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걷는 길 (1)
<나는 솔로 아티스트가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원했다 - 아리고 사키>
요니의 득점 순간, 선덜랜드 벤치에도 환호가 번졌다. 수석코치 샐리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델랍과 파비오를 비롯한 코치들과 차례로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그리고 감독 브라이언 역시 가볍게 주먹을 쥐어 보였지만, 그 이상의 기쁨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선덜랜드 선수들이 세레머니를 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단 말이지.’
이제 전반 37분, 경기가 끝나려면 아직 50분 이상의 시간이 남았다. 기뻐하기는 너무 이르다. 게다가 지금의 선덜랜드는, 홈에서 딱 한 골 차이로 앞서는 정도로 기뻐할 팀도 아니었다.
세레머니 같은 걸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그보다는 상대가 정신을 추스를 시간을 주지 않고 몰아치는 게 훨씬 중요하다.
‘팬들이 날뛰기 시작했으니까.’
빛의 경기장을 가득 메운 칠만 명의 관중, 풋볼 스퀘어와 로커 파크에 모여든 삼만 명의 팬, 그리고 시티 오브 선덜랜드 곳곳에서 쏟아지는 이십오만 명의 포효와 함성이 지금 그라운드에 몰아치는 중이다.
간단한 전술 지시조차 하기 힘들 만큼 무시무시한 소음, 지금까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찾았던 모든 원정 선수들을, 꼼짝도 못 하게 만든 원동력이다.
‘이럴 때 상대 선수들의 멘탈을 너덜너덜하게 부수는 게 훨씬 중요하지··· 세레머니는 그다음에 천천히 하면 그만이야.’
브라이언은 그런 마음을 담아 경기장을 응시했다.
마침 벤치를 향해 시선을 돌리던 요니와 눈이 마주쳤다. 이윽고 요니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레알 골대를 향해 달려갔다.
네트에 꽂힌 공을 주워오기 위해서였다.
이럴 때 선덜랜드는 반드시 득점자 본인이 직접 공을 주워 들고 하프라인으로 달린다. 다각도로 실험한 결과, 득점한 선수 본인이 직접 공을 줍는 게 가장 상대의 멘탈에 타격을 준다는 걸 알아냈기 때문이다.
“요니가 자기 일을 아주 잘하고 있네요.”
옆에서 들려온 샐리의 목소리에는 흐뭇한 감정이 가득 담긴 채였다. 브라이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주장이니까.”
열정적인 잭이 관중들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데 최적화된 선수라면, 냉정한 요니는 상대의 전의에 찬물을 끼얹는 역할이 가장 잘 어울린다.
그리고 선덜랜드의 감독과 코치에게는···.
“우리에게는, 상대 감독의 수를 읽어내고 부수는 역할이 어울리고요.”
“맞아. 그리고 슬슬 움직일 거야. 안첼로티는 단판 승부에 아주 강하기로 정평 난 감독이니까.”
그러자 샐리가 소리 내 웃었다.
“어머, 하지만 그건 우리 팀 감독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렇게 만들어야지.”
* * *
선제골을 뽑아낸 직후, 우리 벤치가 기민하게 움직였다. 얼마나 대응이 빠른지, 레알보다도 우리 쪽 전술 변화가 먼저 이루어졌을 정도다.
이기고 있으니까 지키겠다는 그런 의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더 공격적이고 빠른 템포로, 경기를 난타전으로 끌고 가겠다는 의도가 엿보였다.
“상대의 혼을 쏙 빼놓겠다는 느낌이네요. 멋진데요?”
다미의 감상에, 옆에서 희주가 울상을 지었다.
“멋있긴 한데, 솔직히 전 그냥 지키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결승전이고, 이기면 트레블이잖아요?”
그건 그렇지.
“오빠는 그렇게 히죽히죽 웃지만 말고!”
“희주 씨?”
“아니, 절대로 저는 감히 오라버님께 대들려는 게 아니었어요. 그냥, 조금만 더 구단주 업무에 집중해 주시면 어떨까 해서요.”
오늘따라 희주가 아주 고분고분하다. 얘는 이상하게 다미를 어려워하더라고. 그렇다고 사이가 나쁘지도 않고, 평소엔 그렇게 친한데.
“오라버님, 지금이라도 브라이언 씨한테 연락하는 게 어떠세요? 무리하지 말고 라인 내리라고 지시하시죠.”
“어떻게? 지시하고 싶어도 그럴 방법이 없을 텐데?”
“음··· 축구 규칙 4조 4항에 따르면 팀 임원에 의한 전자 통신 사용은 전술, 코칭 이유로는 허용되는 거 아닌가?”
“대신 조건이 붙었지. 미승인 기기 쓰다가 걸리면 퇴장이라고. 괜히 그러다가 혹시라도 나 퇴장이라도 당하면 억울해서 어쩌려고?”
