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들기 위해 (3)
선덜랜드 대 바르샤의 챔스 조별리그 2경기는 세간의 관심을 가득 끌어모으는 대진이었다.
티켓은 평소보다 훨씬 빠른 페이스로 매진되었고, 글로벌 스포츠 채널의 중계 편성표에서도 선덜랜드 대 바르샤 경기를 집중 중계하게 되었다.
어쩌면 당연한 조건이다. 축구의 신이라 불리는 사내가, 자신의 전성기를 함께한 친정팀과 맞대결하는 기회는 아주 드물기 때문에.
바르샤의 요즘 폼이나 메시의 나이를 고려하면, 아마도 올 시즌이 마지막 맞대결이 될 거라는 게 사람들의 주된 예상이었다.
세간의 관심이 쏠리면서 선덜랜드 스태프는 일제히 초비상사태가 되었다. 시설관리팀과 CS팀은 비상 대책 회의를 열었고, 신상품개발팀은 아주 철야에 들어갔다.
프레스팀 또한 비상사태였다. 오죽하면 다른 부서 직원들의 도움을 요청했을 정도로.
라인업은 무척 화려했다. 스퀘어관리팀 도로시, 유소년 육성단장 보좌 앨리스, 그리고 구단주 비서 이희주까지.
주위를 둘러보던 프레스팀장 애니가 굳은 얼굴로 속삭였다.
“아벨, 도로시 씨나 앨리스는 그렇다 치고··· 비서님은 누가 불렀지?”
그러자 아벨이 어깨를 으쓱했다.
“본인이 자청했습니다. 적임자라던데요? 장래 희망이 SNS 와치걸이었다고···.”
“비서님 일 잘하는 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구단주 비서가 이 시기에 자리를 비우는 것도 좀···.”
기본적으로, 선덜랜드에는 이럴 때 절대로 차출하지 않는 포지션이 몇 개 존재한다. 예를 들어 1군 감독과 수석코치, 분석팀장, 메디컬팀장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고 놔둔다는 불문율이 있다.
시즌 중에는 경기 준비가 최우선 업무이기 때문이다.
그다음으로 차출하기 곤란한 포지션이 바로 구단주 비서였다. 구단주 본인이 워낙 다양한 업무를 직접 맡아서 하기 때문에, 구단주 비서는 늘 바쁜 편이었다.
정작 이희주 본인은 무척 해맑았지만.
“괜찮아요. 오빠··· 아니 구단주님 스케줄은 걱정 없어요. 좋은 대타를 구했거든요.”
애니가 미소를 지었다.
“아하, 리미트리스 부사장님을 섭외했다는 거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무심코 애니는 살짝 실례되는 발상을 떠올렸다. 만일 리미트리스의 최다미가 지원 온 게 사실이라면, 이희주 대신 최다미의 도움이 훨씬 이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어느새 이희주가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는 중이었다. 애니가 재빨리 표정을 관리하는 사이, 구단주 비서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미 언니는 안 왔지만, 대신 맡겨둘 사람 찾았으니 걱정 마세요. 전문 어덜트시터를 구했거든요. 그럼, 대책 회의를 시작해 볼까요? SNS가 아주 시끄럽던데요.”
이야기하며, 구단주 비서는 미리 준비해온 자료를 척척 늘어놓았다. SNS나 축구 커뮤니티에서 캡쳐한 자료가 한가득이었다.
[축구의 신이 친정팀에 비수를 꽂을 것]부터 [카탈루냐는 배신자에게 당하지 않는다] 거나, [퇴물은 이제 필요 없다]는 여론까지 아주 다채롭다.
곧바로 앨리스가 볼을 부풀렸다.
“너무해요. 메시 선수가 바르샤에 해준 게 얼만데··· 이제 와서 퇴물 취급이라니!”
마침 앨리스는 메시의 이적 직후 마킹 유니폼 한정판을 줄 서서 확보할 정도로 선수에 대한 팬심이 가득했었다.
어쩌면 그녀의 직속 상사가 레알의 레전드 출신이라는 점도, 바르샤라는 클럽에 대해서 다소 편견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걱정 마, 앨리스. 글 올린 기록을 추적해 봤는데, 대부분은 그냥 분탕러야.”
자세히 보니 퇴물 운운하는 글 아래 반론이 잔뜩 달렸다. 싫어요를 누른 프로필 사진엔 바르샤 엠블럼이 가득하다. 진짜 바르샤 팬들이 알아서 정화했을 것이다. 축구의 신은 그들에게도 레전드 중의 레전드이기에.
앨리스의 얼굴이 살짝 누그러지는 찰나, 애니가 선언했다.
“다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어. 여러분을 부른 이유야.”
애니의 손에서 신문이 펄럭였다.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바르샤 회장의 사진이 모두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메시의 이적에 대한, 바르샤 회장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그가 무급으로 뛰어주길 원했습니다.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요.]
“이 레전드는 무료로···? 이거 완전?”
“아니, 근데 이걸 공격이라고 한 건가 싶기도 한데요. 솔직히 자폭 아닌가?”
앨리스의 반응에, 애니가 한숨을 쉬었다.
