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걷는 길 (2)
프레스 관계자석에서는, 기자들이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며, 열심히 기사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전반, 홈팀 선덜랜드 2-0 리드!]
[로스 블랑코스, 이대로 무너지는가?]
[레드 앤 화이트 아미, 압도적인 경기력 뽐내.]
[선덜랜드, 창단 첫 트레블까지 앞으로 45분!]
그 사이에는 런던 튜브의 기자, 엘렌과 랜던의 모습도 섞여 있었다.
“고맙다 엘렌. 네 덕분에 챔스 결승 직관도 다 해 보고.”
이번에 런던 튜브는 티켓 한 장을 더 배정받았다. 그동안 엘렌이 질 좋은 기사를 써왔다는 점과, 선덜랜드 프레스팀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저는 이렇게 일방적인 결승전은 처음 봐요.”
엘렌의 이야기에, 선배 기자 랜던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 몰라. 후반에만 세 골 따라잡은 이스탄불 같은 사례도 있었으니까. 솔직히 선덜랜드가 그 시절 밀란만큼 압도적인 우위라고 보기도 어려워.”
“그러고 보니 레알 감독 안첼로티가 이스탄불 피해자였죠?”
“맞아. 후반전에 충분히 세 골을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감독이지. 이미 당해봤으니까.”
랜던은, 어디까지나 경기는 아직 모른다는 걸 강조했다.
정론이었고, 동시에 아주 신중한 의견이었으며, 프레스석을 메운 기자들 모두가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아무튼 명색이 챔스 결승전이니, 치열하게 치고받아야 흥행에 도움 될 것이기에.
기왕이면 트레블이 걸려 있는 홈팀 선덜랜드의 우승이 좀 더 기삿거리가 되겠지만, 기자들은 기본적으로 접전을 원했다.
단, 엘렌은 조금 다른 부분에 주목한 상태였다.
“제가 일방적인 결승이라고 말씀드린 건, 내용이 아니에요. 바로 이 경기장의 분위기죠.”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관중석 대부분이 선덜랜드 팬으로 뒤덮여 있었고, 레알 유니폼을 입은 팬은 한 줌도 안 되어 보였다.
풋볼 스퀘어와 로커 파크에 들어간 선덜랜드 팬들의 목소리까지 더해지고 나니, 할라 마드리드 소리는 완벽하게 묻혀 버렸다.
“경기장 분위기?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원정 지옥인 게 어제오늘 이야기도 아니잖아?”
“리그에서는 그게 정상이죠. 하지만 이번엔 챔스 결승이잖아요?”
그러자 랜던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사이드라인 바깥의 일은, 아직 내가 선배입네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선배님은 이유를 아세요!?”
“챔스 결승전 티켓 예매는, 8강전 전후에 하잖아.”
“···그래서요?”
“결승 티켓은, 어느 팀이 결승에 나올지 모르고 예매한다는 거지.”
랜던의 지적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래서 지금처럼 홈팀이 올라오면 유리하긴 하죠. 축구 팬이라면 자기 앞마당에서 열리는 챔스 결승전 티켓을 일단 사두려고 할 테니까요··· 그래도 이 정도 격차는 드물잖아요?”
“나머지는 믿음의 차이겠지. 우리 팀이 반드시 결승까지 올라올 거라는 팬들의 믿음.”
랜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서 엘렌의 시선 역시 경기장 주위를 향하게 되었다.
하프타임을 맞아, 경품을 뿌리며 돌아다니는 선덜랜드 스태프와, 뜨겁게 호응하는 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경기장 곳곳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는 오늘 경기의 하이라이트가 계속 흘러나오는 중이었는데, 당연히 선덜랜드 위주의 영상들이었다··· 솔직히, 이 경기장에서는 다른 팀이 이긴다는 모습을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너도 기사 썼잖아? 선덜랜드가 이번 결승을 어떻게 준비해 왔는지. 다큐멘터리 찍고, 굿즈 뿌리고··· 자기 홈에서 열리는 결승전을 자기들 잔치로 만들겠다고. 그러니 선덜랜드 팬들은 8강전 시점부터 곧바로 티켓 확보하러 움직였을 거야.”
두 사람의 이야기에, 주위의 기자들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아무튼 이제 하프타임, 경기가 쉬는 중이기 때문이다.
“유에파 스폰서들 통해서 풀리는 중립 티켓은 기본적으로 전부 선덜랜드 거죠.”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선덜랜드가 꾸준히 암표를 금지해온 것도 이번 결승전 티켓 수급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고 봐요.”
옆에서, 엘렌과 친분이 깊은 선덜랜드 데일리 대표이사 겸 편집장 리타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리타 씨, 그게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죠?”
“음, 아시다시피 챔스 티켓은 미리 예매하는 특성상 개인끼리 거래가 활발해요. 그런데 선덜랜드에는 아시다시피···.”