농담으로 받았지만, 사실 그런 일이 정말로 생기면 내 퇴장이 문제가 아니다. 나 혼자 퇴장당하면 그냥 내 기분이 나빠지고 끝난다. 물론 역사적인 창단 첫 트레블을 직접 보지 못하고 쫓겨나는 내 심정은 너무나도 참담하겠지만.
하지만 중요한 건 자칫하면 우리 벤치에서 내 지시를 받는 사람이 같이 퇴장당하는 수가 있다는 거다··· 통신은 쌍방향이잖아?
최악의 경우, 브라이언이 퇴장당한다는 이야기다. 그랬다가는 곧바로 경기가 뒤집히겠지.
게다가··· 설령 규칙상 문제가 없더라도, 나는 감독에게 경기 중의 전술 대응까지 참견하는 타입의 구단주가 되고 싶지는 않다.
“만일 내 지시가, 브라이언의 판단보다 정확할 것 같으면 그냥 내가 감독하고 있겠지.”
“그래서, 이기고 있으면서 굳이 템포 더 끌어올리는 지금 브라이언 씨 판단은 말이 되고?”
“그야 문제없어. 여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니까.”
만일 오늘이 원정 경기였다면, 이 경기장이 레알의 홈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였다면 이야기는 달랐을 거다. 나부터 한 골 뽑았으니 제발 라인 내리라고 소리 질렀겠지··· 그래도 벤치에 통신 보내려는 시도는 안 하겠지만.
애초에 그랬으면 굳이 통신할 필요도 없었을 거다. 브라이언부터 공격수 빼고, 미드필더나 수비수를 늘리며 노골적인 버티기에 들어갔을 테니.
그래도 역습 위협은 가해야 하니 마르틴은 피치 위에 남았겠지만, 바스티아노는 교체로 걸어 나왔을 거다. 대신 레이 브라운이나 최새벽이 투입되었겠지.
하지만 여기는 우리 홈이다. 그러니 대응은 달라야 한다.
옆에서 다미도 똑같은 소리를 했다.
“구기 스포츠는 흐름이 중요한 경기니까요. 당장의 실리를 버리더라도, 상대에게 흐름을 넘겨주지 않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닐까요?”
그러자 희주가 툴툴거렸다.
“다미 언니는 축구 모른다면서요?”
“네, 축구는 잘 몰라요. 하지만 부모님이 야구는 보시니까, 종종 들었어요. 겨우 한두 점 앞섰다고 괜히 지킬 생각만 하다가는 흐름이 넘어간다고요.”
“흐름···.”
“그리고 이 경기장은 홈팀이 흐름을 잡기 최적인 것 같네요. 이렇게 사람들이 열렬히 소리치니까요. 홈 선수들에게는 힘이 되고, 원정 선수들에게는 부담이 되겠죠.”
“그건 맞아요. 맞는데··· 대신 이러다 괜히 동점골 맞을 수도 있잖아요? 흐름을 가져오기 위한 시도가··· 효과적일까요?”
“네.”
희주의 질문에, 다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러고는, 얼굴 가득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바로 이 분위기를 사장님이 만드신 거니까, 틀림없어요.”
다미의 목소리를, 팬들의 함성이 곧바로 덮었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 * *
관중들의 뜨거운 함성 속에서, 잭은 슬쩍 시선을 돌려 벤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마치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현란한 수신호를 보내는 선덜랜드 감독 브라이언의 모습이 보였다.
원인은 분명하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잔뜩 끓어올랐기 때문에. 이제 이 경기장은 벤치의 감독과 선수들이 음성만으로는 의사소통하기 불편할 정도로 떠들썩해졌다.
물론 선덜랜드가 세세한 사인 플레이를 정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감독의 수신호의 의미는···.
[제발 와서 쪽지 좀 받아 가.]
잭이 눈짓하자, 라이트백 브루노가 재빨리 쪽지를 받아와 쭉쭉 돌렸다.
쪽지의 글씨체는 꽤 예쁘장하고 또 정갈했다. 그래서 잭은, 아마 쪽지의 내용 자체는 수석코치 샐리가 썼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선덜랜드 감독의 글씨를 식별하기 위해서는 전문가··· 그것도 암호 해독반이 필요하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포백라인, 지금보다 두 걸음 반 전진할 것. 공이 없을 때 마르틴은 사이드라인에 바짝 붙도록!]
[바스티아노는 두 걸음 앞으로 나가고, 스티븐은 안쪽으로 파고들듯 세 걸음 전진해.]
잭에게 가까이 다가온 에디가 히죽 웃었다.
“왜 우리는 두 걸음 반 전진하는데, 바스티는 두 걸음만 나가라고 하시는 거지?”
잭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야 바스티아노 보폭이 너보다 길어서 그렇겠지.”
“이봐, 바스티보다 내가 좀 더 클 텐데?”
“키는 그렇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보폭이야.”
“···시끄러워.”
투덜거리던 에디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이번 지시의 의미는 알고 있겠지, 캡틴?”
“물론이지.”
바스티아노에게는 레알 포백라인을 위압해 물러나게 하라는 의미를 담았고, 스티븐에게는 상대의 후방 빌드업을 방해하라는 지시다.
