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들기 위해 (4)
축구의 신이 37번 그라운드에 합류하자, 공을 차던 테오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잠시 후, 선덜랜드 1군과 유소년을 대표하는 천재들이 서로 대화를 시작했다. 단, 목소리 없이, 오직 공으로.
그렇게 한참 동안 공을 주고받은 다음, 테오가 먼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저기, 이거 한국식 인사래요.”
“구단주님한테 배운 거구나.”
“네. 저기··· 혹시.”
한참 머뭇거리는 테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축구의 신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냥 몸이 움직이는 대로 하면 돼. 연습은 그러려고 하는 거야.”
“가,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친 테오가 몸을 돌려, 유소년 기숙사 쪽으로 뽀르르 달려갔다.
테오의 작은 등은 나이치고도 왜소했고, 돌아가는 발걸음 또한 조금 어색해 보였다. 조금 전까지 세련된 몸짓을 과시하던 천재 축구소년의 모습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축구공을 떼어놓고, 사이드라인을 넘어가면··· 축구 천재는 그저 보통 사람에 불과하다.
“이럴 때 보면 참 평범해 보이는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축구의 신이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그러자 흐뭇한 미소를 지은 육성단장 페르난데스와 마주했다.
“어떻게··· 알고 나오셨습니까? 37번 그라운드는 로비에서는 보여도, 단장실 창가에선 안 보일 텐데요.”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37번 그라운드는 유소년들의 성지나 다름없었다.
선덜랜드는 오버 트레이닝을 엄격하게 금지하지만, 그래도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훈련 시간 이외에도 공을 차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다. 37번 그라운드는 그런 아이들을 위한 잔디관리인 리지의 역작이었다.
여담으로 아이들은, 자신들의 연습장이 단장실에서는 안 보여도 메디컬 팀 숙직실에서는 훤히 보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 또한 리지의 세심한 설계다.
정작 페르난데스의 반응은 담담했다.
“공 차는 소리가 나더라고.”
“귀가 밝으시군요.”
“골키퍼니까.”
페널티킥이 골라인을 넘는 시간은 약 0.5초에 해당한다. 시각에만 의지하면 아무래도 반응이 늦어지기 때문에, 우수한 골키퍼는 예외 없이 귀가 좋은 편이다.
페르난데스가 빙긋 웃었다.
“꼭 캐치볼 같더군.”
페르난데스의 표현처럼, 확실히 캐치볼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압도적인 테크니션 두 사람이, 아무런 발재간도 부리지 않은 채 그저 담담하게 공을 주고받기만 했기 때문에.
“캐치볼이요?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미국에서는 부자지간에 그런 걸 하는 경우가 많다던데.”
페르난데스의 이야기를 메시가 슬쩍 농담으로 받아쳤다.
“제 아들은 따로 있어요.”
“알아. 너만 아들 있는 거 아니잖아.”
“그렇네요.”
“테오는 터치가 널 닮았더군.”
“팔로스루도요. 아마 제 영상을 세심하게 살펴본 거겠죠.”
“그거 말고도, 다른 플레이도 전부 닮았으면 좋겠어.”
“그런가요?”
슬쩍 얼버무리는 메시를 향해, 페르난데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시치미 떼지 마. 너도 그래서 우리에게 온 거잖아.”
“하긴, 애초에 상담을 했었죠. 구단을 옮겨오기 전에··· 단장님은 참 우수한 상담사라고 생각합니다.”
“훗, 그러고보니 구단주 비서님이 재미있는 표현을 쓰시더군. 어덜트시터라던가.”
“저는 베이비시터고요.”
한때 라 리가를 주름잡던 두 클럽의 레전드가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그래서 테오가 저를 닮았으면 좋겠다고요?”
“뭐, 육성단장으로서는 당연한 욕심이지.”
“사실 선수로서도 욕심이 나긴 합니다. 저를 닮은 선수를 남긴다면··· 전성기의 운동능력을 가진 제가 뛰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분명 대단하겠지.”
“사실 그 아이에게 가장 알려주고 싶은 건 따로 있었지만··· 이 팀에서는 쓸모없는 지식 같네요.”
