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걸음 (1)
<축구는 매일 전 세계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다. - 프란츠 베켄바워>
목을 몇 번 가다듬은 다음, 에디는 단숨에 내뱉듯이 말했다.
“제가 신랑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참 볼품이 없었습니다. 플레이는 투박했고, 움직임에는 지성이 없었죠. 무엇보다 아직 주장도 아니었고요. 그런 그가 이제 선덜랜드의 캡틴이 되어 에이미 씨와 같은 천하의 미인을 아내로···.”
“뭐 하냐.”
퉁명스러운 잭의 목소리가 에디의 이야기를 잘랐다. 에디가 어깨를 으쓱했다.
“시즌 끝나고 결혼한다면서? 따라서 나는 너의 베스트맨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미리 스피치 연습 중인데.”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잭은 에디를 흘끗 바라보았다. 사실 볼품을 따지면 지금 에디의 모양새가 훨씬 초라했기 때문이다.
훈련을 마치고 샤워를 했기에, 아직 덜 마른 머리가 부스스했다. 이제 곧 해리슨과 개인 연습을 나선다는 이유로 옷도 대충 입었다. 무릎 튀어나온 추리닝에 목 늘어난 티셔츠로.
게다가 기본적으로 에디는 트로피 휘두르는 동작조차 이상하게 모양이 안 사는, 천성적으로 세레머니가 태가 안 나는 체질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시선을 느낀 에디가 곧바로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참고로 패션 센스 지적은 안 받는다. 네 결혼식 날은 제대로 입을 거니까.”
“아, 그러셔? 그런데 일단 내 베스트맨은 요니가 맡을 예정이야.”
“이해해. 우리는 서로 축구 선수니까.”
“그렇지. 절대로 에디 네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더 적합한 사람이 존재할 뿐이야. 라인업에 자리는 한정적이거든.”
“알았어, 알았어. 교체로 투입되더라도 기회를 잡으면 된다는 이야기잖아. 축구에는 뜻밖의 부상이나 결장에 대비하는 문화가 있거든.”
천연덕스럽게 반문하는 에디를 향해, 이번에는 이고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조심해라 부주장. 아무래도 캡틴의 결혼식 전날 3주장이 널 습격할 모양이다.”
요니는 그냥 웃고 말았지만, 옆에서 잭이 한숨을 쉬었다.
“베스트맨 이야기는 넘어가자. 그리고, 정확히 말하자면 나하고 에이미는 트레블 하고 나면 결혼할 거야. 이번 시즌 끝나고 나서가 아니라.”
그러자 반사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똑같은 거 아니야?”
잠시 에디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잭이,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게. 똑같네.”
트레블까지 앞으로 몇 승이 더 필요한지 정확히 장담하기는 힘들다.
빅 이어까지는 딱 세 경기가 남았고, FA컵은 결승 한 경기만을 남겨두고 있다. 그리고 네 경기를 남겨둔 리그에서는 현재 선두를 질주하고는 있지만, 2위 맨시티가 워낙 잘 따라오는 중이라 아직 우승을 확정하지 못한 상태다.
올 시즌 준우승팀은 최다승점 준우승 기록을 경신할 것이 유력하다는 썰이 나오기 시작할 만큼 치열한 시즌이었다.
그래도 선덜랜드 선수들은 당연하다는 듯, 트레블을 노리고 있었다.
“시즌이 끝나면 활짝 웃을 수 있을 거야.”
처음엔 까마득하던 트레블이라는 단어는, 이제 모두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손이 닿는 곳에서 아른거릴 정도로.
시작은 뮌헨과의 챔스 4강 1차전이다.
“가자! 우리들은 선덜랜드다!”
“그리고 우리는, 캡틴을 반드시 장가보낼 것이다!”
까불거리며 덧붙이는 에디를 향해 잭이 입맛을 다시는 사이, 감독 브라이언이 손뼉을 치며 선수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4강 1차전 전술이 나왔으니까, 다들 쿨다운 마무리하고 브리핑 룸에 집합해!”
* * *
챔스 4강전은 시작 전부터 뜨거웠다. 축구계에서는 우리와 뮌헨, 서로에게 있어 아주 치열한 4강전이 될 것으로 전망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론에서는 역대급 대결로 부르던데요?”
“왜, 사실상의 결승전이래?”
남아 있던 4강 상대 중, 뮌헨이 가장 까다로운 팀이었던 건 사실이다. 시티는 유독 챔스에선 자멸하는 경향이 있고, 레알은 현재 스쿼드 리빌딩 진행 중인 상태다.
따라서 4강 상대 세 팀을 강한 순서대로 줄 세우면 뮌헨이 분명 앞서 있겠지만, 그래도 큰 차이는 아니다. 아마도 딱 한 걸음의 격차가 아닐까?
사실상의 결승 운운은 시티와 레알에게 너무나도 무례한 소리다.