그리고 마르틴은 옆으로 넓게 벌려선다. 언제든 다시 찬스를 노릴 수 있도록, 혹은 레알의 수비를 강제로 측면으로 끌어내도록···.
잭은, 쪽지에 쓰여 있지 않았던 내용을 소리 내 읽기 시작했다.
“미드필더 세 명은 공과 점유율, 그리고 경기의 주도권을 전부 지켜내도록.”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요니와 로드리게스가 동시에 고개를 살짝 끄덕인 것 같았다. 그래서 잭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점유율을 유지하는 방법은 미드필더마다 각자 다르다. 누군가는 깔끔한 테크닉을 앞세운 탈압박으로 공을 지켜낼 것이며, 누군가는 패싱 센스로 공을 돌릴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위치 선정을 무기로 상대의 공을 빼앗는 플레이로 점유율을 가져온다.
잭의 경우는···.
I know I am. I’m sure I am.
‘공교롭게도 나는, 딱 하나밖에 몰라서 말야.’
관중들의 함성 소리에 왼쪽 가슴팍의 엠블렘이 화끈거렸고, 왼팔에 매달린 주장 완장이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달려야 해.’
이윽고 심장에서 시작한 열기가 선덜랜드 주장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달리고 달려서, 이 열기를 전부 뿜어내야 해.’
죽을 때까지 달릴 것이다. 잭은 늘 그렇게 해왔던 선수다.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그리고 빛의 경기장에서라면, 90분 내내 쉬지 않고 달릴 자신이 있었다.
* * *
“달려! 더 달려요!”
“왼쪽이 비었어!”
다미와 희주가 어느새 목에 핏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희주 얘가 축구 보면서 날뛰는 거야 딱히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다미의 응원도 생각보다 꽤 격렬하다.
물론 따지고 보면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었다. 나는 익스클루시브 박스 펜스에 거의 매달린 상태였으니까.
“들어가!”
잭이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하면, 경기의 분위기는 금방 이렇게 타오르곤 한다. 우리 팬들도 일제히 발을 구르며 선수의 플레이에 힘을 실었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그렇게 우리는, 레알에게 반격 시도할 틈조차 주지 않고 계속 몰아치는 중이었다. 마르틴은 왼쪽 측면을 넓게 쓰며 상대를 위협했고, 바스티아노는 강렬한 슛으로 상대 센터백을 압박했다.
그리고 우리의 공격이 실패하고 레알의 반격이 시작될 때마다, 그 앞에는 선덜랜드의 주장과 부주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공을 뺏지 못하더라도 필사적으로 추격한다. 절대로, 공을 편하게 전진시키게 놔두지 않는다는 단호한 의지 표명이다.
그 헌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전반 내내 레알을 일방적으로 두들길 수 있었다.
사실 도박사들은 오늘 경기에서, 우리 선덜랜드를 정배당으로 꼽았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팀으로 평가받았다는 의미다··· 결승전 킥오프 전부터.
하지만 선수 개개인을 하나씩 살피면, 여전히 레알 선수단이 우리보다 대단하다. 그들 사이에는 우리 선수들보다 더 유명하고, 더 인기 있으며, 더 비싸게 평가받는 스타플레이어가 즐비하다.
개중에는 이마의 숫자조차 우리 선수들을 상회하는 천재도 있다.
그래도 오늘 우리는, 레알에게 전혀 질 것 같지 않다··· 선덜랜드라는 팀은, 이제 그들보다 강하니까.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리누스 미헬스였는지, 아리고 사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토털 사커와 깊게 연관된 명장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솔로 아티스트가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원했다.]
우리 축구를 오케스트라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선덜랜드의 축구는 아름답고 정갈한 클래식이 아니라, 헤비메탈처럼 거칠고 격렬한 축구니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가 오케스트라인지 아니면 헤비메탈 밴드인지 간에··· 이 팀에는 솔로 아티스트가 없다.
그때 우리 주장이 마침내 공을 따냈다. 패스를 건네받은 요니가 곧바로 달려 나갔다.
잠시 후, 잭이 그대로 구르듯 몸을 일으켰다. 그 동작은 조금도 우아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았지만, 무척 빠르고 또 필사적이었다.
[우리 주장이 공을 따냈습니다! 요니가 곧바로 달립니다. 선덜랜드의 역습입니다!]
아나운서의 외침처럼, 선덜랜드의 역습이었다. 발 빠른 공격수 몇 명만 달리는 게 아니라, 골키퍼를 제외한 모두가 함께 달려 나가는 바로 그런 역습.
공을 빼앗은 선수 본인조차 예외가 될 수 없었다. FA컵 결승에서 크리그가 보여준 것처럼, 그리고 잭이 매일같이 경기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잠시 후, 레알의 골 마우스를 향해 열 개의 붉은 선이 휘몰아쳤다.
[바스티아노, 바스티아노, 바스티아노··· 들어갔습니다! 추가골! 선덜랜드, 이제 두 골 차로 달아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