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만지다 (5)
경기의 흐름은, 기자들의 사전 예상보다 훨씬 일방적이었다.
“솔직히 선덜랜드가 다소 힘 빼고 나왔을 줄 알았는데.”
런던 튜브의 선배 기자, 렌던의 의문에 엘렌이 곧바로 반응했다.
“그 이야기 말이죠? 선덜랜드가 지면 뉴캐슬은 유로파 컨퍼런스리그에 확실히 못 나가게 된다는 거요.”
결국, 진출권의 문제였다.
EFL컵 우승에 딸려오는 유로파 컨퍼런스리그 진출권은, 챔스에 나가는 선덜랜드에게는 의미가 없다. 따라서 선덜랜드가 우승할 경우, 진출권은 자연히 리그 6위 팀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현재 추세로 볼 때, 6위는 뉴캐슬이 차지할 가능성이 있었다.
“우승컵은 소중하다지만, 더비 라이벌 좋은 꼴을 보려고 할까?”
“그도 그렇지만, 뉴캐슬이 7위 할 가능성도 있어요. 5위로 유로파리그 진출을 노릴 가능성도 있고요. 최악의 경우 선덜랜드는 EFL컵을 놓치고 뉴캐슬이 유로파리그 나가는 꼴을 보게 되는데요.”
엘렌의 반론에, 렌던이 깔끔하게 수긍했다.
“하긴 선덜랜드는 자기들이 우승해서 뉴캐슬에게 진출권이 돌아가면 그걸 빌미로 거하게 놀려먹을 타입이지, 트로피를 포기할 팀은 아니야··· 그렇다면 선발 라인업은 왜 이렇게 낸 거지?”
도저히 결승이라고는 믿기 힘든 라인업이기는 했다. 선덜랜드의 베스트 일레븐 중에선 주장 잭과 부주장 요니, 그리고 3주장 에디만 피치 위에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팀은 로테이션조차도 너무 강력하다고 평가하신 사람은 선배님 아니셨나요?”
“즉, 지금의 선덜랜드는 에버튼 상대로 로테이션을 돌릴 만큼 여유가 있는 팀이다? 그것도 결승에서?”
“그렇다기보다는요.”
엘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보고 들은 선덜랜드 구단주와 감독은 딱히 그런 여유를 부릴 성격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발을 멈추지 말라는 로저스 감독 밑에서 유소년기를 보낸 두 사람은, 공식전에서는 인정사정 모르는 승부욕의 화신들이었다.
선덜랜드의 다음 경기 일정이 특별히 빡빡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오늘 라인업은 서브 멤버에 대한 배려이거나, 아니면···.
“···지금 멤버가 에버튼을 가장 잘 상대할 수 있다고 믿은 거겠죠.”
* * *
경기장을 응시하며, 브라이언은 희미하게 웃었다.
흐름은 선덜랜드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아직 점수는 바뀌지 않았지만, 내용상 에버튼은 분명히 마구 흔들리는 상태였다.
그 사실이 브라이언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코치 라이센스도, 체계적인 전술론도 없었던 어린 시절, 처음으로 지휘했던 팀에게 패배를 안겨준 상대. 베니테스는 브라이언에게 무척 특별한 감독이었다.
‘덕분에··· 아주 잘 알고 있단 말이지. 그쪽의 플레이에 대해서는.’
뛰어난 플레이메이커에게 맡기다시피 하는 공격, 아주 타이트한 라인 컨트롤, 공수의 간격을 메우기 위한 헌신적인 미드필더를 선호하는 취향까지.
대책은 이미 세워 두었다.
기동성을 중시해 젊은 선수들을 기용한 오늘의 조합에서도, 잭과 요니만은 빼지 않았다. 미드필더의 퀄리티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였다.
선덜랜드의 주장단보다 뛰어난 미드필더는 세상에 존재할 수도 있지만, 저들보다 헌신적인 미드필더는 축구계에 절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베니테스가 자랑하는, 타이트한 라인 컨트롤을 부숴버리기 위해서는···.
“들어가!”
축구에서, 조직력을 깨는 것은 언제나 상대보다 빠른 속도다. 브라이언의 호령에, 선덜랜드 선수들이 벌떼처럼 파상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오른쪽에서는 스티븐이 힘차게 파고들고, 반대편에서는 베리가 특유의 주력을 살려 타이트한 수비 조직을 강제로 벌어지게 만든다.
그 틈을 파고드는 것은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공간연주자, 그리고 최근 찬스 메이킹에 완벽히 눈뜬 주장이다.
경기 시작 10분도 지나지 않아, 선덜랜드가 명백한 우위를 잡았다.
* * *
“그렇지! 잘한다!”
허공에 주먹을 휙휙 휘두르던 희주가, 갑자기 상기된 얼굴을 내게 향했다.
“우리 오늘 되게 잘한다! 마르틴도 안 나갔는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에버튼은 마르틴이 상대하기 편했을걸.”
마르틴처럼, 속도와 개인기로 수비를 찢어발기는 타입의 윙포워드는 세상에 퍽 흔하니까.
