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걷는 길 (3)
휘슬이 세 번 울린 순간, 붉은 유니폼 선수들의 발이 멈췄다.
잠시 후, 그들의 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잔디 위에 무릎을 꿇고 오열했고, 긴장이 풀려 큰대자로 눕는 선수도 나왔다.
이럴 때면 가장 먼저 팬들 쪽에게 달려가던 주장 잭도, 오늘만은 꼼짝도 못 한 채 잔디 위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다.
“누가 보면 우리가 진 줄 알겠네요. 레알 선수들이 훨씬 멀쩡해 보여요.”
스태프의 이야기에, 에이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런 경기는, 원래 그런 거야.”
아슬아슬한 승부라면 또 다른 모습이겠지만, 3점 차의 경기였다.
진 팀 선수들이야 패배를 받아들일 시간이 있지만, 이기는 팀에겐 그럴 여유가 없다. 다 이긴 게임을 허무하게 날려버리지 않도록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해야 한다. 하물며 선덜랜드의 축구, 발을 멈추지 않는 축구를 하는 선수들이라면···.
그 차이가 지금의 풍경을 만드는 것이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풍경을.
빛의 경기장.
규모를 따지자면 영국에서 세 번째로 크고, 설비로 치면 세계에서도 첫손에 꼽힐 최상급 축구장, 그곳의 푸른 잔디 위에서 치열하게 싸운 붉은 유니폼의 일레븐, 감정을 남김없이 퍼붓는 든든한 서포터의 모습을, 그녀는 세상 무엇보다 사랑했다.
I know I am. I’m sure I am.
I’m Sunderland ’til I die.
기쁨으로 환호하고 감격에 겨워 흐느끼면서도 목소리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 그들에게서 퍼져나가는 다양한 감정들이 자꾸만 그녀의 시야를 흐릿하게 물들였다.
그래서 에이미는 눈을 깜빡여 눈물을 짜냈다.
아직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선수들의 임무는 끝났지만, 스태프의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자, 여러분···.”
그녀가 잠긴 목을 가다듬는 사이, 옆에서 스태프들의 목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부팀장님 이제 결혼할 수 있겠네요. 부케 던지는 연습은 좀 하셨어요?”
“에이, 우리 부팀장님이면 무조건 깔끔하게 잘하시지.”
“예전에 수잔 베일리 우드 고객님 결혼식 때, 부케 던지는 연습 도와준 사람도 우리 부팀장님이잖아?”
사실이었다. 그리고 아주 공교롭게도, 이번에 에이미의 결혼식 리허설을 도와준 사람은 바로 그 수잔 우드였다.
그러니 결혼식 준비야 굳이 더 필요 없겠지만···.
“여러분! 가서 일이나 해요. 이벤트가 몇 개인데, 잡담할 시간이나 있나요, 지금!?”
호령하면서도, 에이미의 입가는 계속 실룩거렸다.
* * *
선덜랜드 유소년은, 언제나처럼 나이얼 스탠드에 모여서 경기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우승이다!”
“트레블이야!”
어린 소년들의 소리가 명랑하게 울렸다.
원래는 대화조차 힘들어야 했다. 관중의 아우성이 경기장을 가득 메워, 목소리조차 알아듣기 힘들 만큼 시끄럽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텐션도 높고 톤도 높은 아이들의 목소리는, 이 함성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경기장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우리가 정말로 해냈구나.’
유소년 선수이기 이전에 선덜랜드의 팬이었고,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주민이었던 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자리에 모인 어떤 유소년보다 기뻐할 자격이 있었다. 부모까지 진성 블랙캣츠인 크리스 정도가 간신히 우위를 보일 것이고, 나머지는 어림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짐은 가슴 한편에 시큰거림을 함께 느꼈다. 위장을 짓누르는 묵직한 책임감은 덤이었다. 그는 선덜랜드 유소년팀의 주장이었고, 하퍼와 페르난데스의 등번호 ‘1’을 물려받게 될 선수다.
눈앞에 펼쳐진 경기장의 풍경, 트레블의 위업은 언젠가 그 자신 또한 반드시 해내야 하는 청사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째서인지 시야가 흐릿해졌다.
