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라인 (1)
<공은 내 앞에서 멈춘다 - 파비오 칸나바로>
한편 FA컵 16강전의 다른 블록에서는, 아직도 한창 사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보로가 따라붙습니다! 보로, 마침내 경기를 원점으로 돌립니다! FA컵에서의 타인티스 더비는, 리버사이드 스타디움으로 무대를 옮겨서 이어집니다!]
뉴캐슬 감독 시어러의 얼굴이 아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중계 화면 너머로도 알 수 있을 만큼.
분노로 부들거리는 입술이 끊임없이 달싹였고,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경기를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감독이라는 지위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헤어드라이어를 쏟아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분한 마음은 이해가 되었다. 저 사람이 뉴캐슬의 현역이던 시절에, 뉴캐슬은 우리나 미들즈브러보다 분명히 강팀이었고, 심지어 챔스에도 여러 차례 나가던 강팀이었으니까.
시어러가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뛰던 10년간, 우리가 뉴캐슬보다 높은 순위로 마감한 시즌은 딱 두 번에 불과할 정도다.
그런데 지금은 선덜랜드보다 한 수 아래의 팀으로 낙인찍혔고, 오늘은 홈에서 보로에게 비긴 끝에 재경기 확정이다.
뉴캐슬의 레전드로서는 누구보다 분하겠지.
구단 유소년 출신이라 그런지, 시어러의 심정이 조금쯤은 이해가 될 것도 같다. 그래서일까? 더비 라이벌의 불행에도 잭과 요니의 표정 또한 썩 밝지 않았다.
“만약에 다시 그 시절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도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 시절?”
“우리는 하부 리그를 벅벅 구르고, ‘그 팀’은 1부라고 으스대던 시절 말야.”
“아아, 내 눈으로 그 꼴 보면 죽고 싶어지겠지.”
씁쓸하게 말하는 잭과 요니의 곁에서, 마찬가지로 클럽 유스 출신인 해리슨이 슬쩍 끼어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구단주님이 계시니까, 일어날 수 없는 일 아닐까요?”
그러자 주위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구단주는 원칙적으로 사이드라인 안쪽의 일에는 관여하지 못해. 경기의 승패는 나한테 달린 문제가 아니야. 그러니까···.”
결국 축구는 선수들이 하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만일 축구가 구단의 지원으로 승패를 가르는 종목이었다면, 이미 진작부터 맨시티와 파리가 트로피를 나눠 가졌을 것이다.
팀을 위해 최고의 지원을 해주고 싶은 마음은 분명하지만, 그와 별개로 사이드라인 안에서 승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선수들의 일이다. 좀 더 폭을 넓히면 감독과 코칭스태프의 일이고.
매치데이 당일, 구단주가 할 수 있는 건 비서와 함께 목청을 높여 응원하는 정도다.
그렇게 공을 선수들에게 돌리자, 주장단의 표정이 변했다.
“알고 있슴다. 방심하지 말고 뛰라는 말씀 아님까? 다들 구단주님 말씀 들었지? 시즌 마지막까지 죽기살기로 뛰는 거다!”
“대충 뛰는 건 어느 경기에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혹시라도 특히 그 팀이나 보로 상대로 대충 뛰고 싶은 사람은 미리 나한테 이야기해. 그냥 지금 같이 죽게.”
주장단의 반응에 누군가 피식 웃었다.
“이러다 FA컵 8강 상대가 ‘그 팀’이나 보로로 잡히면 아주 볼만해지겠네.”
음, 그건 내 생각에도 꽤 볼만해질 것 같다. 확률은 낮을 것 같지만.
그때 희주가 키득거리며 끼어들었다.
“그렇게 잡히면 축협은 엄청 좋아하겠죠. 그치만, 그렇게 딱 들어맞을까요? 애초에 그 팀은 보로에 발목 잡혀서 올라오지도 못할 것 같고요.”
방금 확률이 오른 기분이 드는데.
일주일 후, 뉴캐슬은 리버사이드 스타디움에서 치러진 FA컵 16강 재경기에서 미들즈브러를 잡아내며 8강행 막차에 탑승했다.
그리고.
우리의 FA컵 8강전 상대는 뉴캐슬로 정해졌다.
* * *
아마도 여러 사람이 기뻐했을 대진이었을 것이다.
컵 대회에서의 타인위어 더비는 전통적인 흥행 보증수표고, 특히 우리와 뉴캐슬 모두 돈을 펑펑 쓰는 요즘에는 영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더비가 되었다.
CS팀은 모처럼의 빅매치에 벌써부터 바빠졌고, 아드리안은 또다시 굿즈 찍어낼 생각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브라이언과 샐리는 그 팀을 어떻게 박살 낼까를 기쁘게 고민했고, 잭과 요니는 의욕에 불탔다.
