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만지다 (3)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깜빡였고, 인공눈물까지 몇 번 흘려 넣었다. 그렇게 맑아진 눈으로 몇 번이고 확인했는데, 아드리안의 이마에 적힌 가치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시제품도 그대로다.
인지부조화가 올 것 같다. 내 눈에 보이는 가치대로라면 아드리안 정도의 기획자가 준비한 상품은 무조건 대박이 나야 정상인데, 막상 가져온 시제품은··· 안 팔려야 정상인 물건들이다.
“진심으로 이게 팔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나는 아드리안이 가져온 축구공, 정확히는 축구공 모양이 달린 흉물스러운 기계를 응시했다. 듣자니 펀칭머신처럼 바닥에 놓고 발로 찰 수 있게 만든··· 키보드란다. 엔터키만 있는 버전이라는데.
아드리안이 단호하게 응수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구단주님. 정말입니다.”
아무리 봐도 어디 망한 공장의 악성 재고를 싸게 인수해서 떨이로 팔아치우려는 것 같은데.
내 미심쩍은 시선을 눈치챈 아드리안이, 준비한 태블릿 화면에 사진을 띄우기 시작했다. 사진에는 초대형 엔터키를 주먹으로 힘차게 내려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보시다시피 세상에는 키보드 엔터키를 세게 내려치고 싶은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버그를 찾지 못한 프로그래머라거나, 마감에 시달리는 소설가, 혹은 자꾸만 원고가 늦어지는 소설가의 담당 편집자···.”
“그리고 마음에 안 드는 기안을 반려하고 싶은 상사도 있겠군요.”
슬쩍 야유를 보냈는데, 아드리안은 개의치 않았다.
“네, 그 경우도 팔리겠죠. 아무튼 빅 엔터키는 실제로 팔립니다. 그렇다면 풋 엔터키도 팔리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발로 밟는 페달 엔터키도 있다는 모양입니다.”
아드리안의 진지한 반응에, 옆에서 희주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그쵸. 페달보단 축구공이 낫죠. 선덜랜드는 축구단이니까요! 그래도 실용성이 너무 없는 게 아쉬운데···.”
그러자 아드리안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실용성이 있도록 부록을 끼워 줍니다. 선덜랜드 키캡 세트죠. PBT 이중 사출, 선덜랜드의 상징색인 레드 앤 화이트로 구성된 풀 셋 키캡입니다. ESC 자리엔 팀 엠블럼이 들어갑니다.”
아무리 봐도 키캡이 본품이고 엔터키 축구공이 부록인데?
“혹시 키캡만 따로 팔 생각은 없습니까?”
“절대 없습니다. 하지만 팬 서비스 차원에서, 엔터와 ESC, 백스페이스만 별도 판매할 예정입니다.”
나는 별 뜻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옆에서는 희주가 질린 듯 고개를 흔들었다.
“포인트 키캡을 따로 팔아서 키캡 품질이 얼마나 좋은지 과시하려는 거야. 기어이 저 축구공 엔터키를 팔아먹을 계획인 거지.”
이런 악마···.
“넘어갑시다. 다음은 뭡니까?”
그러자 아드리안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보시다시피 그릇입니다. 코리안 트래디셔널 브래스···.”
“놋그릇이군요.”
“Not? 그릇이 아니라는 겁니까?”
“대충 넘어가죠. 막걸리 그릇이군요.”
누가 봐도 한국 전통 놋그릇인데, 딱 보면 사극 소품으로 쓸 것처럼 표면이 살짝 찌그러지고 울퉁불퉁하다. 일부러 손댄 모양이다.
“네, 구단주님. 최근 개발했던 전략 칵테일에 어울리는 술잔을 찾다 보니, 이런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요즘은 한류 드라마가 넷플릭스에서 인기 아니겠습니까?”
옆에서 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저건 괜찮겠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집에서 선덜랜드를 응원할 때 가져다 놓고 막걸리 한잔···.”
막걸리 한잔이란 말이지. 반색하는 희주에게서 고개를 돌린 다음, 나는 차분하게 물었다.
“저 제품은 어디에 끼워서 팔 생각입니까?”
그러자 아드리안에게서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그야 Kuk-pong이죠. 최근 보틀링화에 성공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아드리안 정도 되는 사람··· 아니 악마가 막걸리 잔을 팔면서 막걸리를 안 팔 리는 없으니까.
“···온라인으로 술 팔아도 되던가?”
“···영국은 되지 않아? 저건 전통주가 아니라서 한국에선 못 팔 것 같긴 한데.”
“나중에 다미에게 물어봐야겠네.”
그 외에도 아드리안은 몇 개나 되는 굿즈를 내놓았는데, 심지어 그중에는 게임 데이터도 포함되어 있었다.
“요즘 사커 매니저에서 선덜랜드가 너무 쉽다는 의견이 많아서, 하드모드 DLC 컨텐츠를 준비했습니다.”
비록 게임은 잘 모르지만, 시스템 메시지가 딱 보기에도 흉흉하다.