하지만 희주가 전한 언론인들의 반응은,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그렇다기보다는, 트레블 결정전이래.”
곧바로 스태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참견을 시작했다.
“하긴, 뮌헨도 분데스와 포칼이 아주 유력해 보이니까요.”
“거긴 올 시즌 챔스만 들면 트레블 확정이죠. 그런데 우리도 아시다시피 트레블 도전 팀입니다. 그러니 언론에서는 떠들 수 있겠죠. 트레블 결정전이라고.”
“말 되네. 우리는 뮌헨처럼 편하게 리그와 FA컵 우승 먹진 못하겠지만··· 그놈의 맨시티!”
“근데, 그렇게 치면 4강전이 트레블 결정전인 건 맨시티에게도 똑같은 조건 아닌가요? 시티도 우리처럼 FA컵과 리그 우승 노릴 수 있잖아요?”
“시티는 트레블이 가능한데, 레알이 트레블 물 건너가서 그렇겠지. 레알은 코파 델 레이하고 이상하게 안 친하더라고.”
우리 스태프들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대충 이렇다.
이번 챔스 4강전 참가팀은, 전부 트레블을 노릴 수 있는 조건을 채웠다. 코파 델 레이, 그러니까 FA컵을 또 날려먹은 레알만 빼고.
그중에서도 특히 뮌헨은 리그와 FA컵을 비교적 편하게 차지하며 챔스에 올인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상대적으로 가시밭길이라는 결론이다. 그놈의 맨시티!
이제 34라운드를 통과한 프리미어리그에서, 우리는 승점 90점을 벌었다. ···이 점수면, 역대 우승팀 대부분의 승점을 뛰어넘는다. 무패 우승 시즌의 아스널이 딱 90점으로 우승했을 정도니까.
즉, 맨시티 같은 놈들이 튀어나오는 요즘 축구판이 아니었으면 조기 우승 확정도 가능했을 성적이라는 뜻이다.
내 얼굴을 바라보던 샐리가 한숨을 쉬었다.
“구단주님 마음은 이해해요. 하지만 맨시티 보드진도 똑같은 심정 아닐까요? 어쩌다 하늘은 선덜랜드를 낳고 맨시티를 만들었냐며.”
샐리의 이야기에 희주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어, 그거 동양 고사인데. 샐리 씨 되게 유식하네요? 그치만 조금 아쉽네요. 맨시티 입장에서 한탄하려면 순서를 바꿔야 하거든요.”
“비서님, 우리가 시티보다 창단이 빨라요. 그러니까 선덜랜드를 먼저 낳고 맨시티를 나중에 만든 게 맞아요.”
“어··· 안 되는데··· 잘못하면 우리가 콩라인 되는데.”
“비서님, 축구와 콩이 무슨 관계가 있나요? 네? 축구와 콩이 무슨 관계가 있냐니까요?”
이야기가 산으로 갈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일단 지금은 뮌헨전 이야기나 합시다.”
그러자 프레스팀이 포문을 열었다.
“오케이. 보니까 뮌헨은 어지간히 이번 챔스가 기다려졌나 봐. 벌써부터 언플 시작했더라고.”
애니가 종이 신문을 펄럭펄럭 흔들었다. 보니까 뮌헨 감독 나겔스만의 인터뷰다.
[선덜랜드를 다시 만나게 되어 아주 기쁘다. 좋은 팀을 꺾고 우승한다면 더욱 가치가 값질 것이다.]
“재밌네요. 우리 대응은요?”
애니에게 묻자, 그녀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맞대응할 인터뷰 스크립트까지는 만들었는데, 사람이 없어. 퀸 수석코치라면 아주 찰지게 패고 올 텐데, 우리 감독은···.”
그러자 샐리는 자랑스럽게 턱 살짝 치켜들며 가슴을 폈고, 브라이언이 발끈했다.
“제가 왜요. 필요하면 언제든지 팀을 위해서 인터뷰하고 올 수 있습니다. 제 인터뷰 스킬엔 딱히 문제가 없거든요.”
아니, 네 인터뷰 스킬엔 문제가 많아.
실제로 애니도 동감이라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감독이 인터뷰 잘하는 날은 우리가 졌을 때밖에 없던데··· 아무튼 그래서 난감해. 예전 같으면 그냥 앨리스를 내보내서 응수했을 텐데, 이번에는 좀 제대로 뼈 때려주고 싶어서.”
요약하면, 뮌헨 감독의 인터뷰에 대응하기에 격이 떨어지지 않을 지위의 소유자이면서, 카메라 앞에서 나쁘지 않은 입담을 과시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애니가 왜 사람이 없다는 건지 싶어서.
혹시 내 인터뷰 스킬에도 문제가 있나?
* * *
여의도, 리미트리스 부사장실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스크린에 영상이 떠올랐다. 구단주 이희성과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 방송인데, 무편집본 영상이었다.
