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경기장에서 (1)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일개 클럽이 아니라 리그를 세계 정상에 다시 올려놓는 것이다 - 알렉스 퍼거슨>
전용기가 리미트리스 공항에 닿을 무렵, 나는 슬쩍 에이미와 린다를 불렀다.
“리버뷰 브래서리면 괜찮겠습니까?”
내 질문에, 에이미는 살짝 한숨 섞인 대답을 했다.
“제 꿈은 원래 스몰 웨딩이었는데요. 조촐하게, 가까운 사람들만 불러 놓고요. 그러니까 맥그리거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맥그리거장?”
맥그리거가 잭의 성씨임을 눈치채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집이 넓어요. 예전에 캡틴 어머님이 잠깐 식당 하신 적이 있어서요. 소시지 맛집이었는데···.”
에이미가 재빨리 부연하자, 옆에서 CS팀장 린다가 고개를 저었다.
“일반 가정집치고는 크지만, 그래도 CS팀이 전부 들어갈 정도는 아니던데?”
“그냥 비스트로였으니까요. 그런데 팀장님, 저는 스몰 웨딩 취향이라고 방금 말씀 안 드렸던가요?”
“그래서 CS팀만 참석한다고 하잖아. 아니었으면 선덜랜드 스태프 전원이 참석할걸?”
린다의 이야기에, 나도 거들었다.
“아예 일가친척만 부르려는 게 아니면, 좀 더 큰 장소가 필요할 겁니다. 일단 신랑 측에서는 1군 선수 전원이 참석할 테니까요. 잭도 이제 잉글랜드 국가대표니까, 국대 동료도 몇 명쯤 올 것 같고···.”
말을 잇지 못하는 에이미에게, 린다의 결정타가 이어졌다.
“리버뷰 브래서리 정도면 충분히 작아졌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선덜랜드 캡틴의 결혼식이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피치 위에서 진행해도 아무도 불만 없었을걸?”
“신부는 불만이라니까요. 결혼식은 신부 마음대로 하는 거 아니었나요?”
가볍게 불평하던 에이미의 표정이, 이내 진지해졌다.
“구단주님도, 팀장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는 곧 트레블을 할 팀이죠. 다시 말하면, 아직 해낸 건 아니에요. 결승전 하기도 전부터 그렇게 풀어져서는···.”
에이미의 꽤 날카로운 반격이었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나와 린다는 이 정도 반론에 휘둘릴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선덜랜드 스태프는, 팀이 반드시 우승한다고 가정하고 준비하죠. 만에 하나 우승에 실패해, 눈물로 치워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구단주님 말씀대로입니다. 그리고 에이미, 우리 선수들이 결승전 전부터 벌써 풀어졌는지 아닌지는 부팀장이 훨씬 더 잘 알지 않아?”
“뭐, 우리 선수들이 그럴 리는 없지만요. 그래도 결혼 준비는 조금 일러요. 일단 챔스 우승하면 우승 기념 행사가 가장 먼저잖아요? 그다음은 트레블 기념 이벤트를 해야 하고요.”
에이미의 정론에,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예를 들면 트레블 기념으로 뉴캐슬어폰타인에 버스와 비행선 중 어느 걸 보내는 게 더 좋을까 같은 거 말입니까?”
“바로 그거죠. 역시 구단주님이세요.”
그런 건 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에는 ‘둘 다’ 라는 좋은 문화가 있다. 아니면 로켓 하나 쏴도 그만이고.
그보다는 잭과 에이미의 결혼식이 훨씬 중요하다.
선덜랜드의 캡틴과 CS팀 부팀장은 현재 공식적으로 사귀는 사이다. 두 사람 모두 팬들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점에서 천생연분이었는데, 팀이 트레블을 하고 나면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소망으로 시작된 이야기였는데, 어느새 팀은 트레블까지 딱 1승만 남겨둔 위치까지 올랐다. 덕분에 우리 선수들은 캡틴을 반드시 장가보내자며 유머러스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팀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할 예정이다. 주장 잭도, CS팀 에이스 에이미도 구단에서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들이기에. 만일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전체를 결혼식장으로 내달라고 요구했어도 기쁘게 허락했을 것이다.
리버뷰 브래서리를 하루 내주는 정도는 조금도 아깝지 않단 말이지. 실제로 쉐프 카일은 벌써부터 결혼식 피로연에 쓸 메뉴 연구에 들어가기도 했고.
그런데 이야기를 좀 더 나누다 보니, 잭의 어머니 사라 여사도 직접 결혼식 피로연 메뉴를 연구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일단 잭의 집부터 가야겠군요.”
* * *
FA컵 우승 기념 퍼레이드는 예상보다 훨씬 조용하게 시작했다. 뉴캐슬어폰타인에서는 아예 우리의 퍼레이드 시간에 맞춰 일종의 청야전술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민들이 모조리 실내에 틀어박히는 식으로 대응하는 거 말이지.
