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등에 짊어진 것 (4)
요니의 파넨카가 네트를 흔든 순간, 분석실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선덜랜드 유소년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파넨카 킥!?”
“캡틴이 아닌데도 해냈어!”
“1번 키커의 파넨카 킥은··· 이건 크지!”
이런 걸 얻어맞으면, 골키퍼는 심리적으로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승부차기는 언제나 멘탈 싸움이다. 골키퍼의 반응속도보다 빠른, 그래서 원래는 막힐 리 없는 슛이 골키퍼의 손에 걸리는 것은 심리 싸움의 결과인 것이다.
골키퍼인 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요니의 파넨카 킥이 어떤 의미인지를, 그리고 이제부터 첼시가 어떻게 나올지를.
‘만회하려면, 틀림없이 하퍼 선수의 멘탈을 부수려고 시도할 거야···!’
파넨카를 파넨카로 받을 배짱은 없겠지만, 골대 구석에 강슛쯤은 꽂아 넣을 것이다. 그래서 짐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에 보이는 사내를, 짐은 자기 자신보다도 더 믿고 있었다. 골마우스 앞에 걸어 나온 선덜랜드의 12번, 에드워드 하퍼를.
골키퍼가 되기 전부터 짐은 줄곧 선덜랜드의 팬이었다. 그리고 짐이 기억하는 선덜랜드의 첫 넘버원 또한 하퍼였다. 어릴 때 그렸던 선덜랜드 골키퍼가 하퍼였던 것처럼.
그 뒤로 많은 것이 바뀌어 버렸다.
우선 등번호가 바뀌었다. 하퍼는 이제 더 이상 팀의 1번이 아니다. 그리고 나이도 적지 않게 먹었다. 짐 자신이 자라는 사이, 어릴 적의 우상은 이제 노장으로 취급받는 선수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바뀌지 않은 것도 있다.
[네가 좋아하는 하퍼는 곧 돌아올 거야. 실망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묵묵하게 훈련하고 있으니까.]
첼시의 1번 키커가 도움닫기를 시작한 순간, 짐은 숨을 삼켰다. 그리고 키커가 공을 걷어차기 직전에 외쳤다.
“···오른쪽!”
짐의 외침처럼, 하퍼는 똑같이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공 또한 오른쪽으로 향했다. 완벽한 예상과 타이밍이었다. 다만, 첼시 키커도 킥을 워낙에 잘 차서 손끝을 가져다 대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악! 막을 수 있었는데!”
“방향은 완벽하게 맞췄어.”
“아깝다!”
분석실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고, 그 사이에는 짐 자신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도 조금쯤은 아깝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리 봐도 유일하게 결과를 ‘아까워하지’ 않는 상대는 두 명뿐이었다. 티 나게 안도하는 첼시의 1번 키커와, 무표정하게 몸을 일으키며 골마우스를 떠나는 하퍼였다.
[선덜랜드 0 (1) - (1) 0 첼시]
조금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선덜랜드의 12번을 본 순간, 짐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하퍼는 그날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것임을.
선덜랜드의 골키퍼가 늘 그랬던 것처럼 묵묵하게 골대를 지키고 있는, 자기가 너무 좋아하는 선수를··· 짐은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 * *
풋볼 스퀘어는 고요했다.
수많은 선덜랜드 팬들이 손을 모은 채 스크린을 묵묵히 응시하기만 했고, 어느새 응원의 목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승부차기에서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긴장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풋볼 스퀘어에는 점차 조용한 기대감이 함께 번져 나갔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소녀 팬 주디의 중얼거림에, 주위에서 다들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또한, 다들 팀의 승리를 믿는다는 증거였다. 맹목적인 믿음은 아니었고,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었다.
비록 스코어는 아직 팽팽하지만 과정은 퍽 달랐기 때문이다.
파넨카를 꽂아 넣은 요니에 이어, 2번 키커 곤잘로가 또다시 첼시 키퍼를 완벽하게 속였다. 반면 첼시의 킥은 계속 하퍼의 손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났다.
“긴장되겠지. 부담스러울 거야. 계속 키퍼의 손에 닿는 거니까.”
“응. 앞으로 딱 1센티··· 아니, 5밀리만 가운데로 쏠리면 바로 막힌다는 부담감에 떨고 있을 거야. 제대로 차기는 아무래도 힘들겠지.”
자기 오빠와 이야기를 나누던 주디가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안심해도 괜찮아. 아이반.”
아이반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당황하고 있었다.
‘내가 안심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고? 그렇다면, 내가 중립이 아니란 소리잖아?’
오늘 경기는 정말로 중립적인 자세로 관전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아이반은, 경기의 초반 전개에 굉장히 만족했었다. 응원하는 두 팀의 수준 높은 축구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심지어 경기는 연장까지 120분간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공식적으로는 오늘 선덜랜드와 첼시 중 누구도 패배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이반에게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그야말로 땡잡은 경기일 거라고 믿었다.
