.

사실 이번 레스터전 준비는 대부분 샐리가 했고, 브라이언은 관여하지 않았다. 챔스 조별리그 밀란전에 대비해 감독에게 ‘가상 밀란’을 만들어주려는 샐리의 목적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 책임감도 느끼고 있겠지.’

조추첨 당시 샐리는, 세계 최강 선덜랜드는 누구를 만나도 아무 상관 없다며 입방정을 떨었다. 그러다 정말로 죽음의 조에 떨어졌으니, 팀을 위해 뭐라도 해주고 싶은 건 어쩌면 당연한 감정이리라.

‘확실히, 정말 좋은 팀이야.’

팀에 오기 전, 선덜랜드의 감독과 수석코치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도 몇 번이나.

마이크워크는 형편없고 리더십은 평범하다. 선수 보는 눈은 훌륭하지만, 이미 투자의 신이 구단주로 있는 팀에서 코치진의 선수 보는 눈이 필요한지는 모르겠다는 의견도 많았다.

‘그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빅클럽을 맡기 충분한 전술 천재··· 라고 했었던가?’

와서 지내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이들의 전술 재능은 소문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대단했고, 전술 외의 면모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아직 젊어서 미숙한 점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아주 성실하고, 축구밖에 모르며, 무엇보다 팀에 대한 애정이 넘친다.

그때, 옆에서 바스티아노가 파비오의 옆구리를 찔렀다.

“경기 중에 그렇게 흑심 가득한 시선은 좀···.”

“뭐? 흑심?”

“이해해요. 수석코치님은 절세의 미녀니까 자꾸만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야 이놈아! 애초에 나는 유부남이야.”

그러자 샐리를 아주 예뻐하는 베테랑 코치, 델랍의 험상궂은 얼굴이 쑥 올라와, 두 사람의 시야를 가렸다.

“어이, 똑바로 봐. 오늘 경기야말로, 우리가 밀란을 상대할 교본이 될 테니까.”

* * *

경기는 줄곧 접전이었고, 잭은 살짝 어금니를 깨물었다.

‘오늘은 이겨야 하는 경기인데.’

그것도 아주 압도적으로 이겨야 한다. 선덜랜드가 밀란과 유사한 스타일의 팀을 어떤 식으로 격파하는지 과시할 수 있도록.

그때부터 선덜랜드 코칭스태프가 자랑하는 진짜 수싸움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만일 밀란이 패턴을 바꿔 익숙하지 않은 전법으로 나선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고, 평소대로 나온다면 오늘 레스터를 잡아먹은 방식과 똑같이 박살 내면 그만이라는 게 샐리의 복안이었다.

문제는, 레스터의 저항이 생각보다 완강했다는 것이다. 레스터 킬러라는 크리그도 줄곧 득점에 실패했고, 베리와 터너는 좀처럼 찬스를 잡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잭은, 경기 내내 발밑이 줄곧 신경 쓰인다. 레스터의 홈, 킹 파워 스타디움의 잔디는 이미 재현이 끝난 상태일 텐데도.

‘혹시 내 컨디션에 문제가 생긴 건가?’

그렇다면 팬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경기는 원정이니까.

‘만약에 오늘 이기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밀란은 오히려 자신감을 얻은 상태로 조별리그 1차전에 임할 것이며, 선덜랜드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괜한 만용을 부렸다며 감독과 수석코치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하다.

그리고 팬들은, 잭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또다시 눈물을 훔쳐야 할 것이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잭은 몸서리를 치고 말았다.

그때였다.

“너희만 우릴 분석하는 게 아니야. 우리도 너희를 분석하고 있지. 선발로 나와줘서 고마워, 잭.”

도발기 섞인 레스터 미드필더의 대화에, 잭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아, 그러셔.”

“요나스의 침투는 읽기 어렵고, 마르틴의 돌파는 날카롭지만, 네 움직임은 빠르긴 해도 너무 뻔하더라고. 어디서 창의성도 테크닉도 조금도 없는, 개싸움 3미들 조합을 들고 와서는···.”

상대의 비아냥에,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자신이 그런 선수라는 건 진작부터 알았지만, 함께 출전한 레이 브라운과 디아라까지 도매금으로 같이 넘어가는 것 같아서.

곧바로 노련한 레이 브라운이 다가와 잭을 제지했다.

“흥분할 필요 없어, 캡틴. 내가 투박한 선수인 건 사실이니까.”

“흥분 안 함다.”

