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기다린다 (1)
<머리는 가슴에게 이야기하고, 가슴은 발에게 이야기한다 - 펠레>
런던에 사는 축구 팬 소년 아이반과 제이슨은 각각 첼시와 토트넘의 오랜 팬이었다.
원래는 그것만으로도 서로 사이가 좋을 리 없는 관계였지만, 둘은 의외로 가까웠다. 굳이 따지자면 첼시는 서런던 팀이고, 토트넘은 북런던 팀이라 서로에게 최악의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이반이 아스널을 응원했거나, 제이슨이 풀럼이나 브렌드퍼드 팬이었으면 아주 볼만했겠지만, 다행히 둘이 응원하는 팀은 직접적인 라이벌리티에서는 살짝 벗어난 상태였다.
게다가 둘 사이에는 다른 공통점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두 번째로 좋아하는 축구팀이 선덜랜드였던 것이다.
“웸블리 보러 갈 거지?”
“당연하지.”
FA컵은 4강전부터 런던의 웸블리 경기장에서 열린다. 둘은 꼼꼼하게 일정을 체크했고, 재빠르게 티켓팅을 마쳤다.
문제는 챔스 결승전이었다.
“챔결은 티켓 더럽게 비싼데.”
“알바라도 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두 소년이 무심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물론 둘은, 어지간한 알바로는 결승전 티켓값을 절대로 못 뽑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일단 잔디 좀 깎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둘은 물끄러미 신문 가판대 응시를 응시했다. 런던 튜브의 선덜랜드 특집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선덜랜드를 위한 기도를 안다. 몇 번이고 승격에 실패하던 시절, 팬들이 흘렸던 눈물을 안다. 축구에서 진다고 누군가가 죽지는 않겠지만, 대신 죽을 만큼 슬퍼한다는 것도 선수들은 전부 알고 있다.]
“확실히 선덜랜드는 멋진 팀이지. 챔스 결승도 꼭 보러 가고 싶은데.”
선덜랜드가 챔스 결승에 못 나올 가능성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화제가 선덜랜드로 흐르자 제이슨이 먼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선덜랜드에 알바 자리 많다더라. 브렌든 씨가 그랬으니까 확실해.”
아이반이 혀를 찼다.
“숙박비가 더 나오겠다 인간아. 하루 이틀이면 마일즈 대선배님 댁에서 신세를 지겠지만, 두 달을 머물면서 버틸 순 없잖아?”
브렌든이 들으면 통곡했을 발언이었다. 왜 마일즈는 대선배고 자기는 브렌든 씨냐고. 물론 런던 소년들이 그런 디테일을 신경 써줄 가능성은 없다.
제이슨이 진지하게 말했다.
“자세히 좀 들어 봐. 요즘 단기 알바 시급이 엄청 올랐대. 대충 이 정도로.”
그러면서 스마트폰에 숫자 몇 개를 꾹꾹 찍자, 아이반의 눈이 커졌다.
“선덜랜드가 요즘 호황이라고 듣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준다고?”
두 달쯤 열심히 일하면 챔스 결승 티켓값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은 시급이다.
제이슨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요즘 축구 펍이 엄청 호황이라더라고.”
“그럴 줄 알았다. 야, 우린 아직 펍에서 알바 못 해.”
“끝까지 들어봐. 축구 펍이 모조리 사람을 끌어들이니까, 카페나 빵집, 식당에서 일할 사람이 없는 거야.”
“알바시장의 연쇄이적인가.”
둘의 눈이 마주쳤다.
“숙식만 해결하면 어떻게든 되겠는데?”
“호스텔은 싸.”
잠시 후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대학 진학 계획이 없었기에, 굳이 식스폼은 다닐 생각도 없었다. 사회 진출 전에 주어진 약간의 유예, 청소년기의 마지막에 남다른 추억을 남길 기회다.
“가자.”
* * *
클라라는 물끄러미 카페의 입구를 응시했다. 손잡이에 매달린 검은 고양이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선덜랜드 축구단과 제휴 중이라는 표시로, 선덜랜드 시즌권 소유자나 구단 관계자는 할인 혜택을 받는 가게였다.
클라라는 그곳에서 아르바이트 중이었다. 원래는 알바에 관심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 너무 바쁘다는 친구 재닛의 하소연에 그만 넘어가고 만 것이다.
확실히 도시 전체에 활력이 넘치는 상태긴 하다. 관광객도 많이 늘어났다고 들었고, 길거리를 딱 봐도 예전보다 훨씬 사람이 많다.
그러니 카페도 바쁘기야 하겠지만···.
“있잖아, 재닛. 나는 카페 일은 정말로 잘 모르는데.”
