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378화 (378/422)

Heart to heart (3)

“오늘 다들 분위기가 좋은데? 무슨 일 있나?”

잭이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선덜랜드 일레븐의 사기는 드높았다. 평소보다도 훨씬 더. 이쯤 되면 감독이 드레싱룸에서 눈물의 명연설을 했거나, 원정 버스에 엄청 감동적인 영상이 흘렀을 때나 가능할 텐션이다.

다만, 만일 실제로 그런 이벤트가 있었다면 주장이 모를 리는 없다. 따라서 잭으로서는 동료들의 높은 텐션의 원인이 조금도 짐작 가지 않았다.

요니가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보아하니 몰래 꿍꿍이를 꾸미는 모양이더라고. 주장단에겐 비밀로.”

“해리슨?”

“해리슨.”

정보원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밝혀버린 요니가 재빨리 덧붙였다. 아무튼, 지금은 경기 중이라 잡담을 길게 할 여유가 없다.

“이렇게 된 거, 슬슬 고백해야 하는 거 아니야?”

“쓸데없는 소리.”

쓴웃음을 지으며, 잭은 하프라인 맞은편에서 기다리는 리버풀의 주장 헨도를 응시했다. 오늘 그들이 넘어야 할 상대는, 엄연히 노장 축에 들어가는 지금도 변함없는 강력함을 과시했다.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옛 10번이 우릴 기다리고 계시니까.”

이야기하면서, 잭은 시선을 돌려 사이드라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터치아웃된 공을 넘겨받아, 유니폼 앞섬을 당겨 물기를 닦는 스티븐의 모습이 보였다.

덩치 좋은 풀백 출신 라이트윙, 스티븐은 롱 스로인 능력이 탁월한 편이었다. 그리고 선덜랜드 못지않게 스로인을 중시하기로 유명한 리버풀은, 오늘은 최대한 안필드의 광고판을 앞으로 바짝 당겨서 대응하는 중이다.

도움닫기를 방해하려는 것이지만, 스티븐 정도면 어지간한 선수보다 훨씬 멀리 던질 수 있다. 시선을 교환한 잭과 요니가 동시에 흩어졌다.

다음 순간 공이 포환처럼 날아들었다.

잭은 쾌재를 부르며 리버풀 진영에 파고들어 공을 받아낼 준비를 했다.

그때, 마치 등이 벽에 닿은 것처럼 순간적으로 움직임이 멈췄다.

“미안하지만, 이쪽은 통행금지인데.”

잭의 등 뒤에서, 리버풀 주장의 목소리가 평온하게 울렸다. 동시에, 상당한 압력이 전해졌다. 잭은 어금니에 힘을 넣으며 버텨내려 애썼다.

“죄송하지만, 이쪽은 미끼임다."

등 뒤에서 울리는 헨도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담담했다.

“알고 있어. 선덜랜드의 돌파 상황에서는 대부분 네 친구가 정답이라는 것 정도는··· 그래도 오늘은 널 묶어놓는 게 내 일이야. 네가 날뛰면 선덜랜드의 기세가 오른다는 건 축구계의 정설이거든.”

* * *

[주장 대 주장!? 이건 못 참지. 이거야말로 진정한 정상대결 아닌가요?]

왼손에 든 스마트폰으로는 황급히 자기 삼촌에게 메시지를 보내면서, ‘@선덜랜드_명예시민’ 미정의 눈은 진지하게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중간중간 경기 영상을 움짤로 따서 커뮤니티에 올리는 중이었다.

발단은 한국 축덕들을 더욱 가열차게 영업하면 좋겠다는 구단주의 니즈였다.

고민하던 미정이 경기 움짤 아이디어를 꺼내자 이틀도 안 되어 최신형 노트북과 선덜랜드 중계 채널 구독권, 그리고 저작권 관련 협의까지 끝냈으니 마음껏 올려도 된다는 메일이 도착한 것이다.

잠시 후, 그녀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그녀의 삼촌이자 30년간 리버풀 팬으로 살아온 ‘@이스탄불_이전부터’ 의 답장이었다.