동시에 카메라 셔터 소리가 났다.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자, 옆에서 테오가 스마트폰을 들이댄 채 헤벌쭉 웃고 있었다.
“뭔데?”
짐의 무뚝뚝한 물음에, 테오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클라라에게 보내 주려고!”
옆에서 월터도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 캡틴의 우는 모습··· 이건 굉장히 귀하군요.”
“귀하긴 하지. 캡틴은 예전에 딱 한 번, 클라라 수술 끝났을 때만 울었잖아? 그 이야기 해 줬더니 클라라가 안 믿더라고. 우리 캡틴은 절~대 안 울 거라고!”
짐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안 울었어.”
대답하면서, 무척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감격과 기쁨 못지않은 중압감에 시달리는 중이었는데, 지금은 중압감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크리스가 옆에서 꺄륵거렸다.
“괜차나. 캡틴. 추욱구는, 열한 명이 하는 거야.”
“펠레의 명언이구나! 똑똑한데!?”
테오가 어느새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은 채, 크리스를 마냥 귀여워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르카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지만, 오늘은 딱히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역시 트레블의 감격이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동료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짐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팬들의 함성에, 자신의 목소리를 얹었다. 배에 힘을 잔뜩 준 채,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우리가 트레블 팀이다! 유럽 최강 선덜랜드다!”
유소년 주장의 외침에, 동료들의 목소리가 덮였다.
“우리도 꼭! 트레블 할 거다!”
Say we are.
* * *
마일즈는 무심코 물었다.
“왜 그래?”
“크리스가 엄마 부른 것 같아서요.”
수잔의 뜬금없는 이야기에 마일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옆자리의 브렌든은 곧바로 불만을 드러냈다.
“거 우드 여사님, 독신들 서럽게 그러지 좀 마요. 이 난리통에 크리스 목소리가 어떻게 들려요.”
핀잔을 주는 브렌든에게 마일즈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맥주집 사장이 끼어들었다.
“그게 바로 어머니의 위대함이라는 거야. 이 친구야.”
그러자 주위의 일행들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맥주집 사장 본인부터가 유부남이었고, 심지어 마일즈보다 훨씬 먼저 결혼했다. 그런데도 오늘 같은 날 가게를 맡겨 두고 축구 보러 와버렸으니···.
“그러고 보니 자네 안 돌아가도 괜찮아? 와이프 혼자 가게 지킬 수 있겠어?”
“지금은 못 가지. 어디 지나갈 수나 있겠나?”
경기장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조금 전까진 축 늘어져 있던 선수들도 기운을 차리고 팬들과 기쁨을 나누는 중이었다.
[첫 트레블의 감동, 도시의 모두와 함께!]
피치 위에서는 선덜랜드의 잔디 관리인 리지가 또다시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고, 사이드라인 너머에서는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단상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제 곧 챔스 트로피, 빅 이어가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 트로피를 주장의 손으로 힘차게 휘두르는 순간, 선덜랜드의 창단 첫 ‘트레블’이 완성된다.
모처럼 경기장에 직관하러 온 팬이라면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장면이라, 선덜랜드 팬들은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은 채 경기장에 머물렀다. 덕분에 지금 귀가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좀 이따가, 천천히 돌아갈까 했는데.”
맥주집 사장의 이야기에, 수잔과 마일즈가 걱정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럼··· 오늘 밤은 영업이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구단에서 아주 작정했잖아요?”
“하긴, 오늘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밤새 빛이 꺼지지 않을 거라고 했었지.”
정작 맥주집 사장은 호쾌했다.
“뭐, 못 돌아가면 돈 좀 덜 벌고 마는 거지. 나도 장사치이기 이전에 선덜랜드 팬이거든!”
“이봐. 우린 자네 수입을 걱정하는 게 아니야. 자네가 나중에 와이프한테 맞아 죽을 걸 걱정하는 거지. 챔스 결승에선 어금니 꽉 깨물고 일한다면서?”
