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371화 (371/422)

역사를 만들기 위해 (1)

<역사를 만들고 있는 팀의 일원이라는 게 자랑스럽다. - 프랭크 램파드>

EFL컵 3라운드 승리에 이어, 주말에는 리그에서도 승리했다. 덕분에 리그 4연승, 컵 대회까지 합치면 개막 후 6전 전승을 질주하며 선두권을 굳건히 지켰다.

- 선덜랜드 초반 기세 실화냐?

ㄴ 사실 챔스 먹고 다음 해 바로 5관왕 한 시점에서 팀 포텐 제대로 터지긴 했지.

- 저 미친놈들은 로테가 로테가 아님;

ㄴ ㅇㅈ. 특히 최새벽 저 괴물! 누가 저거 이제 겨우 스물 넘긴 애송이라고 생각하겠음?

ㄴ 해리슨 패스도 제대로 미쳤던데.

ㄴ 선생님, 선생님은 혹시 2년 전 해리슨을 턴오버 머신이라고 부르신 분 아닙니까?

그 밑으로는 댓글이 달리지 않았다··· 이래서 SNS가 무섭다는 건가.

내가 쓴웃음을 짓는 사이, 희주가 실실 웃으며 자기 폰을 내민다.

[이제 시작되는 챔스, ‘죽음의 조’ C조 통과자는 누구?]

우리가 몸담은 C조가 확실히 죽음의 조이긴 한 모양이다. 벌써부터 특집 기사가 나돌 정도면.

단, 기사에서는 선덜랜드를 유력한 조 1위 통과 후보로 두고, 나머지 셋의 2위 경쟁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현시점의 우리는 밖에서 보기에도 유력한 챔스 우승 후보로 꼽힌다. 내부적으로는 트레블 노리는 팀이니 당연히 우리가 가장 강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다들 우리와 비기고 다른 두 팀을 잡는다는 전략을 펼 거라고 예상한다는데? 이거 완전 선덜랜드 3무 탈락 빌드업···.”

“챔스 조별리그는 6경기인데.”

“그럼 6무···.”

“무슨 무첨가 식품이냐. 원정 준비나 해.”

피식 웃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곧바로 희주가 뽀르르 따라붙는다.

기사의 내용처럼, 이제부터 챔스 조별리그가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의 조별 첫 상대는 밀란이었다.

“오빠 뭐 잊은 거 없어?”

“그런 게 있을 리가.“

해외 원정 한두 번 다녀오는 것도 아니고, 우리 원정지원팀은 아주 프로페셔널하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 개인적인 소지품을 말하는 거라면···.

뭐, 카드는 항상 잘 챙겨 다닌다. 그것만 있으면 나머지는 항상, 언제나 조달할 수 있지.

희주가 실실 웃었다.

“최근 선덜랜드 행운의 여신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은 부작용이 아주 심각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EFL컵 4라운드 진출도 확정되었으니, 대진표 추첨 전에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하는 거 아닐까요?”

나는 희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게뜨 좀 줄까?”

정통 유럽식이라 그런지, 한 시간쯤 지나면 이빨도 안 들어갈 만큼 딱딱해진다. 덕분에 저주 봉인 효과가 참 탁월할 것 같은데.

“아이참, 우리가 가는 곳이 이탈리아 밀라노잖아? 패션의 도시지!”

적지가 아니고?

* * *

밀라노 근처에 위치한 말펜사 국제공항에 도착한 이후, 이탈리아 출신 파비오가 자연스럽게 앞장섰다. 마치 관광 가이드처럼 명랑한 태도였다.

“이탈리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낭만적인 나라죠.”

“코치님 우리 이탈리아 와 봤어요.”

에디가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고,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기만 했다.

사실 우리 팀에 한해, 현지 적응 가이드가 굳이 필요하지는 않다. 원정지원팀은 이미 이 주일 전에 밀라노에 도착해, 경기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다.

