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405화 (405/422)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방법 (5)

어느새 웸블리에는 색종이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붉은 꽃비의 물결이.

우리 팬들이 미리 준비해 온 모양인데, 아마 스태프들도 거들었을 것이다. 만에 하나, 준비해온 것들이 전부 쓸모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우승에 대비하는 게 선덜랜드 스태프의 철칙이기에.

잠시 후 우리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웸블리의 FA컵 운영진과 함께 단상을 설치하고, 플래카드를 내걸며, 선수들에게 새 유니폼 셔츠를 내밀었다.

[FA컵 챔피언 선덜랜드]

은색 바탕에 빨간 무늬, FA컵의 디펜딩 챔피언 패치에는 숫자 ‘5’가 선명하다. 가슴팍의 메인 스폰서 로고 아래에는 ‘연속 우승’ 멘트를 넣었다.

“오빠, 연속 우승도 플래카드 걸고 자랑할 만하지 않았어? FA컵 연속 우승은 맨유나 맨시티, 리버풀도 못 해본 거잖아.”

“아스널, 첼시, 토트넘, 블랙번 같은 소수의 팀들만 해냈지··· 그리고 ‘그 팀’도.”

“아.”

우리가 FA컵 3연패를 해낸 다음이면 모를까, 그 전에는 대놓고 광고하기 그렇다. 뉴캐슬이 50년대에 이미 해버린 거라서.

그사이 트로피가 단상 앞에 올라왔다. 일제히 도열한 1군 선수들 사이에서, 주장 잭이 동료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에디와 바스티아노가 양쪽에서 크리그의 팔을 붙잡아, 대열 가운데로 내보냈다.

“왜들 이러는데, 왜.”

“아시잖슴까. 전통임다.”

평소라면 주장이 가장 먼저 트로피를 드는 게 원칙이지만, 은퇴 시즌에는 떠나보낼 선수에게 트로피를 양보한다. 페르난데스, 톰슨··· 팀에 헌신했던 선수들을 떠나보내는 시즌에서, 우리는 늘 그랬었다.

마침 크리그는 이번 FA컵 결승전에서 더할 나위 없는 맹활약을 펼쳤다. 팀을 대표해 가장 먼저 트로피를 들기에 손색이 없는 선수다.

어색한 얼굴로 머뭇거리던 크리그가, 동료들의 부추김 속에서 마침내 트로피에 손을 가져다 댔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팬들의 함성 속에서 크리그가 트로피를 힘차게 들어 올렸다.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고, 또다시 종이 꽃가루가 흩날렸다.

조금은 어색하게, 한편으로는 후련하게 웃는 크리그의 얼굴 위에 옛 추억이 겹쳐 보였다. 구단을 처음 인수했던 날, 혼자 남아서 계속 공을 차던 스트라이커의 기억이.

[제 업무는 골 넣는 건데요. 그걸 못 해서 지금 연습 중인 거고요.]

팀을 위해 멋지게 자신의 업무를 다해준 그를 향해,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어느새 웸블리의 우리 팬들이 전부 일어나 있었다.

* * *

같은 시각,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분석실에는 선덜랜드 유소년들이 나란히 앉아 경기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이 정도 슛이면, 솔직히 푸스카스상 후보 아니야?”

선덜랜드 유소년들은, 크리그의 쐐기골에 매우 감동한 상태였다. 역습의 시발점이 되어 공을 끊어냈던 선수가, 죽도록 달려와 마지막 마무리에 다시 참여하는 그 모습이야말로 선덜랜드의 팀 스피릿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었기에.

심지어 그 질주는 경기 종료를 앞둔 89분에, 그것도 은퇴를 앞둔 노장의 발에서 나왔기에 어린 소년들을 더욱 감동시켰다.

“솔직히 푸스카스상 시상은 조금 힘들 것 같아. 보통은 공격수의 개인기가 뛰어난 골에 표를 주는 경향이 많더라고.”

“축알못들 같으니라고.”

소년들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크리스는 손에 든 크리그 카드를 힘차게 흔들었다. 그의 아버지, 마일즈 우드가 점보 크레이프를 알뜰하게 먹어치운 끝에 확보한 물건이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테오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크리스 너, 축구 보는 눈은 확실히 괜찮은 것 같네! 크리그 씨가 아주 멋지게 해냈어!”

“사아인.”