원래 윙어 출신인 곤잘로를 풀백으로 끌어내리고, 직선적인 베리를 같이 내보낸 지금이 막기는 더 까다로울 것이다. 비록 세련된 맛이나 완성도는 부족해도, 의외성이라는 점에서는 평소의 선덜랜드 이상이다.
그리고 반대쪽도.
“22번 체크해!
에버튼 수비의 모든 신경은 문전의 크리그에게 쏠렸다. 컵 대회마다 조커로 꾸준히 활약해온 크리그는, 수비수에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하물며 왼쪽 측면에서는 베리와 곤잘로가 번갈아 폭격하고, 후방에서는 잭과 요니가 수시로 침투하는 상황이었다. 에버튼 수비진의 신경이 착실하게 갉아먹히는 중이었다.
그때, 줄곧 박스 오른쪽 모서리에서 기다리던 스티븐에게 공이 넘어갔다. 마크를 등진 채 공을 받는 스티븐을 포위하며, 에버튼 수비진이 거칠게 외친다.
“26번은 포스트 플레이밖에 못 해! 그러니까···.”
대체 몇 년 전 이야기를 하는 건지.
스티븐이 순간적으로 몸을 돌렸다. 어지간한 센터백에 버금가는 체격과, 잭에 필적하는 주력을 가진 스티븐의 턴에, 에버튼 수비가 순간적으로 밀려 쓰러졌다.
단 한 걸음 후, 스티븐이 박스 안에서 오픈 찬스를 맞이했다. 에버튼 센터백의 커버는 조금 늦었다.
문전에 여전히 크리그가 남아있기 때문일지, 어쩌면 26번 스티븐을 여전히 포스트플레이 원툴로 취급하는 것일지, 아니면 주전 라이트윙 자리에서 밀려나 서브가 된 선수라고 저평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에버튼 수비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침착하게 파고든 스티븐이 힘차게 공을 파 포스트로 걷어찼다. 달려드는 수비를 피해, 골키퍼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잠시 후, 공이 네트에 그대로 꽂혔다.
[선덜랜드 1 - 0 에버튼]
팬들의 환호 속에서, 스티븐은 두 팔을 벌린 채 우뚝 섰다. 자신 또한 당당한 선덜랜드의 공격수임을 과시하듯이.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 * *
이후에도 경기는 계속되었지만, 승패는 사실 선제골을 넣은 순간 정해진 셈이었다.
우리 선수들은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 발을 멈추지 않았고, 브라이언과 샐리는 에버튼의 추격을 허용하지 않은 채 그대로 경기를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그렇게 우리는, 창단 이래 세 번째 EFL컵을 차지했다.
선수들이 일제히 단상에 올랐다. 그리고 트로피 앞에 주장 잭이 우뚝 섰다.
잭의 모습에서는 관록과 여유가 느껴졌다. 그는 이미 주장으로서 리그 무패우승과 챔스 우승을 포함해, 클럽 팀 주장이 들어볼 수 있는 트로피를 단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본 선수다. 심지어 EFL컵을 드는 것은 벌써 두 번째고.
우리 주장이 자신감 있는 동작, 자랑스러운 얼굴로 트로피를 두 손으로 감싼 순간, 웸블리가 조용해졌다. 다들 함성을 지르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는 중이기 때문이다.
나와 희주도 마찬가지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트로피는 주장의 머리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대신 잭은, 트로피를 얼굴 앞에 가져와 가볍게 키스했다.
와아- 함성을 준비하던 웸블리의 관중들이 살짝 엇박자를 냈고, 옆에선 희주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저 세레머니, 에이미 씨하고 상의는 한 걸까? 아니면 설마 허락보다 용서가 편하다는 속셈으로?”
“아니, 저걸 에이미와 왜 상의해.”
“왜냐면 입술은 이제 에이미 씨 거잖아?”
그러다간 조만간 잭을 나눠 갖자고 하겠다. 입술은 에이미 거고, 심장은 구단 거고, 마음은 팬들 거고, 왼팔은 주장 완장과 한 세트 취급이니까.
아무튼, 잭이 왜 그랬는지는 금방 밝혀졌다.
경기 종료 후 믹스드존에서, 우승 소감을 묻는 기자들을 바라보며 선덜랜드의 주장은 다소 뜬금없는 답변을 했다.
“야채 맛이 났슴다··· 났습니다.”
[네? 트로피에서··· 야채 맛이 난다고요?]
기자들이 혼란스러워했다. 구석에서는 ‘아주 홍시 맛이 난다고 하지?’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도 보여서, 한류 드라마에 관심 있는 부류가 누구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감독의 인터뷰가 외계어인 건 그렇다 치고, 그간 인터뷰 잘하던 주장까지 이렇게 된 건지, 선덜랜드 드레싱룸엔 정말로 수맥이 흐르는지 같은 의문이 기자들의 눈동자에 떠올랐다.
하지만 구단 관계자는 전부 눈치챘다. 잭이 어째서 굳이 트로피에 입을 가져다 댔는지를.