핫도그 사내의 참견에도, 맥주집 사장은 끄떡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허허, 여자 눈치나 보면서 축구 팬을 어떻게 하나?”
실제로는 기나긴 협상을 통해 오늘 직관을 허락받은 거지만, 친구들 앞에서는 ‘원래 나는 와이프 눈치조차 보지 않는다’며 호언장담하고 싶은 게 맥주집 사장의 심정이었다.
물론 맥주집 사장의 그런 속셈은 진작에 친구들에게 간파된 상태였다. 더불어, 마일즈와 수잔은 맥주집 사장 부인이 왜 자기 남편을 보내줬는지도 들었다.
[그야 보내 줘야죠. 저도 선덜랜드 팬이니까요··· 그렇다고 역사 깊은 펍의 안주인으로서 매치데이에 가게를 닫는 것만은 허락할 수 없으니, 그이만 보내야죠.]
‘그래서 처음부터 보내줄 생각이긴 했는데, 가고 싶다며 애원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고 했었지?’
다만, 아쉽게도 이 자리에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소년 팬이 한 명 섞여 있었다.
바로 토트넘 팬 출신, 제이슨이다.
“멋지십니다! 방금 전 말씀, 아이반에게 꼭 들려주고 싶네요. 여자 눈치나 보면서 축구 팬을 어떻게 하냐고요!”
제이슨과 아이반은 이번에 챔스 결승을 같이 보겠다는 일념으로 함께 선덜랜드에 건너왔다. 열심히 알바하면서 가까스로 결승 티켓값을 모았지만, 정작 아이반은 ‘자기는 풋볼 스퀘어에서 경기를 보겠다’며 물러났다.
아이반이 물러난 원인이, 풋볼 스퀘어의 터줏대감 소녀 주디임은 제이슨 또한 이미 눈치챈 상태였다.
“아이반 그 자식, 반드시 후회할 겁니다. 이걸 직관 안 하다니··· 피눈물을 흘릴 거라고요!”
주먹을 불끈 쥐고 선언하는 제이슨을 흘끗거리며, 마일즈는 수잔과 눈을 맞췄다.
“오늘 풋볼 스퀘어에서 드림스케이프 공연 있는 거 알려주면··· 큰일 나겠죠?”
“어차피 아이반이 메시지 보내서 자랑하겠지만··· 지금은 놔두자고.”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맥주집 사장과 제이슨이 경기장을 중간에 빠져나갈 방법도, 아이반이 경기장에 들어올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각자의 방법으로 남은 시간을 즐기면 된다.
밤은 길고, 즐길 이벤트 또한 잔뜩 남았다. 경기장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오늘은 분명히, 시티 오브 선덜랜드 전체의 축제날이니까.
* * *
온 사방에서 붉은 함성이 쏟아져 내리는 경기장을 바라보며, 브라이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3 회의실은···.”
“죄송하지만, 오늘은 안 되겠는데요.”
대답하는 샐리의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새침함 함유량이 대폭 늘어났다. 아마 브라이언과 똑같은 기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신 줄 놓고 마음껏 오열하고 싶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참아내야만 하는 것이 코칭스태프의 숙명이다. 그들에게는 선수들을 다독이고 축하할 의무가 있기에.
특히 감독에게는, 트로피를 들고, 믹스드존 인터뷰까지 끝내는 막중한 역할이 남아 있다.
그래도 4강전 때는 가까스로 수석코치에게 인터뷰를 대행시킬 수 있었지만, 챔스 결승 승리 직후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실제로 샐리의 얼굴에는 ‘오늘 인터뷰도 나한테 떠넘기면 바로 쿠데타 돌입이야.’ 같은 표정이 떠오른 상태다.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려 노력하며, 브라이언이 목소리를 착 깔았다.
“그동안은··· 우리가 이루지 못한 기록이 있었잖아?”
“그랬죠. 그래서 늘 주장했었죠. 선덜랜드는 아직 배가 고프다. 우리가 도전자다··· 이젠 아니네요.”
이제 선덜랜드는 당당한 트레블 팀이다. 따라서 다음 시즌부터는 챔스, 프리미어리그, FA컵은 물론, EFL컵과 커뮤니티 실드까지 ‘디펜딩 챔피언’ 으로서 참전한다.