“사인받을 거라고? 걱정 마. 내가 책임지고 받아줄 테니까.”

자신 있게 말하는 테오를 향해, 주위에서 의심의 시선이 쏟아졌다.

“설마 테오 너, 엄마은행 같은 짓을 하려는 건 아니지? 맡길 때는 자유지만, 찾을 때는 아니라는 그 은행 말야.”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 돌아오시는 대로 같이 받으러 가자.”

애초에 테오는 크리스가 가진 카드를 가로챌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일단 크리그 카드는 이미 한 장 갖고 있었고, 지금 분석실 구석에서 환한 미소를 보내는 앨리스 단장보좌와 크리스의 친분을 알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테오는 크리스를 아주 예뻐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바르카가 더욱더 크리스를 시샘하게 되었고, 유소년 주장 짐이 바르카를 챙기면서 테오가 다시 바르카를 질투하는 원한의 순환구조가 강화되고 말았지만, 우승의 기쁨 앞에서는 그런 사소한 감정은 모두 눈 녹듯 사라지고 만다.

잠시 후 중계 영상은 믹스드존을 비췄고, 양 팀 감독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승리한 선덜랜드의 분투에 축하를 보냅니다.]

맨시티 감독 펩의 인터뷰는 짧고 간결했고, 승장 브라이언의 인터뷰는 조금 더 길었다.

[예전에 제가 존경하는 어느 감독께서, 노력은 각자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중계를 지켜보던 다른 아이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앨리스는 쓴웃음을 지었고 테오는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 모두, 조금 전 거론된 ‘존경하는 감독’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맨시티 감독, 펩 본인이 그렇게 말했었다.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지만, 노력만은 의지에 달린 것이라고.

브라이언은 하필 그 이야기를, 심지어 이긴 직후에 인용했다. 어쩌면 상대로서는 조롱이나 도발로 받아들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브라이언의 얼굴은 진지했고, 맨시티를 긁으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오늘 우리 선덜랜드의 22번이, 크리그가 보여준 플레이야말로 의지의 정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선수와 함께할 수 있었음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 * *

양 팀 감독들의 인터뷰에 이어, 오늘의 MoM 크리그가 믹스드존에 섰다.

[득점 축하드립니다! 이로써 크리그 선수는, 클럽 선수가 참가할 수 있는 최상위 컵 대회의 모든 결승전에서 득점하는 진기록을 세우게 되셨는데요!]

기자의 호들갑에, 크리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재작년 챔스 결승전에서, 조커로 출전해 쐐기골을 넣은 게 대기록 수립에 큰 도움이 된 모양이다. 클럽 월드컵 결승전에 나간 것도 큰 힘이 되었고.

아무튼, 무척 드문 대기록이다. 그래서인지 옆에서는 희주가 가슴을 펴며 자랑스러워하는 중이었다··· 네가 아니라 선수가 잘한 건데 말이지.

그 와중에도 인터뷰는 계속 진행되었다.

[여전히 결승전에서 뛸 수 있고, 득점할 수도 있는 선수가 은퇴를 선택한 것이 아쉽다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혹시 선덜랜드가 아닌 다른 팀에서라도 선수 생활을 이어갈 생각은 없으신가요?]

대답하기 전, 크리그는 기자와 카메라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고, 입술이 몇 차례 달싹거렸다.

그런 다음에야, 마침내 크리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 저는 그렇게 가치 있는 선수가··· 재능 있는 선수가 아닙니다. 오죽하면 시즌 내내 한 골밖에 넣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구단주님 밑에서가 아니면, 선수로서 한 사람 몫을 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절대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인터뷰를 지켜보아야 했다. 이 자리는 그의 자리이지, 나의 자리가 아니기에.

“하지만 단지, 그런 이유에서만 은퇴를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크리그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짝 왜소해 보이던 크리그의 모습이, 어깨를 펴자 무척이나 당당하게 보였다.

“저는 이미 이 셔츠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기 때문에, 남은 미련도··· 다른 엠블럼을 위해서 내줄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선덜랜드 이외의 유니폼을 입을 마음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혹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아직 팀에게 한 경기가 더 남아 있습니다. 가장 큰 무대, 챔스 결승전이요. 창단 첫 트레블이 걸린 역사적인 무대이기도 합니다··· 오늘 절 응원해 주신 것처럼, 그날도 더 큰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 * *

선덜랜드로 돌아오는 전용기에서, 선수들이 다들 의자에 파묻히듯 축 늘어졌다. 경기가 끝난 여파에 더해, FA컵 우승과 더블을 확정한 성취감에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였으면 ‘아직 시즌이 끝나지 않았다!’며 독려했을 브라이언과 샐리도, 마냥 흐뭇한 표정으로 선수들에게 짧은 휴식을 허락했다.

