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409화 (409/422)

빛의 경기장에서 (4)

레알의 윙어, 비니시우스는 원진을 짜는 선덜랜드 선수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붉은 세로 줄무늬 유니폼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사실은 이 경기장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귀를 찢는 듯한 소음에 비니시우스가 살짝 눈살을 찌푸릴 때, 동료 발베르데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분위기에 잡아먹히지 마. 곧 시작한다.”

비니시우스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겨우 칠만 명에게 잡아먹힐 리가요. 저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홈으로 쓰는 선수인데요.”

레알은 세계 최고의 명문 축구팀을 논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팀이고, 그곳에서 뛰는 선수들 또한 남다른 긍지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홈경기장에 대해서도 각별한 경의를 표하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와 대등하다는 평가는 레알의 유니폼을 입고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다.

“뭐, 종합적으로는 캄 노우 정도는 되는 것 같네요.”

턱을 살짝 치켜들고 답하는 비니시우스를 바라보던 발베르데가 피식 웃었다.

“그래. 캄 노우에 필적할 정도지.”

레알 최대의 숙적, 바르샤의 홈 캄 노우를 자연스럽게 거론하는 것이, 레알의 흰 유니폼을 입은 자가 이 경기장에 대해 표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였다.

잠시 후 비니시우스의 입이 실룩거렸다.

“여기 구단주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하긴 하더군요. 수완이 우리 페레즈 회장님보다도 몇 수 위라고요. 3부 리그를 구르던 팀을, 몇 년 만에 우리와 필적할 정도로 만들었으니.”

“우리와 필적한다?”

“뭐, 결승 상대로 손색이 없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요. 다만, 우리 상대로 중원 싸움을 벌이겠다는 호기는 다소 의문스럽지만요.”

비니시우스의 평가는, 비단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축구계 관계자의 공통된 평가가 그랬었다. 빅 이어를 노리는 빅클럽 중에서는, 선덜랜드 중원이 가장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JJ, 잭과 요니는 헌신적이고 팀에 꼭 필요한 선수이지만, 그래도 월드클래스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였다.

로테이션 멤버인 레이 브라운은 말할 것도 없고, 디아라와 해리슨은 아직 어린 선수 취급이었다. 물론 로드리게스는 당당한 월드클래스 미드필더지만, 혼자서는 중원을 장악할 수 없다.

하지만 발베르데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그렇잖아도 선덜랜드의 JJ 듀오와는 예전에 직접 붙어본 적이 있었지.”

“재작년 챔스 4강전 말이군요.”

이를 가는 비니시우스를 향해, 발베르데가 고개를 저었다.

“···그땐 내가 뛰지 않았었고, 다른 경기 이야기야. 그보다 더 이전, 선덜랜드가 3부 리그 팀이던 시절의 친선경기인데···.”

“아···.”

하프라인 너머에서 진영을 갖추기 시작한 선덜랜드 일레븐을 응시하던 발베르데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겨우 3부 리그 따위에서 뛰는 미드필더와 유니폼을 바꾸고 싶어진 건, 내 평생 그때가 유일했으니까.”

“뭐··· 엄청 열심히 뛰긴 한다더군요. 그래서요?”

“그 ‘열심히 뛰는 게 전부이던 3부 리거’들이 지금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의 주장과 부주장이 되었어. 이게 무슨 뜻인지 정말 모르겠다고?”

비니시우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킥오프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기 때문이다.

답을 듣지 못했어도 아쉬움은 없었다. 어차피 피차 축구 선수이기 때문에, 경기가 시작되면 상대의 기량 정도는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서로의 발과 심장으로.

* * *

익스클루시브 박스에서, 그라운드를 내려다보던 희주가 피식 웃었다.

“감히 우리 상대로 중원 싸움을 벌이겠다고? 그것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그러자 다미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알아보니 축구계 관계자들 사이에선, 선덜랜드 미드필더에 대한 평가가 꽤 박하더라고요. 레알 중원에게는 상대가 안 될 거라던데요?”

“아니, 그럼 레알 정배 주지, 왜 우리가 정배야!? 우리 홈이라서!? 이런 축알못들 같으니라고···.”

부들부들 떠는 희주를 향해, 다미가 부드럽게 웃었다.

“대신 선덜랜드 수비진과 공격수의 퀄리티가 앞선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맞지. 그래서, 다미 언니가 보기엔 어때요? 다미 언니도 촉 하나는 되게 좋은 사람이잖아요.”

“그래도 전 축구는 잘 모르니까요.”