“괜찮아. 클라라 너는 암산 잘하잖아? 기계도 잘 다루고. 그러니까 카운터만 맡아줘. 주문받아서 포스기에 치면 돼.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
“카운터가 그렇게 바빠?”
“바빠.”
사실은 카운터는 그렇게까지 바쁜 역할은 아니지만, 재닛에게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주위에서도 손꼽히게 예쁜 클라라를 카운터에 세워 두면 틀림없이 매상이 늘어날 것이라는 속셈이다.
그때 클라라가 천진하게 물었다.
“어? 카페인데 Kuk-pong도 팔아?”
재닛이 키득거렸다.
“맞아. 알콜을 날려버린 버전이지만. 구단주 비서님이 착안하신 거야. 뱅쇼도 카페에서 파는데. Kuk-pong도 팔 수 있는 것 아니냐고.”
“그렇구나. 그럼 저··· 구단 엠블럼처럼 생긴 쿠키는?”
“선덜랜드 공식 쿠키야. 구단 스낵바에서 공급받고 있어. FC 선덜랜드 먹거리는 싸고 품질 좋기로 유명하거든. 스태프 중에 먹을 것에 진심인 사람도 많고.”
“재닛 너처럼?”
“그래, 나처럼.”
정작 재닛은 요즘 하도 바쁘게 움직이는 바람에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날씬한 체형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그때 카페 앞을 젊은 남녀가 지나갔다. 복장을 보면 점심시간을 맞은 직장인 같았다. 재닛이 재빨리 카페 입구에 달려가 목청을 높였다.
“매치데이 머플러 세트 있습니다! 매치데이 머플러 세트! 커피 한 잔과 머플러를 합쳐서 겨우 5파운드입니다!”
잠시 후, 두 세트 주문을 따낸 재닛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본 클라라가 고개를 예쁘게 갸웃거렸다.
“매치데이 머플러가 보통··· 카페에서 팔 만한 물건이던가?”
“노점에서도 팔잖아. 카페에서 못 팔 이유가 있겠어? 저기, 클라라. 카페에 사람들이 왜 온다고 생각해?”
“음,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려고?”
클라라의 천진한 답변에, 재닛이 가슴을 편 채 고개를 저었다.
“이탈리아인 같은 소리 하지 말고. 그런 취향이라면 길 건너 플로리안에 가겠지.”
“바스티아노 씨 단골 카페 말이구나.”
“여긴 영국이야. 차 한 잔의 여유가 필요하면 홍차를 마시러 갈 거야. 따라서 카페에 오는 사람은 둘 중 하나야. 카페인이 필요한 직장인! 그리고 축구 팬!”
“축구와 카페가 관계가 있어?”
“선덜랜드 도심에 오는 사람의 절반쯤은 축구 팬이거든. 그리고 직장인의 대부분은 티엠씨에서 회사를 다녀. 선덜랜드 축구팀에 대한 호감이 높은 편이지. 따라서 매치데이 머플러가 잘 팔릴 수밖에 없겠지?”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카운터 근처에 앉은 손님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눈이 마주치자 재닛은 황급히 목을 움츠리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목소리가 너무 컸죠? 친구가 이번에 새로 알바하는데, 이것저것 알려주느라고요.”
“그건 상관없지만, 혹시 괜찮으면 연락처를 좀 받을 수 있겠습니까?”
손님의 이야기에, 재닛의 목이 더 움츠러들었다.
“죄송해요. 저희 카페는 헌팅 같은 건 좀··· 특히 얘는 남자친구도 있고요.”
그러자 손님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헌팅이 아닌데··· 클라라 양은 나 알잖아요?”
클라라가 키득거렸다.
“아드리안 씨였죠? 재닛, 이분은 선덜랜드 축구단 스태프셔. 팀장님이고.”
“네!? 정말요!?”
재닛의 눈이 커졌고, 목소리가 빨라졌다.
“저는 작년부터 선덜랜드 스태프로 일하는 게 목표였어요. 지금도 이렇게 열심히 아르바이트로 업무 경험을 쌓고 있고···.”
“아주 훌륭합니다. 선덜랜드 축구단은 아가씨 같은 인재를 원합니다.”
“작년 공채에선 떨어졌지만요.”
“클라라 양과 친구면 나이 때문에 채용이 어려웠겠죠.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면 꼭 연락 주세요.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드리안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테이블 위의 커피를 마저 마신 다음, 빈 잔을 반납했다. 그리고 정중하게 명함까지 남기고 떠났다.
재닛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클라라를 반쯤 끌어안았다.