“보드진 잘 고르는 법 말이지? 우리 팀에선 필요 없어. 차라리 자동차 고르는 법이 인생에 훨씬 도움이 될 거야.”
그러자 메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필요 없어요. 자동차도 구단에서 주잖아요.”
* * *
“갑부 오라버님, SNS 대응 업무를 종료하고 구단주 비서로 복귀하고자 합니다.”
구단주실에 복귀하며, 희주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경례까지 했다. 이럴 때의 희주는, 최소한 자기 딴에는 꽤 일 처리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도 흡족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을 맞췄다.
“보고해보도록.”
“네, 우선 메시 퇴물설 말인데요. 당연히 바르샤 팬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타 팀 팬의 분탕질 시도로 간주해, 과거 댓글 이력을 확인해서···.”
확인해서 고소미라도 먹였나? 하지만 서양은 명예훼손 고소가 불가능한 것 같았는데··· 의아해하는 사이, 희주가 씩씩하게 덧붙였다.
“어느 팀 팬인지를 확인해서, 댓글로 ‘그 퇴물한테 발린’ 스페셜 영상을 남겨 줬지!”
무심코 웃고 말았다. 슬쩍 보니 같이 도착한 조엘과 린다도 웃음을 참느라 고역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
“유일하게 보로 팬들만··· 메시에게 당한 기록이 없더라고.”
“그건 좀 아쉽네.”
“대신 걔들한테는 댓글로 챔스 출전기록을 달아 줬어. ‘강해져서 돌아와라’라고 멘트 남겼고.”
선덜랜드 구단주가 미들즈브러 팬을 동정할 정도의 매서운 공세, 이쯤되면 사탄도 실직할 기세다.
“너어는 정말···.”
“참고로 앨리스 양 작품입니다.”
음, 예전부터 앨리스가 SNS에 대응 업무에 소질이 있을 줄 알았다. 그녀는 만능형 인재니까.
“무급 드립은?”
희주가 씩 웃는다.
“바르샤 회장 월급을 확인해서 댓글로 남겨 줬어!”
“잘했네.”
희주의 시원시원한 대답을 들은 조엘과 린다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돌아왔다.
“감히 우리 선수를 도발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습니다. 구단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원정 드레싱룸에 ‘마술’을 좀 부려볼까 하는데요.”
조엘의 단호한 목소리에, 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술이요?”
조엘이 설명하기 전에 내가 먼저 대답했다.
“그런 거 있어. 신기하게 원정팀 드레싱룸에만 온수가 안 나오거나, 보일러가 고장 나서 시끄럽거나 뭐 그런.”
조엘이 흐뭇한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자매품으로, 그라운드의 스프링클러 컨트롤러는 하필이면 언제나 원정팀 사이드만 망가지죠.”
“아하. 이해했어요··· 아주 좋은 생각 같은데요?”
마주 미소 짓는 희주와 조엘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마술은 필요 없습니다. 원정 드레싱룸부터 원정팀 관객 응대까지, 전부 프리시즌 컵에 준해서 대응하세요.”
그러자 조엘이 눈을 깜빡거렸다.
“구단주님··· 그건 최상급 대우인데요?”
“네. 그렇게 해주라는 겁니다.”
우리와 바르샤의 사이는 썩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쪽 회장이 시도한 서툰 여론전만 제외한다면.
굳이 척을 질 필요는 없다. 하물며 캄 노우 원정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리고 무엇보다, 모처럼 영입한 축구의 신이 오래 몸담은 옛 친정팀과 으르렁거린다는 느낌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선수 보호를 위해서는, 상대 팀과 원만하게 지내는 게 훨씬 낫기 때문에.
다만··· 너무 저자세로 나간다는 느낌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자칫하면 우리 팬들, 특히 로컬 팬들이 불쾌할 테니.
“그 대신, 포스터나 플래카드는 확실히 걸어 두세요. 선덜랜드의 선수가 바르샤를 상대하는 겁니다. 바르샤의 레전드가 옛 동료를 상대하는 게 아니라요. 무슨 의미인지 알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조엘과 린다의 눈이 빛났다.
