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걷는 길 (4)
우승 관련 기사를 쭉 훑어보던 다미가 아쉬운 듯 한숨을 쉬었다.
“감독님 이야기만 많고, 사장님 이야기는 별로 없네요? 모처럼 로켓까지 한 발 날렸는데···.”
이번에 트레블 기념으로, 인공위성 ‘트레블 호’를 궤도에 올려놓긴 했다. 5관왕 때 올렸던 ‘선덜랜드 호’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통신용 위성이다.
‘선덜랜드 호’는 장차 개도국에 축구 방송을 공급하는 용도로 활용할 예정이었다.
“이렇게 된 거, 로켓을 한 발 더 쏴야 하나···.”
다미의 눈이 반짝거린다. 눈빛만 보면, 내가 허락하는 즉시 ‘축알못 격퇴 호’를 발사할 것만 같다··· 기왕 한 발 날릴 거라면 좌표는 세인트 제임스 파크 센터서클이 좋겠는데.
아니, 그게 아니고.
다행히 희주가 재빨리 다미를 제지했다.
“그렇지도 않아요.”
“하지만 다들 검증이 더 필요하다는데요? 대체 우리 사장님보고 뭘 더 검증하려는 건지···.”
볼을 부풀리는 다미를 향해, 희주가 미소를 지었다.
“그거 스포츠판에서 오랜 밈이에요. 자기 팀 와달라는 드립이죠.”
- 썬이 그렇게 쩐다고? 못 믿겠음. 리버풀 와서 증명해주면 인정함.
- 리버풀은 이미 충분히 강팀이라 증명이 안 됨. 증명을 위한 최적의 구단, 미들즈브러가···.
ㄴ 지금 더비 라이벌팀 구단주를 데려오겠다고?
ㄴ 구단주가 썬이라는데, 더비 라이벌이 문제임? 오겠다고 말만 하면 세인트 제임스 파크 정문부터 구단주실까지 레드카펫 쫙 깔릴걸?
- 내가 볼 때 EPL은 갑부 구단주에게 너무 유리한 게임임. 분데스에 와서 검증하자.
- 그렇다면 저 마인츠!
ㄴ 우리 빌바오는 어떠십니까? 유니폼도 비슷한데요.
“사실 극찬이죠. 자기 팀에 당장 모셔가고 싶을 정도로요.”
“그런 거면 됐어요.”
다미가 만족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기에는 살짝 어색한 미소였는데, 진짜로 기분이 좋아지면, 다미는 이런 식으로 웃는다.
눈이 너무 커서 그런지, 눈웃음이 살짝 어색하게 보이는 게 리미트리스 넘버 투의 오랜 특징이다.
덕분에 로켓은 어젯밤에 쏜 한 발이면 충분할 모양이다. 희주가 살짝 가슴을 쓸어내린 다음, 수첩을 폈다.
“에··· 그럼 다음 스케줄입니다. 갑부 오라버님. 오늘의 최대 이벤트는 아시다시피 결혼식인데요.”
“알아. 리버뷰 브래서리지?”
“응. 참고로 턱시도 입어야 할 거야. 신랑신부의 강렬한 요구에 따라 주례가 오빠로 결정되었거든.”
주례라. 결혼식 리허설 때는 조엘이 했던 역할인데··· 나라고?
“아니, 세상에 총각보고 주례 서달라는 막장 결혼식이 어디 있어? 감독님한테 부탁하라고 해.”
“브라이언 씨도 미혼이잖아. 게다가 에이미 씨가 그러는데··· 브라이언 씨 축사 듣느니 그냥 결혼식 없이 살림 차리겠대.”
브라이언에게 연설시키는 짓은 나도 안 하지. 그건, 내가 주례 서는 이상으로 막장이거든.
“내가 말한 감독님은 로저스 감독님인데.”
“은퇴한 사람 부려 먹는 거 아니라고 하시던데··· 포기해.”