“클라라! 나 드디어 꿈에 그리던 선덜랜드 CS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자 클라라가 살짝 어색하게 웃었다.
“CS팀은 관계없을 것 같은데··· 저분은 선덜랜드 신상품기획팀장이셔.”
명함을 받으면 꼭 이름과 소속을 확인하는 것이 비즈니스 에티켓임을, 재닛은 이날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배우게 되었다.
* * *
[선덜랜드의 경기장 안에는 죽기 살기로 뛰는 선수가 있고, 밖에는 열광적인 팬들이 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도시에서 열리는 챔스 결승전을 준비한다.]
[팬들은 벌써부터 도시를 붉게 물들이고, 시민들은 손님맞이 준비에 한창이다. 그리고 선수들은 반드시 결승에 진출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홈에서 열리는 경기를 최대의 축제로 만들겠다는 결의의 표현이다.]
런던에서 큰 반향을 부른 엘렌의 기사였는데, 정작 선덜랜드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태블릿으로 신문 기사를 체크하던 수잔이 불쑥 말했다.
“런던은 인구가 많아서 이런 것도 기사가 되는 걸까요?”
“응?”
“인간은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죽어버린다! 뭐 이런 게 기사로 나온 느낌이라서요.”
수잔이 태블릿을 흔들자, 아침 식사 중이던 마일즈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는 보통 반대로 써야지. 개가 사람을 무는 것보다 사람이 개를 물어야 특종이라고 하는 것처럼.”
“그러게요. 선덜랜드 사람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서 시큰둥하네요.”
“하지만 예전에도 당연했던 건 아니었어.”
수잔이 배시시 웃었다.
“알아요. 힘든 시절도 있었다는 걸. 그래도 꾹 참고 넘기니까 좋은 날도 오는 거죠? 그쵸?”
“그렇지 뭐. 당신 요리 솜씨도 아주 좋아진 것처럼.”
마일즈가 살짝 놀리자, 수잔이 얼굴을 붉혔다.
사실 결혼 전의 수잔은 식사를 부실하게 하는 편이었다. 축구장 앞 푸드트럭 핫도그를 소울푸드로 삼았을 정도로. 딱히 식탐도 없었고 평소 요리를 해먹지도 않다 보니 솜씨가 늘 기회가 없었다.
덕분에 신혼 초에는 아침마다 꽤 처참한 그림을 만들었다. 너무 구워서 파삭하다 못해 종이 같은 식감을 자랑하는 베이컨이나, 파스타도 아닌데 속이 덜 익은 알덴테 소시지 같은.
작년까지만 해도 수잔의 요리 중 유일하게 상태가 멀쩡했던 건 전날 빵집에서 사다가 아침에 토스터로 구워 내놓는 식빵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토스트는 도저히 망칠 수 없는 레시피 아니야?]
그때마다 수잔은 볼을 부풀리며 항변했다. 토스터로 식빵 굽는 것에도 고도의 노하우가 필요하다며.
마일즈 본인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마냥 부정할 수도 없었다. 신혼 생활의 평화 차원에서도 그렇거니와, 식빵을 벽돌로 바꿔놓는 앨리스의 사례가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수잔의 요리 실력은 이제 흠잡을 데 없다. 흡족한 기분으로 마일즈는 식사를 마쳤다. 수잔의 말처럼, 꾹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오는 법이니까.
축구공을 끌어안고 거실에서 뒹굴거리는 크리스를 보면서, 마일즈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아들, 축구가 가져다준 행복이다.
“자꾸만 공을 끌어안는 걸 보니 골키퍼가 되려고 그러나?”
“발로 찰 만한 사이즈가 아니라 그런 거 아닐까요?”
처음에는 아기의 체격에 맞는 작은 축구공을 사줬다. 흔히 말하는 스킬볼, 0호 축구공이었다. 다소 작은 감이 있긴 해도 크리스가 가지고 놀려면 어쩔 수 없지 싶었는데, 막상 크리스는 불만스럽게 빼액거리며 진짜 축구공을 요구했다.
그렇다고 곧바로 선덜랜드에서 선수 사인볼을 사다가 아이 장난감으로 내준 수잔의 배포도 상당한 편이지 싶긴 하다.
그때 크리스가 끌어안았던 공을 품에서 놓았다. 거실 바닥에 공을 살짝 굴리며 일어나더니, 살짝 짧은 느낌이 있는 다리로 공을 기세 좋게 걷어찼다.
힘은 없었지만 자세는 퍽 그럴듯했다. 그 위에 아빠 특유의 콩깍지가 더해지자, 마치 어린 메시 비슷한 동작처럼 보였다.
마일즈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근데 유소년 아카데미 입단은 몇 살부터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