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들기 위해 (2)
밀란의 수비 뒷공간에 완벽한 패스가 떨어졌고, 요니가 가장 먼저 공에 도착했다. 부심의 깃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정적인 찬스다.
“그렇지!”
브라이언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옆에서는 샐리가 환호한다. 뛰어라. 넣어라. 무조건 성공시켜라. 그런 단어들이 선덜랜드 코칭스태프의 입가를 맴돌았다.
이 찬스를 만들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산 시로에서의 시간은 이제 겨우 5분이 흘렀을 뿐이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무수한 노력이 필요했다.
철저한 분석으로 밀란 수비의 패턴을 파악하고, 경기 장면을 수도 없이 돌려 보면서 왼쪽 측면돌파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연구했다.
오늘, 선덜랜드의 플레이는 전부 약속된 움직임이었다. 크리그의 위치는 물론, 바스티아노와 메시, 잭과 요니의 움직임까지 전부.
그 성과가 지금 눈앞에 펼쳐지려는 중이다.
“막아. 더 빨리 뛰어! 어떻게 선덜랜드 놈들의 침투가 너희보다 더 빠르냐고!”
테크니컬 에어리어에서 절규하는 밀란 감독을 흘끗 바라보며, 브라이언은 약간의 동정심을 느꼈다.
‘이해합니다. 당신으로선 최선의 준비였겠죠.’
한때 유럽 전체에서도 가장 찬란했던, 하지만 이후 처참하게 몰락했던 명가 밀란은 가까스로 날갯짓을 준비하는 팀이었다.
선수들은 젊었고, 새로운 감독이 참신한 전술로 팀을 부활로 이끄는 중이었다··· 선덜랜드가 지난 몇 년간 경험했던 것처럼.
젊은 팀이 빠르게 수비 조직력을 갖춰 나가는 방법은 언제나 패턴 플레이다. 따라서, 리빌딩 중인 팀에는 반드시 정형화된 패턴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확신할 수 있다. 선덜랜드 또한 그랬으니까. 지난 몇 년간은 샐리가 일부러 자기 팀의 약점을 파헤쳐야 했을 정도로.
오늘, 밀란이 같은 패턴에 또 당하는 일은 없으리라.
곧바로 수비 패턴을 수정하고, 선수의 위치를 변경하며, 대인마크의 우선순위를 조정할 것이다. 그 정도 작업은, 이탈리아 감독이라면 경기 중에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니··· 똑같은 기회는 두 번 오지 않는다.
“때려 넣어!”
침투하는 요니를 바라보며, 브라이언은 목에 힘을 넣었다. 밥상은 차렸고, 사이드라인 밖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이제 남은 건 오로지 선수의 기량뿐이다.
* * *
선덜랜드가 밀란을 철저하게 분석한 것처럼, 밀란 또한 선덜랜드를 분석한 상태였다. 특히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공간연주자 요니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밀란의 골키퍼는 단단히 각오를 다졌다.
‘패스지? 알고 있어.’
아무튼 요니는 합리적인 선수다. 기록에는 그다지 욕심내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 슛과 패스 중 가장 성공률이 높다고 생각하는 쪽을 선택하는 타입이다.
수비는 하나, 공격은 둘. 이것만으로도 패스가 좀 더 성공률이 높은 조건인데 마침 요니의 등 뒤에는 클러치 플레이어로 이름난 선덜랜드의 주장이 바짝 달려오는 중이었다.
반드시 패스일 것이다. 문제는 패스하는 타이밍이 언제냐는 거지만, 선택지를 좁힌 상태에서는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다.
‘오른발이 움직일 때, 그때겠지.’
거리가 좁혀졌고, 요니가 보폭을 순간적으로 줄이며 잰발로 간격을 조절했다. 곧 그때가 온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고, 요니의 오른발 안쪽이 공에 닿은 순간 직감은 확신으로 변했다.
골키퍼는 망설임 없이 무게중심을 실었다. 패스에 대응하기 위해서. 타이밍은 완벽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공이 오지 않는다.
오른발 인프런트를 떠난 공은 그대로 요니의 왼발에 걸렸다. 다음 순간 공이 앞으로 밀려났다. 순간, 골키퍼의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스쳐 지났다.
그것은 축구에 존재하는 모든 개인기 중 아마도 가장 효율적인 기술의 이름.
‘라 크로케타···?’
필사적으로 가로막으려 했지만, 이미 중심을 잃은 골키퍼의 몸은 반응하지 못했다. 그저 서서히 무너져내릴 뿐.
엉덩이가 땅에 닿았다고 생각했을 때, 선덜랜드의 19번은 이미 자신의 곁을 빠져나간 뒤였다.
잠시 후 득점을 알리는 무정한 휘슬이 산 시로의 하늘 아래 울렸다.
[밀란 0 - 1 선덜랜드]
* * *
득점에 성공한 요니가 가볍게 몸을 돌렸고, 한발 늦게 따라잡은 잭이 곧바로 요니에게 팔을 벌렸다.