구단 명성이 떨어졌습니다. 재정이 바닥났습니다. 백투백 강등되었습니다. 팬들이 등을 돌립니다. 선수들은 감독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스태프들이 전부 해고되었습니다··· 무슨 게임이 저따위야?
옆에선 희주가 좋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어? 저거 완전···.”
아드리안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 게임 제작사에서는 투자의 신 모드, 정확히는 ’투자의 신은 해냈던 일’ 모드라고 부르더라고요.”
* * *
아드리안이 개발한 새로운 굿즈가 잔뜩 들어오면서, 또다시 온라인 스토어는 매진 행렬을 이어 나갔다.
신상품기획팀과 CS팀 멤버들은 잔뜩 긴장한 상태로 고객들의 반응에 초점을 맞췄지만, 특별한 일은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변을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한국 지부 담당자 미정이었다.
‘이상해. 반응이 너무 없어. 지나치게 조용해.’
선덜랜드 글로벌 스토어가 그런 것처럼, 한국어 스토어 역시 품절의 행렬이었다. 이 정도로 물건이 나갔으면 호평이든 악평이든 말이 많아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스토어 상품페이지는 물론, 커뮤니티 반응도 아주 조용하다.
[클레임이나 악플이 없다는 뜻은 그만큼 ‘명예시민’ 님이 일 잘 해준다는 증거 아닐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아요. 한국인을 너무 얌전하게 보시는 거라고요.”
미정은 알고 있었다. 이 정도로 구하기 힘든 물건은, 원래대로라면 커뮤니티에 인증샷이 잔뜩 올라오기 마련이다.
하물며 클레임도 그렇다. 아드리안이 완벽한 제품을 만들고, 자신이 깔끔하게 응대해도 불만이 전혀 나오지 않을 수는 없다. 하다못해 ‘배송이 느려요’ 정도는 댓글이 달리는 게 보통이다.
[그런가요? 구단주님은 물건에 크게 까다롭지 않으셔서 몰랐어요. 비서님은 엄청 까탈스럽게 고르시긴 하는데··· 축구팬은 남자잖아요? 한국 남자들은 다 구단주님 같은 줄···.]
본사 CS팀원의 태연한 대답이 멈췄고, 화면 너머에 에이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고 있겠지만 구단주님은 물건에는 까다롭지 않으셔도, 사람은 아주 까다롭게 고르십니다. 대충 넘기지 말고 자세히 파헤치세요.]
에이미의 호령에 본사 CS팀원들이 심각한 얼굴로 움직였다. 잠시 그들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에이미가 다시 미정과, 정확히는 회의용 카메라에 시선을 맞췄다.
[명예시민 씨, 혹시 짐작 가는 내용이 있나요?]
“혹시··· 한국 스토어 고객들이 주로 배송받는 주소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민감한 개인정보, 그러니까 이름이나 전화번호 같은 거는 지우고 보여주세요.”
미정의 요청에, CS팀이 곧바로 확인에 들어갔다.
[네. 똑같은 주소에서 배송받는 경우가 많더군요. 드라마에서 보니까 한국은 아파트에 몰려 살던데, 그래서일까요?]
잠시 영문으로 된 주소를 확인하던 미정이 무릎을 쳤다.
“아, 배대지구나!”
아무래도 사람들은 타국의 주소에 대해서는 둔감한 편이었기에, 유능한 선덜랜드 CS팀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한국은 직구가 유행하는 편이라 배대지라는 개념에 아주 익숙하지만, 영국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았던 것도 한몫했다.
미정의 설명을 들은 에이미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상상도 못 했어요. 영국 축구팀 물건을 한국에서 사서 다시 해외에 배송대행하다니···.]
“한국은 최새벽 선수 관련 굿즈 재고를 우선적으로 배정받으니까요. 맹점이었네요.”
미정의 이야기에, 에이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인을 알았으니 대응할게요. 스토어 언어와 상관없이 재고를 전체적으로 통합 관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편해서···.]
미정이 눈을 빛냈다.
“아뇨, 개편하기 전에 며칠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 * *
한편, 선덜랜드에서 출시한 굿즈들 덕분에 한국 축구 커뮤니티가 뜨거워졌다.
- 사커 매니저 투자의 신 모드 해본 사람?
ㄴ 그거 너무 심하던데. 솔직히 이적예산 에디터로 안 건드리고 할 수 있는 사람 있음?
ㄴ 이적예산 건드리고 시작하면 나중에 후회한다. 3년 뒤에 유에파가 FFP 위반으로 징계 먹이는 이벤트가 생기는데, 예산 손대고 시작했으면 그때 완전 망함.
ㄴ 일단 라일 파커를 잘라. 그리고 구단에 보면 이름 이상한 직원 하나 있는데 걔를 스카우터로 재계약해야 함. 참고로 그게 브라이언임.
ㄴ 그다음은?
ㄴ 브라이언이 쓸만한 감독을 물어올 때까지 스카우팅을 돌려. 솔직히 인내심 많이 필요함.