착각이었다. 막상 겪어 보니 전혀 좋지 않았다. 오히려 피가 바짝바짝 말랐고,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페널티 스폿에 선수가 설 때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그것도 남들보다 두 배로. 두 팀 모두를 사랑하는 소년에게, 이번 승부차기는 총알이 두 개 들어있는 러시안 룰렛이나 마찬가지였다.
창백해진 아이반을 향해, 주디가 웃었다.
“처음엔 태연하길래, 배짱 좋은 줄 알았더니··· 아니었구나?”
아이반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랬나 봐.”
머리로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가슴속에 담긴 마음은 그렇게 가볍지 않았던 모양이다.
너무 오랫동안 응원했던, 고향의 푸른 유니폼이 페널티 스폿에 설 때면 마음이 저절로 흔들린다. 넣어달라고, 놓치지 말라고 응원하고 만다.
하지만 그 오래된 마음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선덜랜드의 붉고 흰 유니폼에도 잔뜩 정이 들어버린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아이반은 너무나 괴로운 표정으로 결말을 기다렸다.
선덜랜드의 3번 키커 크리그가 골대 구석에 손쓸 수 없는 킥을 꽂아 넣었고, 이어진 첼시의 3번 킥에서는 하퍼가 마침내 공을 라인 밖으로 쳐냈다.
풋볼 스퀘어가 세차게 흔들렸다.
“하퍼가 해냈어!”
딱 한 번의 선방이었지만,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셈이었다. 선덜랜드에는 실축하지 않는 주장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기에.
아이반의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아마 웸블리의 첼시 팬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다음, 결국 FA컵 4강전은 예정된 결말대로 흘렀다. 선덜랜드의 4번 키커 에디의 킥이 막혔지만, 하퍼가 다시 한번 선방하면서 여전히 스코어상 우위를 유지했다.
마침내 선덜랜드의 5번 키커, 잭이 페널티 스폿에 섰다. 그리고 지난 7년간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잭은 실축하지 않았다.
[선덜랜드 p 0 (4) - (2) 0 첼시]
승리의 환호와 기쁨이 풋볼 스퀘어를 가득 메운 가운데에서, 아이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마침내 팀의 결승 진출이 확정된 순간, 웸블리 또한 뜨거워졌다. 우드 부부가 부둥켜안았고, 브라더스가 일제히 환호했다.
“트레블까지 앞으로 몇 승이지?”
“몰라! 근데 일단 FA컵 확보까지는 앞으로 딱 1승인 건 확실해!”
“아니 이 역사적인 순간에, 왜 나는 우리 이쁜 크리스를 수염으로 부벼주지 못하는 걸까?”
분위기를 탄 마일즈의 외침에, 옆에서 수잔과 브렌든의 냉담한 반응이 이어졌다.
“그야 우드 일가는 수염을 싫어하니까요.”
“그리고 자네 아들은 아카데미에 입단했거든. 1군 팀 경기는 무조건 모여서 보는 게 선덜랜드 방침이라며?”
“어, 그건 그래.”
옆에서는 제이슨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선덜랜드의 결승 진출 자체만으로도 기뻤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대팀이 첼시라서 좀 더 신이 나기도 했다. 축구에서 이웃사촌이란, 적을 지칭하는 다른 명칭에 불과했기에.
하지만 그는 이내,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 남겨둔 친구 아이반을 떠올리며 시무룩해졌다. 그런 제이슨의 표정을 지켜보던 수잔이 차분하게 물었다.
“아이반을 걱정하는 거니?”
“네.”
“그럼 전화라도 걸어 봐.”
제이슨은 잠시 망설였다가 대답했다.
“지금은 못 듣지 않을까요? 사실 전화가 잘 터질지도 의문이고요.”
“그런가?”
“한 명은 웸블리에, 다른 한 명은 풋볼 스퀘어에 위치한 상황이잖아요?”
사실은, 먼저 연락하지 않으려는 핑계였다. 혹시라도 아이반에게 첼시를 응원하는 마음이 더 컸다면, 지금쯤 상심했을 테니까. 만일 제이슨 자신이었다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를 일인데, 원래 이 나이 남자애들은 남에게 눈물을 보이는 걸 싫어한다.
“그럼, 돌아가면 위로해 줘. 어깨도 두드려 주고.”
“네.”
하지만 제이슨의 배려가 무색하게도, 연락은 아이반이 먼저 했다. 그것도, 아주 기세 좋게 영상통화까지 하면서.
화면 속의 아이반은 웃고 있었다.
[이제 트레블까지 몇 승 남았더라?]
“어째 너, 브렌든 아저씨하고 똑같은 이야기 한다?”
[그야 어쩔 수 없지. 브렌든 아저씨가 소개해 준 일자리에서 일하는 중이니까.]
아이반의 눈은 살짝 붉었다. 제이슨은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 배려를 보였지만, 이번에도 아이반이 먼저 실토했다.
