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등에 짊어진 것 (2)
마일즈 우드는 파리 원정에 동참하지 못하고 ‘멀리서’ 응원함을 한탄했지만, 사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도버해협 너머, 영국과 프랑스는 기껏해야 시차 한 시간 거리에 불과하기에.
해외 팬들이 훨씬 멀다. 선덜랜드는 최근 몇 년간 유럽 대회에서 맹활약했고, 글로벌 팬들을 위한 굿즈와 팬서비스도 강화했다. 덕분에 세계적으로도 팬베이스가 많이 늘었고, 자연스레 우드 부부보다도 훨씬 멀리서 선덜랜드를 응원하는 팬들이 생겨났다.
팀과의 물리적 거리를 따지자면 ‘명예시민’ 미정 역시 손꼽힐 것이다. 한국은 러시아의 캄차카나 오세아니아, 태평양의 군도들을 제외하면 영국과 가장 멀리 떨어진 편에 속했다. 시차만 9시간이니까.
물론 이제 그녀는 단순한 팬이라기엔 다소 애매한 구석이 있다. 이제 그녀는, 구단의 업무를 돕는 직원이기 때문에.
그래도 팬심에는 손색이 없다는 게 미정의 마음이었다. 모니터 옆에 세워둔 탁상용 액자에 담긴 선수들 사인을 흘끗거리며, 그녀는 바쁘게 손을 놀렸다.
- 솔직히 MOM은 스티븐이 아니라 돈나룸마 줘야 함. 골키퍼 아니었으면 파리는 오 대 영 각이었음.
자연스레 커뮤니티에 떡밥을 던지며 여론을 교묘하게 유도했다. 한국 축구팬들에게 2차전에 대한 기대감을 끌어올리고, 선수들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며, 악플이나 선수에 대한 욕설을 재주 좋게 걸러내는 게 그녀의 일이었다.
다행히 스티븐에 대한 반응은 한국에서 훨씬 좋았다. 과거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했던 두 개의 심장 덕분에, ‘디펜시브 윙어’에 대해 아주 호의적이었던 것이다.
- 파리도 2차전 골치 아프겠네. 스티븐이 파리의 에이스를 견제하면서, 스스로 득점도 할 수 있다고 입증한 셈이잖아.
- 메시 나오는 날이 공격력은 훨씬 좋지만, 밸런스는 스티븐 나오는 날이 더 좋은데?
ㄴ 7발롱도 이제 쉬어야지. 마지막으로 챔스 한 번 더 들고.
- 그럼 2차전에도 메시는 안 나오나?
ㄴ 내겠냐. 비기기만 해도 올라가는데.
ㄴ 정확히는 두 골 차까지는 져도 올라감.
이후 커뮤니티는 자기들끼리 뜨거워졌다.
- 트레블 노리는 팀이 챔스 8강에서 몸을 사린다고?
ㄴ 파리같이 스타플레이어 많은 팀은 기세를 올리게 두면 위험함. 적당히 맞불 놓아야지, 괜히 가드 올리고 방어만 하다가 잘못하면 게임 터짐.
ㄴ 야 그렇다고 괜히 원정에서 라인 올리다가 잘못하면 다 잡은 4강 티켓 날아간다니까?
미정은 미소를 지었다.
선덜랜드가 2차전에 어떻게 나올지는 미정도 모른다. 구단주와 감독, 수석코치 말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팬들은 벌써부터 팀의 라인업을 궁금해하고, 2차전의 행방에 흥미를 느끼며, 팀에 대한 기대와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팀과 함께 싸우는 열세 번째 플레이어다.]
[우리 도시, 빨갛게 빨갛게!]
화상회의 때 봤던, 영국에 있는 본사 스태프들의 자리 뒤에 붙어 있는 문구가 지금 그녀의 등 뒤에도 걸려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커뮤니티를 붉고 희게 물들여 나갔다.
* * *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 파리 대 선덜랜드]
킥오프를 앞두고, 희주가 활기차게 외쳤다.
“오빠, 커뮤니티에서 아주 난리 났는데?”
희주가 계속 실실 웃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면, 얘는 보통 남의 뒤통수를 맛깔나게 때렸을 때 이런 표정을 짓는다. 따라서···.
“왜, 우리 라인업이 이상하대?”
“응! 오늘 메시와 스티븐 중 누구를 선발로 내세울지 말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우리는 오늘 둘 다 내버렸잖아?”
여동생의 호들갑을 들으며, 나도 부드럽게 웃었다.
“한국 문화 좀 배우셔야겠네.”
한국에는 짬짜면이나 반반무마니 같은 아주 좋은 문화가 있다. 메시와 스티븐, 누구를 선발로 낼지 모르겠다고? 그럼 둘 다 내면 되지.
- 이게 공존이 되나?
