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등에 짊어진 것 (1)
<골키퍼가 첫 번째 공격수고, 포워드가 첫 번째 수비수다 - 요한 크루이프>
파리의 10번, 네이마르는 선덜랜드의 7번과는 적지 않은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예전에는 바르샤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고, 같은 남미 출신으로 남다른 친분을 과시했다.
그랬기에 축구의 신이 처음 바르샤를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파리행을 권했었고, 파리 대신 선덜랜드로 옮겼을 때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왜 선덜랜드였습니까? 돈이 문제였다면 파리라는 선택도 가능했을 텐데요.]
그때 돌아온 대답은 너무나 예상 밖이어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선덜랜드에 가면 축구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결과가 입증하기는 했다. 선덜랜드는 두 시즌 전에 빅 이어를 차지한 팀이 되었고, 심지어 그 결승에서는 파리 자신들을 꺾고 승리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하기는 힘든 대답이었다. 그럼 다른 팀에서는 축구를 할 수 없다는 것인지.
오랜 의문은, 이 도시에 발을 디딘 순간 풀렸다.
온 사방이 빨간 물결이다.
건물 곳곳이, 길거리의 사람들이. 규모로 따지면 파리의 반의반도 안 될 중소 도시인데 축구에 대한 열기의 질량은 대등하다.
“이제 알겠군.”
네이마르의 혼잣말에 동료들이 의문 섞인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파리의 10번은 피식거리며 덧붙였다.
“그냥, 여기가 왜 원정 지옥인지 알겠다고.”
세상에는 정말로 축구에 미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축구단 주변에서는 의외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인물 유형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시 전체가 축구에 진지하게 미쳐 있는 그런 장소는··· 선덜랜드 이외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동료들이 네이마르의 감상에 동의했다.
“꼭 용광로 같아.”
“그러게. 탄광과 조선소가 있던 도시라서 그런가?”
‘신이 있는 도시라서 그렇겠지. 그것도 둘이나.’
선덜랜드가 세웠다는 홈 최다 무패 기록은 물론 대단하지만, 조금도 놀랍지는 않았다. 이 도시에서 선덜랜드를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
‘그럼, 비기고 돌아갈 수는 있을까?’
원정 도착 한 시간 만에, 파리 선수단은 1차전 목표를 ‘무승부’로 수정했다. 이곳에서 선덜랜드를 꺾는다는 만용을 부리느니, 얌전히 내려앉아 버티면서 2차전을 대비하는 게 훨씬 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잠시 잊고 있었다. 선덜랜드에는 상대 팀의 약점을 후벼파는 스페셜리스트가 있다는 것을.
그것도 둘이나.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 선덜랜드 대 파리]
킥오프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선덜랜드가 라인을 올리기 시작했다. 파리 선수단은 다소 황당한 심정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천하의 파리 상대로 라인을 올려?”
“아, 물론 합리적인 판단이긴 해··· 우리는 오늘 버티고 비기기만 하려고 했으니까. 근데 내가 궁금한 건, 어떻게 이놈들이 시작하자마자 라인 올리냐는 거야.”
“이놈들, 우리 숙소에 도청기라도 달았나?”
서로를 마주 보며 황당해하면서도, 파리 선수단은 어렴풋하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정도까지 수를 읽혔다는 건, 상대와의 분석 싸움에서 완패했다는 증거라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강렬한 유혹이기도 했다.
잔뜩 올라온 포백라인, 덕분에 훤히 드러나보인 선덜랜드의 뒷공간을 파리의 10번이 노려보았다.
저렇게까지 노출된 공간을 노리지 않고 얌전히 얻어맞기만 하는 팀은, 프랑스 챔피언이 아니다. 아무리 이곳이 원정 지옥이라도, 용광로 한가운데라 하더라도.
파리와 브라질의 에이스는 절대 이런 상황에서 얌전히 참지 않는다.
파리의 10번이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돌격했다.
