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방법 (3)
“좀 더 날카롭게 보내줄 수 있잖아?”
크리그의 요구에, 요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날카롭게요?”
“더 빠른 타이밍에, 좀 더 라인 뒤로 파고들게끔···.”
그제야 요구의 의미를 알아차린 요니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해리슨 같은 패스 말이군요. 저는 자신 없는데요.”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요니는 재빨리 패스 루트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 보면 확실히 요니가 재주가 좋은 선수라고, 크리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해리슨은 오늘부터, 아침 자유 훈련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다. 밤마다 에디와 따로 훈련하다가 그만 닥터스톱, 정확히는 메디컬 팀 스톱을 먹고 강제 휴식 조치에 처해진 것이다.
선덜랜드 스태프의 조치는 꼼꼼했다. 메디컬 팀의 ‘개인 훈련 금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리지가 훈련장 입구에 [잡상인, 기자, 해리슨 사절합니다.]라고 써 붙였을 정도다.
아쉽게도 해리슨은 그 농담 섞인 공지문을 읽지 못했는데, 시설관리팀에 붙들려 클럽하우스를 빠져나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요니와 크리그의 훈련량도 꽤 아슬아슬한 지경까지 이르긴 했지만, 요니는 그래도 끝나고 따로 밤 연습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가까스로 세이프였다.
그리고 크리그는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 의사를 밝힌 만큼, 가급적 선수가 바라는 대로 원 없이 훈련할 수 있게 해 주라는 지시가 들어간 상태였다.
크리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요니는 다시 세워둔 콘 사이로 공을 보내기 시작했다. 가상의 수비를 따돌리기 위해 사선으로 달리던 크리그는, 패스 타이밍에 맞춰 방향을 꺾었다.
‘바스티아노처럼 우아한 몸동작도 없고, 우리 캡틴처럼 중거리 득점을 노릴 수도 없으니까··· 내게 유일하게 남은 무기는 라인브레이킹뿐이겠지.’
처음 해리슨의 패스를 봤던 날에는, 공에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이후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발끝 정도를 댈 수 있게 되었다.
세간에서는 몇 년간 아침마다 함께 훈련해온 덕분에 호흡이 맞기 시작했다고 평가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건 크리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해리슨은 훨씬 더 예리한 패스를 보낼 수 있다. 수비가 대응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자리로. 그저 자신이 해리슨의 ‘진짜’ 패스를 따라잡지 못할 뿐이다.
지금처럼.
간발의 차이로 공을 놓친 크리그가 살짝 고개를 떨어뜨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요니가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그만할까요?”
잠시 숨을 고른 다음, 크리그는 처음 위치로 돌아갔다. 연습을 계속하겠다는 의사 표시다.
“가끔, 꿈을 꿀 때가 있어. 결정적인 찬스에서 내가 패스를 따라잡지 못하거나, 자세가 무너져서 공이 허공을 넘기고 마는 거야. 결말은 항상 똑같아. 팬들의 깊은 탄식이지.”
“···공격수에게는 끔찍한 악몽이겠네요.”
“맞아. 악몽이지. 하지만 가장 끔찍한 부분은 사실 저것들이 모두 실제 경험담이라는 거야. 너도 알잖아.”
내뱉듯이 말한 크리그를 향해, 요니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다 옛날 일이잖아요.”
“맞아, 옛날 일이지. 모든 경기가··· 지나고 나면 전부 옛날 일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크리그는 눈을 감았다.
“올 시즌 팀에 남은 경기는 이제 딱 둘이야. FA컵 결승전과 챔스 결승전.”
그리고 크리그는, 지금의 자신이 챔스 결승전에서 뛸 수 있는 수준의 선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난, FA컵 결승전이 마지막일 거야.”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네.”
“두 번 다시, 팬들에게 나쁜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아. 마지막 경기라면 더욱.”
“네.”
“그러니까, 보내. 더 깊숙한 위치까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공이 날아들었다.
요니의 발을 떠난 패스는, 처음 해리슨의 패스를 경험했던 순간처럼··· 크리그가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던 궤적을 그렸다.
‘세상에는 천재가 참 많단 말이지.’
하긴, 요니는 원래 선덜랜드의 보물이라 불리며, 공간연주자라 극찬받는 선수다. 남다른 공간지능을 가진 요니라면, 패싱 센스도 남다를 것임은 처음부터 분명했다.
‘난 아니지만.’
그래도 끝까지 싸우고 달릴 것이다. 아마추어 축구 지망생을 프로로 만드는 요소는 재능이지만, 프로로 살아가게 하는 조건은 재능 따위가 아니니까.
재능이 부족해도, 의지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업적은 남기지 못해도 좋은 기억을 심어줄 수는 있다. 원클럽맨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헌신할 수는 있다.