ㄴ 문제없지. 축구의 신은 원래 펄스 나인으로도 뛰었잖아?
ㄴ 그건 젊었을 때 이야기고.
스티븐의 활동량과 수비 가담, 메시의 테크닉과 창조성을 살리면 엄청난 시너지가 나올 거라는 의견과, 왜 비기기만 해도 올라가는 경기에서 이도 저도 아닌 전술을 들고 왔느냐는 비난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 브라이언이 또 명장병 걸린 거지 뭐.
ㄴ 고맙다! 브라이언 명장병 이야기만 나오면 귀신같이 이기던데.
나는 느긋하게 아래쪽 댓글에 좋아요를 누른 다음, 시트에 몸을 파묻으며 킥오프를 기다렸다.
그날, 우리는 한결같이 좋은 경기력을 과시했다.
스트라이커 포지션으로 출전한 메시는 전문 공격수보다는 낮은 위치에 머물며 경기를 조율하고 찬스를 만들었다. 활동량이 적었기에 위치를 자주 바꾸지는 못했지만, 대신 항상 절묘하게 수비와 미드필더 사이를 압박할 수 있는 위치에 머물며 파리의 대열을 흐트러트렸다.
축구의 신이 전방에서 창의성을 과시할 때마다, 2선에서는 끊임없이 파고들며 찬스를 만들었다. 우리 10번 마르틴은 네이마르 못지않은 현란한 드리블로 수비를 찢어놓았고,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공간연주자 요니는 절묘한 공간 침투로 상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스티븐 또한 오늘 맹활약을 펼쳤다. 헌신적으로 수비에 가담했고, 공수 전환 과정에서는 누구보다 먼저 전방으로 달려나갔다. 비록 네이마르로부터 공을 빼앗지는 못했지만, 대신 자유롭게 날뛰지도 못하게 방해했다.
완벽한 자물쇠 역할이다.
이후 조급해진 파리는 롱 볼을 우리 문전에 밀어 넣으며 세트피스 위주의 전개를 유도했지만, 브라이언은 마치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대응했다. 바스티아노의 투입, 그리고 롱 스로인 시도. 파리 감독 포치의 전술을 이미 전부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완벽한 받아치기였다.
[(1) 파리 1 - 1 선덜랜드 (4)]
휘슬이 길게 세 번 울린 순간, 희주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번졌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이 가늘어졌다. 4강 진출에 대한 흡족함도, 선수들이 보여준 경기력에 대한 만족도 섞여 있겠지만, 희주의 감정을 가장 크게 차지한 감정은 아마, 자랑스러움일 것이다.
남매니까 표정이 닮았다는 이론에 따르면 틀림없이 그렇다.
* * *
선덜랜드가 4강 진출을 확정 지은 날,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 남아 있던 유소년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분석실 화면을 바라보았다.
테오 역시 그들 사이에 있었다. 옆에 크리스를 끼고 머리를 쓰담쓰담하면서 중계를 바라보는 맛이 일품이었다. 비록 옆에서는 바르카가 질투 섞인 시선을 보냈지만,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팀이 챔스 4강에 올랐으니, 아무것도 겁낼 게 없었던 것이다.
경기 종료 후 믹스드존에는 축구의 신이 나섰다. 그는 오늘 수많은 찬스를 만들었고, 마침내 바스티아노의 득점을 어시스트하며 MOM 자리를 획득했다.
[오늘은 드리블 돌파도, 슈팅도 아예 시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찬스 메이킹에만 주력하셨는데요.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을까요?]
기자들의 얼굴을 응시하며, 메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네요. 머리로는 수비를 어떻게 따돌려야 할지 알겠는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요.]
[네, 아마 호나우두의 이야기였죠?]
크리스의 머리를 쓰다듬던 테오의 손이 멈췄다. 동시에 기자들이 플래시를 마구 터트리기 시작했다. 왜냐면 호나우두는 저 발언을, 은퇴 발표 자리에서 했기 때문이다. 기자들로서는 기대할만한 상황이었다. 축구의 신의 은퇴 선언이라면 특종 중의 특종이 될 테니.
“왜에?”
천진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크리스에게도 대답하지 못한 채, 테오는 줄곧 화면을 응시하기만 했다.
그때, 축구의 신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래서 동료들의 힘을 빌리기로 했습니다.]
테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고, 옆에선 다른 유소년들이 일제히 안도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짐조차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 테오는 화면 너머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요.]
정말로 마주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선덜랜드 1군은 지금 도버 해협 너머에 있고 아무리 축구의 신이라도 카메라를 꿰뚫어보는 신통력까지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테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도 지금의 이야기가,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가르침일 거라고.