* * *
희주는 아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천하의 선덜랜드 상대로 맞불을 놓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그건가? 0챔스가··· 말대꾸?”
나는 피식 웃었다.
“어쩔 수 없었을 거야. 파리는 프랑스 챔피언이거든.”
그리고 네이마르와 음바페를 가진 팀이기도 하다. 현시점에서, 세계에서 뒷공간 공략을 가장 잘하는 팀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 따라서 잔뜩 올라간 우리 수비라인의 허점을 노리지 않을 리가 없다.
우리 코칭스태프의 노림수 또한, 파리의 성향을 분석한 결과였다.
[우리가 라인 올리는 거 보면 피가 거꾸로 솟지 않을까요? 지난번 챔스 결승 때와는 서로의 처지가 달라졌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분하겠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정면승부는 못 할 거야. 사실 우리 홈에서 그래 주면 우리는 좋지만.]
[포치는 그렇게까지 과감한 감독은 아니죠. 따라서 전체적으로 팀의 라인을 내린 상태에서 공격진만 끌어 올리는 정도로 타협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공수 간격이 벌어지겠지.]
[네, 우리 미드필더의 독무대가 되겠죠.]
못된 계략을 꾸미는 어린아이처럼, 마냥 천진난만하게 웃는 우리 코칭스태프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맞이했던 파국도.
[요니가 맹활약하겠네.]
[잭이 아니고요!?]
보다 못한 희주가 어깨를 으쓱했었다. 잭과 요니, 그 두 사람이 홈경기에서 미쳐 날뛰는 건 이제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라면서.
개인적으로는 우리 윙포워드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마르틴, 그리고 스티븐에게.
* * *
스티븐은 자신과 대치 중인 파리의 10번, 네이마르를 응시했다.
“이봐, 너는 윙어 아니었어?”
“무슨 상관이야. 수비는 아무나 하는 거지.”
바짝 달라붙자, 네이마르가 진저리를 냈다.
“네 매치업 상대는 누누 아니야? 너, 라이트윙이잖아.”
“그건 너희 레프트백이 올라올 때 이야기겠지?”
스티븐은 아주 태연하게 응수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이미 경기 시작 전부터 감독과 코치의 지시까지 받았다.
보통 라이트윙은 상대 레프트백을 상대하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라이트윙 스티븐이 레프트윙 네이마르를 마크한다.
아주 노골적인 메시지 전달이다. 선덜랜드 상대로, 파리는 정말로 풀백을 전진시킬 자신이 있느냐는.
“그렇군. 그럼 내가 널 부수면 되는 건가.”
이를 드러내는 파리의, 그리고 브라질의 에이스를 향해 스티븐은 태연하게 응수했다.
“해 봐.”
스티븐은 풀백 출신의 윙어다. 따라서 윙어치고는 꽤 파격적인 수비력을 갖췄지만, 그래도 전문 풀백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들었다.
조직적인 협력 수비에 한해서라면, 세간의 평가는 옳다. 하지만 전방압박과 일대일 마크라면 스티븐에게도 자신이 있었다.
‘내가 매일 누구와 연습하는데.’
해리슨의 상대가 에디인 것처럼, 스티븐의 상대는 마르틴과 베넷이다.
프랑스 대표팀의 주전 레프트백과 선덜랜드의 에이스를 매일 훈련에서 상대하고 있기에, 스티븐은 확신하고 있었다. 선덜랜드의 왼쪽은 아주 파괴적이다. 그가 지금 상대하는 파리의 왼쪽보다 훨씬 더.
상대적으로 오른쪽은 수수하다. 메시가 출전하는 날은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지만, 스티븐 본인이 출전하는 날은 아주 심심해진다.
그래도 상관없다.
‘난, 조연이라도 만족해.’
축구는 그런 스포츠다. 모두가 골을 노리거나, 모두가 태클을 날리고 포스트 플레이를 시도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아무리 파리의 10번이라도, 두 명을 제칠 수는 없겠지.”
