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축구가 있다 (1)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에겐 축구가 있다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순간, 등을 떠밀린 것 같았다. 비유적인 의미로도, 그리고 물리적인 의미로도.
나중에 영상을 확인해 보면 확실하겠지만, 아무래도 리지 아니면 희주가 떠민 것 같다. 사실 위치만 보면 에디도 유력하지만, 선덜랜드의 주전 센터백이 밀었으면 앞으로 한 걸음 나오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겠지.
아무튼, 온 세상의 시선이 나에게 쏠리는 것 같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잭의 입이 살짝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구단주님, 지금 뭐 하시는 검까? 무슨 연습용 콘처럼 우두커니 서서··· 빨리 움직이셔야 함다. 별로 어렵지도 않슴다. 일단 한쪽 무릎 꿇으면 됨다.]
상상도 못 할 만큼 멋들어진 복화술이다. 재주도 좋네.
신부 에이미의 시선도 따갑다.
[제가 얼마나 연습을 했는데요. 목적지까지 완벽한 궤적으로 날아드는 로켓급 부케배송 시스템!]
아니. 그건 안다. 아는데.
“일단 결혼식은 마저 끝내야죠. 선덜랜드의 결혼식이잖아요. 팬들도 보고 있고요.”
[팬들이 보고 있어서 진행하려는 건데요!? 어렵지 않아요. 그냥 왼쪽 재킷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 걸 내밀면 된다니까요?]
에이미 씨, 대체 내 왼쪽 재킷 안주머니는 언제 스캔했습니까?
[최고의 팬 서비스가 될 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인이 맞지 않는 팀플레이란 이렇게 괴로운 걸까. 솔로 아티스트보다는 오케스트라가 멋지지만, 이렇게 호흡이 안 맞아 생기는 불협화음의 가능성은 합창일 때 훨씬 끔찍하다.
“······.”
[······.]
영원과도 같은 침묵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준 건, 리미트리스의 넘버 투였다.
“어쩌죠? 실수로 제가 받아버렸는데요. 영국에서도 이럴 땐 다시 던지나요?”
어느새 다미는 평소의 차분함과 기품을 되찾은 상태였다. 목소리는 명랑하고, 입가엔 환한 미소가 피었다.
리미트리스를 처음 차렸던, 그래서 브로슈어 모델 섭외는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에 직접 활약해온 다미의 영업용 미소는 잠깐 처지려던 분위기를 단숨에 끌어올리기 충분했다.
옆에서 희주가 자기 몸처럼 플랫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일단결혼식을속행하죠.”
영혼이 사라진 것만 같다.
* * *
부케 던지기 파트에서 약간의 버퍼링이 있었지만, 풋볼 스퀘어의 팬들은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식장 사람들에게는 큰 해프닝처럼 보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선덜랜드 스태프의 일 처리가 워낙 마법처럼 매끄러웠기에 상대적으로 실수가 커 보인 것에 불과했다.
중계로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딱히 의식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 주장을 위하여!”
“CS팀 에이스를 위하여!”
저마다 축복의 문구를 던지던 팬들 사이에서, 의미심장한 멘트가 터져 나왔다.
“선덜랜드 축구계와 이 도시를 위해 건강한 아들을!”
순간 팬들이 술렁였다. 부모 모두가 열성 블랙캣츠로 알려진 우드 부부네 크리스의 이야기가 이미 시티 오브 선덜랜드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는 축구 신동인 것도 그렇지만, 몸도 못 가누는 어릴 때부터 선덜랜드 엠블럼 안 들어간 장난감을 곧바로 패대기칠 정도로 구단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아이로 유명했다.
덕분에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문장이 맴돌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부모 모두가 선덜랜드에 깊이 헌신해온 잭과 에이미의 아이라면, 구단에 대한 애정이 아주 가득하겠지? 그리고 실력은 얼마나 좋으려나?]
덕분에 사람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장래를 두고 토론을 벌이기까지 했다.
“아빠 닮으면 미드필더겠지? 차기는 몰라도 차차기 주장쯤은 확정일 거고.”
“차차기 주장은 너무 이르다.”
“뭐가 일러. 차기 주장이 짐인데. 선수 수명 긴 골키퍼고, 아직 열일곱이잖아. 주니어가 콜업될 때까진 뛸걸?”
그 ‘주니어’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다들 애써 무시하는 것 같았다.
“공격수일 수도 있어. 잭이 워낙 클러치가 좋잖아.”
“아빠가 예전에 종종 메짤라 역할을 했으니 측면 공격 담당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난 수비수도 괜찮을 것 같은데. 투혼 넘치는 슬라이딩 태클과 육탄 방어··· 캬!”
