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만지다 (2)
클라라를 바래다주고 클럽하우스에 돌아온 짐은, 드물게도 비난을 받아야 했다.
“실망이야 캡틴.”
“갑자기 왜 또.”
그러자 테오가 허리에 손을 척 얹으며 짐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좋은 분위기에서 그냥 손만 잡고 가다니 믿을 수 없어.”
테오의 역습에 짐은 잠시 당황했지만, 금방 차분함을 되찾았다. 아무튼 짐은 또래들 사이에서 무적으로 칭송받는 골키퍼이며, 선덜랜드 골키퍼는 언제나 평정심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훈련받는다.
“···우리는 아직 미성년자거든? 그나저나··· 그럼 우릴 미행했단 소리네?”
짐은 가차 없이 테오를 붙잡아 꿀밤을 먹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월터와 바르카가 키득거렸다.
“있잖아, 월터. 테오는 캡틴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지?”
“그러게. 아마 형제 비슷한 거 아닐까 싶은데.”
사실 테오가 짐과 클라라를 미행한 지는 제법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짐이 클라라를 바래다주기 시작한 다음부터였다.
[클라라를 바래다주는 건 좋아. 클라라는 뺑소니를 당한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캡틴 혼자 클라라를 바래다주다가 돌아올 때 사고를 당할 수도 있는 거잖아?]
해괴하기 짝이 없는 논리였다. 만일 테오의 말대로라면, 짐과 클라라를 따라가는 테오 자신도 사고를 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 그러면 차라리 같이 바래다주고 오라’는 월터의 제안에, 그건 눈치 없는 짓이라며 버티기까지 했던 테오다.
“그런 깊은 애정의 대가가 꿀밤이라니, 조금 불쌍하네.”
“하지만 이번 일은 백 프로 자업자득이긴 해··· 아프겠다.”
짐에게서 풀려난 테오는 아주 시무룩해 보였다. 월터가 보기엔 꿀밤이 아프다기보다는, 짐에게 혼났다는 사실 자체에 상심한 것 같았다. 왜냐면 테오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기운찼기 때문이다.
[내일은 무조건 이길 거야! 캡틴이 프로가 되기 전에, 대기록을 만들어줘야 하니까.]
“있잖아, 월터. 만약에 테오가 여자애였으면 엄청 재밌었겠다. 그럼 클라라는 두통약을 달고 살았겠지?”
“···그랬으면 우리 위장약이 더 필요해질걸.”
그때 멀리서 가벼운 손뼉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유소년 코치 톰슨이 모두를 호출하는 중이었다.
“내일은 경기 당일이니까, 이제부터 37번 그라운드는 쓰면 안 된다? 다들 일찍 씻고, 잘 먹고 푹 쉬는 거야. 참고로 오늘 메뉴는 특식이다.”
“와아-!”
유소년들이 환호했다. 선덜랜드 구내식당 메뉴는 훌륭하기로 정평이 나 있지만, 그중에서도 아카데미 유소년은 특별히 더 신경 쓴 식단을 제공받는다.
맛은 물론 성장기 아이들에게 필요한 영양 균형까지 신경 쓴 메뉴는 아이들뿐 아니라 부모들에게도 호평을 받았다. 다른 팀에 흔하다는 케첩 금지령 같은 것 있지도 않을 정도다.
[시판 케첩이 문제라면, 우리가 생토마토를 직접 졸여서 만들어 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쉐프?]
[내 생각엔 반드시 케첩을 찍어먹게 만드는 느끼한 튀김이 더 문제 같은데···.]
구내식당 운영팀의 오랜 노력이 빛을 보았고, 최근에는 축구협회에서도 레시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을 정도다.
아이들은 환호하며, 일제히 식당으로 달렸다. 어느새 짐도 테오를 다독여 데리고 움직이는 중이었다.
지켜보던 월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캡틴은 작년에도 우승했어. 만일 내일 우승 못 하면, 그건 나하고 테오 책임이야.”
“그치만 캡틴은 동의하지 않을걸?”
“맞아. 축구는 열한 명이 하는 거라고 대답하겠지.”
“골키퍼 혼자서는 절대로 팀을 이기게 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그러니까 월터, 내일 꼭 이기고 와.”
“당연하지.”
퍽 의젓해진 바르카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월터는 식당으로 걸었다.
이 아카데미에 하나라도 더 많은 트로피를 가져오고 싶었다. 한 살 차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른스러운 캡틴을 위해서도. 그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코치 톰슨을 위해서도.
그리고, 아카데미를 지탱하는 모든 스태프들을 위해서도.
스스로는 아직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선덜랜드의 선수가 되어 있었다.
* * *
[U-18 유스컵 결승, 선덜랜드 U 대 맨시티 U]
예년보다 일찍 개최된 유스컵 결승을 맞이해, 선덜랜드 유소년팀 관계자는 일제히 세인트 조지 파크로 향했다.