심지어 희주까지 기뻐하는 중이다. 한동안 뚝 끊겼던 공물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거든··· 에라이 부두술사야.
반면 근심걱정에 가득한 부류도 있다. 예를 들면 메디컬 팀이다.
“아시다시피 FA컵 8강전은 챔스 8강과 시기가 겹칩니다. 그리고 FA컵과 같은 주에는 리그 31라운드가 열리고요.”
“31라운드··· 보로 원정이군요.”
그래서 나는 메디컬 팀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타인위어 더비와 위어티스 더비를 연속으로 치르는 일정 특성상, 선수들이 과열될 것을 우려하는 것이리라.
메디컬 팀장 버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급적 뉴캐슬전과 보로전, 둘 중 한 경기에서는 잭과 요니에게 휴식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브라이언은 동의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까?”
“감독님한테는 말씀도 못 드렸습니다. 샐리 수석코치가 딱 잘라 거절했거든요.”
샐리가?
내 눈짓에, 희주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샐리를 호출했다. 이미 자기들끼리는 몇 번 이야기했는지, 샐리는 내 자리에 앉은 버드를 보자마자 상황을 짐작한 것 같았다.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견엔 동의하지만, 그럼 리그 30라운드에서 쉬게 하면 그만 아닌가요? 아니면 32라운드에서 뺄 수도 있고요.”
“수석코치님, 실례지만 아침에 하루 세 끼 분량을 몰아 먹고, 나머지 시간에 종일 일만 하면 사람이 망가지지 않겠습니까? 휴식도 그와 마찬가지로 중간중간 적절하게 취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자 샐리의 얼굴에 가벼운 경악이 스친다. 짚이는 데가 있는 나와 희주가 사이좋게 한숨을 내쉬었다.
“샐리, 그러다 건강 해칩니다.”
“아니 그런 식습관으로 그 이기적인 몸매는 대체 뭔데.”
잠시 수석코치의 식습관에 대해, 그리고 높은 확률로 수석코치에게 시달리고 있을 분석팀의 식습관에 대해 잠깐 조언한 다음,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
“빡빡한 일정은 코치진도 알고 있어요. 선수단 전체의 체력 관리에 신경 쓸 예정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JJ가 필요해요.”
“더비니까 유스 출신 듀오의 열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연속 출장은 위험합니다. 챔스도 남아 있으니까요.”
“홈이라면 빼겠는데, 두 번 다 원정인걸요. 지금 주장과 부주장 없이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 다녀오라는 건 아니죠?”
이야기가 평행선을 달리는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런데 샐리, 혹시 브라이언도 같은 생각입니까?”
“네, 불러올까요?”
샐리는 곧바로 대답했고, 망설임도 거의 없었다. 브라이언도 같은 생각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아뇨.”
축구에서, 선수의 선발은 기본적으로 감독의 권한이다. 종종 어기는 구단도 있는 모양이지만, 우리 팀에서는 되도록 지키려고 노력 중이다.
그리고 나는 혹시라도 선수 선발에 참견할 때는 항상 조언이라는 형태를 유지했고, 구단주실에 감독을 호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우리 스태프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스태프들의 얼굴에서 희비가 교차했다. 샐리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고, 버드는 우울한 얼굴을 떨궜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건데.
“그래도 선수 보호라는 팀의 대원칙을 깨고 싶진 않군요. 샐리, 브라이언에게 전해주세요. 가급적 메디컬 팀의 권고를 따르라고요.”
* * *
구단주실의 개입 이래, 우울한 사람이 몇 명 늘어났다. 브라이언과 샐리는 아주 살짝 시무룩해졌고, 잭과 요니는 아주 나라를 잃어버렸다.
특히 잭의 상태가 심각했다. 수시로 한숨을 달고 살아서, 보다 못한 에디가 따로 잭을 불러내야 했다.
“주장의 덕목이 뭔 줄 알아?”
에디의 질문에, 잭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함성이 그치지 않게 하는 것. 페르난데스 단장님께 그렇게 배웠어.”
“그분답네. 그런데 내 생각은 조금 달라. 주장의 덕목은 부서지지 않는 거야.”
“······.”
에디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눈치챈 잭이 입을 다물었다. 다만, 에디 또한 그렇다고 멈출 생각은 없었다.
“작년 맨시티와의 3연전에서, 너는 부서지기 직전이었어. 체력은 떨어졌고, 폼도 평소 같지 않았지. 요나스는 쥐가 나서 제대로 뛰지도 못했고. 부정하지는 못할 거야.”
“···그래서?”
“두 번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건, 우리 모두의 책임이었으니까.”