“선덜랜드 축구계와 이 도시를 위해 아들 열 명을···.”
“이봐, 에이미 씨를 죽일 셈이야? 왜, 아주 열한 명 낳아서 맥그리거즈 축구 팀 꾸리라고 하지.”
“하지만 잭은 아직 골키퍼로는 검증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주위 어른들을 바라보며, 아이반이 한숨을 쉬었다.
“아직 결혼식도 안 끝났는데 벌써 아들 장래를 걱정하네. 대체 손자 이름은 왜 안 고민해주나 모르겠어.”
그러자 옆에서 주디가 소리 내 웃었다.
“그만큼 우리 지역 사람들은 캡틴을 사랑하거든.”
주디가, 마치 안내라도 하듯 주위에 시선을 돌렸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전부는 선덜랜드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드레스 코드로 지정된 거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대부분 마킹까지 넣었다.
[18. 맥그리거]
물론 주디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원래 아주 어릴 때부터 잭의 팬이었던 소녀다. 그녀의 오빠가 잭의 사인을 얻으러 경기 날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주변을 돌아다녔을 정도로.
“다른 팀 선수들은, 이 정도까지 사랑받진 않을 텐데.”
아이반의 혼잣말에, 주디가 대답했다.
“아마 캡틴은 아직도 운전을 못 하기 때문일 거야.”
“운전?”
“구단에서 받은 로드스터 놔두고 걸어 다니거든. 집이 가까운데 차가 무슨 필요 있느냐면서. 그러다 동네 사람들과 마주치면 사인해 주고, 안아주고, 음식 같이 먹고···.”
하긴, 잭의 지역 사랑은 이미 아이반 본인도 경험한 일이다. 선덜랜드에 머문 경력이 짧은데도, 벌써 두 번이나 길에서 마주쳤다. 연쇄사인마로 유명한 잭은, 아이반이 묻기도 전에 티셔츠에 사인을 해 줬다.
“하긴, 그런 선수는 사랑할 수밖에 없겠네. 말로만 팬과 팀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니까.”
첼시 팬 출신 아이반으로서는, 무엇보다 잭의 충성심이 가장 부러웠다. 일단 잭은, 나중에 덜 붉은 심장이 될 가능성이 없어보이는 선수니까.
주디가 덧붙였다.
“성골 유스 주장도 라이벌 팀에 자유계약으로 이적해버리는 일이 일어나는 게 축구판이잖아? 우리 캡틴은 절대 안 그럴 거지만.”
“어,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는데, 부탁이니까 그 이야기는 제이슨 앞에선 절대 하지 마.”
요즘은 사실상 선덜랜드 팬이 되었지만, 제이슨은 원래 토트넘 팬이었다. 그리고 토트넘은 예전에 아스널 상대로 주디가 말한 일을 당한 적이 있다.
성골 유스 주장이던 캠벨의 아스널 이적 사건.
아이반과 제이슨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제이슨은 그 이야기만 들으면 거품을 문다.
그래서 아이반은 슬그머니 이야기를 돌렸다.
“그럼 만약에, 저분이 결혼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풋볼 스퀘어 옆, 선덜랜드 시청에서 지어 준 구단주 이희성의 동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아마 웨딩카도, 식장도 필요 없을걸?”
주디가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시티 오브 선덜랜드 전체가 결혼식장이 될 거고, 공항까지는 헹가래로 갈 수 있을 거야. 아, 그래도 신부는 맨몸으로 헹가래 받기 좀 그러니까 Ga-ma를 태우는 게 나을까?”
“Ga-ma?”
“K-히스토리컬 드라마 안 보니? 요즘 넷플릭스에서 꽤 유행이라던데.”
그사이 결혼식이 모두 끝났다.
잭은 프리시즌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즉시 신혼여행을 다녀오겠다고 밝혔고, 구단에서는 비행기와 신혼여행지 숙소를 전부 제공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마침내 웨딩카와 퍼레이드용 버스, ‘스페셜 땡스 투 뉴캐슬 호’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주차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풋볼 스퀘어는 다시 한번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 * *
잭과 에이미의 결혼식에 몰려든 하객은, 리미트리스 공항으로의 퍼레이드까지 마친 다음에야 해산했다.
하지만 해산이라고는 해도 공식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모두가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일단 리지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스타디움 투어를 필요로 하는 손님에게 경기장을 안내하는 일.
리지는 등을 꼿꼿하게 세운 채로 다미를 응시했다.
