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만지다 (1)
<그날, 나는 손으로 하늘을 만지는 느낌을 받았다 - 디에고 마라도나>
마주 잡은 손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요니는 슬쩍 자신의 옆으로 고개를 돌려, 경기장에 입장하는 소년 팬의 얼굴을 흘끗 바라보았다.
소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요니는 썩 아이에게 인기 있는 선수는 아니었기에. 그래도 요니는, 최대한 표정을 부드럽게 하려 노력했다.
“미안, 잭하고 같이 들어왔으면 좋았을 텐데.”
조심스럽게 말하며, 그는 앞서 걷는 18번 유니폼을 응시했다. 선덜랜드의 주장 잭은 언제나처럼 기운찬 걸음으로 걸어 나갔고, 그 옆의 꼬마 소녀는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의 친구는 선덜랜드에서 가장 사랑받는 선수이기에.
그때, 붙잡은 손에 힘이 느껴졌다. 옆의 아이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 있었다.
“요니 선수가 좋아요.”
빈말이 아니라는 것처럼, 소년은 긴장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요니가 제일 좋아요.”
“그렇구나.”
알고 보니 팬심 때문에 긴장했던 것 같다. 내심 흐뭇함을 감추려 노력하는 요니에게, 소년이 다시 속삭이듯 물었다.
“꼭 이겨주실 거죠? 박싱데이니까요.”
“물론이지.”
요니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잠시 후, 팬들의 환호 아래, 하프라인을 따라 양 팀 선수들이 도열했다. 플레이어 에스코트로 참여한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자, 라인 맞은편에서 비아냥 소리가 들렸다.
“미안해서 어떡하냐. 애 실망시키면.”
요니는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임을 확신하기에. 그리고 요니 스스로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옆에 늘어선 열 명의 동료들 또한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I know I am. I’m sure I am.
선덜랜드 선수는 절대로 팬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심장이 뛰고, 발이 움직이는 한.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우렁찬 함성 속에서, 휘슬이 울렸다. 센터서클의 잭으로부터 공을 넘겨받은 요니는, 지체 없이 공을 후방의 로드리게스에게 돌렸다.
그리고 달렸다.
몸이 가벼웠고, 한겨울의 추위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미 경기 시작 전부터 그라운드는 팬들의 열기로 후끈하게 달아오른 상태였기에.
심장이 터질 때까지 달려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나이얼 스탠드에서, 유소년 동료들과 함께 경기를 지켜보는 테오의 목소리는 밝았다.
“캡틴, 캡틴!”
요즘 들어 캡틴이라는 단어의 울림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아마 캡틴이 하나 줄었기 때문이라고 테오는 생각했다. 이제 테오에게 ‘캡틴’은 세상에서 딱 두 명만 남았다. 1군 주장 잭과, U-18 주장 짐이다.
‘지난 시즌까진 세 명을 구분해서 발음하기 귀찮았단 말이지.’
“캡틴, 캡틴! 경기 시작했어!”
“어, 그러네.”
호들갑스러운 테오의 반응과 달리, 옆자리의 짐은 비교적 차분했다. 냉정과 냉담 사이의 어느 중간쯤의 대답에, 테오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역시 클라라와 함께가 아니라서 심드렁한 거구나! 어제 많이 봤을 텐데··· 부족해?”
테오는 가벼운 유쾌함을 느꼈다. 그는 짐을 아주 좋아했고, 짐을 놀리는 건 더 좋아했다. 그래서 항상 짐과 클라라가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놀리는 맛이 있거든.’
이제 테오도 어엿한 U-18 선수다. 알콩달콩 사귀는 사이를 놀리는 건 꿀잼이지만, 혹시라도 사이가 틀어지면 그때부터는 짐을 놀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은 철이 들었다.
U-18에서도 변함없이 ‘무적’으로 칭송받는 골키퍼 짐이지만, 클라라 이야기만 나오면 소년다운 수줍음을 내보인다. 오늘도 벌써부터 얼굴이 빨개진 모습이, 한창 놀리는 맛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테오의 잡담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주위에서 세찬 함성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경기 초반부터 잭과 요니가 상대 진영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상태였다.
테오의 눈이 크게 떠졌다.
‘19, 7, 18, 19? 아니면 19, 9, 7, 19?’
전자라면 득점 장면이 깔끔할 것이고, 후자는 연계가 효율적일 것이다. 그라운드의 1군 팀이 어느 방향을 택할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았지만, 경기 초반부터 득점으로 이어지는 루트가 선명하게 보인다는 게 기뻤다.
‘요니 선수는 어떻게 할까?’