[무슨 소리야, 오늘 중계 안 나오잖아.]

예상대로의 답변에, 미정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천연덕스럽게 회신했다.

[EFL컵은 중계 안 나와요?]

[토트넘에 밀렸잖아. 그래서 문자중계만 보는 중이었는데··· 혹시 너희 집 영상 나와?]

[네. 영어긴 한데 저는 원래 영어 중계가 편해서요.]

[ㅇㅋ지금감]

얼마나 바빴는지, 평소의 삼촌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초성 섞인 답장이 날아왔다. 미정은 히죽 웃으며 빠르게 손을 놀렸다.

[오실 때 치킨도 부탁해요. 반반무마니로.]

원래 축구에 치킨은 못 참는다. 그런데 미정은 하필, 경기 전 치킨 주문을 깜빡했다. 오늘 토트넘 경기가 있다고 하니, 지금 시키면 아무리 빨라도 한 시간은 걸릴 것이다.

따라서 삼촌배송 서비스가 훨씬 유용하다. 마침 삼촌과는 가까이 살고, 중간에 치킨집도 세 개쯤 있으니까.

진짜 용건을 마친 미정은, 태연하게 시선을 다시 모니터에 돌렸다. 경기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팽팽했다. 아무래도 리버풀의 홈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신흥 원정 지옥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원래 안필드는 전통적으로 원정팀의 무덤으로 악명 높은 곳이다··· 중계 화면 너머로도 리버풀 팬들의 고함 소리가 울릴 정도로.

‘그리고 머지않아 콥 한 명이 거실에 추가되겠지.’

그래도 오늘 선덜랜드 선수들의 움직임도 무척 굉장했다. 그 중심에는 팀이 자랑하는 유스 출신 주장단 듀오, 잭과 요니가 있었다.

오늘 잭은 아주 노골적일 정도로 미끼 노릇을 수행했다. 그리고 리버풀은 잭을 무시하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잭은 축구계에서 이름난 클러치 플레이어다.

그래서 선덜랜드의 주장은, 리버풀 주장의 전담마크를 몸으로 받아냈다. 자신보다 훨씬 덩치 좋은 헨도에게 마크당하며, 경합 상황마다 나동그라지지 않게 고생해야 했다.

그리고 잭의 그런 헌신은 보답받았다. 잭이 헨도에게 묶여 있는 동안 - 그리고 마크당함으로써 헨도를 묶어놓는 동안, 요니가 마음껏 리버풀 수비라인을 헤집고 다닌 것이다.

후반 50분, 리버풀의 박스 안에서 요니가 밀려 그라운드를 나뒹굴고 말았다. 당연하게도 판정은 페널티 킥이었다.

심판의 선언과, 치킨 두 마리를 사들고 온 삼촌의 도착은 거의 동시였다.

* * *

페널티 킥이 선언된 순간, 안필드는 야유에 뒤덮였고, 리버풀 선수들은 주심을 둘러싸고 격렬한 항의를 퍼붓기 시작했다.

곧바로 우리 선수들이 언쟁에 끼어들며, 경기장이 과열되었다. 특히 박스 안에서 밀려 넘어진 요니의 반발이 상당했다.

그 격렬한 언쟁에서, 단 두 명만이 벗어난 상태였다. 이제 페널티 킥을 막아야 할 리버풀 골키퍼와, 우리 전담 키커 잭이다.

그들은 주위의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골라인과 페널티 스폿에서 차분하게 서로를 응시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사이, 소란을 견디다 못한 주심이 귀에 손을 가져다 대며 VAR 판독을 알렸다. 그러자 양 팀 선수들의 항의는 조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홈 팬들의 야유는 멈출 줄 몰랐다.

희주가 울상을 지었다.

“설마, 이러다 판정 뒤집히는 거 아니겠지?”

“걱정 마. 항의한다고 판정이 번복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

“그치만 VAR은? 오빠, 여기 리버풀 홈이야.”