선덜랜드의 7번에게서 77번에게 전해져온 것.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그가 크리스에게 넘겨줘야 할 가르침을, 테오는 조용히 되새겼다.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 * *
FA컵과 챔스 모두 4강 진출을 확정하면서, 우리는 올 시즌의 목표였던 트레블에 또다시 한 걸음 다가섰다.
조추첨을 앞두고, 희주는 또다시 대량의 공물을 획득했다. 부두술사에게 적절한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가 발생한 참혹한 대진운을 모두가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최새벽은 팬들이 보내준 한국 과자를 한 박스 싸들고 찾아왔고, 에이미는 레몬을 듬뿍 넣은 아이스티를 준비했다. 그리고 리지는 요즘 푸드트럭에서 엄청 인기라는 김치 핫도그를 구해 왔다··· 정말로 인기 있는 거 맞아? 아무리 생각해도 인기 없을 조합인데.
희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와서 공물에 딱히 의미가 있을까요? 4강쯤 되면 대진운도 별 의미가 없잖아요?”
원칙대로면 희주 이야기가 맞다. FA컵 4강 상대는 첼시 아니면 맨유, 아니면 맨시티인데 약간의 우열은 있을지언정 딱히 만만한 상대는 남지 않았다. 뮌헨, 레알, 맨시티가 기다리는 챔스 4강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우리 스태프들에게도 조추첨운을 원하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루벤이 대표로 설명에 나섰다.
“아시죠? 감독님하고 코치님이 또 맨시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거요.”
“목표가 트레블만 아니면 저도 신경 안 쓰겠어요. 아니, 오히려 컵 대회에서 맨시티만 계속 만나면 좋죠. 그럼 리그 경쟁이 아주 편해질 테니까요··· 하지만 올해 목표는 트레블이죠!? 하나라도 내주면 안 되는 거잖아요.”
하소연하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브라이언이 태연하게 정어리 파이를 우물거렸고, 샐리는 우아하게 망고 스무디를 홀짝였다. 즉 희주 못지않은 저주의 아이콘, 우리 감독과 수석코치의 입은 확실히 틀어막혔다는 뜻이다.
그 모습을 본 희주가 부드럽게 웃었다.
“알았어요. 그럼 맨시티 만···.”
스태프들 사이에서 탄식이 새어 나오려는 찰나, 리지가 재빨리 희주의 입에 김치 핫도그를 밀어 넣는 데 성공했다. 간발의 차이로 희주는 말을 잇지 못했고, 리지는 마치 떨어지는 운석으로부터 지구를 구해낸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조추첨 결과가 나왔다.
[챔피언스리그 4강 - 선덜랜드 대 뮌헨]
[FA컵 4강 - 선덜랜드 대 첼시]
“그렇지! 성공했어!”
환호하는 스태프들이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사이, 샐리와 브라이언이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대진표가, 맨시티랑 붙는 대진운 대비 특별히 더 나은 점이 있나요?”
“아니지. 솔직히 챔스 뮌헨보다는 챔스 시티가 훨씬 만만한데.”
“그쵸. FA컵 첼시도 무섭고요.”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루벤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 듣고 보니 그러네?”
* * *
챔스 4강 대진이 결정된 직후, 리델은 주먹에 으스러지게 힘을 넣었다. 독일 출신 선수로서는 아무래도 ‘뮌헨’이라는 이름에 특별한 감상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선덜랜드는 이미 뮌헨을 챔스 16강전에서 꺾은 적이 있지만, 그때는 하퍼가 출전했었다. 리델이 챔스에서 뛴 것은 그다음 경기, 8강전부터였다.
“기대되는가 봐?”
하퍼가 슬쩍 묻자, 리델이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죠. 아무래도 저는 독일 출신이라서요.”
리델이 빠르게 덧붙였다.
“아, 물론 우리 부주장은 선덜랜드 출신이지만요.”
대답을 들은 하퍼가 키득거렸고, 요니는 대답 대신 몸을 돌렸다. 옆에서 바스티아노와 곤잘로가 한마디씩 거들었다.
“하긴, 나도 밀란이나 유베, 인테르를 상대하면 기분이 조금 특별하더라고.”
“맞아. 내가 레알이나 바르샤를 상대하는 기분과 비슷한 거겠지. 하지만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어. 독일의 챔피언은 그만큼 압도적이잖아?”
“맞아. 분데스의 뮌헨은 리그의 절대강자니까. 마치 크로아티아 프르바리그의 자그···.”
히죽거리며 덧붙이던 에디가, 최새벽과 이고르의 시선에 재빨리 말을 바꿨다.
“아니, 오시예크처럼.”
동료들을 바라보며 리델이 부드럽게 웃었다.
“네. 아주 의미 있는 상대죠. 선발 라인업은 감독님이 정하시겠지만, 꼭 싸우고 싶은··· 아니, 꺾고 싶은 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