정작 파비오는 에디의 반응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정열적인 사람들, 그리고 진주 같은 아드리아 해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에디의 옆에서 이고르가 기쁘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하긴, 아드리아 해는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의 바다다. 물론 이고르는 내륙 오시예크 출신이라 실제로 아드리아 해를 접할 일은 별로 없었겠지만.

“사람들이 정열적이란 말이죠?”

샐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동시에, 바스티아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의미는 명확하다. 예전에 바스티아노는 퍽 정열적으로 계란을 얻어맞았고, 자동차도 꽤 정열적으로 박살 났다. 덕분에 그의 페라리는 지금 새빨간 테슬라 로드스터로 바뀐 상태다.

덕분에 나는, 파비오가 갑자기 왜 가이드를 자처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파비오는 예전에 베로나에서 바스티아노와 함께 뛰었던 적이 있다. 바스티아노가 이탈리아에서 어떤 꼴을 당하며 쫓겨나듯 선덜랜드로 옮겼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다.

따라서 지금의 가이드 노릇은, 반쯤은 분위기를 돌리기 위한 시도일 것이며 나머지 반은 선수단의 앞에서 인간방패가 되려는 의도다.

[계란을 던지려면 나에게 던져!]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잭과 요니도 진지한 얼굴로 선두에 나섰고, 어느새 에디와 이고르도 바스티아노보다 앞에 서 있었다.

“하핫, 주장과 부주장의 마음은 알겠지만, 높이가 부족해. 높이가.”

“우리에게 맡겨. 육탄 방어는 센터백의 덕목이거든.”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사실 우리 원정지원팀이 이미 철저하게 조치했기에 바스티아노가 계란을 맞거나 야유를 받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지만, 그래도 역시 팀메이트끼리는 이래야지.

축구는 혼자서 할 수 없는 스포츠니까.

파비오 또한 흡족한지, 환한 미소로 가이드 활동에 종사했다.

“차오 이탈리아! 이제부터 여러분이 방문하실 밀라노는···.”

장단을 맞출 생각이었는지, 희주가 재빨리 끼어든다.

“알아요. 베르사체의 도시죠!”

그러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아뇨, 악마 놈들의 도시죠. 우리는 싸우러 온 겁니다.”

파비오가 불끈 주먹을 쥐어 보였고, 선수들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희주는 재빨리 내게 귓속말을 했다.

“오빠, 혹시 베로나와 밀란도 사이 안 좋아?”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특별히 나쁜 사이는 아닐걸··· 이탈리아 기준으로는 말이지만.”

“··· 엄청나다는 소리구나. 그치만 베로나의 최대 라이벌은 같은 도시에 있는 키에보 아니었어?”

“뭐, 그건 축구계 국룰이지.”

어깨를 으쓱거리며, 나는 슬쩍 바스티아노를 응시했다.

몇 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이탈리안 스트라이커의 눈빛은 차분하고 고요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공항에 내린 시점부터 그는 이미 싸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 * *

응원을 위해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오른 우드 부부는, 크리스와 함께 스타디오 산 시로에 도착했다.

“진짜 크네요.”

수잔이 무심코 감탄하고 말았다. 밀란의 홈 산 시로는, 우드 부부 같은 선덜랜드의 골수팬에게도 위압감을 줄 정도의 경기장이었다.

고대 로마 시절의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고풍스러운 디자인에, 백 년을 바라보는 세월이 묻어 있었다. 규모는 팔만 석,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보다 거대하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보다 오래된 축구장, 이곳은 틀림없이 유럽 축구를 상징하는 경기장 중 한 곳이다.

당연하게도 경기장 주변은 온통 밀란의 레플리카로 물들었다. 적지 한가운데에 선덜랜드 레플리카 차림으로 나타난 우드 일가는 아무래도 조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바스티아노의 사연도 있고 해서, 부부의 눈에는 사방에 밀집한 밀란 팬들이 꼭 폭도처럼 보였다. 하지만 의외로 밀란 팬들은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았다.

우드 일가가 몸에 걸친 선덜랜드 레플리카를 발견한 이탈리아 청년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경기장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원정 게이트는 저쪽입니다. 시뇨라.”

“고맙습니다.”