테오는 그라운드 위의 요니를 내려다보았다. 선덜랜드의 보물, 공간연주자라 칭송받는 19번이라면 틀림없이 자신 같은 비전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나라면 아마 깔끔한 득점을 원하겠지만, 요니 선수는 간결한 플레이를 중시하니까···.’
그때, 요니의 발이 공을 타넘었다. 스텝 오버, 혹은 헛다리 짚기라고 불리는 이름의 개인기로.
평소의 요니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이었다. 그래서인지 당황한 뉴캐슬 수비는 제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었고, 테오는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짐과 바르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른쪽이 비었어요!”
“라이트!”
이윽고, 요니의 오른발 아웃프런트가 건드린 공이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랐다.
* * *
오른쪽 측면에서 기다리던 축구의 신은, 공을 받자마자 다이렉트 발리로 되돌렸다.
마법 같은 터치 한 번으로 공은 뉴캐슬 수비와 골키퍼 사이에 떨어졌고, 기다렸다는 듯 선덜랜드의 18번 유니폼이 공을 쫓아 달린다.
“그렇지! 오프사이드 아니야! 들어가! 달려!”
희주가 마구 날뛰는 사이, 나는 주먹에 힘을 넣었다. 가슴이 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다음에 일어날 장면이 미리 보인 것만 같아서.
“컷백.”
무심코 요니의 특기였던 플레이를 독백처럼 읊은 순간, 잭은 마치 내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따라붙는 수비를 피해 공을 뒤로 흘렸다.
공 앞에는 언제나처럼 요니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이윽고 요니가, 달려오는 기세를 살려 그대로 공을 걷어찼다.
낮은 땅볼 슛. 골포스트에 닿을 만큼 아슬아슬한 각도, 뉴캐슬 골키퍼가 손쓸 엄두조차 주지 않은 완벽한 슛이 네트를 흔들었다.
[선덜랜드 1 - 0 뉴캐슬]
“들어갔어! 들어갔다고!”
“그러게, 완벽한 전개였어.”
대답하면서, 나는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요니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개인기를 골라 이번 공격 전개를 완벽하게 주도했고, 잭은 마치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깔끔한 컷백 패스로 어시스트를 만들었다.
그런 두 사람이 가볍게 하이파이브하며 스탠드로 달려오는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앞으로도 저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자극하고, 함께 발전해 나갈 것이다. 잭은 요니의 영리함을, 요니는 잭의 결정력을 닮아갈 것이다.
지금처럼.
“하루 늦었지만 메리 크리스마스임다! 사랑함다!”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 블랙캣츠 여러분.”
스탠드 아래에서 환하게 웃는 잭과 요니,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아서 나도 마주 웃었다.
그날, 우리는 뉴캐슬을 3-0으로 격파했다.
더비전의 승리부터 JJ 듀오의 성장, 모든 면에서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는데, 기쁜 소식은 경기 종료 후까지 이어졌다.
휘슬이 세 번 울린 순간, 스마트폰이 거칠게 울리기 시작했다.
[오늘의 승리로 FC 선덜랜드는, 마침내 프리미어리그 86경기 연속 홈 무패를 달성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첼시와 함께 프리미어리그 최다 기록이죠. @선덜랜드_CS팀]
스마트폰 메시지 확인이 나보다 빠른 희주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울렸다.
“어!? 진짜로? 왜 이걸 미리 몰랐지?”
“그야 비밀로 했으니까.”
오늘 증명한 것처럼, 평범하게 대결하면 아직 우리가 뉴캐슬에 질 리는 없다. 선수단의 전력도, 감독과 코치의 전술도, 홈이라는 환경도 우리가 훨씬 유리하다.
따라서 굳이 ‘대기록 달성’을 미리 강조할 이유는 없었다. 자칫 우리 선수들은 괜한 부담감을 느낄 테고, ‘그 팀’ 선수들은 기록 저지를 위해 죽기 살기로 싸우게 될 테니.
“오빠, 그럼 기왕 기다린 김에 22라운드까지 기다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날도 안 지면 우리가 단독 1위로 등극하는 거잖아? 벌써부터 선수들에게 부담을 줄 필요가 있었어?”
희주의 의견은 분명히 옳다. 옳은데···.
“더비 라이벌을 놀려먹을 찬스를 어떻게 참으라는 거지?”
그러자 희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 시작했다. 정작 본인도 입꼬리가 귀에 걸렸으면서.
잠시 후, 팀 공식 계정과 프레스팀 계정의 메시지가 연달아 쏟아졌다.
[대기록 수립에 협조해 주신 뉴캐슬 여러분께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선덜랜드_오피셜]
[조금 전 부적절한 메시지가 올라왔습니다. 팀 공식 계정과 개인 계정을 착각한 관리자의 실수입니다. 해당 직원은 내부 징계 조치되었습니다. @선덜랜드_프레스팀]
아벨이 또 실수한 모양이다. 그러니 징계 줘야지. 나는 차분하게 희주에게 지시해, 프레스팀을 일주일 정도 몰디브에 ‘징계’ 보내도록 전달했다.