태연하게 대꾸하면서도, 잭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그래서 잭은 더욱 스피드를 높였다. 뜨거워진 피를 식히고, 분함을 토해내기 위해. 어차피 지금은, 달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빠르게···!’

자신보다 요니가 더 빠르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신호에 맞춰 출발하는 싸움이라면 장거리든 단거리든 잭이 빠르지만, 경기장 안에서는 요니가 훨씬 빠르다.

축구는 킥오프 이후에는 별도의 신호가 울리지 않는 종목이니, 목적지도, 출발 타이밍도 전부 스스로 정할 수 있다. 사이드라인 안에서의 달리기는 언제나 그렇다.

따라서, 수비를 따돌리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빠른 발이 아니라···.

잭은 어금니에 힘을 주며 더욱 가속했다. 그래도 눈앞에 어른거리는 레스터의 유니폼은 좀처럼 시야 밖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단순히 속도만으로는 따돌릴 수 없는 상대를 맞이한 잭이, 눈동자를 굴렸다.

* * *

옆자리에서 희주가 발을 거칠게 굴렀다.

흘끗 바라보자 여동생의 뺨에 불만과 심술이 덕지덕지 매달렸다. 굳이 표현하자면, 밤에 야식 삼아 끓인 라면을 자기 오빠에게 한 입 빼앗겼을 때의 표정과 비슷하다.

“아이씨, 고전하는 거 아니라며! 괜히 이러다가 지는 거 아니야?”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그럴 리는 없지. 이러고 지면 개망신이거든.”

“말씀 잘하셨어요, 갑부 오라버님. 바로 그래서 제가 고민인 건데요. 이러다가 지면 그게 무슨 망신이야.”

“안 져. 우리 코칭스태프 성격상 팀이 그런 개망신을 당하게 놔둘 리가 없거든··· 그리고 우리 주장도.”

“그 우리 주장은 완전히 틀어막혔는데···.”

희주의 지적처럼, 오늘 잭이 레스터 미드필더에게 완전히 막히기는 했다. 자랑하는 주력만으로 떼어내지 못할 상대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잭의 침투 시도는 계속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좀처럼 바이털 에어리어로 들어가지 못한 상태다.

만일, 한 번만 따돌릴 수 있다면?

굳이 아주 화려한 발재간은 필요하지 않다. 한순간, 딱 한순간만 거리를 벌릴 수 있으면 된다. 대등한 스피드를 가진 상대를 떼어내기 위해서는 그걸로 충분하다. 상대는 절대로, 한번 멀어진 거리를 쉽게 따라잡지 못할 테니.

그때였다.

필사적으로 달리던 잭의 몸이 순간적으로 멈춘다. 그의 오른발이 공을 살짝 밟는다 싶은 순간, 선덜랜드의 18번 유니폼이 그 위를 넘어간다.

잭의 몸이 반 바퀴를 돌았다.

“방향 전환!? 하지만 그 자리에서는···.”

희주가 숨을 삼켰지만, 내 생각에 방향 전환은 아니다. 지금은 수비를 따돌려야 하는 상황이고, 전방에서의 역주행은 큰 의미는 없다. 따라서 잭이 하려는 것은···.

그 기술의 이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오른발로 멈춰 세운 공을 그대로 끌어당겨, 컨트롤을 왼발로 넘긴다. 동시에 몸을 반 바퀴 더 돌린다. 그렇게 온전히 회전했을 때 완성되는 기술.

마르세유 턴, 혹은 룰렛.

잭의 룰렛은 전성기 지단의 그것처럼 우아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실전에서 쓰기에는 충분했다. 공을 놓치지 않았고, 순간적으로 스피드에 엇박자를 주면서 수비를 따돌렸으며, 한 바퀴 회전하는 사이 동료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기에.

완벽하게 수비를 따돌린 잭의 발에서 크로스가 날아간다. 동시에 오프사이드 라인에서는 크리그가 침투를 시작했다.

결정적인 찬스에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옆에선 희주가 아주 날뛰기 시작했다. 레스터 홈팬들에 비하면 한 줌밖에 안 되는 우리 선덜랜드 원정팬도 같이 외친다.

“때려!”

“절대로 놓치지 마!”

크리그의 발은 공을 딱 한 번 건드렸을 뿐이었다. 둥실 떠오른 공이 달려 나오는 레스터 골키퍼의 머리를 넘겨, 골네트를 흔들었다.

