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경기장에서 (3)
요니가 선덜랜드의 보물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비록 이 지역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는 당당한 성골 유스다. 유소년 시절부터 줄곧 우리 팀에만 머물렀던 요니를, 구단에서는 로컬 보이 잭과 동등하게 대우하고 있다.
선수 본인 또한 잭과 돈독한 친분, 그리고 팽팽한 라이벌리티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구단을 인수한 직후에는 잭이 먼저 두각을 나타냈지만, 이마의 숫자는 처음부터 요니가 더 높았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라이벌인 관계다.
지난 시즌까지는 요니가 슬슬 잭보다 앞서나가는 느낌이었지만, 최근에는 잭이 각성하면서 이마의 숫자를 두 배 이상으로 불리며 치고 나가 버렸다.
그렇기에, 요니는 내게 있어 살짝 아픈 손가락이었다. 외지 출신이라는 점, 그럼에도 스스로 선덜랜드를 골랐다는 점, 그리고 바로 옆에 자기보다 앞서나가는 친구의 그림자에 줄곧 갇혀 있었다는 점이, 묘하게 선수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가 언제 밀렸냐는 것처럼 눈부신 숫자를 자랑하는 요니의 이마를 보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곤 한다.
요니의 각성 덕분에, 이제 우리는 로드리게스에 이어 잭과 요니라는 가치 높은 선수들을 보유하게 되었다. 세 명 모두 현재 전성기를 구가할 무렵이니, 지금의 우리 중원은 세계의 어느 팀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상태다.
게다가 좀 더 기다리면 디아라와 해리슨이 전성기를 맞이할 테니까···.
“구단주님?”
요니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요니는 자신의 손에 들린 간식들을 난처한 표정으로 번갈아 바라보는 중이었다. 잠시 후, 요니는 약간 변명처럼 들리는 ‘간식 처분 계획’ 을 털어놓았다. 아마, 내가 그를 빤히 응시했기 때문일 텐데, 어쩌면 축구 선수가 칼로리 관리할 생각은 안 하고 군것질이나 한다는 질책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팬들께서 주시는 거라, 거부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저 혼자 다 먹을 생각은 없고, 나눠 먹을 겁니다. 스태프분들하고요.”
“그래.”
“혹시 구단주님도 좀 드시겠습니까?”
“아니야.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옆에서 희주가, 그럼 자기 좀 달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나와 요니 모두 깔끔하게 무시했다. 희주의 손에는 이미 빈 공간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요니가 로커 파크를 올려다보았다.
“다음 시즌부터는 우리 애들이 이곳에서 경기하는 거군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보다는 작지만, 유소년에게는 아주 큰 무대일 텐데요.”
“어릴 때부터 큰 무대에서 경험을 쌓아야, 나중에 무대울렁증 같은 게 안 오지.”
“그렇네요. 확실히 구단주님께서 오시고 나서, 우리 아카데미가 강해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로커 파크를 올려다보던 요니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잠시 후, 그 미소가 나를 향했다.
“만일, 구단주님을 좀 더 빨리 만났으면, 저도 지금보다 더 나은 선수가 될 수 있었을까요?”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만일 그랬으면, 나는 지금보다 좀 더 미숙한 선수와 만나게 되었을 거야.”
구단주로서, 내가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팬들을 끌어모으고, 각종 설비와 코치진을 강화하며, 경기장과 훈련장에 막대한 투자를 했으니까.
그래도, 결국 벽을 넘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힘이다. 그렇지 않다면 똑같은 환경에서 성장한 우리 선수들 중에서, 오직 잭과 요니, 그리고 짐만이 자신의 숫자를 바꿔냈다는 사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름에 J가 들어가는 게 숫자를 바꾸는 조건이 아니라면야.
그러자 옆에서 줄곧 우리를 지켜보던 로드리게스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대신 요니가 지금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했겠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요니는 몰라도, 저는 이적생이니까요··· 다른 구단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장담할 수 있을 겁니다. 이 구단이 최고라는 걸.”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려서, 나는 슬쩍 이야기를 돌렸다.
“그래서, 우리 결승 홍보 영상은 나왔습니까?”
* * *
[트레블을 향한 마지막 관문, 챔스 결승전이 다가옵니다.]
[그날, 지난 100년간 시티 오브 선덜랜드를 지켜왔던 로커 파크가 다시 돌아옵니다. 선덜랜드 유소년팀의 홈으로, 팀의 전통과 역사를 내일로 이어나갈 공간입니다.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구장, 빛의 경기장은 변함없이 반짝일 것입니다. 해가 진 다음까지도 꺼지지 않을 빛, 결승전 당일 밤까지 이어질 축하행사에 꼭 함께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에이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회의실에 모인 스태프의 얼굴은 하나같이 밝았고,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그만큼 이번 홍보 영상이 마음에 들게 뽑힌 것이다.