뜻밖의 친절에, 수잔은 우아한 미소로 응답했다. 그러자 이탈리아 청년 역시 환하게 웃고는, 경기장 앞 광장의 숫자를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1926. 산 시로가 지어진 해다.

“뭐, 왜, 우리가 밀란보다 훨씬 오래된 팀인데.”

뒤늦게 혼자 발끈한 마일즈를 수잔이 잡아끌었다.

“스타디움의 역사 이야기겠죠. 들어가요. 괜히 시비 걸지 말고.”

원정 팬 게이트 입구에는 낯익은 얼굴이 보여서, 우드 일가를 안심시켰다. 선덜랜드 원정지원팀 멤버들이다.

“머플러, 선덜랜드 머플러 있습니다! 티켓 소지자에게는 무료로 드립니다! 하나씩 가져가세요!”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대담하게도 선덜랜드 응원 구호까지 외치는 구단 스태프들을 보자, 마일즈와 수잔의 얼굴에도 웃음이 돌아왔다. 눈이 마주치자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는 선덜랜드 스태프들 사이에,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매주 만나는 얼굴도 섞여 있었다.

“어머, 크리스 우드 고객님도 오셨네요!?”

“네에~!”

크리스가 신나게 꺄륵거리자, 에이미가 화사한 미소와 함께 머플러를 내밀었다.

“마침 어린이용 머플러도 있답니다. 크리스 우드 고객님한테는··· 이 사이즈가 맞겠네요.”

에이미가 내민 머플러에 선명하게 새겨진 문구, Sunderland ’til I die를 발견한 크리스가 뭐가 좋은지 방긋거렸다.

* * *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1경기, 밀란 대 선덜랜드]

밀란전을 맞아 발표된 선발 명단에, SNS가 또다시 발칵 뒤집혔다.

- 하필 마르틴을 뺐다고? 실화냐?

ㄴ 쓰리톱이 크리그, 바스티아노, 메시면··· 쓰리톱의 기동성이 보장 안 되지 않나?

ㄴ 일단 크리그가 라인브레이킹이 되는 선수긴 한데··· 발은 별로 안 빠르지.

- 브라이언 또 명장병 도졌네.

그 아래에는 온라인이 그렇듯 정성스러운 헛소리가 가득했다. 요즘 밀란처럼 라인 올리는 팀 상대로는 빠른 공격수 쓰는 게 상식이라는 둥, 실제로 레스터 상대로는 뒷공간 잘 털어놓고 왜 이러냐는 둥.

“이러다 비기는 거 아니냐면서 6무 이야기도 나왔길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스낵바에서 무첨가 소시지 출시했다고 댓글 남겨 놨어!”

“잘했어.”

참고로 이번에 출시한 소시지는 무려 7무첨가제품이오니, 많은 애용 바랍니다.

“이 사람들은 진심으로 우리가 비기러 왔다고 생각하는 건가? 미드필더 라인업만 봐도 이길 생각 만반인 거 알 텐데.”

“그리고 레프트백도.”

잭과 요니, 로드리게스를 전부 내보낸 미드필더진이나, 베넷 대신 곤잘로를 내보낸 명단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 코칭스태프는 이길 생각 만반이라는 걸.

[경기장을 좁게 쓰는 게 밀란 스타일이라고? 그게 뭐? 우리가 그쪽에 맞춰줄 이유는 별로 없는데.]

이건 상대에게 보내는 도전장이다. 우리는 경기 내내 왼쪽 측면을 신나게 후벼팔 생각인데, 그래도 계속 컴팩트한 축구를 시도할 것인지. 선덜랜드의 측면을 자유롭게 놔둘 자신은 있는지.

“근데 오빠, 만일 밀란이 도전장을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땐 곤잘로가 신나게 크로스 올리겠지. 바스티아노와 크리그가 기다리는 문전으로.”

마침 바스티아노는 강력한 몸싸움을 갖춘 타게터고, 크리그는 결정력 좋은 골 사냥꾼이다. 머리를 노리는 높은 크로스에도, 발을 노리는 낮고 빠른 얼리 크로스에도 전부 대응할 수 있다.