웸블리가 영국 축구의 성지라고 한다면, 이곳은 영국 대표팀의 요람이다. 연령별 대표는 물론, 성인 대표팀도 이곳에 집결해 훈련하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유스컵 결승은 세인트 조지 파크에서 치러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유스컵 결승전에 올라올 정도의 선수라면 틀림없이 유망주일 테니, 어릴 때부터 대표팀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
우리 팀 관계자가 세인트 조지 파크 스탠드에 나란히 앉았다. 예년 같으면 페르난데스와 앨리스, 그리고 여유가 되면 브라이언과 샐리 정도가 따라왔을 텐데, 올해는 인원이 많이 늘었다.
아카데미 운영팀이 전부 따라왔기 때문이다.
“구단주님··· 정말로 저희가 여기까지 따라와도 되는 걸까요.”
불안한 목소리로 묻는 유소년 육성단 스태프들에게, 담담하게 대답해 주었다.
“문제없습니다. 여러분이 관리해야 하는 유소년 선수들은 오늘, 전부 이곳에 와 있으니까요.”
비록 U-15 멤버들은 오늘 경기에는 뛰지 못하지만, 선배 기수를 응원한다는 명목으로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따라서 오늘, 유소년 육성단 스태프들이 굳이 아카데미를 지킬 필요는 없다.
“그리고 사실, 톰슨 코치의 각별한 요청이 있었습니다. 스탠드에서 여러분이 응원해 줬으면 좋겠다고요. 우리 아이들이 틀림없이 좋아할 거라고 하더군요.”
그러자 아카데미 스태프들은 감격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응시했다.
“그럼 경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얌전히 응원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아카데미 스태프들의 응원은 썩 얌전하지는 않았다. 선덜랜드 관계자들은 일단 휘슬이 울리고 나면 전부 냉정함을 잃어버리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평소 지적인 이미지의 앨리스조차, 관중석에 앉으면 대량의 비속어가 섞인 열정적인 응원을 퍼부을 정도다.
스탠드에 앉을 때도 차분한 사람을 굳이 따지자면···.
“역시 샐리 씨 정도겠지? 샐리 씨는 항상 냉정침착한 타입이니까.”
“그렇지도 않아. 샐리는 자기가 전술 안 짜는 경기에선 장난 아니더라고.”
나와 희주가 잡담하는 사이, 한 줄 아래쪽 자리에선 샐리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테오! 슛은 골키퍼를 이기려고 차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지? 부숴버릴 마음으로 차는 거라니까!?”
뭐, 축구선수 따님이니 오죽하겠냐마는··· 나와 희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역시 나구나? 하긴, 나 정도면 완벽한 쿨 뷰티지.”
“제발 거울이나 보고 떠드세요, 동생님.”
개인적으로는, 선덜랜드 관계자 중 유일하게 침착한 사람은 다미 정도라고 생각한다. 리미트리스를 선덜랜드 관계사로 카운트할 경우의 이야기겠지만.
우리의 옆자리에서는 육성단 스태프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월터! 기죽지 마! 더 빨리 달려!”
“테-오! 한 번만 더 몸싸움을 밀리면, 내일부터 고기 양을 두 배로 늘려버릴 거야!”
희주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고기라고요? 그럼 일부러 몸싸움 지는 거 아닌가요?”
“비서님, 테오는 의외로 고기를 싫어하거든요. 입이 짧습니··· 으악! 또 밀렸어!”
“돌아가면 서로인 스테이크를 아주 듬뿍 먹여 주자고요, 쉐프!”
스태프들이 아쉬움에 발을 굴렀다··· 사실 우리가 질 리 없으니까 저렇게 조바심 낼 필요는 없을 텐데.
테오가 어깨싸움에서 밀리는 건 체격상 어쩔 수 없다 치고, 월터의 플레이가 소극적으로 보이는 건··· 딱 봐도 함정이다. 월터는 지금 상대를 끌어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예전에 톰슨이 그랬던 것처럼.
맨시티의 진형이 앞으로 딱 1미터만 더 올라온다면, 그때부터 월터는 곧바로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지금처럼.
“나이스 컷!”
맨시티의 전진 패스를 월터가 곧바로 가로챘다. 그리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공을 전방으로 길게 걷어찼다.
팔을 좌우로 펼쳐 균형을 잡는 예비 동작도, 크게 휘두르는 다리도, 전부 현역 시절의 톰슨과 많이 닮아 있었다.
푸른 하늘 아래, 공이 높이 떠오른다.
“카운터-!”
다음은 테오의 독무대였다.
수비 뒷공간에 떨어진 월터의 로빙 스루 패스를 따라잡은 테오는, 공이 잔디에 떨어지는 순간 오른발을 살짝 가져다 댔다. 터치라기에도 민망할 만큼 단순한 동작이었고, 공을 차올리려는 움직임도 전혀 엿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테오의 발을 떠난 공은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랐고, 달려나오는 맨시티 골키퍼의 머리를 넘겼다.
[선덜랜드 U 1 - 0 맨시티 U]
“그렇지!”