예전에는 넷플릭스나 유튜브의 도움을 받아 컨텐츠를 만들었지만, 이후 몇 년간 꾸준하게 자체 제작을 강화해 왔다. 이제 이 정도 홍보영상은 구단 내부에서도 깔끔하게 만들어 낸다.
“로커 파크 앞 스크린하고, 풋볼 스퀘어에 뿌릴 거죠?”
“TV하고, 스마트폰에도 나갈 거야.”
“그럼 스마트폰용은 해상도를 조금 조절해서···.”
“야간 행사 예고를 조금 넣으면 어떨까요?”
영상 송출에 앞서 마지막 마무리를 준비하는 사이, 누군가 불쑥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상상하기도 싫긴 하지만, 혹시라도 우리가 지면 어떻게 되나요?”
순간 회의실의 분위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고,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무심코 이야기를 꺼냈던 CS팀원이 자신의 입을 찰싹 손으로 두들기는 모습을 보며, CS팀장 린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뭐, 선덜랜드 스태프라면 당연히 질 경우도 준비해야지. 더블 기념 이벤트도 추가로 준비해.”
“아니면 트레블 기념 이벤트를 강행하는 건 어떨까요?”
“지고 나서? 무슨 명분으로?”
“일단 리그와 FA컵, EFL컵을 모두 먹었으니 도메스틱 트레블이긴 하잖아요.”
“그건 너무 없어 보인다.”
린다가 딱 잘라 반대했고, 에이미 또한 린다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는 사이, 옆에선 시설관리팀장 조엘이 으르렁거렸다.
“미리 말해두는데, 혹시라도 우리 선수들이 지게 되면··· 죽도록 분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스프링클러는 틀지 마.”
“에이, 졌다고 졸렬하게 스프링클러 틀어버리는 그런 팀이 있나요? 아, 있었구나.”
조엘의 시선을 받은 시설관리팀원이, 곧바로 두 손을 들었다.
“걱정 마시죠 팀장님. 우리 잔디 스프링클러는 관리인님만 손댈 수 있게 되어 있잖아요.”
“혹시 모르니까 리지에게 따로 말해놔야겠어. 리지처럼 대를 이어 일하는 스태프가, 팀이 결승에서 지는 꼴을 보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잖아?”
“에이, 걱정 마세요. 그래도 리지 씨는 결과에 깔끔하게 승복하는 성격인데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팀원 하나가 에이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요, 부팀장님. 혹시라도 우리가 지면 부팀장님 결혼식도 취소되는 건가요?
“그렇지? 처음부터 트레블 하면 결혼하기로 약속했던 거니까, 지면 취소지.”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에이미는 속으로만 절규했다.
‘당연히 안 괜찮지!’
일생일대의 이벤트, 결혼식이 취소되는 것만으로도 이미 괜찮지 않은 상황인데, 추가로 잃어버리는 게 너무 많았다. 트레블을 코앞에서 놓친다는 것도 비극이고, 이희성이 인수한 이래 결승에서 한 번도 진 적 없다는 선덜랜드의 대기록도 깨진다는 뜻이 된다. 소속팀과 팬들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예비부부, 잭과 에이미로서는 통곡할 일이다.
그렇다고 트레블 여부와 상관없이 결혼을 강행할 마음은 없었다. 챔스 결승에서 지고 난 직후에 결혼한다면, 두 사람은 절대로 평생 행복해질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에이미는 아름다운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띈 채,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관없어. 우리 팀이 반드시 이길 거라고 믿으니까.”
에이미의 단호한 대답에, 주위의 시선이 쏠렸다.
“그거, 축구단 관계자라면 누구나 똑같이 믿는 것 아닌가요?”
“모든 선덜랜드 스태프도요.”
“그리고 팬들도.”
* * *
마일즈 우드는 거실 벽에 걸린 달력을 흘끗 바라보았다.
[트레블 하는 날]
처음에는 챔스 결승전이라고 표기했는데, 크리스가 하도 빼액거리며 불만을 나타내는 바람에 결국은 고쳐 쓰고 말았다.
‘누구 닮아서 고집이 이렇게 센지, 원.’
수잔을 흘끗 바라보자, 마침 수잔도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중이었다.
“아빠 닮아서 팀에 대한 믿음이 큰 것 같네요.”