잭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신종 쿠데타 시도냐?”
“뭐, 너하고 요니가 없어지면 3주장님 세상이긴 하지··· 그렇다고 재킷 안주머니에 손 넣지 마라. 총 꺼내려는 것 같아서 무섭잖아.”
물론, 잭의 재킷 주머니에서 권총이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영국은 총기 규제가 까다로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대신, 잭이 꺼낸 것은 선덜랜드의 주장 완장이었다.
잭이 매치데이에 항상 착용하던 물건이다.
선덜랜드의 주장과 3주장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자신의 완장을 넘긴 주장이 먼저 돌아섰고, 에디는 그런 잭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잭의 모습이 시야에서 거의 사라졌을 때, 목소리가 불쑥 울렸다.
“에디 선수도 힘들잖아요. 올 시즌은 주장 다음으로 많은 경기를 소화하고 있는데··· 아무리 센터백이라도 버티기 힘들 텐데요.”
해리슨과 눈이 마주친 에디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게 남자라는 거야.”
“어, 방금 멋있었어요.”
“그치? 그런데 나는 왜 여친이 안 생기는 걸까?”
“항상 마지막에 그렇게 덧붙이기 때문 아닐까요.”
“오, 해리! 부탁이니까 너는 나를 두고 먼저 가지 말아다오. 혹시라도 너한테 역전당하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아.”
“···저는 결혼 일찍 할 생각이긴 한데요.”
“에라이, 배신자야.”
“별수 없어요. 어영부영하다가는 짐에게 역전당할 것 같아서요.”
살짝 웃는 해리슨을 바라보며, 에디도 마주 웃었다.
그리고 손에 남겨진 주장 완장을 꾹 쥐었다.
* * *
[FA컵 8강전, 뉴캐슬 대 선덜랜드]
뉴캐슬 원정을 맞아, 선덜랜드는 또다시 원정 버스를 대량으로 동원하며 팬들을 티켓 한계까지 실어 날랐다.
하지만 세인트 제임스 파크의 수용인원에 비하면 턱도 없는 수준이었다. 온통 뉴캐슬의 검은색으로 물든 경기장에서, 선덜랜드 팬들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경기 시작 전, 코인토스를 앞두고 에디는 평소보다 훨씬 느긋한 걸음으로 움직였다. 눈이 마주치자 뉴캐슬 주장 매튜의 얼굴에 의아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이것 봐라? 진짜로 네가 오늘 주장이야?”
에디는 대답 대신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에디의 그런 태도가 심기를 자극했는지, 매튜가 인상을 썼다.
“성적 좀 나온다고, 감히 우리 상대로 로테이션 돌린단 말이지.”
계속 싱글거리며, 에디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너희도 우리 상대로 로테이션 돌린 적 있잖아. 그때 우리는 불평한 적 없어.’
그렇게 팩트로 때리면 속이 시원할 것 같긴 했다. 하지만 팀의 주장이라면 조금 다른 대답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시절은 에디가 아직 선덜랜드 유니폼을 입기도 전이다.
그래서 에디는 빙긋 웃으며 유들유들하게 받아쳤다.
“그러게. 유감이야. 어쩌다 내가 격 떨어지게 너희 전담이 돼버려서··· 이러니까 꼭 서브 같네.”
“이 자식이! 오늘 아주 박살을 내 줄 테니까 각오해라.”
“이봐, 주장의 덕목이 뭔 줄 알아?”
마주친 시선에 불꽃이 튀었다. 둘의 신경전을 보다 못한 심판이 주의를 줬고, 둘은 적어도 겉으로는 수긍한 것처럼 재빨리 입을 다물고 코인토스를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는 코인 토스였다. 선덜랜드와 뉴캐슬의 경기에서는 언제나 홈팀이 선공을, 원정팀이 진영 선택권을 고르기 때문이다.
코인 토스를 마친 에디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서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진 상태였다.
[주장의 덕목은, 부서지지 않는 거야.]
잭 또한 지금까지 충실하게 지켜온 미덕이었다. 페르난데스에게서 주장 완장을 물려받은 이래, 카드는 먹어도 퇴장을 당한 적은 없다. 부상으로 걸어 나간 경기조차 손으로 꼽을 정도다.
그렇게, 선덜랜드의 주장은 줄곧 부서지지 않은 채 버텨냈다. 그의 등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던 페르난데스도, 혹은 그의 앞에서 끈질기게 일어나던 잭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오늘은 그의 차례다.
에디는 자신의 왼팔을 슬쩍 쓰다듬었다. 그리고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느긋한 동작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오늘은 내가 선덜랜드 주장이다. 그러니까.”
온 사방에서 쏟아지는 조르디의 도발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자신 있으면, 부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