잠시 후, 조엘에게서 다시 보고가 들어왔다.
[구단주님. 원정 드레싱룸 거울 다섯 장이 깨졌는데요. 체크해서 ‘그 팀'에 수리비 청구할까요?]
“아뇨. 수리비는 그냥 내가 내죠.”
프리미어리그 최다 홈 무패 타이기록을 수립한 기쁜 날, 상대 팀 자리에 ‘그 팀’의 이름을 새기는 대가로 거울 다섯 장이면 아주 싸지. 솔직히 원정 드레싱룸 전체를 다섯 번 고쳐지었더라도 싸다고 느꼈을 거다.
그날, 다시 한번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축구 펍이 최고 매상 기록을 찍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야말로 축제였다.
그리고 우리는 1월을 맞이했다.
축제는 새해에도 계속 이어졌다. 새해 첫날 열린 22라운드에서 우리는 토트넘을 무승부로 막아내며, 홈 연속 무패 기록을 87경기로 늘렸다.
프리미어리그 단독 최다 기록이었다.
뒤이어 1월부터 시작된 FA컵 3라운드에서는 에버튼을 홈에서 잡아내며 다음 라운드 티켓을 확보했고, EFL컵 4강전에서는 아스널을 따돌리며 결승전에 향했다.
급기야 언론에서는 진지하게 ‘트레블’이라는 단어를 거론하기 시작했고, 일부에서는 작년의 선덜랜드가 가장 강한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나왔다.
[필자는 예전에, 이 팀은 리그 원에 머물기엔 지나치게 강력하다고 평가한 적이 있었다. 정정하겠다. 선덜랜드는 어디에 있어도 지나치게 강력하다. 심지어 유소년조차도.]
[내일, 선덜랜드 유소년은 U-18 유스컵 2연패에 도전한다. 만일 선덜랜드가 우승한다면···.]
* * *
“유스팀 주장 짐 하워드는 유스컵에서 3시즌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대. 아하하, 굉장하네!”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확인한 클라라가 명랑하게 말했다.
“굉장하긴. 팀이 강한 거지. 어차피 골키퍼 혼자서는 못 이겨.”
짐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훈련 때 클라라가 응원하러 오는 것도, 끝나고 클라라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것도 이제 짐에게는 퍽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듬직하네. 꼭 프로 같아.”
클라라가 짐을 살짝 올려다보며 말했다. 예전에는 이 정도 키 차이는 아니었는데, 어느새 클라라와 차이가 제법 벌어졌다.
짐은 부드러운 미소를 되돌렸다.
“노력하고 있어. 선덜랜드 유소년팀 주장이니까.”
사실, 다른 아카데미에서 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시티 오브 선덜랜드 로컬 출신이고, 따라서 뉴캐슬의 유스 아카데미 - 위틀리 파크에서는 뛸 수 없었다.
그리고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에서 뛰기 전까지, 그는 썩 고평가받는 유소년은 아니었다. 다른 지역 아카데미까지 축구 유학을 떠나긴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선덜랜드 유스 이외의 팀을 만났다면, 자신은 절대로 지금처럼 성장하지 못했을 테니까.
“테오도 내일은 꼭 이기겠다고 벼르더라.”
“그래? 이기겠다고 벼르는 녀석들이 왜 이리 많은지.”
4강 상대였던 U-15부터의 라이벌, 리버풀 유스의 마이클은 ‘다음엔 안 진다.’며 메시지를 남겼고, 결승 상대 맨시티의 모리스는 ‘올해는 꼭 이기겠다’며 선전포고를 해왔다.
짐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모리스가 그를 이기고 싶었다면 작년에 결승전까지 올라왔어야 했었다. 올해에는 테오와 월터가 있기 때문에, 적어도 같은 잉글랜드 유소년 상대로는 절대 질 리가 없다.
왼손에 조금 차갑고, 한없이 보드라운 무언가가 닿았다. 마치 함박눈의 감촉처럼. 하지만 눈은 아닐 것이다. 올려다본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렀으니까.
무심코 시선을 돌리자, 클라라의 작은 손이 그의 큼직한 왼손을 살포시 잡고 있었다.
살짝 얼굴이 화끈거렸다. 확인하진 못했지만, 아마 클라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새 그녀의 명랑한 재잘거림은 사라지고, 반짝이는 눈동자는 신발 끝만 내려다보는 중이었기에.
그래서 짐은, 그냥 그렇게만 말했다.
“내일도, 절대 지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