FA컵 결승전의 휘슬이 세 번 울릴 때까지··· 크리그는, 아무것도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노점 앞에서, 마일즈는 점보 크레이프를 알뜰하게 씹어먹었다. 그러자 기분 탓인지 바지가 빡빡하게 조이는 것 같았다.
크림과 과일, 시럽 같은 당분이 그대로 살덩이가 되어 아랫배에 매달리는 것만 같다. 여러 개를 더 먹을 자신은, 적어도 오늘은 없었다.
‘제발···.’
기도하는 심정으로 마일즈는 크레이프에 동봉된 카드를 개봉했다.
‘제발 앨리스 카드! 아니면 크리그도 괜찮은데.’
아이가 원한다는 게, 우선순위의 가장 큰 이유였다. 네 살짜리 아들이 크리그 카드와 앨리스 카드를 원한다는데, 아빠라면 당연히 구해다 주는 게 도리 아니던가? 친구들의 희망사항은 미안하지만 나중 문제다.
개인적으로는 크리그보다는 앨리스 카드를 더 희망했다. 그래도 크리그 카드는 교환으로 구할 수 있지만, 앨리스 카드는, 어떤 의미에서는 구단주 카드나 축구의 신 카드보다도 바꾸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 같은 아저씨가 앨리스 카드를 달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다가는, 주위에서 무수한 경멸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팩을 개봉한 마일즈의 눈에, 카드의 이름이 보였다.
[No.22. 빌 크리그 (FW)]
“그렇지! 크리그다!”
무심코 포효하는 마일즈를 향해, 주위의 시선이 쏠렸다. 그중에는 선글라스를 걸친, 키가 훤칠하게 큰 청년도 포함되어 있었다.
“크리그 씨의 팬이신가 보네요. 좋은 안목이지만, 그래도 공격수들보다는 묵묵히 뒤에서 헌신하는 수비진의 고생에 관심을 가져 주시면 어떨까요?”
선글라스 청년의 질문에, 마일즈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아주, 아주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 저는 개인적으로 에디 선수 팬입니다. 카드는, 우리 애가 크리그 선수를 좋아해서··· 아들 주려고요.”
“아, 그렇군요. 아주 안목이 높으시군요.”
“네··· 형편없는 안목은 아닐 겁니다.”
대답하면서, 마일즈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선글라스 청년은 아무리 봐도 에디 본인이었기 때문에.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서, 고작 선글라스 좀 썼다고 선덜랜드 1군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특히 에디는 무척이나 티가 잘 나는 편이다.
센터백 특유의 거구도 눈에 띄지만, 일단 행동거지가 묘하게 어설프다. 경기장 안에서는 누구보다 멋들어진 ‘철의 센터백’인데, 일상생활에선 묘하게 어색한 것이다.
걸음걸이며 동작은 물론, 패션 테러리스트의 조건을 충분히 갖춘 복장도 문제다. 심지어 에디는 선글라스조차 어색하고 폼이 안 났다.
실제로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선글라스 청년이 에디임을 전부 눈치챈 것 같았다. 다만, 선글라스까지 쓰고 나온 이상 ‘일단 모르는 척 해 주자.’는 느낌의 반응이었다.
마일즈는 그런 에디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메디컬 팀 몰래 크레이프 사 먹으러 왔나?’
잠시 지켜본 결과 에디는 줄곧 크레이프 노점 주위에 머물렀고, 대량의 크레이프를 구입했다. 하지만 단 한 개의 크레이프도 자기 입에 가져가지는 않았다.
대신, 에디는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크레이프를 하나씩 사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No.5. 에디 레이놀드 (DF)]
“와아- 에디 카드 나왔어!”
“좋겠구나.”
“그치만 캡틴 카드도 갖고 싶었는데···.”
그러자 에디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고, 원래 살짝 구부정하던 자세가 축 늘어졌다.
“그럼 캡틴이 나오나 보게, 크레이프 한 개 더 줄까?”
“아뇨. 살쪄요. 그리고 저는 에디 카드도 좋아요.”
“그렇지?”
단숨에 기운을 차리는 에디를 향해, 아이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FA컵 결승전도 이겨주실 거죠, 3주장?”
“3주장이라니. 나는 그런 훌륭한 사람이 아닌데.”
쓴웃음을 지으며 선글라스 청년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살짝 덧붙였다.
“하지만 선덜랜드는 절대로 지지 않을 거야. 너희가 응원해 주기만 한다면···.”
“응원할게요!”
“결승전 날, 풋볼 스퀘어에 나와줄 거지?”
“네에!”
“음··· 그날 형은 너무 바빠서 풋볼 스퀘어에 같이 오지는 못할 거야. 그래도 너희들은 응원해야 한다. 알았지?”
“네에!”