해외에서는 죽겠다고 난리인데, 한국 게이머들은 출시 직후부터 빠르게 답을 찾아나가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쉽진 않은 모양이지만.
댓글을 확인하면서, ‘@이스탄불_이전부터’가 쓴웃음을 지었다.
‘힘들겠지. 게임 속에서는 투자의 신 본인이 했던 일을 그대로 재현하지 못하니까.’
구단주의 사비로 이적 예산을 늘리는, 쉽고 빠른 방법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대신 경기장을 개축하고, 옆에서 음식을 팔고, 굿즈를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사커 매니저에서는 할 수 없는 방식들을 골라서 팀을 강하게 만들어 왔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선덜랜드의 상징적인 칵테일 ‘국뽕’과 함께 시원하게 주모를 외쳐보세요! 온라인에선 팔지 않지만, 대신 서울에도 제휴 펍이 생겼으니까요!]
선덜랜드 한국어 스토어에서는 ‘국뽕’을 구매할 수 없다는 메시지 아래, 안내 동영상이 하나 추가되었다. 보아하니 그의 조카 솜씨였다.
비록 영상에는 구단주 비서 이희주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지만, 편집하는 스타일을 보면 뻔하다. 그의 조카는 적성에 아주 잘 맞는 일을 시작한 모양이다.
[선덜랜드 한국 스토어 담당자입니다. 최근에 상품이 전량 매진되어 너무 기뻤는데, 알고 보니 영국 분들이 직구로 도로 사 갔다는 거 같더라고요. 이 기분을 영국 스토어 담당자에게도 느끼게 해 주고 싶어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영국에서 선덜랜드 굿즈 직구하는 방법, 알고 계셨나요? 가끔 한국 스토어에 없는 물건이 뜰 때가 있어요.]
“이 녀석, 아무래도 너무 적성에 잘 맞는 일을 찾은 모양인데.”
자기 조카가 정말로 한국인들에게 굿즈를 영국에서 직구로 들여오게 하려고 저런 드립을 칠 리는 없다. 전하려는 진짜 메시지는 따로 있을 게 뻔하다.
그러니까, ‘선덜랜드 한국 스토어에는 영국 현지팬들도 못 구해 안달난 물품이 있다.’는 메시지를.
한국의 선덜랜드 팬은 아무래도 라이트 팬이 많은 편이다. 덕분에 요즘엔 TV 시청률은 상당히 잘 나와도, 굿즈 구매로는 쉽게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앞으론 달라질 것이다.
굿즈는 보통 증식하는 성질이 있는데, 특히 선덜랜드 정도로 품질 좋은 굿즈는 아주 빠르게 증식한다. 심지어 수완 좋은 마케터까지 들어갔으니, 선덜랜드는 앞으로도 잘 나갈 것이다.
반면 그가 응원하는 팀은···.
“그래서 우리 리버풀은 새해에도 0입이냐? 이런 빌어먹을 존 헨리!”
‘@이스탄불_이전부터’는 투덜거리며, 컴퓨터 책상 아래의 축구공 엔터키를 걷어찼다. 처음에 조카에게 선물 받았을 때는 이게 대체 무슨 해괴한 상품인가 했는데, 꽤 중독성이 있다.
특히, 악플을 달 때 아주 효과가 좋다. 실제로 요즘은 바르샤 팬들이 축구공 엔터키를 많이 사갔다는 소문이 있기도 하다. 원래부터 바르샤 보드진은 팬들에게 평이 나빴는데, 마침 올 시즌은 챔스 조별에서 3위로 탈락하면서 유로파행 티켓을 끊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선덜랜드 축구공 엔터키, 한정판이 새로 출시되었습니다! 메시 사인 버전으로요!]
앞으로도 격차가 계속 벌어질 것 같았다. 선덜랜드에는 언제 뭘 팔아야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스태프와, 해괴해 보이는 상품에도 아낌없이 개발비를 투자할 수 있는 구단주가 있기 때문에.
아랫배가 살살 아파온 리버풀 팬, ‘@이스탄불_이전부터’는 재빠르게 조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정아, 혹시 너희, 축구공 키보드 헨도 사인 버전은 출시 안 하니?]
[죄송해요. 저도 팔고 싶은데, 헨도는 이제 저희 선수가 아니라서요. 아 맞다, 다음 주 EFL컵 결승전 같이 안 보실래요? 저희 집은 방송 나오는데.]
[됐어요 조카님, 우리 팀은 대회에 안 나가요. 니네 팀에 밀려서 진작에 짐 쌌어요. 영입도 없어서 짜증 나는데 긁고 난리야.]
[아 맞다! 죄송해요. 그리고 저희도 올겨울엔 아직까지 0입이니까, 리버풀 영입 없다고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요.]
[네가 제일 나빠.]
조카에게 보낼 메시지를 타이핑한 ‘@이스탄불_이전부터’가 축구공 엔터키를 거칠게 걷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