아무리 이탈리아 수비가 견실하다고 해도, 이 라인업 상대로 문전에서 공방을 벌이고 싶진 않을 거다. 따라서 아마도···.

기동전이 될 것이다.

* * *

킥오프를 앞두고, 크리그는 동료들을 흘끗 바라보았다.

가장 멘탈을 염려했던 바스티아노는 상대적으로 평온해 보였고, 챔스를 처음 치르는 곤잘로도 태연하다. 선덜랜드 일레븐은 평소의 침착함을 유지한 상태였다.

굳이 따지자면 잭과 요니의 모습이 평소와 조금 다르다. 발밑이 신경 쓰이는지, 산 시로의 잔디를 몇 번이나 고쳐 밟으며 감촉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크리그는 무심코 피식 웃고 말았다.

3부 리그 시절, 끝없는 부진에 빠졌을 때의 모습이 저랬다. 당시 구단에서는 실력 좋은 잔디관리인을 영입했고, 훈련장에는 다른 팀의 잔디까지 모조리 재현하기 시작했다.

‘그땐, 내가 챔스에서 뛸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하지만 그는 이미 챔스 결승전을 경험했고, 오늘은 조별리그에서 선발로 뛴다. 그리고 요즘은 원정 경기의 잔디가 그렇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너흰 다르겠지만.’

크리그는 잭과 요니를 조금 아련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마냥 어리게만 보았었지만, 어느새 팀의 주축이 되어 있는 두 사람이다. 그러니 잔디의 감촉이 신경 쓰일 것이다.

스스로의 성장 속도를 감각이 미처 따라잡지 못했을 테니까.

요즘 들어 부쩍 잭과 요니가 달라지고 있다는 걸 안다. 선수로서 한 꺼풀 벗을 기회를 맞이했다는 것도··· 이미 전성기를 훌쩍 넘긴 자신에게는 똑같은 기회가 오지 않을 것임도.

그래도 상관없었다. 톰슨이 지난 시즌 마지막에 보여준 불꽃처럼, 크리그 또한 올 시즌을 끝으로 모조리 태워버릴 생각이었기에.

휘슬이 울렸고, 선덜랜드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미리 준비했던 것처럼 선덜랜드는 레프트백 곤잘로의 적극적 오버래핑을 선보였고, 밀란 역시 평소와 달리 수비의 폭을 넓히며 측면 돌파에 대비했다.

하지만 밀란은 수비 라인을 바짝 올리며 적극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치, 꼭 물어보는 것 같았다.

[이봐 크리그, 압박 뚫어낼 자신 있어?]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레프트윙으로 출전한 크리그를 틀어막으면, 레프트백 곤잘로의 돌파도 자연히 빛이 바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미끼인데. 멍청이들.’

사방에서 달려드는 밀란 유니폼의 포위망을 보면서도 크리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곤잘로의 패스를 아주 태연하게··· 흘렸다.

텅 비어 있는 전방, 밀란 포백라인의 뒷공간을 향해.

“나이스 패스!”

거의 동시에, 선덜랜드의 18, 19번 유니폼이 무섭게 쇄도했다.

산 시로의 잔디를 가로지르는 잭과 요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크리그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잔디를 박찼다.

누군가는 선덜랜드 기동전의 핵심을 잭과 요니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마르틴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선덜랜드 선수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고개를 떨어뜨리지 마라. 발을 멈추지 마라.]

크리그의 등 뒤에선 에디와 이고르가, 브루노가 달리고 있을 것이다. 바스티아노는 이미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전방에 도착하기 전에 이번 공격이 끝난다는 걸 알면서도, 선덜랜드 선수들은 전력으로 달렸다. 그게 선덜랜드의 축구이기 때문에.

[휘슬이 길게 세 번 울리기 전까진, 죽어도 멈추지 마라.]

그들의 어깨 위에, 밀라노까지 따라온 블랙캣츠의 함성이 내려앉았다.

Sunderland ’til I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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