하지만 스태프들에게는 쉴 여유가 없었다.

프레스팀 쪽에서는 벌써부터 전투적인 타이핑 소리가 흘러나왔고, 조금 떨어진 자리까지 애니의 지시가 들려왔다.

“더블을 해냈다는 걸 강조하지 마. 트레블이 남았다는 걸 강조해. 딱 한 경기면 트레블이라고,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한 경기만 이기면 된다는 걸 강조하라고.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듣지?”

“네, 팀장님. SNS에도 떡밥 잔뜩 뿌리겠습니다. 리그 무패 우승과 5관왕, 그리고 올 시즌의 트레블 중 뭐가 더 대단한 업적인지 비교시키는 식으로요.”

신상품기획팀은 기념 굿즈 찍어낼 생각에 여념이 없어 보였고, 시설관리팀장 조엘은 희주와 한창 통화를 나눴다.

“스페셜 땡스 투 뉴캐슬 3호는 준비 끝난 거죠? FA컵 트로피 모형 달고, 은색으로 예쁘게 폴리싱해서요.”

[네, 하지만 아무래도 트레블이 코앞이니 퍼레이드는 간략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네, 간략히 할 거예요. 그런데 왜 굳이 런던까지 버스가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생각하세요?”

[즉시 리미트리스 공항에 출동시키겠습니다!]

“암, 그래야죠.”

예전에는 우리 퍼레이드용 버스가 촌스럽다며 질색하던 희주도, 요즘은 꽤 즐기게 된 모양이다. 더비 라이벌을 까는 참맛을··· 하긴, 쟤도 이제 블랙캣츠 경력이 제법 되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조금 귀한 손님과 통화하는 중이었다.

[FA컵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왕세손 전하.”

전하인지 저하인지 살짝 헷갈리는데, 이럴 때는 높은 쪽으로 부르는 게 마음 편하다. 다른 전하들이 통화 엿듣는 것도 아닐 테고.

[이번엔 FA컵 회장으로서 전화한 거니까, 편하게 부르시면 됩니다, 구단주님. 아니면 서로 정식 호칭을 쓰는 게 나을까요, 대영제국 훈장 사령관 희성 썬 리 경?]

영국인이 아니니까 경은 아니라고 항변해 볼까 하다가, 나는 그냥 깔끔하게 두 손을 들기로 했다.

“아뇨, 감사합니다. 회장님.”

전화기 너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선덜랜드의 기세가 대단하던데요. 이렇게 된 거 챔스 결승전, 기대해도 괜찮겠지요?]

“물론입니다. 유럽 대항전에서도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예전에, 맨유의 전성기를 이끈 감독 퍼거슨 경이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하나의 팀이 아니라, 리그 전체를 유럽의 정상에 올려놓는 게 목표라고.

나는 그렇게까지 거창한 목표를 입에 담을 생각은 없다. 어차피 나는 영국인이 아닌 한국인이고, 내 관심사는 프리미어리그가 아닌, 선덜랜드의 승리에만 쏠려 있다.

다만, 챔스에서 질 생각도 없을 뿐이다. 하물며 그 챔스가 우리 홈,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열리는 경기라면 더욱 질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우승은 자연스럽게 리그의 위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것이다.

[기대하죠.]

통화를 끝내는 인삿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잠시 기다려도 전화 끊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전화기 너머에서는 축협 회장의 찬탄이 전해져 왔다.

[프로페셔널한 스태프, 영국에서 가장 뜨거운 관중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단단하게 결속된 열한 명의 선수들··· 구단주님은 정말로 훌륭한 팀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대단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네?]

“경기를 이기게 만드는 건 선수들이고, 대회의 성적은 감독과 코치들이 냅니다. 빛의 경기장을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은 스태프들이고, 함성은 팬들이 지르는 겁니다. 제 공은 딱히 없습니다.”

그렇게 딱 잘라 말하자, 감탄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선덜랜드가 강한 비결을 알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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