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rt to heart (4)
“아니, 왜들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데?”
잭의 하소연이 안필드의 원정 드레싱룸에 공허하게 울렸다. 이윽고 에디의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면 이런 일을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는데, 반응 안 하게 생겼어?”
드레싱룸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종료 직후 터져 나온 주장의 폭탄 발언 때문이었다.
“언제부터? 그보다··· 왜 우린 아무도 몰랐었지?”
에디를 주축으로, 선수단의 매서운 추궁이 이어졌다. 그동안 농담처럼 거론되던 3주장의 쿠데타 시도가 거의 성공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평소 선수단을 완벽하게 통솔해온 주장, 무서운 게 없다는 강심장 잭은, 오늘은 굉장히 쩔쩔매며 난처해하는 중이었다.
“그게··· 모르는 게 당연하지. 사생활이잖아? 프라이버시고. 그보다 다들 괜히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고 다음 경기에만 집중하자. 곧 박싱데이잖아? 그렇지?”
얼버무리려는 잭에게, 드레싱룸 구석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다음 경기에 집중하려면 네가 빨리 털어놓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주장.”
감독 브라이언마저 가세하자, 수세에 몰린 잭은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알겠슴다. 다 말씀드림다. 저는 주장이고 그쪽은 CS팀 부팀장 아님까? 지위가 있다 보니 거창하게 고백하고 뭐하고 하느니 그냥 조용히,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는 느낌으로···.”
“느낌으로?”
에디의 추궁에, 잭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짐과 클라라를 참고한 거야. 걔들도 뭐 따로 고백 이벤트 같은 거 안 하고도 잘만 사귀잖아.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아직 한 달도 안 지났어.”
“즉, 같은 1군 선수인 우리한텐 비밀로 해 놓고 유소년한테는 이야기를 했다···?”
“정확히 말하면, 사실 딱히 비밀로 했던 건 아닌데.”
“응, 알아. 보아하니 요나스 저 배신자는 그동안 빤히 알면서도 입 다물고 있었네.”
“에이미 부팀장님··· 아니, 에이미가 그러더라고. 나하고 요니 사이면, 반드시 내 입으로 말해 줘야 한다고. 혹시라도 남의 귀로 전해 듣게 하면 최악이라고.”
그리고 요니가 재빨리 수습을 시도했다.
“그래서 나로서는 부득이하게 너희에게도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혹시라도 남의 귀로 전해 듣게 하면 최악이라고 하길래··· 잭에게 직접 들어야지.”
주장단의 변명을 들은 에디가 준엄하게 선언했다.
“이놈들을 멍석말이 형에 처한다.”
선덜랜드 선수단이 우르르 몰려들었고, 멍석말이를 각오한 잭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잠시 후, 그의 몸은 두들겨맞는 대신, 허공에 떠올랐다.
“며칠 늦었지만, 진짜로 빌어먹게 축하한다 캡틴!”
동료들이 잭을 헹가래 치는 동안, 에디가 히죽거리며 지시를 내렸다.
“깨끗하게 씻긴 다음, 정장으로 잘 포장해서 시티 오브 선덜랜드로 데려가자. 부팀장님께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게.”
“아이 아이 캡틴!”
“클럽 캡틴은 난데···.”
잭의 가벼운 항의는 당연하게도 통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최새벽과 해리슨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팀장님 크리스마스 선물 완전 총알배송으로 받으시겠네. 이 시간에 주문하면 한국에서도 당일배송 안 되는데.”
“그보다 에디 3주장님 괜찮으시려나. 이렇게 되면 3주장님은 자기도 솔로면서 괜히 커플 연애 걱정을 해준 셈이 되잖아?”
“쉿. 지금 그런 소리 잘못하면 우리 주장님이 머지사이드 눈밭에 파묻힐지도 몰라.”
* * *
거의 같은 시각, CS팀도 난리가 났다. 안필드에서 원정에 따라간 스태프들이 곧바로 단톡방에 메시지를 올린 탓이다.
“언제부터였나요?”
“옆에서 떠밀지 않으면 안 사귀실 분위기 아니었나요?”
“맞아요! 그리고 왜 비밀로 한 건가요?”
CS팀의 질문 공세는, 사실 안필드의 드레싱룸보다 훨씬 강렬했다. 이전부터 자기네 부팀장의 연애사에 관심이 많았던 CS팀 직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다만 에이미는 잭과 달리 쩔쩔매지는 않았다.
“알려지면 여러분이 이렇게 난리 칠 게 뻔하니까 비밀로 했던 건데··· 일 안 할 거야?”
“흠흠, 그나저나 예상보다 훨씬 급진전인데요··· 역시 지난번에 팬 문병을 같이 가신 게 결정적이었나요?”