엘렌의 눈이 빛났다.
“구단에서 직접 운영하는 티켓 거래 시스템이 있어요! 그거군요!”
* * *
“후반전도 시작부터 신나게 몰아치겠죠? 흐름을 넘겨주지 말아야 하니까요.”
여동생의 태도가 평소와 조금 달랐다. 구체적으로는 전반 끝나고 화장실 다녀온 직후부터.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여자들은 화장실이 무슨 축구 그라운드라도 되는 것처럼, 팀으로 도전하는 습성이 있다··· 희주 쟤도 다미 손잡고 다녀오더라고.
“갑부 오라버님께서 만드신 다양한 시스템들이 시너지를 일으킨 덕분에, 이 경기장은 언제나 원정 지옥이고···.”
희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미가 옆에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덕분에 나는, 여동생의 고분고분 지수가 삼연상 친 주식처럼 치솟은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후반은 시작부터 잠그겠지.”
“어째서!? ···요?”
“우리 팬들의 함성 소리는, 드레싱룸 안까지는 닿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하프타임 10분이면 레알도 충분히 정신 차릴 시간이거든.”
“원정 드레싱룸 방음재를 너무 좋은 걸 썼나···.”
그건 나도 살짝 아쉽지만, 바깥의 소리가 새어드는 드레싱룸으로는 챔스 결승전을 유치하지도 못했을 거다.
“사장님. 겨우 10분 만에 상대팀 선수들이 회복할까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아무튼 상대는 세계 축구계 최고의 명문 구단이니까.”
그런 빅클럽에서 뛰는 선수들이라면, 하프타임의 10분이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 따라서 후반전의 레알은 다시 전사가 되어 나타날 것이다.
감독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안첼로티 정도 되는 노련한 감독이 선수들을 그대로 내보낼 리 없거든.
실제로 하프타임이 끝난 직후 레알은 기세등등하게 그라운드에 돌아왔고, 경기 시작 무렵의 사기를 되찾았으며, 경기장의 소음이나 팬들의 목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날뛰었다.
반드시 두 골을 따라잡겠다는 것처럼 거칠게, 또 격렬하게 반격해 오기까지 했다.
“어떡해···!”
바이털 에어리어에 밀고 들어오는 레알의 흰 유니폼을 바라보며, 희주가 울상을 지었다. 다미는 훨씬 차분했지만, 자세히 보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나는 태연했다.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감독의 영향력은 분명히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단기 결전을 잘하는 감독으로 꼽히는 노련한 명장 안첼로티는 분명 훌륭한 감독이다. 덕장이란 평가처럼, 자기 선수들을 불지옥 속에서 완벽하게 건져냈다. 그것도, 고작 10분 만에.
다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10분이었다. 선수들의 멘탈을 추스르고 일으키는 것으로도 빠듯하기에, 멋들어진 반격 전술까지 주입시키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게다가···.
“브라이언과 샐리가, 선수들을 아무 대책도 없이 내보낼 리 없거든.”
* * *
밀고 들어오는 레알의 흰 유니폼을 노려보며, 에디는 자신의 임무를 떠올렸다.
[후반전은 너희들, 포백라인의 시간이 될 거다. 부탁한다. 20분간, 상대에게 슛을 허용하지 마라.]
감독의 간곡한 목소리에, 에디는 일부러 특유의 경박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이후는요? 20분 지나면 슛 마음껏 쏘게 해도 되는 겁니까?]
대답은 감독 대신, 미모의 수석코치에게서 돌아왔다.
[상관없어. 그때부터는 레알이 하프라인도 제대로 넘어오지 못할 테니까.]
샐리의 목소리는 싸늘했지만, 눈빛은 부드러웠다. 선수단에 대한 신뢰가 담뿍 담긴 눈동자다.
몇 년 전에는 꼭 얼음장 같았던 미녀 수석코치는, 요즘은 차갑기는 해도 부드럽고 달콤한 아이스크림 같은 느낌이 되었다.
‘그래서, 20분간 유효슈팅조차 내주지 말라는 소리지? 그러기 위해서는···.’
답은 정해져 있다. 전방 압박도, 카운터프레스도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 라인을 낮추고 상대를 충분히 끌어들이는 것이다.
레알의 20번이, 물러서는 에디에게 조소를 보냈다.
“그렇게 무섭냐? 벌써부터 엉덩이 빼게. 너희 팬들을 이렇게 모아 놓고도, 우리가 무섭냐?”
발끈하는 이고르 쪽에 손짓을 보내며, 에디는 차분하게 응수했다.
“너흰 별로 안 무서운데, 다른 건 무섭지. 혹시라도 팬들을 실망시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데.”
대치한 자세 그대로, 에디는 또박또박 되물었다.