제길, 어제까지 상 쳤던 여동생의 고분고분 지수가 하루 만에 폭락한 모양이다··· 조만간 다미한테 날 잡아서 AS 맡겨야지.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다미가 옆에서 눈을 빛낸다.
“그런데 사장님, 이번에는 카퍼레이드 안 하나요? 선덜랜드는 트로피 딸 때마다 공항에서 스타디움까지 퍼레이드 하는 걸로 아는데··· 저도 그거 타보고 싶었거든요.”
그러자 희주가 조용히 대답했다.
“이번엔 못 하죠. 위대하신 우리 갑부 오라버님께서 유일하게 실수하신 부분이니까요.”
“실수라고요?”
“결승이 원정 경기였으면 공항에서 퍼레이드 하면서 돌아와도 이상하지 않지만, 우리 홈에서 치렀는데 퍼레이드 할 순 없잖아요?”
“아···.”
다미의 얼굴 가득 아쉬움이 번졌다.
사실 그동안 우리 여성 스태프들 사이에서는, ‘스페셜 땡스 투 뉴캐슬 호’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희주는 촌스럽다고 질색했고, 샐리는 말은 안 하지만 표정은 밝지 않았다.
심지어 요즘엔 리지마저 기피하는 느낌이다. 트로피 모형이 잔뜩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막상 그거 타고 뉴캐슬어폰타인을 통과할 땐 좋아 죽으려고들 하면서.
아무튼, 여성진 중에서 다미처럼 ‘자기도 타고 싶다’며 적극성을 보인 사례는 희귀하다. 마침 다미에게는 오래 신세를 졌으니, 이런 사소한 소망은 꼭 들어주고 싶다.
그래서 나는 차분하게 덧붙였다.
“참고로 말해두자면, 나는 이번에 딱히 실수한 게 없어.”
내가 유일하게 실수한 건, 잭의 결혼식 주례를 로저스 감독으로 못 박아 두지 않은 것뿐이야.
“그치만 퍼레이드는 못 하잖아? 비행기를 쓸 명분이 없었으니까.”
“신혼여행엔 비행기가 필요하지. 그리고 구단에서는 헌신적인 팀의 주장과 충성스러운 스태프의 원활한 신혼여행을 위해 공항까지 배웅할 예정이야.”
신랑신부는 웨딩카 타고 움직이겠지만, 다른 하객들은 ‘스페셜 땡스 투 뉴캐슬 호’를 이용할 거다.
내 구상을 들은 다미는 만족했고, 희주는 혀를 내둘렀다.
“···사탄도 실직하겠네. 조만간 데빌잡이나 잡인페르노 같은 사이트 하나 만들어야겠어.”
* * *
리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 아래에는, 하얀 구름 몇 조각만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상쾌하고 맑은, 화창한 날씨였다. 원래 영국 평균보다는 그래도 강수량이 적은 시티 오브 선덜랜드라지만, 이렇게까지 화창한 날씨는 드물다.
“하늘도 축하하는 모양이네.”
리지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카트를 움직였다. 어제의 트레블 기념 문구를 다시 깎아내고, 새 글씨로 덮어쓰기 위해서다.
오늘 진행되는 잭과 에이미의 결혼은, 구단 최대의 빅 이벤트였고, 어떤 의미에선 챔스 우승 기념행사 이상으로 중요한 자리였다.
팬과 구단에 한결같이 헌신해온 주장과 CS 에이스의 결혼에, 구단 모든 관계자가 진심으로 축복을 보냈다. 특히 구단주실의 반응이 뜨거웠는데, 결혼식은 물론 신혼여행까지 모든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선언했다.
리지 또한,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한껏 솜씨를 부리기로 했다. 어제 트레블 축하 문구를 새겼던 잔디 위를 도로 깎아내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글씨를 넣는 정밀 작업을 강행할 정도로.
‘잔디의 결이 끊어지지 않도록··· 단숨에.’