그렇게 조심스럽게 말문을 연 다미는, 이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덧붙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장과 부주장은 선거나 인기투표로 뽑는 게 아니라고 들었어요. 클럽에서 임명하는 거죠.”

“그렇··· 죠?”

“즉, 사장님이 뽑으셨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면 다른 팀 선수보다 약할 리 없죠.”

다미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해는 원래 동쪽에서 뜨는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에, 희주는 그저 입맛만 다시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했네. 물어볼 사람한테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그러게.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다미 쟤는 나에 대한 믿음이 과도할 때가 있단 말이지.

뭐, 이번에는 굳이 덧붙일 말도 따로 없다··· 우리 중원이 레알 중원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전문가들이 그렇게 떠들었다고? 올 시즌 초라면 틀린 말은 아니었을 테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잭도 요니도 당당한 월드클래스 선수가 되었기 때문에. 하물며 그 두 사람은, 원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는 평소와는 아주 다른 선수가 되어버리곤 한다.

그러니까 어디 보자고. 정말로 상대가 안 되는지.

나는 물끄러미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오늘의 레알은, 후반에 나이얼 스탠드를 등지는 리스크를 지지 않으려 했고, 덕분에 선공은 우리의 차지였다.

그리고 우리는 경기 시작부터 원정팀 레알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전문가들이 그렇게 우리에게 불리하다고 떠들었던 중원 싸움을 시도하면서.

요니와 잭이 간결한 짧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레알 중원을 끌어들였고, 상대가 전방 압박을 시도할 때마다 로드리게스가 지체 없는 롱 패스를 뒷공간에 날리며 위협했다.

“희주 씨, 저는 축구는 잘 모르지만··· 잘하고 있는 거 맞지요?”

“엄청 잘하고 있는 거죠! 축알못들의 평가를 완전히 뒤집었잖아요? 우리 중원이 압도하고 있어요!”

호들갑을 떠는 희주와 달리, 나는 상대적으로 냉정했다. 우리 중원이 레알 중원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는 것은, 경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기에.

지금의 잭과 요니, 이마의 숫자를 바꾸고 한계를 넘어선 두 사람이라면 훨씬 멋진 플레이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까.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그저 쏟아지는 팬들의 함성에, 내 목소리를 더할 뿐이다.

* * *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칠만 명이 지르는 함성 하나하나가 생생하다.

요니는,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경기장의 바람이 아주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발아래 바스러지는 잔디의 촉감이 친숙하다.

빛의 경기장이 늘 그랬던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친숙하고 또 호의적인 축구장에서 뛰고 있다는 안도감 위에, 최근 들어 기묘할 정도로 날카로워진 감각이 더해진다. 그래서 요니는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은, 상대의 생각까지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예를 들면, 레알은 중원 싸움을 포기할 의향이 없어 보였다. 수비 라인을 올렸고, 미드필더 세 명을 선덜랜드 중원에 정면으로 충돌시켰다.

감독의 취향인지, 아니면 빅클럽의 자존심인지, 어쩌면 레알 선수들의 긍지 때문일지··· 그것까지는 경기장 안에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게 만용이라는 것쯤은 확실하지.’

구단주 이희성이 부임한 이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공식전 무패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게다가 선덜랜드는 이미 2년 전, 이곳에서 레알을 한 번 탈락시킨 적이 있는 팀이다.

하물며 레알 역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같은 대형 경기장을 홈으로 쓰고 있으니, 팬들의 뜨거운 함성이 어떤 효과를 보이는지 결코 모를 리는 없을 텐데.

요니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등 뒤로 손을 돌려 수신호를 보냈다. 잠시 후 기세 좋게 공 차는 소리가 들렸다.

‘로드리게스가 아니라, 에디구나.’

비록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요니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얼마 전부터 공 차는 소리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걸 알았으니까. 덕분에 요니는 공의 목적지까지도 알 것 같았다.

에디와는 몇 년간 같은 팀에서 함께 뛰어온 사이다. 패스의 목적지 정도는, 공 차는 소리만 들으면 알 수 있다.

경기장의 상황도, 생겨날 공간에 대해서도, 레알의 수비진에 대해서도 의식하지 않은 채, 요니는 그저 공이 떨어질 위치를 향해 달렸다. 잠시 후 공이 요니의 발아래에 딱 맞게 도착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레알의 미드필더 발베르데가 요니의 앞에 나타났다.

“크로스 씨에게 들었어. 네가 있는 위치로 공이 온다면서?”