아울러, 챔스 우승팀 자격으로 나가는 슈퍼컵과 유럽 챔피언으로서 출전하는 클럽 월드컵에서도 탑독 취급을 받을 것이다.
이제 어떤 대회에서도 ‘도전자’ 행세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 줄곧 언더독 정신으로 싸워온 선덜랜드가, 처음 걷는 길이다.
“그러면 나는 앞으로 선수들을 뭐라고 독려해야 하는 거지? 새로운 레퍼토리가 필요할 것 같은데.”
“글쎄요. 그보다 믹스드존 걱정부터 하시는 게 어떨까요? 곧 가셔야 할 텐데.”
믹스드존 이야기에, 브라이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벅찬 감동을 억누르기도 버거워서, 도저히 제대로 인터뷰할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 지난번처럼 메디컬 이슈가 생기면 어떨까? 선덜랜드 감독 브라이언은 로컬 보이이자 원클럽맨 출신으로서, 이 도시에서 열린 챔스를 우승하고 트레블을 달성한 사실이 너무 벅차서···.”
그러자 샐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별수 없이 제가 인터뷰하겠죠. 감사합니다. 다음 시즌부터 선덜랜드 감독을 맡게 된 샐리 퀸입니다. 브라이언 감독님의 유지를 받들어···.”
“유지라고? 나 죽는 거야?”
“그야 챔스 승리 인터뷰를 두 번이나 내던진 감독을 살려둘 리 없잖아요? 풀백 출신이시니까 사이드라인 옆에 묻어 드릴게요. 대충 이쯤에.”
그렇게 말하면서, 샐리는 발끝으로 잔디 위를 쿡쿡 찍어 보이기까지 했다. 절대 안 바꿔줄 기세에, 브라이언은 결국 터덜터덜 인터뷰 회장으로 향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프레스팀에서도 지금 열일 중이니까요. 프롬프터만 보면 될 정도로요!”
실제로 프롬프터에는 글자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지만, 브라이언은 한 글자도 읽지 못했다. ‘챔스’라거나 ‘우승’, 혹은 ‘이 도시’나 ‘팬들’ 같은 키워드가 보일 때마다 가슴이 울컥해서, 말조차 잇기 힘들었기 때문에.
브라이언은 그날, 결국 최악의 인터뷰를 하고 말았다.
“33.333%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네?]
“우리 브로가, 그러니까 구단주 썬이··· 트레블 세 번 하면 은퇴시켜준다고 했거든요. 이번에 한 번 했으니까, 앞으로 두 번만 더 하면 은퇴할 수 있다는 뜻이죠.”
기자들이 울상을 지었고, 멀리서 지켜보던 구단주의 얼굴에서는 감정이 사라졌으며, 프레스팀은 오열했지만··· 의외로 팬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 브라이언 종신각 날카롭죠?
ㄴ 종신은 너무했고, 딱 치매 오기 직전까지만 부려 먹자.
ㄴ 트레블 딱 한 번만 더 하고, 다음부턴 계속 유로피언 더블만 하면 노예계약 완성이네.
ㄴ 선수들이 이제부터 FA컵 던지고 와도 매우 칭찬할 예정입니다. 블랙캣츠 서포터 일동.
- 프리미어리그 19개 구단은 선덜랜드의 트레블 세 번 달성을 지지합니다.
ㄴ 마음은 알겠는데, 명단에서 조르디랑 보로는 빼주세요.
ㄴ 살짝 가불기 느낌인 건 알겠는데, 님들도 그냥 선덜랜드 트레블 두 번 더 시켜주고 전술 천재 감독 치워버리는 게 낫지 않겠음?
ㄴ 난 죽음을 택하겠다.
ㄴ 아니, 머리가 있으면 생각들을 좀 해 봐. 지금 브라이언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거기는 구단주가 진짜 핵심이야.
ㄴ 그건 그렇네.
ㄴ 벌써부터 끔찍하다. 트레블까지 해버렸으니, 이제 선덜랜드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