* * *
[챔피언스리그 조별 2경기, 선덜랜드 대 바르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경기 전부터 뜨거웠다.
‘메시 더비’라는 최고의 흥행 카드 덕분이었다.
경기 며칠 전부터 도시 전체에 포스터가 붙었고, 전날부터는 메시의 대형 유니폼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외벽에 내걸렸다.
경기장에 향하던 우드 부부, 그리고 브라더스가 포스터를 보고 박장대소했다.
“이야, 이거 걸작인데! 자네 영상 컨셉 그대로지?”
블라우그라나, 바르샤를 상징하는 붉고 파란 줄무늬 패턴을 흰색 페인트 롤러로 덧칠하는 사진이었다.
예전, 선덜랜드 챌린지 때 브렌든도 비슷한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다. 그때는 뉴캐슬의 검은 색 위에 붉은 페인트 롤러를 문지르는 영상을 찍었다.
덕분에 조르디의 공적으로 등극한 브렌든이 입맛을 다셨다.
“세게 나왔네. 우리 팀은 원래 이런 도발성 퍼포먼스 잘 안 하잖아?”
뉴캐슬과 미들즈브러 상대로는 세상 누구보다 강경하지만, 그 외의 모든 팀들 상대로는 아주 점잖게 대응하기로 유명한 선덜랜드로서는 꽤 수위 높은 공격이었다.
“바르샤 회장 인터뷰에 대한 항의 표시겠지.”
“그러면··· 경기에서는 얼마나 빡세게 나오려나요? 메시가 아주 칼을 갈고 있겠죠?”
정작 메시는, 그날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의외의 라인업에 경기를 지켜보던 우드 부부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바르샤를 깜짝 놀라게 해주려는 묘수인 걸까요? 오늘 경기에서 메시를 내보내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하진 못했을 거 아니에요?”
“허를 찔린 것치고 바르샤 벤치가 평온한데···”
부부가 살짝 고민하는 사이, 아동용 시트에서 크리스가 힘차게 바둥거렸다.
“후반! 후우바안!”
마일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 말대로, 아마 후반에 교체 투입되겠지. 아예 안 뛰진 않을 거야.”
“에이··· 메시를 교체 카드로 쓴다고요?”
못 믿겠다는 수잔의 반응에, 마일즈가 진지하게 답했다.
“예전에 본인 인터뷰를 들었어. 만일 풀타임으로 뛰지 못한다면 자기는 차라리 교체로 들어오는 걸 선호한다던데? 스타팅에는 별다른 집착이 없고, 끝까지 뛰지 못하고 중간에 물러나는 게 더 싫다더군.”
아마 실리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경기 중반을 넘어선 시점에 들어오면, 아무래도 수비가 조금쯤은 지치기 마련이다.
찬스를 만들기도 훨씬 용이할 것이다.
그렇게 메시 없이 시작한 메시 더비에서, 선덜랜드와 바르샤는 시작부터 서로 한 골씩 주고받으며 치열하게 치고받았다.
[선덜랜드 1 - 1 바르샤]
그리고 후반, 마침내 축구의 신이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나이얼 스탠드에 모여든 선덜랜드 유소년이 손에 땀을 쥐며 경기를 바라보았다. 테오 또한 숨 쉬는 것도 잊었다는 것처럼 집중한 상태였다.
‘일부러 전반은 버린 거야··· 그만큼 후반에 폭발력을 보여주려고!’
테오의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축구의 신이라 불리던 사내, 메시의 플레이는 분석실 영상에서의 모습보다 분명히 느렸다. 밀집 수비 사이로 주저 없이 돌격하던 대담함도, 영원처럼 이어지던 연속 라 크로케타도 이젠 없다.
오히려 드리블러로서의 날카로움, 온 더 볼의 예리함은 왼쪽 측면의 마르틴이 보여주고 있었다.
메시가 오기 전부터 10번을 차지한 사내,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에이스 드리블러 마르틴은 이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는 중이었고, 반대로 축구의 신은 전성기가 끝나 내려오는 중이었기에.