“자폭이긴 한데, 그래서 더 질이 나쁘지. 아무튼 메시의 이미지도 깎이잖아. 결국 오랫동안 몸담은 클럽보다 돈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느낌이 되니까.”
그러자 스태프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전직 ‘@축잘알’ 아벨과, ‘@이상한_나라의_블랙캣츠’ 앨리스, 그리고 SNS 와치걸 지망생 이희주까지···.
언플이라면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 선덜랜드 스태프들의 눈이 흉흉한 빛을 발했다.
* * *
나는 잠시 눈을 비볐지만, 그래도 비서 자리에 앉은 사람의 모습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리지,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의자가 퍽 마음에 드는지 빙글빙글 돌려 보던 리지가 황급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게, 희주 씨에게 의뢰받은 업무가 있어서요.”
“비서 노릇을 떠맡긴 모양이군요··· 굳이 대타 구할 필요 없다니까.”
하물며 경기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잔디관리인을 굳이 동원해서 대타를 맡길 필요는 절대로 없다. 그러자 리지가 머뭇거렸다.
“그, 그게···.”
리지의 태도가 보기 드물게 수상하다. 그래서 확인했더니, 그녀가 받은 메시지에 ‘임시 어덜트시터로 임명하겠다’는 희주의 헛소리가 남아 있었다··· 뭐? 어덜트시터라고?
나야말로 베이비시터 노릇을 몇 년째 하고 있는 느낌이 드는데 말이지.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나갈까요?”
“네! 어디로 안내하면 될까요, 썬?”
“그야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죠.”
리지는 아무래도 사무실보다는 잔디 위가 훨씬 어울린다. 영국 최고의 잔디관리인을 비서 자리에 앉혀두다니 재능 낭비기도 하고··· 무엇보다 경기가 코앞이잖아?
그러자 리지는 어째서인지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 * *
우리가 도착했을 때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는 가벼운 혼란에 빠져 있었다. 유소년들이 흥분 상태에 빠져든 것이다.
아무래도 소년들에게는 역시 메시가 바르샤와 맞붙는다는 사실이 무척 기대되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때 축구 게임으로만 해보던 드림매치가 마침내 현실에서 벌어지다니···.”
필이 주먹을 불끈 쥐자, 월터가 비웃었다.
“누가 들으면 많이 자라신 줄 알겠어요. 어디 U-15가 어릴 때를 운운해.”
“네··· 님은 지난 시즌까지 그 U-15셨습니다만.”
그 옆에서는 U-15의 새 주장이자 에이스 바르카가, 빽빽하게 세워둔 콘을 4연속 라 크로케타로 통과하는 중이었다.
“엄청 깔끔했지? 나 완전 메시였어! 자랑할 거야! 그런데 우리 인턴 누나는 어디에··· 아얏.”
“보좌관님이라고 부르랬지? 너는 정말 사람 말을 들어먹지 않는구나.”
짐의 한숨 섞인 말처럼, 바르카는 기본적으로 통제가 어려운 편이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산만함에 천재 특유의 자의식이 더해진 탓이다.
훈련 자체는 성실하게 받고, 경기 중에는 항상 U-15의 에이스이자 주장답게 활약하긴 하지만···.
“앨리스가 없을 땐 통제가 어려운 모양이네요.”
앨리스를 프레스팀에 파견 보낸 것은 내 결단이다··· 아무리 언론 대책이 급했다지만, 유스팀에겐 미안한 짓을 했다.
입맛을 다시는 페르난데스의 곁에서, 톰슨이 놀리듯 말했다.
“괜찮아 썬, 우리 단장님이 애보기에는 자신이 있으시거든··· 그렇잖습니까, 단장님? 제가 처음 선덜랜드에 입단했을 때 애보기의 정수를 알려주셨던 기억이 나는데요.”
페르난데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남 일처럼 말하지 말게. 자네도 공동 책임이야. 절반은 자네 업무라고.”
“아뇨, 절반은 제가 아니라 벤자민 감독님 몫이겠죠··· 그나저나, 작년엔 도대체 어떻게 버티셨습니까? 재작년이야 짐이 U-15에 있었다지만요.”
“작년엔 월터와 테오가 U-15였거든.”
“아아, 테오 앞에선 얌전하게 굴겠군요.”
톰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나저나, 이야기를 듣고 보니 테오가 안 보인다.
“단장님, 테오는?”
그러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모니터 앞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아마··· 바르샤가 오기 때문이겠죠.”
선덜랜드 유소년들은 대체로 메시를 동경하지만, 그중에서도 테오는 좀 더 각별한 감정을 보인다.
짐이 페르난데스의 영상을 매일같이 보는 것처럼, 테오 역시 메시의 하이라이트를 숨도 쉬지 않은 채 응시하곤 한다.
“슬슬 오후 연습 시간이니··· 끌어내야겠군요.”
페르난데스의 혼잣말에 톰슨이 재빨리 움직이려고 하길래, 제지했다.
“제가 데려오죠.”
톰슨에게서 원망 섞인 시선이 돌아왔지만, 무시했다. 너는 애들 봐야지.