“상관없어. 홈 어드밴티지 같은 걸 적용할 것 같았으면, 애초에 PK를 불지도 않았겠지.”

희주는 판정이 못내 불안했던 모양이지만, 오히려 내 걱정은 따로 있었다.

미친 듯이 야유를 퍼붓는 리버풀 팬들의 악의를, 미친 듯한 야유를 홀로 받아내고 있는 우리 주장의 멘탈이, 나로서는 훨씬 더 신경 쓰였다.

내 심각한 표정을 눈치챈 희주가 조심스럽게, 하지만 명랑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에이, 우리 주장에게 겨우 야유가 통할 거라고 생각해? 잭이 얼마나 강심장인데. 그렇잖아? 실축하지 않기로 유명하잖아!”

“··· 그렇지.”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나는 마냥 잭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실축하지 않는 선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역사상 최고의 페널티 키커 자리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선수들도, 최소한 한 번쯤은 실축을 경험했다. 97%의 성공률을 자랑하는 그 팀의 레전드는 물론, 소튼의 르티시에조차 실축한 적이 있다.

그러니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실축하지 않는 주장 또한 언젠가는 실축하는 날이 올 것이다.

어쩌면 그날이 지금일지도 모른다. 잭이 지금 마주한 스피언 콥 스탠드는 뉴캐슬의 레벨 7이나 우리의 나이얼 스탠드 이상으로 악명 높은 장소다. 그곳에서 퍼부어지는 미친 듯한 야유와 욕설은 선수의 멘탈을 흔들기 딱 좋다.

VAR 판독이 진행되는 그 찰나의 시간에도, 어마어마한 악의가 우리 주장에게 쏟아졌다.

잭의 표정은 담담했다.

조금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오히려 태연하게 팔을 위아래로 휘적거린다. 우리 팬들에게 함성을 요구하는 잭 특유의 제스처였다.

하지만 오늘은 원정이라 역효과가 났다. 어디 한번 야유해볼 테면 해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리버풀 팬들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야유가 쏟아졌다.

마치, 지옥에서 울리는 소리 같다. 콥들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잠시 후, 심판이 판정에 번복 없음을 선언했다. 평온한 얼굴로 도움닫기를 시작한 잭을, 나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제발.”

옆에서 희주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볼 수는 없었다. 눈을 떼기 힘든 장면이었기에.

우리 주장의 자신감 있는 도움닫기도, 평온한 얼굴도··· 마침내 숫자가 드러나기 시작한 이마도.

전부 잊지 못할 풍경이었다.

* * *

움짤 작업용 노트북을 무릎에 안은 채 거실로 이동한 미정의 곁에는, 그녀의 삼촌 ‘@이스탄불_이전부터’ 의 모습이 보였다.

“제발, 제발, 제발···!”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는, 그래서 꽤 사이좋은 삼촌과 조카는 나란히 손에 땀을 쥐며 거실 TV를 응시했다.

물론 바라는 바는 두 사람 모두 달랐다. 선덜랜드를 응원하는 미정은 당연하게도 잭의 득점을, 반대로 리버풀을 응원하는 삼촌은 실축을 기원했다.

잠시 후 삼촌과 조카의 희비가 엇갈렸다.

“고오올! 고올! 골이에요! 골!”

“제기랄! 이럴 줄 알았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스탄불_이전부터’가 맥주를 전투적으로 털어 넣었고, 미정은 치킨을 기쁘게 뜯었다.

[리버풀 0 - 1 선덜랜드]

* * *

잭의 페널티 킥이 그대로 결승골이 되었다.

안필드 홈팬들을 등에 업은 리버풀의 반격은 매서웠지만, 선덜랜드 역시 육탄 방어를 불사하며 끝까지 1점 차의 승리를 지켜낸 것이다.

마침내 휘슬이 세 번 울린 순간, 선덜랜드의 주장은 깊은 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머지사이드의 하늘은 흐렸다.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쏟아낼 것처럼.