곧바로 우리 쪽 스탠드가 발칵 뒤집혔다.
구내식당 운영팀은 테오를 위해 고기 대신 생선구이를 내놓겠다며 의욕을 보였고, 앨리스는 거친 사내들이 펍에서나 할 것 같은 격정적인 동작으로 주먹을 불끈 쥐어 올렸다.
희주가 눈가를 손으로 슥슥 문질렀다.
“거짓말 같아. 예전에 저 아이들이··· 맨시티 유스 상대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내가 아는데.”
짐이 차지한 첫 번째 트로피, U-15 유스컵 때의 일이었다. 나도 기억하고 있다. 천하의 테오라도 혼자서 맨시티 유소년을 상대하지는 못했다. 경기는 시종일관 우리의 열세였고, 짐의 선방 쇼로 간신히 버틴 끝에 가까스로 이겼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도저히 질 것 같지가 않다.
아래쪽에서 샐리가 새침한 목소리로 말참견을 했다.
“작년에 구단주님이, 우리 유소년들까지 우승 메달 돌리셨잖아요? 모조품이지만요.”
“그랬죠.”
“앨리스에게 들었는데 애들이 그날, 아주 제대로 동기부여했다는 것 같아요. 훈련하는 태도도 그렇고, 팀 엠블럼을 바라보는 눈빛부터가 변했다고요. 아시다시피 저 나이에는, 단 하루 사이에도 플레이가 달라지니까요.”
세 시즌 전, U-15 무대에서 맨시티에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며 악착같이 버티던 선덜랜드 유소년의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월터는 경기 내내 중원을 완벽하게 틀어막았고, 테오는 존재감만으로도 맨시티 수비진을 라인 아래쪽에 머무르게 만들었으며, 짐은 늘 그랬듯이 오늘도 점수를 내주지 않고 버텨냈다.
[선덜랜드 유소년, U-18 유스컵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자랑스럽게 웃는 아이들이, 단상 위에서 우리들에게 손짓했다.
“구단주님, 단장님! 같이 사진 찍어요! 보좌관님도요!”
“쉐프! 맛있는 요리 항상 감사드려요··· 모처럼이니 트로피 한번 들어 보시겠어요?”
구내식당 운영팀은 선수들의 제의에, ‘감히 버터 묻은 손으로 신성한 트로피를 만질 수 없다.’며 사양했지만, 나중에 클럽하우스 돌아온 다음엔 트로피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촉감이 아주 좋군요. 꼭 손으로 하늘을 만지고 있는 느낌인데요?”
“맞아. 차갑고, 매끄럽고, 광택이 나는 것 같고··· 이런 느낌의 소스를 아이들에게 먹여 주고 싶은데.”
* * *
한편, 구내식당 운영팀의 소감은 SNS에서 의외의 반향을 불렀다. 선덜랜드의 SNS 담당자, 아벨이 은근슬쩍 영상을 찍어 유출시켰기 때문이다.
- 트로피 만지면서 똑같은 촉감의 요리를 구상한다고? 그거 완전 요리 오타쿠 아니냐. 으으, 소름.
ㄴ 난 좀 다른 쪽으로 소름인데. 선덜랜드는 저런 사람들이 스태프로 일하는 팀이라는 거잖아. 자기 일에 진심인 사람들이.
- 님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님. 선덜랜드는 이미 축구계에서 손꼽힐 만큼 강력한 선수단을 갖춘 팀이잖음?
ㄴ 그래서?
ㄴ 지금도 더럽게 센 팀인데, 구단주는 돈이 질리도록 많아. 그런데 유소년까지 엄청 빵빵한 거야. 이래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됨?
ㄴ 어··· 앞으로 10년쯤은 선덜랜드 강점기 확정이네.
잠시 후, 누군가 영국 속담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길 수 없으면 합류하라는 오랜 격언을.
이후, 선덜랜드 멤버십을 신청하려는 사람들이 쇄도했다. 이른바 ‘합류’ 시도다. 하지만 시즌 초부터 대기하는 인원이 워낙 많아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 합류도 눈치가 빨라야 하는 거 같음. 우린 글렀음.
이후 ‘합류’ 시도자들은 멤버십 대신 굿즈라도 사는 쪽으로 선회했다. 마침 선덜랜드 굿즈는 하나같이 품질이 훌륭하고 팬심을 자극하기로 유명했다.
스포츠팀 굿즈가 언제나 그런 것처럼 가격대는 조금 세지만, 하나같이 돈값은 하는 물건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런 장점은 물건을 ‘구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다.
- 품절이라고!? 아니, 갑자기 왜?
ㄴ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갑자기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팬들 덕분에 선덜랜드 온라인 스토어는 일시적으로 먹통이 될 정도의 호황을 이뤘고, 상품에는 하나같이 재입고 알림 버튼이 붙었으며···.
···선덜랜드 신상품기획팀장 아드리안은 또다시 구단주실에 기획서를 잔뜩 제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