앞을 가로막은 발베르데에게서, 빈틈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축구는 원래 상대 수비수를 제치는 게임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요니는 공을 오른쪽 아웃프런트로 슬쩍 굴리듯 밀어냈다.

“나이스 패스.”

어릴 때부터 호흡을 맞춰온 사이다. 굳이 목소리를 듣기 전부터, 요니는 잭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랜 친구가 특유의 발소리를 요니가 구분하지 못할 리는 없었기에.

그래서 요니 또한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이스 패스.”

발베르데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자화자찬이야? 그런 성격인 줄은 처음 알았네.”

대답 대신 요니는 순간적으로 가속했다. 잠시 후, 잭의 발을 떠난 패스가 짧은 포물선을 그리며 발베르데의 머리를 넘었다.

“이 대 일 패스!? 어디서 감히 그딴 수작을···.”

상대가 말을 잇기도 전에, 요니는 곧바로 공을 길게 걷어찼다. 전방에서 기다리는 마르틴에게로.

* * *

경기를 지켜보던 선덜랜드의 유소년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마르틴 선수에게 가속이 붙었어! 이제 절대로 못 막아!”

“그러게, 상대를 아주 제대로 끌어들였어!”

애초에 로드리게스도, 에디도 후방에서의 킥 한 번으로 최전방까지 패스를 찔러버릴 수 있는 선수들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굳이 선덜랜드의 중원을 패스의 목적지로 선택했다.

레알의 미드필더를 끌어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요니와 잭은 일부러 짧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레알의 미드필더진을 붙잡아 두었다. 덕분에 공간이 생겨났고, 마르틴이 가속할 시간까지 벌었다.

완벽하게 창의적이고, 동시에 지독하게 논리적인 플레이였다. 그리고 레알의 공격진보다 퀄리티가 훨씬 낫다는 평가를 받아온 선덜랜드의 쓰리톱은, 이런 찬스를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

왼쪽 측면에서, 가속이 붙은 마르틴이 재빠르게 돌격해 들어갔다. 동시에 그의 발이 축구공 위를, 마치 춤추듯 타고 넘었다.

“헛다리 짚기!? 저 스피드로!?”

누군가의 경악에, 바르카가 차분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조금 달라. 아직 공을 건드리지 않았어.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달리는 중인 거야.”

그런데도 수시로 공 위로 발을 놀리는 마르틴의 묘기와 같은 움직임에, 경기장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저러면 방향 전환이 불가능하지 않아?”

“그렇지도 않아. 방향을 바꿀 때 공 건드리면 그만이거든.”

그리고 레알 정도 되는 빅클럽의 주전 수비수라면, 선덜랜드 유소년들이 눈치챈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레알 수비가 곧바로 마르틴의 진로를 가로막으며 방향 전환을 유도했다.

수비는, 몸의 자세를 낮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르틴이 방향을 꺾는 순간 곧바로 따라붙어 슬라이딩 태클을 넣으려는 의도가 느껴졌기에, 유소년들이 다시 아우성을 쳤다.

“플립 플랩! 역방향으로 꺾어야 해요!”

“마르틴 선수라면 호커스 포커스도 쓸 수 있지 않아!?”

“뭐가 됐든, 제발 제쳐 주세요!”

유소년들의 간절한 외침을 뒤로한 채, 마르틴은 상대의 노림수를 다 안다는 것처럼 그대로 돌격··· 하는 것처럼 보였다.

축구공 위를 번갈아 타고 넘던 마르틴의 양발은, 어느새 공을 앞뒤로 끼운 상태였다. 다음 순간, 공은 마르틴의 등 뒤에서 떠올랐다.

“사포!?”

방향 전환에 대비해 자세를 한껏 낮춘 레알의 수비수는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그렇게 완벽하게 뒷공간에 파고든 마르틴이, 다시 아크 정면을 향해 짧은 패스를 보냈다.

다음 순간 선덜랜드의 19번이 박스 앞에 나타났다. 달려오는 기세를 살려, 요니가 그대로 침착하게 공을 걷어차 골대 구석에 꽂아 넣었다.

[선덜랜드 1 - 0 레알]

전반 37분, 마침내 홈팀 선덜랜드가 리드를 잡아낸 것이다.

“넣었어!”

“나이스 슛! 나이스 무브먼트!”

유소년들의 환호 위에, 무시무시한 함성이 덮였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울리는 칠만 명 관중의 소리, 풋볼 스퀘어와 로커 파크에 메아리치는 붉은 목소리가.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빛의 경기장에서 시작된 함성이, 시티 오브 선덜랜드 전체의 외침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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