구단주의 방송 출연 조건으로, 반드시 편집하기 전 필름을 확보해 달라는 다미의 요구에 선덜랜드 프레스팀이 난색을 표했다. 물론 리미트리스 부사장은 한 치의 양보도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마침내 선덜랜드 구단주 비서까지 나서서 협상한 끝에, 다미가 사비를 들여 방송국 지분 일부를 사들이며 무편집본 필름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이번에 입수한 필름 원본은 열화 방지 처리를 거친 후, 예전에 노스이스트 저널에서 압수한 신문과 함께 전용 금고에 엄중하게 보관될 예정이었다.
즉, 그녀가 지금 보는 것은 사본이다.
[우리도 뮌헨을 만나 아주 기쁩니다. 나겔스만 감독님 말씀처럼 좋은 팀을 꺾고 우승하면 더욱 값지죠. 확실합니다. 2시즌 전에 해봤거든요.]
다미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갔고, 고개는 열렬히 끄덕여진다. ‘암, 이래야 우리 사장님이지.’ 같은 대사가 그녀의 눈동자에 반짝인다.
[4강 1차전 시작이 원정이라 부담스럽지 않냐고 하셨는데, 전혀 상관없습니다. 마침 알리안츠엔 좋은 기억이 많아서요.]
[안방에서 열리는 챔스 결승전을 남의 잔치로 만들면 참 짜릿하다고 뮌헨이 벼른다고요? 정보 감사합니다. 각별히 조심하죠. 근데 해보니까 확실히 짜릿하긴 하더라고요.]
뮌헨이 ‘벼르는’ 것들 대부분은, 2년 전 챔스 첫 우승 당시 선덜랜드가 이미 뮌헨 상대로 해본 것들이었다. 당연히 뮌헨은 칼을 갈고 나오겠지만, 아무튼 언플 자체는 선덜랜드가 훨씬 유리하다.
그때 부사장실 영상통화용 장비에서,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이돌 라이브에 간 팬들도 그런 시선은 안 할 것 같은데요.]
희주의 푸념에, 다미는 우아하게 응수했다.
“그야 당연하죠. 우리 사장님이 아이돌 따위보다 훨씬 멋있잖아요. 외모만 따져도요.”
[대체 야근을 얼마나 했으면 시력이 그렇게 나빠지는···.]
“희주 씨?”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미 언니가 항상 고생이 많다고요. 근데 다미 언니 눈에는 오빠하고 닮을수록 잘생기고 예뻐 보이는 거죠? 그럼 저도 다미 언니보다 미인인가요?]
다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당연하죠. 그래서 가끔 고민이 들어요. 희주 씨 사진 들고 압구정 한번 다녀올까 하는 고민이.”
[···오빠가 알면 통곡할 테니 절대로 하지 말아요.]
다미는 보조 스크린에 나타난 희주를 향해 우아한 미소를 되돌렸다.
“그래서 희주 씨. 스카이박스가 필요해졌다고요?”
[네, 이번에 구단주가 직접 방송에서 뼈 때려서 그런지, 스카이박스 예약을 막아버리는 식으로 나오더라고요. 자기네 사정상 이번에는 일반석만 제공할 수 있다고···.]
다미의 눈이 가늘어지자, 희주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뮌헨 스폰서 모조리 끊어버리란 소리 아니고요. 그냥 스카이박스만 구해 주면 충분해요. 리미트리스 명의로는 예약이 힘들겠지만, 그래도 다미 언니는 거래처 통해서 확보할 수 있잖아요?]
다미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77번 박스를 쓰세요.”
[77번요? 그거 알리안츠에서 가장 좋은 박스잖아요! 가만, 77번은 관계자 전용이라 외부에서는 예약 안 되는 건데?]
“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제가 확보했어요.”
[뭐야, 이제 나보다 티켓팅도 잘하네!?]
호들갑을 떠는 희주를 향해, 다미는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사실 다미의 티켓팅 솜씨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다만 알리안츠의 관계자 전용 77번 스카이박스는 챔스 시즌에는 항상 유에파에 넘어가고, 유에파는 그 티켓을 다시 스폰서 기업에 제공하며, 리미트리스는 그 기업들의 지분을 적당히 사들였을 뿐이다.
[아무튼 박스 잘 쓸게요! 그럼, 결승전에 봐요. 맞다, 결승전 좌석은 따로 예약할 필요 없어요!]
영상통화를 마친 다음, 다미는 벽면의 메인 스크린을 조심스럽게 껐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업무 모드로 돌아갔다.
조바심은 나지 않았다. 다시 만나기로 한 챔스 결승까지는 이제, 딱 한 걸음만 남았음을 알기에.
그때 다미는, 혹시라도 선덜랜드가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나, 공은 둥글다는 축구계의 오랜 격언 같은 건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