브라이언과 샐리가 흐뭇한 얼굴로 잡담을 나눴다.
“조르디가 던지는 계란과 토마토가 그리워질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나중에 은퇴한 다음 펍에서 자랑할 무용담은 하나 늘었네요.”
“더비 라이벌을 전부 재택근무시켰다고 말이지?”
반면,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 도착하자 주위의 풍경은 온통 붉게 물든 상태였다. 거리 양쪽에 잔뜩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선덜랜드를 외쳤으며, 머플러를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잭의 집에 향했다.
잭의 어머니, 사라 여사는 보기 드물게 호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원래 대범한 강심장으로 소문난 우리 주장 잭조차, 어머니 옆에서는 상대적 소심쟁이로 보일 정도로.
그리고 영국에도 아직 맛있는 요리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예전에 잭의 집은 식당을 했었다고 들었는데, 대체 이런 맛집이 왜 영업을 중단했는지 궁금할 정도다.
아. 어쩌면 영국식 장어 젤리 같은 걸 내놓지 않아서 그런 건가 싶은 실례되는 생각도 잠깐 했을 정도다.
식탁에는 요니의 소울푸드인 컴버랜드 소시지를 비롯한 영국 정통 요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듣자니 맥그리거 가문의 풍습은 손님이 조금이라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도록 넉넉하게 차리는 거란다.
대접받은 음식을 남기면 벌 받는다는 한국문화권 출신의 나와는, 치열한 승부였다. 맛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지.
식사를 마치고, 사라 여사는 나를 빤히 응시했다. 이미 용건은 잭과 에이미, 그리고 린다 팀장이 설명했기에, 이야기는 빨랐다.
“요니가 그러더라고요. 트레블 하면 결혼할 거라고. 우리 애에게는 참 과분한 신부를 만났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구단주님께서 직접 신경 써 주실 줄은 몰랐답니다.”
“잭은 팀의 주장이니까요. 당연히 챙겨야죠.”
대답하자, 사라 여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데 구단주님, 그 이전에 거쳐야 할 훨씬 중요한 단계가 있지 않은가요?”
“네, 트레블을 해내는 게 먼저죠.”
“아뇨. 그 이전의 문제입니다.”
사라 여사는 내 쪽을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았지만, 무언가 더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 * *
잭의 집을 빠져나온 직후, 나는 아주 진기한 경험을 했다. 그러니까 땅에 발을 딛지 않고 도시를 이동하는 경험을.
발단은 톰슨의 문자였다.
[블랙캣츠에서.]
평소였다면 아마 구단주 사무실이나 클럽하우스에서 출발했을 테니 별다른 일은 없었겠지만, 그날은 출발 위치가 조금 달랐다.
FA컵 우승 기념으로 버스 세레머니를 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 공항에서 내린 다음 뉴캐슬어폰타인을 통과했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잠깐 선수 본가에 들리기도 했기 때문에, 동선이 시민들에게 노출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썬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도시 전체가 함성으로 메워졌다.
Sun! Sun! Sun! Sun!
다음에 일어난 일은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었고, 누군가의 손길에 이끌린 내 몸이 허공에 떠올랐으며, 선덜랜드 구단주 이희성은 다섯 블럭을 공중에서 이동했다.
덕분에 톰슨과 마주했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눈치챈 사실은 서로의 복장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나는 꽤 다림질이 필요할 듯한 차림이 되었고, 톰슨은 평소보다 훨씬 반듯했다.
칼 잡힌 정장.
“어쩐 일이야?”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발언이었음은, 말을 꺼내놓은 다음에야 눈치챌 수 있었다. 다행히 톰슨은 내 의도를 오해하지 않았다.
“나도 이제 잘 입고 다녀야지. 이제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잖아. 유소년 코치가 트레이닝복에 운동화 끌고 다니기는 좀···.”
“아니, 그럼 우리 1군 감독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다니는 건 말이 되고?”
사실 브라이언은 경기 당일에도, 심지어 믹스드존에도 어지간하면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간다. 구단 엠블럼이 들어간 팀 훈련복이긴 하지만, 빈말로라도 단정하다고는 못할 복장이다.
톰슨의 무뚝뚝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브라이언 걔는 아무 상관 없지. 걔는 복장이 문제가 아니잖아.”
하긴, 그 인간은 연미복을 입혀도 썩 단정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복장 문제가 아니라는 표현은 아주 정확하다.
“부모님들께 보여 드려야 하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유소년팀 코치는 일종의 초등교사 같은 직업이라고 생각해.”
초등교사란 말이지.
선덜랜드 유소년팀 코치에게 퍽 어울리는 명칭이었지만, 그래도 설마 톰슨의 입에서 듣게 될 단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톰슨이 자리를 권했다.
“앉아. 난 마티니. 젓지 않고 흔들어서.”