결승전 전날 저녁 메뉴가, 트로피의 촉감을 재현한 야채 무스였기 때문이다.
선덜랜드 주장은 우승 소감 인터뷰에서 스태프의 노고를 절대로 거론하지 않는다. 모든 공을 팬에게 돌리고 감사를 표하는 게 페르난데스 이래 선덜랜드 주장단의 전통이었고, 잭 또한 충실히 지키는 원칙이다.
하지만, 말이 아닌 행동으로도 감사의 마음은 얼마든지 전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스태프의 노고를, 선수단은 절대로 잊지 않았다는 단호한 선언이기도 하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손으로 하늘을 만지는 느낌이라는 뜻입니다.”
구석에서 인터뷰를 지켜보던 아카데미 운영팀장이 울컥했는지,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이제 세 개 남았습니다. 시즌 끝까지 더 많은 트로피를 가져오기 위해 싸울 겁니다. 하늘을 만지러 다녀오겠습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응원 부탁드립니다··· 사랑함다!”
* * *
이후, 트로피 세레머니와 아카데미 운영팀의 사연은 비공식적으로 선덜랜드 팬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최초 출처가 어디인지는 의견이 갈렸다. 원정을 마치고 선덜랜드에 돌아온 앨리스가 축구 펍 [죽어도 맥켐즈]에서 풀어놓았다는 이야기가 최초라는 설과, SNS에 가계정으로 정보를 흘린 아벨이 최초 발신자라는 의견이 분분했다.
조금 마이너한 의견으로는 한국어 커뮤니티에 퍼져나간 ‘선덜랜드 썰 푼다’가 최초라는 설도 있다.
사실 선후를 따질 것도 없이 전부 비슷한 타이밍이긴 했다. 기본적으로 구단 홍보에 도움이 되는 미담이었고, 대외비가 아니기 때문에 직원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루트로 은근슬쩍 정보를 흘렸던 것이다.
팬들은 입을 모아 완벽한 우승 소감이자 최고의 세레머니였다고 칭송했는데, 특히 수잔의 지지가 높았다.
“트로피는 야채 맛이야. 우승의 맛이지. 정성껏 요리해서 꼭꼭 씹어먹으면 하늘을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다.”
“정마알?”
“진짜야. 캡틴이 그랬잖아. 그럼 우리 크리스도 야채 먹어볼까?”
“먹을래요!”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 채소 소비량이 급증하면서 소매점 주인도, 아이들에게 야채를 먹일 수 있게 된 부모들도 다들 싱글벙글했다.
유일하게 불행했던 사람은···.
“아빠도 야채 맛있어요?”
“응, 아주 맛.있.구.나··· 근데 엄마는 가지 볶음을 왜 냉장고에 하루 종일 넣어둔 걸까?”
“그야 실패작을 크리스 먹일 순 없잖아요?”
“그럼 실패작을 나한테 먹이는 건 말이 되고?”
···아마 나이 먹고도 편식을 고치지 못한 마일즈 우드였을 것이다.
* * *
마일즈의 불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덜랜드는 이후에도 계속 잘 나갔다.
챔스 16강에서 스포르팅이라는 비교적 쉬운 대진을 뽑은 선덜랜드는, 이스타디우 주제 알발라드 원정을 3-0으로 깔끔하게 셧아웃하며 크게 앞서나갔다.
이후, 홈에서 열린 16강 2차전에서는 이른바 ‘유치원’ 멤버라는 젊은 선수들을 전부 내보내는 여유를 부리며 8강 진출을 확정했다.
[This is Sunderland]
한편, FA컵 16강에서는 웨스트 브롬과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선덜랜드보다는 한 수 아래로 평가받는 팀이지만, 4년 전에 FA컵에서 처음 만났을 땐 무승부로 비긴 적이 있었다. 꽤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유럽 대회를 소화하느라 주전 선수들의 체력이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재경기까지 끌려갔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이적 직후 부진하던 바스티아노가 영국 무대 데뷔골을 뽑아내면서 가까스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던 과거가 있는 상대였다.
그래서 웨스트 브롬은 [선덜랜드 킬러]라는 자극적인 슬로건을 꺼낼 정도로 경기에 자신감을 내보였다. 선덜랜드를 꺾을 수는 없더라도, 재경기까지는 끌고 가겠다는 의도가 역력했다.
하지만···.
[바스티아노 라파, 해트트릭입니다! 선덜랜드, 웨스트 브롬을 네 골 차로 따돌렸습니다!]
[웨스트 브롬이 선덜랜드 킬러? 아닙니다! 바스티아노가 웨스트 브롬을 부수고 있습니다!]
[선덜랜드, 정말 강합니다! 올 시즌, 이 팀을 막을 수 있는 축구팀이, 세상에 존재하는 걸까요?]
[···말씀드리는 사이 크리그가 추가골을 뽑아냅니다. 오 대 영, 선덜랜드가 FA컵 8강에 향합니다! 올 시즌에 다시 한번, 하늘을 만지러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