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만지다 (4)
1월, 겨울 이적 시장은 대체로 조용하게 넘어갔다. 빅클럽들이 특별한 영입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덜랜드는 겨울 이적을 그냥 건너뛰면서 현 선수단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 보였다. 원래 겨울에 돈 잘 안 쓰기로 유명한 리버풀은 깔끔하게 0입으로 마무리했고, 심지어 돈 많은 맨시티나 뉴캐슬도 조용했다.
- 아마 그 팀들은 여름에 워낙에 돈을 퍼부어서 그런 거 아닐까?
- 내가 보기에, 맨시티나 리버풀은 GG 친 것 같음. 어차피 올해는 선덜랜드 도저히 못 잡는 거 확정이잖음? 차라리 이적료 아껴서 내년 시즌에 제대로 지르는 게 이득임.
ㄴ 시티는 몰라도, 일단 리버풀은 돈 아껴야지. 걔들은 돈 별로 없잖아.
ㄴ 정확히 말하면, 리버풀은 돈 아끼는 거 아님. 그냥 돈이 없는 거지.
ㄴ 그럼 뉴캐슬은? 지금 뉴캐슬 정도면 사실상 세계 3대 갑부 구단인데.
ㄴ 걔들은 돈 쓰고 싶어도 쓸데가 없어서 강제 절약 중인 거지. 솔직히 좋은 선수가 왜 뉴캐슬에서 뛰겠음?
SNS 반응을 살피던 뉴캐슬 회장 비서 사만다가 분통을 터트렸다.
“아니, 피차 똑같이 영입 건너뛰는데 왜 이렇게 반응이 다른지 모르겠어요. 우리도 지금 선수단에 만족해서 영입 안 하는 건데···.”
뉴캐슬은 현재 5위 자리를 두고 토트넘, 아스널, 레스터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중이었다. 다시 말하면 유로파 경쟁 중인 건데, 이만하면 꽤 안정적인 성과라는 게 사만다의 평가였다.
여전히 라이벌 선덜랜드보다는 아래에 있지만, 간신히 강등권을 면하던 시절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솔직히 맨시티도 만수르 오자마자 날아오른 건 아니잖아요? 도약을 준비할 시간은 필요했던 것 같은데···.”
SNS반응을 같이 살피던 뉴캐슬 회장 나지프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듣자니 SNS 화력의 절반은 강팀 따라 움직인다고 하더군요. 반의반 정도가 특정 선수 팬이고요. 아시아나 아프리카 출신 선수를 영입하면 화력이 좋다고 합니다.”
“그럼 선덜랜드는 화력이 좋을 만하네요. 마침 요즘 성적이 좋고, 축구의 신을 영입한 데다가 한국인 선수도 뛰니까요. 구단주도 한국인이고.”
“그리고 듣자니 한국인들은 온라인상에서의 화력이 아주 상당하다던데요.”
사실상 일당백이나 마찬가지다. 인터넷 회선 속도와 스마트폰 보급률이 모두 훌륭하고, 유행 전파도 빠르기 때문이다.
“하긴, 그래서 맨시티도 매년 한국 마케팅에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죠? 한국 선수 없는 구단치고는 이례적인 수준으로요. 물론 한국에 제일 공을 들이는 팀은 선덜랜드지만요.”
대답하면서, 사만다의 눈이 반짝였다. 나지프가 어째서 한국 이야기를 거론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해했어요. 한국 마케팅에 공을 들이면, 선덜랜드의 글로벌 팬베이스를 빼앗는 효과가 있겠군요. 덤으로 맨시티 팬도 빼앗고요.”
“그렇습니다. 사만다, 새해 인사 영상을 준비해 주시겠어요?”
“새해 인사라고요? 이제 2월인데요?”
“조사해 보니 한국은 루나 캘린더 기준으로 신년 인사를 주고받는 풍습이 있다더군요. 따라서 2월이죠. 이번엔 제가 직접 메시지를 보낼 겁니다. 한국 전통 복장 입고서요.”
나지프의 결의에, 사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세요. 마침 참고할 자료도 있는데요.”
사만다가 SNS를 뒤져서, 예전에 선덜랜드 구단주 남매가 한복 입고 절하는 영상을 찾아냈다.
그러자 나지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저 동작은 좀··· 잘못하면 제가 본국에 불려갑니다.”
결국, 회장 나지프는 한복 입고 한국어로 새해 인사하는 정도로 타협하고, 큰절은 사만다가 하기로 합의했다.
그들 나름대로는 야심 차게 준비한 제스처였지만, 썩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선덜랜드 이벤트에 완전히 밀려 버린 탓이다.
설날, 선덜랜드는 구단주 남매는 물론, 감독과 수석코치, 주요 스태프들이 일제히 한복 입고 카메라를 향해 세배를 올렸다.
그리고 선수들 또한 힘을 보탰다.