[나는 완벽하게 중립은 아니었나 봐.]
“그렇겠지.”
[그래도 선덜랜드라서 다행이야. 첼시가 다른 팀에 졌으면, 훨씬 분했을 거야.]
제이슨이 뭐라고 위로의 말을 꺼내려는 찰나, 스마트폰 카메라에 여자아이의 모습이 잡혔다. 당연하게도 주디였지만, 제이슨이 알 리는 없다.
[뭐 해, 아이반? 빨리 가자. 승리를 만끽하러!]
“잠깐! 아이반, 옆에 그 여자애 누군데? 뭔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잠시 후 전화가 끊겼다. 아이반이 끊어버린 건지, 혼선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제이슨은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뭐 해?”
“돌아가면 그 자식 죽여버리려고요. 위로는 무슨!”
* * *
“선덜랜드의 골키퍼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믹스드존에서, 첼시 감독 투헬이 짧게 인터뷰를 마쳤다. 이후, 기자들의 질문에 브라이언 또한 마찬가지로 대답했다.
“오늘 모든 선수들이 수고했지만, 네, 저도 우리 골키퍼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나도 동감이었다. 오늘의 MOM은 하퍼의 처지여야 마땅하기에.
잭과 요니를 제외하면 대체로 로테이션 멤버가 많이 섞여 있는 오늘 경기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승부차기를 작정하고 나섰다. 그리고 하퍼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120분간 필드골을 내주지 않은 것은 물론, 마지막 승부차기에서도 두 번의 선방을 보이며 팀을 결승으로 데려간 것이다.
“저렇게 잘하는데 은퇴를 고민한다고? 짐을 콜업할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희주의 목소리에는 살짝 가시가 있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내가 보기에도 아깝다.
팀 전체가 애지중지 키워온 유스팀 주장, 짐을 하루라도 빨리 프로로 데뷔시키고 싶다는 하퍼의 감정은 존중한다. 그렇다고 하퍼가 굳이 당장 은퇴를 고려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물며 오늘처럼, 극적인 플레이를 보여준 다음이라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하퍼는, 단지 짐에게만 롤 모델인 선수는 아니었다.
승부차기 종료 직후, 벤치에서 가장 먼저 달려 나온 선수는 바로 리델이었다. 곧바로 하퍼에게 달려간 리델이, 마치 매달리듯 동료 골키퍼를 끌어안았다. 하퍼는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이윽고 리델의 등을 두드렸다.
대체로 팀에서 가장 큰 사내들이 맡는 포지션, 골키퍼 두 사람이 포옹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때,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팬들이 지르는 승리의 함성에 묻히기도 했거니와, 나는 익스클루시브 박스에서 내려다보는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드레싱룸에 출입하는 샐리의 증언에 따른다면···.
“그림 가지고 이야기하던데요? 선덜랜드의 1번을 그린 그림이라면서요. 솔직히, 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우리 1군엔 지금, 1번 등번호 비었잖아요?”
새침하게 말하며 돌아섰지만, 샐리의 말은 사실 칭찬이다. 하퍼와 리델 두 사람 모두가 너무나 훌륭해서, 누가 1번이고 누가 1번이 아닌지 굳이 정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라는 의미의.
“샐리 씨는 언제쯤 솔직해질까?”
“글쎄.”
원정 버스에 오르는 샐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살짝 덧붙였다.
“트레블하고 난 다음이 아닐까?”
“일리 있네. 그럼 우리 오빠는 언제쯤 솔직해질까? 그것도 트레블하고 난 다음?”
“시끄러워.”
나는 이미 솔직해. 다시 말해 욕망의 노예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까··· 팀을 트레블 시키려는 욕망.
나머지는 그다음에나 고민할 문제라고.
그날 승부차기 끝에 첼시를 물리친 우리는, 맨체스터 더비에서 승리한 맨시티를 결승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시티에 대해 쌓인 게 많은 우리 감독과 수석코치가 매우 흡족해했음은 물론이다.
“FA컵 4강전은··· 리그도 그렇고 챔스도 있고, 이것저것 많아서 로테이션을 고민했는데, 결승전은 그런 걱정 없잖아요?”
“그렇지. 챔스 결승전하고는 일정 차이가 나니까.”
“이번에야말로 찍소리도 못 하게 밟아놓죠?”
“물론이지. 결과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반드시 압승할 거야.”
벌써부터 벼르는 둘을 향해, 루벤이 한숨 섞인 하소연을 내뱉었다.
“좋습니다. 네, 새 전술도 기대하죠. 그런데 기왕 전술 짜시는 김에, 코앞까지 다가온 뮌헨전도 좀 신경 써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리그에서, 우리는 변함없는 선두를 질주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챔스에서는 또다시 뮌헨과의 일전을 남겨 두었다.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치르는 역사적인 챔스 결승전에 진출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 4강전에서···.
우리는 도이체마이스터, 독일 챔피언과 격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