잠시 후 선덜랜드의 주장과 부주장이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하며 센터서클로 돌아왔다. 흐뭇한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옆에서 희주도 시시덕거리기 시작했다.
“요니는 원래 저런 발재간 안 부리는 선수 아니었어?”
“그랬었지.”
나는 잠시, 멀리 내려다보이는 요니를 응시했다. 또다시 흐릿해진 이마의 숫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툭 덧붙였다.
“아마, 잭이 룰렛을 썼기 때문일 거야.”
“그렇구나, 이제 교체 들어가려나? 잠그고 역습하는 전개로!”
희주의 목소리는 명랑했다. 경기 시작 5분 만에 득점에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선제골을 내준 밀란은 자연히 반격해야 하고, 뒷공간을 파고드는 데에는 바스티아노보다는 마르틴이나 베리가 더 나으니까, 어때 오빠?”
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80점. 정론이지만 응용력이 조금 아쉽네.”
“응?”
“애초에 밀란의 수비라인은 시작부터 높았어. 그리고 조금 전 증명한 것처럼, 뒷공간은 꼭 공격수가 아니라도 털 수 있어. 풀백도, 미드필더라도 가능하지.”
“그렇다면···.”
“모처럼 이탈리아 팀을 상대하는 건데, 이탈리안 스트라이커를 뺄 리 없잖아. 굳이 5분 만에 선수를 교체할 이유도 없고.”
우리도 밀란도 기동전을 선택했다. 서로 많이 뛰고, 전환이 격렬하며, 뒷공간을 찌를 일도 잦을 것이다. 빈말로라도 바스티아노가 활약하기 썩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축구는, 속공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지공을 선택할 때도 있고, 세트피스 상황도 있다.
그리고 이탈리안 수비수는 세계에서 가장 기술적이고, 집요하며, 끈질긴 존재다. 트래시토크부터 유니폼 당기기, 절묘한 파울과 끈적한 몸싸움까지.
만일 치즈를 먹지 않고 공격수를 미쳐버리게 만드는 대회가 존재한다면, 랭커 자리는 대부분 이탈리안 수비수가 차지할 것이다. 천하의 지단조차 참다못해 박치기를 날리고 퇴장당했을 정도니까.
“바스티아노는 버틸 수 있다는 뜻이야?”
“당연하지. 월드컵만 봐도 알잖아?”
“내가 아는 월드컵 바스티아노는 실축 직후 엄청나게 욕먹던 모습밖에 없는데··· 좋은 선수인 건 알지만, 솔직히 멘탈이 강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월드컵에 나왔잖아. 약소 클럽 베로나 출신인데도.”
그것도 9번, 아주리의 주전 스트라이커였다. 다시 말해 이탈리아의 바스티아노는 세리에의 왕으로 군림하던 선수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밀란도 아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자, 밀란은 이제 어떻게 나오려나?”
* * *
구단주 이희성이 짐작했던 내용을, 바스티아노 또한 눈치채고 있었다.
단순히 점수를 되찾기 위한 목적이라기에는 과도할 만큼 끌어 올린 라인, 빠른 템포의 경기 운영, 절대로 지공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단호한 전방 압박까지.
‘파비오 씨 말대로구나.’
[너는 세리에 수비수에게는 살아 있는 악몽이야. 이탈리아의 적이라는 별명에 손색이 없어. 너는 그 별명 싫어하지만 말야.]
바스티아노의 입술 끝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는 여전히 ‘이탈리아의 적’이라는 별명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유래가 유래이니만큼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단어다.
그래도 예전처럼 마음을 후벼파는 느낌은 없다. 독기가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육탄 방어는 센터백의 덕목이거든.]
그에게 환호하는 로컬 팬들이 있고, 지켜주려는 동료들이 있다. 말펜사 공항에 내리는 순간, 그의 앞을 가로막던 주장단과 센터백의 등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 같다.
그들이 있기에, 바스티아노는 오늘 세리에 팀의 적으로서 싸울 수 있고, 계속 축구를 할 수 있다.
“들어가!”
등 뒤에서 로드리게스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바스티아노는 반사적으로 돌진했다. 준족은 아니지만 라인브레이킹 타이밍에는 자신이 있었다. 밀란 수비가 그를 따라 달린다고 확신한 순간, 그는 순간적으로 멈춰 서며 수비를 교란했다.
또다시 밀란의 라인 너머에 공이 떨어졌고 요니가 또다시 파고들었다. 크리그도 잭도 공을 따라 달린다. 첫 골을 뽑아낸 플레이,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기동전이다.
잭의 슛을, 밀란 수비가 몸을 날려 걷어냈다. 공이 터치라인 밖을 힘없이 구른다.
선덜랜드의 코너킥이었다.
바스티아노는 자신감 있는 걸음으로 문전에 향했다. 어느새 수비 틈에 파고든 잭이 밀란 수비수와 서로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천하의 잭도 고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거칠기로 유명한 잉글랜드 수비를 매주 상대했지만, 세리에 수비는 또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바스티아노가 웃었다.