[안녕하세요. 코리안 팬. 내 이름은 잭 맥그리거이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나의 사인 유니폼, 국경이 없다. 한국에 백 장 보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한국에 계신 팬 여러분, 최새벽입니다. 이번에 한국 과자를 많이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팬분들의 마음이 담긴 선물이라 원래는 제가 다 먹어야 하는데, 운동선수다 보니 먹을 수가 없었어요.]
선덜랜드 선수 중에서는 유일하게 한복을 입고 등장한 최새벽이, 한국 팬들의 선물 앞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보내주신 과자는 타인위어 아동복지센터에 전부 기증하기로 했고, 똑같은 수량을 한국의 아동센터에도 기부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당연히 뉴캐슬의 설날 인사는 한국에서 완벽하게 묻혔다.
“아니, 이놈들은 우릴 엿 먹이려고 축구단 운영하나?”
모처럼의 시도가 묻혀버린 나지프와 사만다가 분노에 몸을 떨었다. 보다 못한 뉴캐슬 직원이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며 구해다 준 물건, 축구공 엔터키 키보드 덕분에 한동안은 버텼지만, 금세 역효과가 났다.
축구공 엔터키가 원래 선덜랜드 굿즈라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한 사만다는, 그만 분함을 못 이겨 앰뷸런스 신세를 져야 했던 것이다.
* * *
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드리안 씨는 도대체 어떻게 축구공 키보드를 뉴캐슬에 팔아먹은 거지? 보니까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 두 개 나갔던데.”
“글쎄, 샘플로 관찰하려는 거 아닐까?”
뉴캐슬 회장은 그렇다 치고, 그쪽 회장 비서는 구단 레전드의 딸이다. 절대로 선덜랜드 굿즈를 써줄 리 없고, 혹시 모르고 썼다면 나중에 뒷목을 잡겠지.
“어, 그럼 이제 뉴캐슬이 우리 굿즈 막 베끼는 거 아니야?”
“베낄 수 있을 때 이야기겠지.”
대부분의 축구단은 우리처럼 굿즈 개발에 돈을 많이 퍼붓지 못한다. 그리고 비슷한 수준의 재력을 가진 뉴캐슬 같은 팀에는 다른 약점이 있다.
예를 들면, 기껏 한복까지 입어 놓고서도 세배는 절대로 따라 할 수 없다든가 하는 식의 제약들. 똑같은 이유에서 그들은 칵테일 관련 굿즈는 절대로 못 베낄 것이 뻔하다.
남는 건 피규어인데, 솔직히 우리 피규어는 아드리안이 혼을 갈아 만드는 제품들이라 다른 팀에서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렇구나! 안심했어. 그럼 나는 이제 설날 기념 휴식을 준비해야겠다.”
“EFL컵 결승전이나 준비하세요, 고액 용돈 수령자님.”
EFL컵은 1군 팀이 참가하는 컵 중에서 가장 먼저 결승전을 치르게 되는 대회인데, 리그나 FA컵 우승보다는 상대적으로 권위가 떨어지는 느낌이 있긴 하다.
실제로 FA컵 우승팀은 유로파리그 진출권을 얻지만, EFL컵 우승팀은 유로파 컨퍼런스리그로 향하게 된다. 굳이 따지자면 한 단계 격이 낮은 취급을 받는 셈이다.
그래도 당당한 1군 대회임에는 변함이 없다. 즉, 반드시 이겨야 할 대회라는 뜻이다. 마침 결승 상대는 에버튼이고.
희주가 곧바로 브이 자를 그려 보였다.
“갑부 오라버님. 결승전 준비는 이미 만전이랍니다. 웸블리 중립 좌석은 모조리 싹쓸이했고, 원정지원팀과 연계해서 팬들에게 교통편 지원할 준비도 끝내 놨어.”
“빠르네.”
“상대가 에버튼이라 편했지. 그쪽 스태프들은 웸블리에 자주 안 오니까, 살짝 헤맸을 거야.”
하긴, 우리는 작년에도 EFL컵과 FA컵을 모두 차지했었다. 최근 몇 년간 영국에서 가장 웸블리를 자주 이용한 팀이니, 희주도 이제 퍽 익숙하겠지.
“남은 건 이기고 돌아오는 것뿐인데, 그건 구단주 비서의 업무 범위가 아니잖아?”
“글쎄, 어떨까.”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희주에게 추가로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 * *
경기 전날 마지막 훈련을 마친 선수단이, 다 같이 식당에 모였다.
식단은 선수들의 스태미나에 도움이 되는 메뉴로 구성되었고, 개인별 근육량에 기반해 칼로리를 섬세하게 계산해서 내놓고 있었다. 혹자는 사실상 환자식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물론 맛에도 신경을 쓴다.
[더럽게 맛없는 식재료와 더럽게 맛없는 조리법으로 더럽게 맛없는 음식을 만들어 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프로 쉐프라면 이 조건에서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
선덜랜드 소속 요리사들의 철칙이다.
잠시 후 1군 선수단 앞에 음식이 놓였다. 보통은 리버뷰 브래서리 메인 쉐프 카일이 메뉴를 소개하는 게 원칙인데, 오늘은 클럽하우스 구내식당 운영팀이 함께 선수들 앞에 섰다.