아주 어릴 때부터 이곳의 잔디를 놀이터로 삼아, 잔디와 함께 자란 그녀에게는, 기술적으로는 그렇게까지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우리는 반쯤 자매 같은 거니까.’
유일한 혈육인 할아버지가 출근할 때마다 그녀는 이 잔디 위에 따라와 시간을 보냈었다. 공놀이부터 블럭쌓기, 인형놀이까지. 그중에서도 어린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일은···.
“자, 약속할 수 있지?”
십 대 소녀들 특유의 톤이 높고 명랑한 목소리가, 작업을 갓 마친 리지의 귀를 파고들었다. 시선을 돌리자 재닛과 클라라, 그리고 처음 보는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녀들의 차림새는 모두 엇비슷했다. 드레스라기엔 소박하지만 원피스라기엔 꽤 화사한, 모든 의미에서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하는 십 대 소녀다운 복장이다.
‘재닛은 구단 관계자니까 당연히 와야 하고, 아마 클라라는 짐의 관계자로 초대받은 것 같은데··· 나머지 한 명은 누구지?’
그때 재닛이 다시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말하는데 난동 부리면 안 돼! 알았지, 마가렛?”
“내가 무슨 사생팬도 아니고···.”
리지의 의문은 금방 풀렸다. 주장 잭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다는 이유로, 어떻게든 재닛과 클라라를 졸라 함께 참석한 모양이었다.
옆에서는 클라라가 거든다.
“사생팬 직전이긴 했지. 자기는 죽어도 캡틴을 못 보낸다면서 클럽하우스에 난입하려 들었지?”
“맞아. 어제는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 울타리에 매달려서 울었잖아.”
이야기를 듣는 리지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동경하는 축구선수의 결혼 소식을 들으면, 팬들이 저런 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 오랫동안 특정 선수의 팬이었던 리지는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다.
멀리서 선덜랜드의 잔디 관리인이 격려를 보내는 줄도 모르고, 마가렛은 새침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냥 놀라서 그런 거야. 캡틴은 늘 팬하고 결혼할 거라고 대답했으니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로컬 팬에게 폭발적 인기를 자랑하는 선덜랜드 주장의 결혼은, 확실히 지역 내에서 빅 이슈긴 했다.
처음에는 반쯤 놀리듯 ‘팀과 결혼한 거 아니었냐.’는 반응이 돌아왔지만, 결혼할 파트너가 구단 직원이라는 이야기에는 팬들도 대체로 수긍하고 축복했다.
물론 예외도 있다. 일부 미혼 남성들은 그 직원이 FC 선덜랜드 4대 미녀로 꼽히는 에이미라는 사실에 피눈물을 흘렸다는 모양이니까.
‘그리고··· 가끔은 선수를 동경하는 소녀들도 가슴앓이를 하는 법이지.’
리지가 생각하는 사이, 클라라와 재닛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트레블 하면 결혼한다고 했대. 그다음에 척척척 대회 세 개를 전부 우승해 버린 거야. 얼마나 멋져?”
“선수들도 엄청 멋있었지. 캡틴을 반드시 장가보낸다는 일념으로 다들 똘똘 뭉쳐서는···.”
“알았어, 알았다고. 나도 축하하러 가는 거야.”
마가렛이 두 손을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친구들에게 그다지 신용을 얻지는 못한 모양이다.
“난동 부리면 절대 안 돼.”
“알았어.”
“결혼식장 카펫 대신 날 밟고 가라는 소리도 안 돼.”
“오케이.”
“팬이라고 꼭 선수와 결혼해야 하는 법은 없는 거야. 동경과 사랑은 다른 거니까.”
이어진 추궁에, 마침내 마가렛이 투덜거리고 말았다.
“클라라 너, 짐은 이미 자기 남자친구라고 그렇게 나오는 거지!?”
오늘의 식장, 리버뷰 브래서리로 향하는 소녀들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리지는 담담한 미소와 함께, 잠시 멈췄던 작업을 단숨에 마무리했다.