“바 블랙캣츠에서는 그 레시피를 톰슨 스페셜로 부르기로 합의한 거 아니었어?”
“조금 달라. 이제는 무알콜이 아니거든. 현역 선수가 아니라서 말이지.”
현역에서 은퇴한 직후부터, 톰슨이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정도는 안다. 페르난데스가 닭가슴살 쉐이크 이외의 다른 음식도 입에 대기 시작한 것처럼.
다만, 철저하게 자기 몸을 관리하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던 나로서는, 아무래도 가벼운 야유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교사라면서, 술 마셔도 되는 거야?”
톰슨이 흔쾌히 대답했다.
“밖에선 못 마시지. 어디 가서 취한 티를 내지도 않을 거야. 어디서 누가 날 보고 있을지 모르니까. 그래도 한두 잔 정도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끄덕이며, 나도 주문했다. 늘 먹는 제로콜라 쿠바 리브레, 물론 나는 무알콜 버전이다.
“그런데 브라이언은 안 불렀어?”
“유스 코치가 1군 감독을 어떻게 오라 가라 하겠냐.”
그때 절묘한 타이밍으로 바텐더가 음료를 가져왔다. ‘구단주님, 쿠바 리브레 나왔습니다.’ 라는 대사가 더해지자, 1군 감독은 못 불러내도 구단주는 불러낼 수 있다는 의미가 되어 버렸다.
톰슨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디까지나 챔스 결승전이 남았다는 의미였어. 어떤 의미로는, 브라이언은 우리들 중 지금 가장 부담스러울 테니까.”
“그렇겠지.”
우리 감독과 코치는 경기의 승패를 온전히 감독의 책임으로 간주한다. 좀 더 범위를 넓히면 감독을 잘못 보좌한 코치도 책임을 나누어 갖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절대 선수를 탓하지는 않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팬이나 구단주에게 책임을 미루지도 않는다.
“결승전 배당은 우리가 정배더라. 네가 온 다음부터 우리는 결승전 무패고, 홈 무패니까. 아무리 챔스의 레알이 대단해도, 이 팀이 홈에서 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나 봐.”
몇 년 전이라면 믿기지 않았을 이야기다. 3부 리그 선덜랜드가, 챔스 결승전에 오른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심지어 레알 상대로 정배를 기록할 정도로 우세한 평가를 받을 거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망상이라고 괜히 비웃음만 샀겠지.
구단주로서, 그리고 선덜랜드의 팬으로서는 무척 뿌듯한 이야기다. 달라진 팀의 위상을 체감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래서일까. 톰슨의 얼굴에도 자랑스러움이 가득했지만, 한구석은 살짝 어두웠다.
“그러니 브라이언은 한동안 분석실을 떠나지 못할 거야. 선덜랜드를 지게 만들 수는 없을 테니까.”
톰슨이 하고 싶은 말이, 무슨 이야기인지 나는 금방 눈치챘다.
공이 둥글다는 오랜 격언은, 어떤 의미에서는 거짓이다. 축구에서는 대체로 이길 만한 팀이 이기고, 올라갈 팀이 올라간다. 리그를 끝까지 돌리면 1위 팀과 20위 팀의 승점이나 득실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벌어지는 게 요즘 축구다.
통계적인 의미에서, 축구공은 썩 둥글지 않다. 그럼에도 축구라는 스포츠에서는 실제로 업셋이 일어나곤 한다. 모든 스포츠가 그런 것처럼.
당연하게도 레알은 그 업셋의 주인공이 되고 싶을 것이고, 우리는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우리 감독과 코치는 분석팀과 함께 또다시 밤을 지새울 것이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날 불러낸 거야? 브라이언 좀 잘 챙겨주라고?”
“아니.”
톰슨이 날 물끄러미 바라보며 덧붙였다.
“너 자신부터 잘 좀 챙겨주라고.”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그만 말을 잇지 못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입만 달싹거렸다.
“브라이언이 전해 주라더라. 하루 정도는 코리안 핫치킨 없이 밤샘해도 괜찮을 거라고. 나도 동감이야. 우리 구단주는 밤마다 야근하는 코칭스태프 야식을 손수 챙기고, 새벽엔 선수들보다 먼저 잔디 위에서 공을 차는 사람이니까 말이지.”
알콜이라고는 한 방울도 들어 있지 않은 쿠바 리브레를 마냥 홀짝거리면서.
“믿어도 괜찮아, 썬. 바로 네가 만든 팀이니까.”
미소 짓는 톰슨을 향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미 믿고 있어.”
이 팀 때문에, 나는 매일이 행복하다. 매일 아침, 어느 때보다도 기쁜 마음으로 눈을 뜨고, 공을 차며, 하루하루 축구 생각을 하며 충실하게 보낸다.
어릴 때의 꿈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그래도 가장 살고 싶은 삶, 행복한 인생이다.
그래도··· 조금 더 행복해질 방법이 있을 것도 같다. 트레블을 해내고 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