머뭇거리는 구내식당 운영팀장의 등을, 카일이 떠밀었다.
“뭐해, 빨리 설명 안 하고. 선수들이 기다리잖아.”
문자 그대로 등 떠밀려 나온 운영팀장이, 조심스럽게 메뉴를 설명했다.
“오늘 제공할 디너는, 그게, 유스컵 우승 기념으로 유소년 선수들에게 제공되었던 메뉴입니다. 트로피의 광택과 매끄러운 촉감을 재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신선한 야채를 그대로 갈아서 무스로 만들었고···.”
설명하는 팀장의 목소리에 점차 자신감과 열기가 돌기 시작했다.
“유스컵이 끝나고, 트로피를 직접 만져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꼭 손으로 하늘을 만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벅찬 감동을 그대로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선수단이 박수를 보냈다. 그러자 팀장은 열기에서 깨어났는지, 또다시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미 챔스까지 차지하신 여러분에게 EFL컵은 그렇게까지 대단한 대회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우물거리는 그를 바라보던 주장 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운영팀장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감사함다. 내일은 반드시 이길 검다.”
선수단의 박수와 환호가 더 커졌다. 이윽고 에디와 요니가 차례로 덧붙인다.
“예전에 캡틴··· 아, 쟤 말고요. 페르난데스 단장님이 말씀해 주신 적이 있어요. 트로피의 무게는 대회의 크기가 정하는 게 아니라, 담겨 있는 마음이 정하는 거라고요.”
“꼭 이기고 오겠습니다.”
요리 위에 올려진 야채 무스는 조금 차갑고, 매끄럽고, 끝맛에는 약간의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 아마도 아이들이 싫어할 것 같은, 하지만 건강에는 좋은 각종 야채를 잔뜩 갈아 넣었음이 분명했다.
그 씁쓸함까지 전부 포함해서, 최고의 맛이 났다.
* * *
[EFL컵 결승전, 선덜랜드 대 에버튼]
웸블리의 관중석은 최근 몇 년간 계속 그랬던 것처럼 선덜랜드가 훨씬 우세한 상태였다. 얼핏 보기엔 선덜랜드 홈이라고 믿을 정도로, 스탠드 곳곳에는 붉은 물결이 넘쳤다.
원정에 따라온 우드 부부와 브라더스, 빌리 노인, 그리고 앨리스도 흐뭇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웸블리도 어나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브렌든의 혼잣말에, 크리스가 빼액거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재빨리 크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달래며, 수잔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것 같아요.”
“하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선덜랜드 서포터 말고는 아무도 못 들어올 정도로 화끈하지. 웸블리는 그래도 중립이라 파란 유니폼도 상당히 보이는데?”
마일즈의 이야기에, 빌리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늘 방심은 금물이야. 에버튼에게는 EFL컵 우승에 딸려 오는, 다음 시즌 유로파 컨퍼런스리그 진출권이 아주 탐날 테니까.”
“마침 에버튼은 올 시즌 FA컵을 하필 우리에게 져서 탈락한 원한도 있으니까요. 아주 악착같이 덤벼들겠죠. 그러니까 응원해요. 더 열정적으로!”
씩씩하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 앨리스가 수잔과 크리스의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물론 유아 교육에 해롭지 않은 범위 안에서요.”
앨리스의 표정을 본 수잔이 그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선덜랜드 유소년팀 스태프로 일하더니, 아이들 교육에 신경 많이 쓰는가 보네. 훌륭해.”
“그럼요! 요즘엔 애들한테 야채 먹이는 방식을 같이 고민할 정도라니까요? 효과도 봤어요.”
“정말? 앞날에 대비해 나도 배워둘까.”
수잔의 눈빛에는 장차 크리스의 편식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역력해서, 주위 사람들을 살짝 숙연하게 만들었다.
특히 야채를 썩 즐기지 않는 마일즈의 표정이 볼만했는데, 그는 사랑스러운 아들 크리스의 둥그스름한 뒤통수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브렌든이 혀를 찼다.
‘제일 안쓰러운 건 크리스가 아니라 마일즈 자네야. 아무렴 수잔이, 아이 먹을 음식을 만들면서 자네만 면제시켜 줄 리 없잖은가?’
오히려 마일즈가 훨씬 힘들 거라는 게 브렌든의 예상이었다. 아빠에게는, 아이 앞에서 야채 요리 맛있게 먹어치워야 하는 의무가 추가되기 때문이다. 크리스야 그냥 꾹 참고 먹으면 그만이지만, 마일즈는 표정 관리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휘슬이 울렸고, 자신의 미래를 알 리 없는 마일즈는 언제나처럼 힘차게 팀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브렌든 또한 모르는 척, 응원이나 하기로 했다.
“힘내! 시퍼런 놈들에게 지지 마!”
반쯤은 오랜 이웃 마일즈에게, 나머지 절반은 선수들에게 보내는 응원이 웸블리의 푸른 하늘 아래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