“응. 서로 어렴풋하게 알던 감정을 그날 확신했지. 서로를 이해해 줄 유일한 상대라고 생각했어. 요니 선수가 중간에 많이 나서 주기도 했고. 우리는 서로가 아니면 독신으로 늙어 죽을 텐데 너무 아깝지 않냐고.”
“어··· 그건 연애 중이라기보다는 동맹 중인 관계 아닌가요? 아무튼 이제 크리스마스인데 데이트 안 하세요?”
“데이트는 무슨. 캡틴은 오늘 쿨다운해야 하고, 내일은 ‘그 팀’ 경기 준비해야지. 그리고 우리는 크리스마스랑 박싱데이 이벤트 챙겨야 하는데, 데이트 같은 거 할 시간이 있나?”
“뭐예요. 로맨스 1도 없어!”
“네,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이나 하러 가세요.”
실제로 잭도 에이미도 로맨틱함과는 살짝 거리가 있는 인물들이긴 하다. 그래도 남녀관계에 정말로 로맨스 성분이 1그램도 없었을 리는 없으니, 에이미로서는 그저 동네방네 떠들기 싫었을 뿐이었다.
“그보다 요니 선수는 자기 걱정부터 해야 하지 않나?”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에이미는 무심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말았다. 다음 순간, 아차 싶어 표정을 관리했지만 이미 조금 늦었다. 그녀의 동료들, 선덜랜드 CS팀은 아무튼 사람의 표정에는 민감하다.
“요니 선수에게도 이미 상대가 있는 거군요!”
“가만, 그럼 에디 선수는 어떻게 되는 거야. 설마 혼자만 화이트 솔로 크리스마스?”
* * *
“그러고 보니 다미 언니는 패션에 그다지 관심 없나 봐요? 액세서리도 잘 안 차고. 시계는 스마트워치고. 가방은 맨날 쓰는 것만 쓰고.”
[뭐, 그렇죠. 왜요, 쇼핑 같이 가 줄 사람 필요해요?]
화면 속의 다미가 그렇게 놀리듯 말했다.
사실 희주가 대학생 시절엔 종종 다미 신세를 진 적이 있긴 하다. VIP고객이 아니면 물건을 팔지도 않는 일부 명품 매장을 뚫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오빠는 카드는 줬어도 매장까지는 절대로 같이 가 주지 않았기 때문에, 리미트리스의 부사장의 동행은 큰 도움이 되었다.
옛날 일을 떠올린 희주가 키득키득 웃었다.
“아이참. 저도 이제 좀 벌어요. 언니에 비하면 턱도 없겠지만··· 선물 사주려고 그런 거죠.”
[선물요?]
“크리스마스잖아요. 크리스마스!”
희주가 가슴을 폈다.
“전부터 언니 가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일단 너무 낡았고, 디자인도 좀 밋밋해요. 언니 정도면 솔직히 버킨이나 켈리 들어도 검소한 거잖아요. 내가 사 줄게요.”
[고마운데, 필요 없어요. 마음만 받을게요.]
예상대로 다미는 거절했지만, 희주는 조금 고집을 부려보기로 했다. 연애의 성립엔 주위 사람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생연분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연애로 발전할 기미가 전혀 없어 보이던 잭과 에이미를 이어주는 데 요니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처럼.
하지만 다미는 완강했다.
[정말 필요 없다니까요. 제 가방은 명품 백보다 훨씬 소중한 가방이라서요.]
다미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뽀얀 볼이 살짝 핑크빛으로 물들었고 입술 옆에는 예쁘게 보조개가 피었다. 신의 오른팔이라 불릴 만큼 유능하고 냉철한 다미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다.
그래서 희주는,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가방의 출처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다미는 절대로 지금 쓰는 낡은 가방을 바꾸지 않을 것임도.
‘굳이 옆에서 참견할 필요는 없겠네.’
[사장님께 선물 받은 거니까요. 졸업 기념으로요.]
예상대로의 답변에 희주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동시에, 어째서인지 조금 샘도 났다. 자기 오빠를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다미에게도, 그리고 이런 다미를 한국에 몇 년간 내버려 두는 오빠에게도.
‘아니, 어쩌면 이런 사이니까 서로 안심하고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거겠지만.’
“아하, 오빠가 골라준 거라 디자인이···.”
[희주 씨?]
“아주 고급스럽고 예쁘다는 뜻이었어요. 암튼, 그럼 가방 선물은 포기해야겠네요.”
[네. 그래도 희주 씨 마음은 정말 고맙게 받을게요.]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잠시 다미에게 양해를 구하고, 희주는 화면 앞을 떠나 구단주실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거의 사람 키만 한 박스를 두 개나 가져온 시설관리팀 직원의 모습이 보였다.
“배달 왔습니다, 비서님. 한국에서 보낸 것 같은데요?”
“한국에서요?”
희주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모니터 쪽에서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났다.
[큰 상자가 희주 씨 거예요! 메리 크리스마스.]