“괜찮으면 유니폼을 바꿔줄 수 있을까? 물론 네 유니폼은 아주, 아주 귀하다는 걸 알지만.”

돌아보자, 어느새 자신의 유니폼을 벗어 든 헨도가 다가와 있었다. 잭은 잠시 망설인 다음 대답했다.

“제가 아니라 마르틴과 바꾸셔야 하는 거 아님까? 예전에 10번이셨다고 들었슴다.”

“그래서 네 걸 원하는 건데. 선덜랜드의 10번 유니폼은 이미 집에 있거든.”

헨도의 얼굴은 무척이나 차분했지만, 한편으로는 진지함이 묻어났다.

때로는, 시선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할 때가 있다. 그래서 잭은 눈앞의 사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유니폼 그 자체보다는, 유니폼을 바꾸는 행위임을 알아차렸다.

선덜랜드의 18번은, 리버풀 주장이 유니폼 교환을 원할 정도의 선수라는 메시지가 된다. 품위 있는 패배 선언이자, 아직도 가끔씩 ‘헨도의 선덜랜드 복귀’를 운운하는 찌라시 언론에게 보내는 대답이기도 하다.

“알겠슴다. 드리겠슴다.”

서로 유니폼을 바꿔 든 다음, 리버풀의 주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꼭 우승해.”

“물론임다. 오늘 EFL컵의 왕을 꺾었으니까, 당연히 우승할 검다.”

그러자 헨도가 쓴웃음을 지었다.

“EFL컵의 왕은 맨시티 이야기겠지.”

“물론 맨시티도 꺾을 검다. 직접 상대해본 경험상 EFL컵에선 항상 리버풀이 더 빡셌슴다. 이번에 저희가 대신 증명해 드리겠슴다.”

“고맙다.”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헨도는 잭의 유니폼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리고 곧바로 인상을 썼다.

잭이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죄송함다. 체질상 땀을 많이 흘리는 편임다. 냄새가 너무 심하면 그냥 돌려주셔도 됨다.”

“그게 아니라··· 생각보다 유니폼이 작아서 놀랐어. 나중에 내가 입어보지는 못하겠다.”

“지금 저 작다고 까는 검까? 헨도 선수가 미드필더치고 너무 큰 검다.”

툴툴거리는 잭을 향해, 헨도가 표정을 고쳐 보였다.

“미안, 칭찬이었어. 실제보다 훨씬 더 커 보인다는 뜻이니까··· 내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잭은 살짝 눈인사로 감사를 표한 다음 몸을 돌렸다.

그의 뺨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자, 눈이 바람에 춤추며 내려오고 있었다. 그렇다고 폭설은 아니었고, 진눈깨비도 아니었다.

겨울을 포근하게 해 주는 솜털 같은 눈발. 아무래도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모양이다.

기다리던 동료들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캡틴,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는 고백을 위한 최고의 순간이라고 들었는데. 사실 데이터도 있어. 우리 분석팀에게 들은 거니까 확실해.”

히죽거리는 에디를 향해, 잭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정말로 분석팀이 그런 데이터 뽑고 있었으면, 수석코치님이 퍽이나 놔뒀겠다.”

“눈치가 빠른 건 좋은데, 그런 건 여심 파악에나 쓰는 게 어때? 에이미 씨 마음을 모르진 않을 거고, 대회에서 이기고 고백하는 건 마침 우리 팀 국룰이잖아?”

에디를 바라보던 잭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럼 고백할까.”

“오! 드디어 결심했군. 잘 생각했어. 사실은 우승 트로피를 들고 나서 고백하는 게 최고지만,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는 못 참지. 빨리 가, 캡틴!”

등이라도 떠밀 듯한 기세로 난리 치기 시작한 에디와, 돌아가면 당장 파티라도 벌일 듯한 다른 동료들을, 잭은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씩씩한 걸음으로 드레싱룸에 향하며 말했다.

“실은 에이미 씨와 이미 연애 중이야. 트레블 해내고 나면 결혼할 거고··· 이상 고백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