스티븐은 등 뒤로 손을 돌려, 브루노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네이마르가 웃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일대일 두 번이면 확실하게 통과할 텐데?”
잠시 후, 공을 넘겨받은 네이마르가 마치 안개처럼 스티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스티븐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원래 사라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저 시야 밖으로 잠깐 모습을 감춘 것뿐이야. 요니와 마르틴은 훈련에서 매일 하는 짓이지.’
그래서 스티븐은 침착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제 막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난 등번호 10번을 추격했다.
파리의 에이스는 확실히, 스티븐이 혼자 마크하기엔 버거운 상대였다.
“따라붙은 건 대견한데, 공에는 발 하나 못 대게 해 주겠어.”
그래도 상관없다. 공을 빼앗는 것은 그의 일이 아니기에.
빠르고 화려하지만 몸싸움이 아주 강하지는 않은 파리의 10번에게 어깨싸움을 걸어, 방향을 제한하는 게 그의 일이다. 그 다음은···.
선덜랜드 라이트백, 브루노가 재빨리 네이마르의 진로를 가로막은 순간, 드리블의 궤도가 마법처럼 비틀렸다. 허를 찔린 브루노가 단숨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일대일 두 번이면 뚫어낼 수 있다는 장담처럼.
‘하지만 세 번은?’
넘어진 브루노와 엇갈리듯 에디가 가속했다. 그리고 스탠딩 태클로 공을 빼앗았다.
“올라가!”
에디의 호령에 스티븐은 몸을 돌렸다. 잠시 후, 등 뒤에서 건조한 소리가 났다.
공이 단숨에 필드를 가로질러, 왼쪽 전방의 마르틴에게 향했다. 가슴 트래핑으로 공을 받아낸 마르틴은, 공이 땅에 닿자마자 곧바로 플립 플랩을 시도했다.
조금 전 파리의 10번이 수비 둘을 한 동작으로 따돌린 것처럼, 선덜랜드의 10번 역시 마찬가지 재주를 부릴 수 있었다. 현란한 발재간으로 파고드는 마르틴의 모습을 보며, 스티븐은 히죽 웃었다.
‘일대일 두 번이면 확실하게 통과할 수 있다며? 그쪽이 말했던 거잖아.’
수비 둘을 떼어놓고 파고든 마르틴이, 힘차게 공을 걷어찼다.
직접 골을 노릴 수도 있는 위치였지만, 마르틴의 킥은 의외로 어정쩡한 각도로 날아들었다. 슛 미스라고 생각한 파리 골키퍼는 대응하지 않았지만, 스티븐은 끝까지 달렸다.
그리고 전력질주로 달려온 스피드를 살려 몸을 던졌다. 공에 이마를 가져다 대기 위해.
잠시 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끓어올랐다.
[선덜랜드 1 - 0 파리]
킥오프 이후, 여전히 스티븐은 공에 발 한 번 못 대 본 상태다. 패스는커녕, 태클조차 해내지 못했다.
그래도 득점할 수는 있고, 팀에 기여할 수도 있다.
온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에 대답하듯, 선덜랜드의 26번이 자랑스럽게 손을 들었다.
* * *
그날 선덜랜드는 파리를 3-0으로 대파하는 기염을 토하며, 챔스 4강을 향해 한발 다가갔다.
경기 종료 후, 믹스드 존에 선 브라이언이 무뚝뚝하게 소감을 밝혔다.
[파리가 아주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딱히 추가 질문은 없었고,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만큼 1차전은 압도적인 흐름이었다.
슈팅 수는 36대 5, 경기력 차이도 엄청났다. 만일 골대를 엄청나게 맞추는 불운이 없었다면, 그리고 파리 골키퍼의 선방 쇼가 아니었다면 점수 차는 훨씬 벌어졌을 것이다.
펍에 모여 경기 소감을 나누던 우드 부부와 브라더스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누가 이 팀들이 3년 전 챔스 결승에서 접전을 펼쳤다고 믿겠어요? 이렇게 일방적인데!”