희주가 두 손을 들었다.
“다미 언니에겐 절대로 못 이기겠네요.”
* * *
“잭의 컨디션은 좀 어때?”
그러자 브라이언 대신, 샐리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주 좋아 보여요.”
그러자 옆에서 희주는 이유 모를 흐뭇함을 얼굴 가득 띄운 채 열렬히 고개를 끄덕거렸고, 브라이언은 어째 평소보다 뚱한 표정이었다.
“역시 오빠도 눈치채고 말았구나?”
“뭘.”
“그게, 에이미 씨하고 잭이···.”
거기까지 들은 순간 바로 이해해 버렸다. 희주가 왜 대만족 상태가 되었는지, 그리고 브라이언은 대체 뭐가 불만이라 저러는지를.
남자라면 누구나 그런 경향이 있지만, 브라이언은 일단 미녀라면 덮어놓고 좋아한다. 그리고 에이미는 어떤 기준으로 봐도 명백히 미녀다··· 선덜랜드 3대 미녀로 손꼽힐 정도로.
브라이언이 이유 없이 시무룩해질 법도 하다.
희주가 명랑하게 말했다.
“감독님. 선덜랜드 4대 미녀 중 한 사람이 품절녀가 되었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감독님 주위엔 여전히 구단 최고의 미녀가 남아 있잖아요?”
4대 미녀? 앨리스 말하는 거지? 내가 사소한 의문을 품는 사이, 브라이언이 과장스러운 연극톤으로 대답했다.
“레이디께서는 물론 구단 최고의 미녀이지만 저는 썬에게 맞아죽고 싶지 않습니다.”
“잘들 논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몇 번 찬 다음, 나는 구단 최고의 미녀에게 시선을 보냈다.
“잭의 상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듣고 싶군요.”
잭의 숫자가 바뀌었다는 것은 확인했다. 500. 숫자의 크기만 보면 마르틴을 뛰어넘는 값이며, 기존의 두 배가 넘는 숫자다.
다만, 잭은 이제 스물일곱이다. 선수로서는 한창 전성기를 달릴 시기이지만, 이제 와서 드라마틱하게 성장하기엔 늦은 나이이기도 하다.
샐리가 곧바로 자신의 폰을 열더니, 데이터를 확인해 가면서 대답했다.
“루벤에게 받은 데이터입니다. 보시다시피 경기를 뛴 직후인데도 평소와 수치가 비슷합니다. 원래 우리 주장은 슬로우 스타터에 가까울 정도로 지구력이 좋은 선수긴 하지만, 이 정도 회복력을 보인 적은 없었죠.”
샐리의 해설에, 옆에서 희주와 브라이언이 말참견을 했다.
“이것이 사랑의 힘? 역시 동기부여는 중요한 거겠죠?”
“이브랍시고 들떠서 딴짓은 안 했던 모양이네.”
두 사람을 무시한 채, 나는 샐리에게 계속 말해보라는 의미의 시선을 던졌다.
“요즘 가장 폼이 좋아졌다고 느낀 부분은, 사실 체력이나 컨디션보다는 오히려 경기 안에서의 모습인데요. 모든 면에서 영리해진 것 같아요."
“영리해졌다고요?”
확실히 잭은 원래 주력과 활동량을 무기로 삼는 타입으로, 요니만큼 영리한 선수는 아니었다. 그런데 샐리의 설명대로라면 잭은 축구 지능이 퍽 좋아졌다는 모양이다.
“제 기억으로는 공을 따라 뛰는 장면이 평소보다 줄었어요. 그런데 기록상 터치는 늘었죠.”
“먼저 가 있었다는 거군요.”
“사실 그 부분은 제 느낌이고, 확실한 근거는 아니라서요··· 루벤에게 경기 영상을 분석시켰으니 정말로 움직임이 좋아진 것인지는 곧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분석시켰다고요? 크리스마스인데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희주를 향해, 샐리가 차갑게 웃었다.
“네, 크리스마스죠. 그래서 분석시킨 건데요. 크리스마스는 박싱데이 전날이니까요.”
“나는 분석팀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희주를, 나는 살짝, 아주 살짝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기도 오늘 근무 중임을 까먹은 것 같아서.
뭐, 희주의 지능은 딱히 중요한 이슈는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잭이다··· 그러니까, 잭의 축구 지능이 좋아진 것 같다고?
순간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다른 능력과 달리, 선수로서의 영리함은 나이가 들어도 쇠퇴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잭에게 다소 부족했던 능력이기도 하고.
샐리의 분석대로라면, 잭은 조만간 500이라는 숫자에 어울리는 강력한 선수로 탈바꿈할 것이다.
누구보다 빠른 발, 지치지 않는 강철 체력을 가진 미드필더에게 늘 올바른 위치를 찾아 움직이는 판단력이 더해진다면···.
그건, 정말로 괴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