마일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이럴 때 엄마 닮았다는 드립을 잘못 치면, 가정의 평화가 무너지는 수가 생긴다며 브렌든이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정작 조언하는 브렌든 본인이 독신이라는 점에서 신뢰성은 없었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잘못하면 이웃 간의 우정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마일즈는 아주 평화적인 사람이었고,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언성을 높이거나 얼굴을 붉힐 짓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성격이었다.
축구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크리스는 오늘도 유스팀 선수들과 같이 보기로 한 거지?”
“네, 앨리스 양이 먼저 데려갔어요.”
“하긴, 아무리 어려도 아카데미 소속이면, 팀의 규칙을 따라야지.”
두 사람의 태도에는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처음에는 아예 챔스 결승전 날짜에 맞춰 미리 연차를 낼까 했는데, 회사에서 먼저 선수를 쳤다. 자체 휴무일 지정, 듣자니 타인위어에는 이번 챔스 결승전에 맞춰 쉬는 기업이 많다고 들었다.
“자, 그럼 우리도 갈까?”
“네.”
두 사람은 미리 준비한 응원용 레플리카를 나란히 걸쳤다.
[197. 우드]
원래 마일즈는 레플리카에 마킹을 넣지 않는 성격이었다. 지난 십수 년간, 그가 마킹 레플리카를 살 때마다 선수가 떠나갔기 때문이었다.
이제 선덜랜드가, 세상 어느 팀을 상대로도 주전 선수를 빼앗기지 않을 팀이 되기는 했다. 프리미어리그에서는 당당한 빅 7이고, 유럽 전체에서도 강팀으로 꼽힌다. 바르샤가 시들해지면서, 요즘은 레뮌선 드립을 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고 들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오랜 습관 때문에 마킹 유니폼을 몸에 걸치지는 않았지만, 197번 등번호의 주인공은 그의 아들 크리스였다.
마일즈는, 자신의 아들을 선덜랜드 이외의 다른 팀에서 뛰게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물론 크리스가 자라 어른이 되면 스스로 팀을 고르게 되겠지만, 태어날 때부터 선덜랜드였으며 블랙캣츠였고 맥켐즈였던 아이가 이적을 선택할 리 없다.
그러니 이제, 마일즈는 자신 있게 레플리카에 마킹을 넣을 수 있었다.
197번 유니폼을 입은 우드 부부가, 느긋한 걸음으로 집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그들의 곁에 선덜랜드 레플리카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웃 브렌든과 빌리 노인, 그리고 게이츠헤드 주민들이 일제히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빛의 경기장에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열리는 날.
타인위어는, 그야말로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고 말았다.
* * *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선덜랜드 대 레알]
킥오프를 앞두고, 선덜랜드 선수들이 일제히 원진을 짰다. 경기를 앞두고 그들이 늘 해왔던 것처럼.
“오늘은, 우리가 반드시 이겨야 하는 날이다.”
주장 잭의 이야기에, 에디가 유머러스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왜냐면 캡틴을 장가보내야··· 항복, 항복!”
하필 에디의 자리는 잭과 요니의 바로 옆이었다. 덕분에 잭은 어렵지 않게 어깨동무 자세를 헤드락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물론 경기를 앞둔 상태라 진짜로 힘을 넣지는 않았지만, 타고난 강골인 잭이 헤드락 자세를 잡는 것만으로도 에디를 얌전히 만들 수 있었다.
“다시 말한다. 오늘···.”
잭이 말을 이어나갔을 때, 선덜랜드 선수들의 머릿속에는 똑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트레블]
유럽에서는 단 일곱 팀만 해냈던 위업이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오직, 맨유만이 갖고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만일 그들이 오늘 이긴다면, 선덜랜드는 유럽에서 여덟 번째로 트레블을 해낸 팀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축구 선수라면 누구나 바라고 꿈꾸는 일이고, 생각만으로도 가슴 벅찬 기록이다.
하지만 잭의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오늘, 분명히 힘든 순간이 있을 것이다. 상대는 챔스 최다 우승팀이니까. 그러니 고개를 떨어뜨리고 싶은 순간도, 발을 멈추고 싶은 순간도 찾아올 것이다.”
선덜랜드 주장의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힘이 실려 있었다.
“어쩌면 대기록의 무게가 우리를 짓누를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떠올려라. 이곳이 빛의 경기장임을. 이곳에 모인 칠만 명의 관중을, 풋볼 스퀘어와 로커 파크를 메운 오만 명의 팬들을, 시티 오브 선덜랜드 전체가 우리와 함께 싸우고 있음을.”
마치 잭의 목소리에 호응하듯, 관중들이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I know I am. I’m sure I am.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그 함성 속에서, 선덜랜드 주장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언제나 한결같이 붉은 이 경기장에서, 오늘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써낼 것이다··· 싸우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