그리고 예상대로 테오는 분석실에 있었다. 구석에서 모니터 하나를 점거한 채,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스크린에 떠오른 모습은, 페르난데스의 예상대로 메시였다. 그리고 화면 속 축구의 신이 몸에 걸친 유니폼은 우리 선덜랜드의 레드 앤 화이트가 아니었다.
블라우그라나, 바르샤의 색. 그리고 상대편은 로스 블랑코스다. 엘 클라시코, 점수를 보아하니 레알이 호된 꼴을 봤던 경기 같다.
“슬슬 오후 연습 시간인데.”
“구단주님?”
내 존재를 눈치챈 테오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재빨리 영상을 끄려고 했다. 마치 남에게 들키면 안 될 영상을 끄는 것처럼 재빠른 손길에,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걱정 마. 페르난데스 단장님껜 비밀로 해줄게.”
“감사합니다. 기왕이면··· 그, 캡틴에게도 좀.”
테오의 반응으로 보아하니, 아무래도 우리 유소년 주장 짐은 ‘페르난데스가 대량 실점하는 영상’을, 일종의 이적표현물로 취급하는 모양이다.
“그래, 비밀은 지킬게.”
그러자 테오의 얼굴이 펴졌다. 재빨리 자리를 정리하며 따라붙는다. 그리고는, 내게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구단주님.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와 라 마시아 중에 어디가 더 대단한가요?”
라 마시아, 바르샤의 유소년 육성시설의 이름이다.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유소년 아카데미의 이름이기도 하다.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를 세계 최고의 유소년 팜으로 키우겠다는 포부를 품고 있었다. 구단에서도 아낌없는 지원을 보냈기에, 설비와 환경이라면 진작에 라 마시아를 뛰어넘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물에 대해서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짐과 테오, 바르카와 월터, 필로 이어지는 선덜랜드 황금세대는 틀림없이 내 자랑거리지만···.
그때, 저 멀리서 창백해진 얼굴로 이쪽을 흘끔거리는 분석팀 스태프 토마스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테오의 조금 전 발언을 ‘라 마시아로 옮기고 싶다’는 관심 표명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전혀 그런 이야기가 아닌데.
나는 태연한 얼굴로, 부드럽게 웃었다.
“그건 대답하기 아직 이른 것 같은데.”
이렇게만 말하면, 이 영리한 소년은 의미를 알아차릴 것이다. 대답할 수 있는 시기는, 이 아이들이 프로가 된 다음일 것임을.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둘게. 너라면 언젠가 그를 따라잡을 거라고··· 최소한 비슷한 수준까지는 올라갈 거라고 믿어.”
말하면서 테오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자, 소년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부끄러워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흥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잠시 후,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가 가진 최고의 재능이, 훈련장을 향해 달렸다.
* * *
기사를 보고, 축구의 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무급으로 뛰어주길 원했습니다.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요.]
기사의 댓글을 절대로 읽지 말라는 신신당부는 이미 몇 번이나 들었다. 가족에게서, 에이전트에게서, 코치에게서, 그리고 프레스팀 스태프에게서.
덕분에 댓글을 읽지 않았지만 내용이 짐작이 갔다. 돈에 눈이 멀어, 오랜 친정팀을 배신했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비난이 가득할 것이다.
대부분의 프로 선수라면 코웃음 칠 내용이었지만, 축구의 신에게는 의외로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그는, 정말로 바르샤를 사랑했기에.
“사실 돈은 문제가 아니었는데.”
그보다는 보드진의 형편없는 일 처리 능력이, 재계약 직전까지도 팀의 재정 상태를 파악하지 못한 무능함이 훨씬 문제였다는 걸, 정말로 모르는 걸까.
시즌 중에 기념 대회에 참가하겠다는 바르샤 보드진의 의아한 결정 때문에, 무패우승의 찬스를 날렸다. 선덜랜드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그는 선덜랜드로 이적한 직후 두 시즌 만에 무패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공항 지분까지 사들이면서 선수단의 컨디션 관리에 힘써준 구단주의 덕분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프로페셔널한 스태프들의···.
“앗! 아직 댓글 읽으시면 안 되는데!”
새된 소리에 고개를 들자, 구단주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축구의 신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댓글은 정말로 안 읽었습니다··· 그런데 아직이라고요?”
그러자 구단주 비서에게서 환한 미소가 돌아왔다.
“음, 좋아요. 사실 조금 전부턴 읽으셔도 되지만요.”
비록 구단주 비서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멘탈에 영향을 줄 만한 댓글을 팀에서 모조리 ‘처리’ 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대답하기 전,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클럽하우스 로비에서 바로 내다보이는 37번 그라운드에서, 아직 앳된 소년, 테오가 공을 차고 있었다.
테오는 꼭, 어릴 때의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체구도, 공을 마음대로 다루는 발재간도, 가끔은 다른 선수에게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먼저 찾아내는 능력도.
그저 축구가 좋아서, 연습이 끝난 이후에도 공을 차는 모습도, 예전의 자신과 똑같다.
“아주 좋습니다. 조금 달려도 될 정도로요.”
축구의 신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