“감독 말처럼, 진짜 운이라고는 더럽게 없긴 했지. 대체 골대만 몇 번을 맞췄는지.”
“근데 우리 홈인데··· 골대는 못 옮기나? 조금만 오른쪽으로 옮겼으면 세 골은 넣었을 텐데.”
“조금만 왼쪽이었으면 두 골은 들어갔을 거야··· 마일즈 자네 이제 구단 관계자 아닌가? 건의해 봐.”
놀리듯 말하는 브렌든을 흘끗 노려본 다음, 마일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관계자는 무슨. 아무튼, 이번에 두 골쯤은 더 넣었어야 했어. 파리도 다음번엔 제대로 칼 갈고 나올 거잖아? 마침 2차전은 파리 홈이고.”
점수 차를 좀 더 벌려서 아예 따라잡을 엄두도 못 내게 만들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마일즈의 한탄에, 브라더스가 차례로 얼굴을 마주 봤다.
“대체 뭐가 걱정이야? 선덜랜드가 딱히 원정에 약한 팀도 아닌데?”
“파리 인구가 우리 열 배잖아. 우리의 딱 십 퍼센트만 뜨거워도. 우리와 대등한 열량인 거니까.”
“에이, 런던 원정을 한두 번 다녀온 것도 아닌데.”
브렌든의 반론에 마일즈가 고개를 저었다.
“런던과는 다르지. 런던은 프로 팀이 여러 개잖아. 파리에는 1부 리그 팀이 딱 한 개라고.”
마일즈의 눈에는, 마치 파리 시민들의 일방적 야유에 시달리는 선덜랜드 선수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봐 마일즈, 우리 팀은 이미 뮌헨에도, 바르셀로나에도, 리스본과 마드리드에도 다녀왔잖아. 그러니 새삼 파리 원정에 주눅들 리가 있겠나?”
주위의 만류에도 마일즈는 막무가내였다.
“역시 원정에 따라가야겠어.”
“이제 와서? 챔스 원정 티켓은 이제 구하기 힘들 텐데?”
“수잔 씨, 두 분 연차 남았습니까?”
“연차는 남았지만, 그래도 파리엔 못 따라가요. 크리스가 아카데미에 남아 있을 거니까요.”
결국 마일즈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럼 멀리서 응원할 수밖에 없는 건가.”
* *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희주가 내게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뭐지? 설마 축구의 신을 계승하는 중인 건가?”
“그건 우리 유소년들 이야기고. 내 나이에 무슨 계승이냐, 계승은.”
만일 무사히 프로로 데뷔했어도 이제는 은퇴를 고려할 나이인데··· 계승이라니, 그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아이참. 꼭 선수만 신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야구의 신은 감독이라면서. 그렇게 치면 구단주도 신이 될 수 있는 거 아냐?”
그런가?
“아무튼, 아까 경기 초반부터 마르틴과 스티븐에게 기대한다고 했잖아? 그랬더니 마르틴이 1골 2어시스트, 스티븐이 1골로 맹활약했는데요. 역시 그 정도 안목이 있어야 투자의 신을 해먹는 겁니까?”
마치 마이크를 들이대듯 입 앞에 주먹을 내미는 여동생을 향해,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일단 마르틴은 우리 에이스니까.”
브라이언과 샐리의 예상처럼, 파리의 반격 시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중심이 파리의 10번이 될 것임도.
이제는 낡은 발상이라지만, 그래도 축구에서 등번호의 의미는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10번이라면 더욱.
10번, 그것은 에이스의 번호다. 파리의 에이스가 거세게 달려들수록, 우리 에이스도 활약해줄 거라고 믿었다.
“그럼 스티븐은? 역시 전술적인 이유에서의 예측이었어? 파리가 네이마르 쪽에 힘을 실을 거라서?”
“반쯤은.”
“나머지 반은?”
희주의 물음에, 나는 대답 대신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엔 조금 쑥스러운 이유였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