* * *
[Will you marry me?]
리지가 경기장 잔디 위에 단숨에 써 내려간 글자는, 식장에서도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오늘의 결혼식장을 굳이 리버뷰 브래서리로 고른 이유 중 하나다.
리버뷰 브래서리.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입점한 고급 레스토랑으로, 선수가 먹어도 칼로리 걱정이 없는 코스 요리를 트레이드 마크로 삼는 레스토랑이다.
경기장에 입점한 모든 편의시설이 대부분 그렇듯, 여기서는 그라운드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덕분에 리지의 축하 메시지부터, 경기장의 곳곳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까지 전부 눈에 들어왔다.
요니가 마이크 앞에 섰다.
“간단히 안내드리겠습니다. 모두의 축복을 받고 싶다는 신부의 소망에 따라, 오늘의 결혼식은 풋볼 스퀘어와 로커 파크에 생중계될 예정입니다.”
서비스 정신이 넘치는 미소, 우리 CS팀 스타일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친절한 목소리로 멘트를 마친 요니가 잭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이크 앞에서 슴다 쓰면 반드시 죽일 거라는 의미니까, 참고해.”
꼼꼼하게 마이크를 잠깐 끄는 것도 잊지 않은 베스트맨의 센스에, 식장에 웃음이 번졌다.
잠시 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스크린이 풋볼 스퀘어와 로커 파크의 풍경을 나란히 비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눈을 의심했다.
처음에는 매치데이 영상을 녹화한 줄 알았다. 스크린에 보이는 풋볼 스퀘어에는, 우리 홈 레플리카를 입은 팬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상태였으니.
하지만 팬들의 손에 들린 크레이프며 핫도그 같은 스낵을 본 순간,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물론 매치데이 당일에는 스낵이 불티나게 팔리지만, 우리 팬들은 경기 중에는 응원하기 바빠서 저런 걸 먹을 시간이 없다.
지금의 영상은 정진정명 생방송이라는 뜻이다.
그나저나···.
“다과는 내가 준비 안 한 것 같은데?”
마이크를 끄고 낮은 목소리로 물어보자, 신랑과 신부도 차분하게 마이크를 껐다.
처음 하는 결혼식인데도 마이크 다루는 게 꽤 능숙하다. 아무래도 한 명은 수시로 인터뷰를 하는 스타플레이어고, 다른 한 명은 CS팀의 에이스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구단주님 덕분에 결혼식 비용을 아낄 수 있었잖슴까? 그래서···.”
“그 비용을, 팬들께 쓰기로 했어요.”
선덜랜드 레플리카를 입고 와서 결혼을 축하해주면 길가 노점에서 각종 음료와 스낵을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다는 플래카드가 도시 곳곳에 내걸린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이크를 켰다.
“처음 걷는 길일 겁니다. 이제 가족이 되는 거니까요. 어려운 순간도 있겠지만, 의지하면 괜찮을 겁니다. 축구가 혼자 하는 게 아닌 것처럼, 인생도 혼자 사는 건 아닐 테니까.”
그다음 일은, 솔직히 말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오늘의 멘트를 따지면, 브라이언을 나무랄 처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인터뷰라면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지만, 결혼식 축사를 맡은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영국 문화에서는 신랑 친구에게 베스트맨을 맡긴다지만, 한국 문화에서 나는,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읽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다.
하지만, 단지 그런 이유에서만 머리가 하얗게 변했던 건 아니다.
기념촬영까지 모두 마친 다음, 오늘의 신부 에이미는 우아한 자세로 부케를 어깨 너머로 날려보냈다.
얼마나 연습했는지, 부케 꽃다발은 완벽하고 우아한 포물선을 그렸다. 마치 다섯 살 아이조차 손만 뻗으면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완만한 각도로···.
하객 맨 앞줄에 서 있던 다미의 앞에 날아들었다.
“···어머?”
반사적으로 부케를 받아 든 다미가 눈을 깜빡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