하지만, 메시가 모든 부분에서 느려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영상 속의 모습보다 훨씬 더 빨라진 부분도 있었다. 예컨대···.
‘출발이 빨라.’
흔히 축구 도사들의 플레이처럼, 마치 경기의 흐름을 미리 안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늘 공보다, 그리고 상대 선수보다 먼저 움직였다.
왼쪽 측면에서 마르틴이 수비를 잔뜩 끌어들인 순간, 반대편의 메시가 가속했다. 곧바로 공이 오른쪽 측면으로 날았고, 메시의 발아래에 달라붙듯 멈췄다.
이윽고 축구의 신이 돌격했다. 이제 영상으로만 남아 있는 전성기의 모습보다 훨씬 느린 발놀림, 더 이상 날카롭지도 않은 움직임으로.
하지만, 메시의 몸짓마다 수비는 한 명씩, 한 명씩 차례로 떨어졌다.
“또 멈췄어!”
체인지 오브 페이스, 순간적으로 멈췄다가 다시 가속하는 단순한 움직임만으로 달려오던 수비는 제풀에 멀어진다. 그리고, 수비가 옆에서 어깨를 들이밀 때면 절묘한 몸놀림으로 흘려 버렸다.
마치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총알 같은 스피드를 잃어버리게 되면, 완급으로 수비를 따돌리면 된다고. 거친 몸싸움을 버텨낼 파워가 남아 있지 않다면,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라고.
[그냥 몸이 움직이는 대로 하면 돼. 연습은 그러려고 하는 거야.]
어제 들은 이야기를 테오가 곱씹는 사이, 어느새 바르샤 수비 셋을 벗겨낸 메시는 페널티 박스에 진입하려는 중이었다. 옆에서 바르카가 속삭였다.
“알려주는 것 같아. 축구는 발이 빠른 사람이 이기는 종목도, 힘이 센 사람이 이기는 종목도 아니라고. 그저, 공을 가장 잘 차는 사람이 이기는 스포츠라고."
테오가 살짝 웃었다.
“아니. 그렇진 않아. 축구는 상대보다 점수를 더 많이 내는 쪽이 이기는 종목이야··· 그렇게 말씀하실 거야.”
테오의 이야기가 끝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나이얼 스탠드가 격하게 흔들렸다. 바르샤의 골네트에서 시작된 진동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선덜랜드 2 - 1 바르샤]
* * *
득점에 성공한 축구의 신은, 곧바로 세레머니를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잠시, 아주 잠시 원정 스탠드를 응시했다.
여전히 그에게 가장 익숙할, 하지만 이제는 그가 입지 않는 블라우그라나 유니폼을 걸친 바르샤 팬들을.
잠시 후 축구의 신이 허공을 향해 양손의 검지를 치켜세웠다. 돌아가신 할머니께 득점을 바친다는, 메시 특유의 세레머니다.
순간, 원정 팬들이 조용해졌다.
야유 같은 것은 조금도 들리지 않았고, 침묵은 딱 한 박자가 지난 다음 갈채로 바뀌었다.
문득 테오는, 눈앞의 풍경이 영상 속의 모습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메시의 세레머니도, 레전드에게 쏟아지는 바르샤 팬들의 박수도.
몸에 걸친 유니폼 이외에는, 유니폼 말고는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테오는 알고 있었다. 이제 세레머니가 끝나고 하프라인을 넘으면, 저들은 다시 싸울 것임을. 메시는 다시 선덜랜드 선수로서 바르샤의 골네트를 몇 번이고 두드릴 것이고, 바르샤 팬들은 선덜랜드의 7번이 공을 잡을 때마다 야유할 것이다.
테오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꼭 선덜랜드에서 은퇴하고 싶어. 다른 유니폼은 입고 싶지 않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데뷔부터 하고 은퇴 고민하라며 핀잔을 줄 월터도, 까불거릴 바르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경기장을 응시했다.
그날, 축구의 신은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현 소속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선덜랜드 4 - 3 바르샤]
그 모습을, 선덜랜드 유소년들이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