[선덜랜드 1 - 0 레스터]

득점에 성공한 크리그가 거칠게 포효하며, 천금 같은 어시스트를 성공한 우리 주장에게 달려든다. 그 뒤를 베리와 터너가, 그리고 디아라와 레이 브라운이 따랐다.

잠시 후 선덜랜드 일레븐은 마치 원진을 짜듯, 한 덩어리로 얽혀 서로 포옹했다.

“오빠, 우리 진짜 좋은 팀 만들었다.”

“그러게.”

나는 흐뭇한 시선으로 우리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선수가 있었다.

그동안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플레이로, 완벽한 어시스트를 만들어 낸 우리 주장 잭이 자랑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의 이마의 숫자는, 앞자리가 완전히 검게 뭉개진 채였다.

* * *

팽팽하던 경기의 균형은, 선제골이 터지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경기는 3-0, 선덜랜드의 대승으로 끝났다.

킹 파워 스타디움까지 따라온 선덜랜드 팬들은 대만족 상태가 되었는데, 당연히 그 사이에는 우드 부부, 그리고 브렌든과 핫도그 사내의 모습도 함께였다.

“최고의 경기였죠?”

처음엔 다들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았지만, 후반 70분쯤 접어들었을 무렵에는 모두가 깨닫게 되었다. 선덜랜드는 오늘 챔스에 대비한 축구를 하고 있었음을.

상대의 움직임을 유도한 다음, 곧바로 깨 버린 수완은 정말로 훌륭했다. 챔스에서의 활약 또한 기대할 수 있는 상황에, 브렌든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이대로라면 트레블도 꿈이··· 읍!”

“자네는 조용히 해, 브렌든. 자네 이야기는 항상 반대로 작동하더라고.”

핫도그 사내가 으르렁거렸고, 우드 부부도 동조했다. 실제로 브렌든은 구단주 비서 이희주에 버금가는 대부두술사로 주위에 악명이 자자했다.

브렌든 또한 자신의 악명을 자각했는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메시지 보내는 정도는 괜찮지?”

“그렇지 않을까요?”

브렌든의 질문에, 수잔이 곧바로 대답했다. 사실 대답 이전부터, 수잔은 이미 ‘@선덜랜드_명예시민’에게 메시지를 보낸 상태였다. 경기를 직관하며 찍은 사진과 짧은 동영상, 경기 소감 같은 것들을 잔뜩.

뒤이어 브렌든마저 ‘@이스탄불_이전부터’에게 메시지를 쏟아내자, 보다 못한 마일즈가 혀를 찼다.

“이봐. 시차도 생각해야지. 한국 사람들은 잘 시간이야.”

“설마요. 우리 경기가 있는데 벌써 자려고요?”

수잔의 반론에 이어, 크리스의 질문이 이어졌다.

“아빠! 한국 사람들은 왜 벌써 자? 아직 이른 시간인데에?”

“그건···.”

곤란한 질문이었다. 결국 마일즈는 지구가 둥글기 때문이라는 아주 궁색한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크리스는 크게 추궁하지 않았다.

“지구가 둥글어어? 축구공처러엄?”

옆에서 핫도그 사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크리스가 축구밖에 몰라서 다행이군.”

“그러게.”

대답하면서, 마일즈는 크리스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옆에서 수잔이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곧 시차에 대해서도 배우게 될 테니까요.”

아주 명백한 선언에, 브라더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해외 원정에 데려가려고?”

“원래 그랬는데요?”

수잔의 반문에, 핫도그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 말은, 두 사람은 원래 조별리그 원정까지는 안 따라갔잖냐는 겁니다. 두 사람도 직업이 있을 텐데, 국내 경기면 몰라도 해외까지 계속 따라가기엔···.”

“휴가 내려고요.”

수잔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마일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팔불출일지도 모르겠지만, 크리스에게는 축구를 계속 보여주는 게 장래에 도움이 될 것 같아. 퀸 수석코치도 어릴 때부터 축구 봤다는 이야기도 있고.”

핫도그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퀸 수석코치는 나이얼 경기마다 따라다녔다고 했었지··· 그렇게 축구관을 키웠다고.”

브렌든도 동조했다.

“오늘 이렇게 완벽한 경기를 보여준 선덜랜드가, 밀란 원정에선 얼마나 멋진 플레이를 보여줄지 나도 살짝 궁금해질 정도야. 우리 크리스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 되겠는걸.”

브렌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마일즈의 품에 안긴 크리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과, 살며시 불어온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고놈 참, 아빠 안 닮아서 아주 잘생겼다. 이마도 시원시원하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