걸음을 멈춘 마일즈가 옆에서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른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미담이네요. 기사로 싣고 싶어지는데요?”
“그렇죠? 하지만 관두는 걸 추천할게요. 선글라스 쓴 선덜랜드 선수를 취재하지 않는 건 불문율이거든요. 운 좋으면 선덜랜드 프레스팀을 상대하게 된다니까요.”
“그 말은, 운 나쁘면 프레스팀보다 더한 걸 상대한다는 뜻이군요.”
“네, 리미트리스죠.”
“미담이니까 괜찮지 않으려나 싶긴 한데, 관둬야겠군요.”
입맛을 다시는 기자들을 흘끔거리며, 마일즈는 재빨리 스마트폰을 꺼냈다. 다행히 그는 팬이고, 선덜랜드 ‘프레스팀’을 상대할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잠시 후, 마일즈는 커뮤니티에 곧바로 글을 올렸다.
- 오늘 에디 봄. 지나가는 애들에게 자기 돈으로 크레이프 사주고, FA컵 응원해 달라고 말함. 되게 멋있었음.
아쉽게도, 마일즈의 글은 썩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일단 인증 사진을 찍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ㄴ 거짓말하지 마. 경기장 밖에서 멋있으면 절대로 에디일 리 없잖아.
도저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마일즈는, 조용히 크리그 카드를 들고 돌아갔다.
* * *
FA컵 결승을 앞두고, 우리는 막바지 준비에 한창이었다.
“맨시티는 빌드업이 좋고, 공격 전개와 기회 창출이 뛰어난 팀이지.”
“네. 슛까지 이어나가는 전개는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팀이나 마찬가지죠. xG도 아주 높고요.”
“다만 결정력은 조금 아쉬워.”
“찬스는 어느 팀보다 많이 만드는데 결정력은 그 정도는 아니죠. 필연적으로 빅찬스 미스 장면이 다른 팀보다 많이 생기고요.”
브라이언과 샐리의 이야기에는 거침이 없었다. 아마 맨시티 감독 본인을 제외하면, 이 두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맨시티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코칭스태프일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결승전의 핵심은···.”
“당연히 크리그죠.”
“에디가 아니고!?”
여느 때와 같은 결말에, 둘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우리 스태프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심지어 희주는, 만족스럽게 웃기까지 했다.
“또 저러는 거 보니까, 이번에도 어지간하면 이기겠네.”
사실 둘의 이야기는 모두 일리가 있다. 그저 표현의 포커스를 어디에 두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맨시티는 언제나처럼 점유율을 가져갈 것이고, 선덜랜드가 받아칠 것이기 때문에, 수비 라인을 지키며 역습을 주도할 든든한 센터백과 한정된 찬스를 골로 바꾸는 결정력 있는 스트라이커가 반드시 필요하다.
에디와 크리그는 그 조건에 딱 맞는 선수들이다.
그리고 만일 한 명을 더 꼽으라면, 개인적으로는 요니에게 기대하고 있다. 맨시티처럼 잘 짜인 팀에게 균열을 내려면, 역시 요니처럼 공간지능과 오프더볼이 뛰어난 선수가 가장 좋으니까.
“음, 공간지능과 오프더볼도 좋지만, 팬들의 미친 듯한 함성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아? 우리 지난번에 기록도 세웠잖아.”
희주의 엉뚱한 소리에,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건 축구판에서 언제나 통하는 진리고.”
여담으로 우리는 지난번 챔스 4강 2차전 직후, 소소한 기록을 하나 더 추가했다. 결승 진출을 확정한 순간, 경기장의 소음이 143.5데시벨로 기네스 기록을 경신했다고 하더라고.
지진계도 살짝 흔들렸다는데, 아쉽게도 우리 팬들의 발구름과 지진계 사이의 인과성을 입증하지 못했다.
“그럼 갑부 오라버님. 슬슬 출발하실까요? 이제 전용기 띄울 시간이라서.”
“가야지.”
CS팀은 이미 하루 먼저 출발했다. 그 팬들이, 이번 웸블리 원정에도 함께하기 때문에.
평소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보여주던 열기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블랙캣츠가, 맥켐즈가 웸블리 스타디움의 좌석 과반수를 차지한 채 소리 지를 것이다. 선수들과 함께 싸우고, 발을 구르고, 경기장을 붉게 물들이겠지.
그 목소리는, 영국 북동부 타인위어에서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풋볼 스퀘어에,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팬들의 발걸음이 이어질 테니까.
그렇기에 대회 결승전이라는 큰 무대도, 맨시티라는 강적도··· 조금도 두렵지 않다. 팀을 믿는, 수만 명의 우리들이 있기 때문에.
그날, 우리 선덜랜드 축구단은 웸블리를 붉게 물들이기 위한 원정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