“넌, 팬을 실망시키는 게 무섭지 않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레알의 20번 유니폼이 순간적으로 가속했다. 라인 뒷공간을 파고드는 움직임, 멀리서는 절묘한 타이밍으로 패스가 날아들었다.
침투 시도다.
에디는 재빨리 몸을 돌려 따라붙었다. 그리고 상대의 진로에 어깨를 넣었다.
“팬이 무섭지 않으면, 너는 프로가 아니야. 그냥 공만 잘 차는 애송이지.”
“···이게!”
대답 대신, 에디는 발뒤꿈치로 공을 힘차게 걷어찼다. 다시 전방을 향해 몸을 돌릴 시간이 없었기에.
동시에 목소리를 높였다.
“로디! 스티비에게!”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잔뜩 내려앉은 선덜랜드의 수비라인, 후반 45분간 2점을 빼앗기 위해 전방에 무게중심을 실은 레알···.
공간이 텅 비어있을 것이다. 어떤 기교도 없이, 그저 일직선으로 달려도 될 정도로.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잠시 후 환호성이 울렸다. 경기장 가득 메운 선덜랜드 팬들의 함성이. 덕분에 에디는, 자신의 판단이 완벽하게 옳았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비로소 몸을 돌려, 전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에디의 시야에, 맨 앞에서 달려나가는 26번 스티븐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그 뒤를 추격하듯 달리는 18번과 19번 주장단 JJ 듀오의 유니폼이, 그리고 반대편 그라운드를 질주하는 10번 마르틴까지.
그 모든 유니폼을 따라, 에디 또한 가속했다.
높은 확률로 의미 없는 질주가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센터백인 그가 레알 진영에 도착할 무렵이면, 이번 역습은 이미 진작에 끝난 다음일 테니까.
그래도 선덜랜드 선수라면 누구나 그렇게 뛴다. 팬들이 보고 있으니까. 그리고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는, 발을 멈추지 않는 것이 선덜랜드의 전통이기에.
스티븐의 슛은 레알 키퍼의 선방에 걸리고 말았다. 세컨볼을 차지한 바스티아노가 다시 발리슛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레알 센터백의 몸에 맞고 굴절되었다.
높이 떠오른 공이 라인을 완전히 넘어갔다. 코너킥이다.
전력으로 질주하면서, 에디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빨리 처리해!”
에디의 목소리에, 코너 플래그에 향하던 요니가 곧바로 멈췄다. 대신, 왼쪽 측면 침투를 위해 깊숙이 침투했던 마르틴이 코너 플래그에 섰다.
그와 동시에, 코너 플래그에 공이 도착했다. 이번에도 볼보이들이 F1 피트인급 보급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거 봐, 달려온 보람이 있었잖아.’
에디는 전력으로 달려왔지만, 레알 공격수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기들 딴에는 재역습을 위해 남아있던 거겠지만, 아무튼 이제 그 대가를 치를 차례다.
“바로 올려!”
잠시 후 마르틴의 발을 떠난 공이 페널티 박스 한가운데에 떠올랐다. 에디는 달려오던 기세를 살려 그대로 뛰어올랐다.
머리는 생각을 할 때나 쓰는 거라는 평소의 지론도, 뇌세포가 죽는 게 싫다는 기분도, 어째서인지 지금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무엇인가에 이끌린 것처럼, 에디는 공에 자신의 머리를 가져다 댔다.
[선덜랜드 3 - 0 레알]
* * *
에디의 득점 순간, 좌우에 묵직한 중량감, 그리고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희주와 얼싸안은 채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다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정말 축하드려요, 사장님.”
“아직 끝난 것도 아닌데 뭐.”
대답하면서도, 나는 알고 있었다. 이제 오늘의 경기는 뒤집히지 않을 것임을.
브라이언은 원래 공격보다 수비에 훨씬 능한 타입의 전술가다. 30분간 세 골의 리드를 지켜내는 정도는, 그에게는 조금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이제, 30분이 지나면 우리는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트레블을 해낸 팀이 될 것이다. 원래부터 길었던 팀의 역사에 성적과 커리어가 따라붙어, 명실상부한 세계적 빅클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오래 걸렸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느라. 그러다 보니 어느새 세계 축구계의 선두권으로 나섰지만, 그래도 우리가 강팀이라는 실감은 쉽게 나지 않았었다.
지금까지는, 항상 뭔가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무패 우승과 5관왕을 달성한 지난 시즌엔 챔스를 놓쳤고, 처음으로 챔스를 우승한 지지난 시즌엔 리그를 빼앗겼다.
이젠 아니다. 곧 아니게 된다.
[이제부터의 모든 순간이, 팀의 역사가 됩니다.]
마침내 휘슬이 세 번 울렸다. 나이얼 스탠드에 내걸린 플래카드의 문구처럼, 그날 우리는 창단 이래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하게 되었다.
처음 걷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