“괜찮아. 캡틴. 내가 할게. 몸싸움은 타게터의 덕목이거든.”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바스티아노를 상대하는 밀란 수비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튼 바스티아노는 잭보다 한 뼘이 큰 빅 유닛이다.
코너 플래그에서 요니가 한 팔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능숙하게 팔로 수비를 억누르며, 바스티아노는 타이밍에 맞춰 뛰어올랐다. 그리고 상대보다 머리 하나가 높은 타점에서, 그대로 공을 이마로 내려찍었다.
[밀란 0 - 2 선덜랜드]
세레머니는 굳이 하지 않았다. 이곳 산 시로에서는 어차피 이탈리아의 적이라며 야유만 당할 뿐이다. 대신 바스티아노는 동료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나이스 헤더, 바스티아노!”
“나이스 런, 캡틴.”
어느새 동료들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자신을 끌어안고, 하이파이브 하며,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바스티아노는 살짝 웃었다.
‘나이스 팀, 버디.’
부드럽게 뛰는 심장에 묻혀, 더 이상 산 시로의 야유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 *
이후 선덜랜드는 밀란의 공세에 한 골을 내줬지만, 바스티아노의 추가골로 다시 달아났다. 그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강렬한 터닝 발리였는데, 도움은 크리그가 기록했다.
[밀란 1 - 3 선덜랜드]
그렇게 경기를 2점 차로 마무리한 선덜랜드는, 아주 여유 있게 그라운드를 떠났다.
“그러고 보니, 산 시로 드레싱룸 되게 괜찮네요? 원정팀 자리인데도요.”
오늘 출전하지 않았던, 그래서 쿨 다운이나 샤워에는 덜 신경 써도 되는 최새벽이 눈을 빛냈다.
실제로 산 시로의 원정 드레싱룸은 지금까지 선덜랜드 선수들이 경험한 모든 경기장 중에서도 상위권에 꼽힐 만큼 훌륭했던 것이다.
바스티아노가 웃었다.
“아마 밀란과 인테르가 함께 사용하는 경기장이라 그런 거 아닐까? 이탈리아엔 그런 경우가 많거든.”
“경기에 따라 인테르가 이 드레싱룸을 쓸 때도 있다는 뜻이군요··· 하긴, 그럼 잘 만들어야겠네요.”
최새벽은 곧바로 납득했지만, 이번엔 주장 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여기가 막상 인테르 드레싱룸이라고 치면 그렇게 훌륭한 느낌은 아닌데.”
“네 눈에는 선덜랜드 엠블럼이 붙어야 훌륭하게 보이잖아··· 사실, 우리 홈 드레싱룸이 워낙 좋기도 하고.”
선덜랜드는 축구계의 모든 구단주들 중 가장 부유하며, 구단 덕질에도 진심인 구단주를 가진 팀이다. 덕분에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벌써 몇 번이나 리모델링을 거쳤고, 홈팀 드레싱룸 설비는 호텔 기준으로 맞춰져 있다.
요니의 핀잔에 바스티아노가 동조했다.
“캡틴, 우리 홈 드레싱룸을 기준으로 하면 좋은 드레싱룸이 별로 없어. 실제로 베로나 시절엔 우리 원정 드레싱룸보다도 나쁜 설비를 썼거든··· 빅클럽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빅클럽이라도 크게 다르진 않을지도? 톰슨 씨가 예전에 그랬거든. 우리 드레싱룸은 스탬포드 브릿지 못지않다고.”
선덜랜드 선수들이 떠드는 사이, 구석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드레싱룸은, 캄 노우에 비해도 손색이 없지. 뭐, 캄 노우도 좋은 곳이지만··· 바르샤 원정 가면 맛집 안내해줄 수도 있어.”
그러자 선덜랜드 선수들의 시선이, 축구의 신이라 불리는 사내에게 쏠렸다.
선덜랜드의 챔스 조별리그 2경기 상대는 바르샤였다. 메시가 아주 오랫동안 몸담았던 팀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단순히 몸담은 기간 이상의 관계이기도 했다.
메시와 함께한 시즌을 제외하면 바르샤가 가진 챔스 우승컵은 딱 한 개밖에 남지 않고, 메시 역시 선수로서의 전성기를 바르샤에서 보냈다.
그런데도 그는 결국 몸에 다른 유니폼을 걸쳤고, 이제 챔스에서 옛 친정팀을 마주하게 된다. 2년 만의 재회, 아무래도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을 상황이다.
그렇다고 ‘괜찮겠냐’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자기 발로 팀을 옮긴 사내에게 그렇게 묻는 것은 실례이기 때문에.
잠시 후, 메시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었다.
“아, 이번엔 우리 홈이 먼저였던가?”
“그렇슴다.”
“그럼, 이번엔 옛 팀메이트에게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투어나 시켜줘야겠군. 원정 지옥 코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