“원래는 에이미 씨 역할인데, 부재중이니까 이번에는 부득이하게 제가 대타로 나설 생각인데요. 혹시 부족할까요?”
그러자 다미가 리지를 향해 부드러운, 하지만 어딘가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주시면 고맙죠. 부탁드릴게요.”
당사자의 허락까지 받아낸 리지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그러니까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조합’이라는 브라이언의 평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리지 생각에, 어색하기는 브라이언의 턱시도 차림이 훨씬 어색하기 때문이다.
“이곳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원래 사만 구천 석 경기장이었죠. 썬이 오고 나서 몇 번 확장 공사를 했고, 지금은···.”
리지의 이야기에, 다미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칠만 석이죠? 네 번 증축했고요.”
“잘 알고 계시네요. 아, 그러고 보니 리미트리스 관계사에서 증축을 맡았던가요?”
“네. 덕분에 그냥 숫자로만 아는 거죠. 지금처럼 직접 볼 기회는 드물었고요.”
“그럼, 부사장님께는 숫자로는 알 수 없는 코스를 보여 드려야겠네요.”
리지는 담담하게 웃으며 걸음을 조금 빠르게 했다.
“예를 들면, 저는 선수나 코치진, 심판들과는 조금 다른 통로를 써요. 잔디 카트를 이동시켜야 하거든요. 예전엔 저희 할아버지가 쓰셨고, 지금은 저만 사용하는 일종의 비밀 통로죠.”
“그렇군요. 하지만··· 다른 통로는 안 보이는데요?”
“광고판으로 숨겨 놨으니까요. 잔디 깎는 사람이 자주 모습 보이면 관중들의 몰입이 깨져요.”
“축구단 운영은 그런 디테일이 중요한 거군요. 하지만 모습을 좀 더 드러내도 괜찮지 않을까요? 리지 씨는 엄청난 미인이고, 가끔 하는 잔디 캘리그래피 퍼포먼스도 훌륭한걸요.”
리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광고판 하나를 옆으로 밀어내 관리인용 통로를 드러냈다.
잠시 후, 선덜랜드 잔디관리인의 손이 그곳에 놓인 작고 낡은 의자를 그리운 듯 쓰다듬었다.
“이건, 제가 어릴 때 쓰던 의자죠. 크면서 치웠는데, 몇 년 전 복귀하면서 다시 가져다 놨어요··· 그리고 어릴 때 썬은 이 앞에서 공을 찼었고요.”
리지는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옛 추억을 꺼냈다. 혹시라도 자신의 의도가 잘못 전달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여전히 최다미의 미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네.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조금 부러운데요? 저는 그 시절의 사장님을 잘 모르니까요.”
“피차일반 아닐까요? 저는 축구를 그만둔 다음의 썬에 대해서는 모르거든요.”
“궁금한가요?”
“아뇨.”
리지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내가 좋아하던 건, 공을 차는 썬의 모습이니까. 그러니까···.’
가슴 한구석이 꾹 옥죄는 느낌을 누르며, 리지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보단 부사장님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어요. 사실 경제 채널 같은 데선, 부사장님 정도면 독립해서 자기 회사를 차려도 이상하지 않다고 하거든요.”
“그럴 순 없죠. 사장님이 아니었다면 리미트리스의 최다미는 존재하지 않을 텐데요.”
다미의 단호한 대답에, 리지는 희미한 예감을 받았다.
“예전, 부사장님은 생일을 법률적 출생일과는 조금 다르게 쓰신다고 들었어요. 처음엔 동양식 루나 캘린더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네. 사장님과 처음 만난 날이 생일이에요.”
“역시. 종종 썬에게 비밀번호로 생일을 물어본다고 하길래, 보안성이 낮다고 생각했어요.”
“정작 사장님은 한 번도 맞추신 적 없지만요.”
“저하고 비슷하네요. 썬이 없었다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잔디 관리인 리지 윌리엄슨은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지금의 선덜랜드도요.”
리지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관리인용 통로 끝에 보이는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자, 투어는 끝났어요. 여기서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타시면 곧바로 리버뷰 브래서리까지 돌아가실 수 있어요.”
다미는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우아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이 닫히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옆에서 재닛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돌아보니 재닛이 웃고 있었다. 옆에선 클라라의 모습도 보였다.
“엄청 조마조마했다고요. 내가 썬의 옛날 여자다! 내가 너보다 썬을 훨씬 더 잘 안다고! 같은 식으로 들이받을까봐.”
“애초에 옛날 여자였던 적도 없거니와, 내가 어디 그럴 성격이니? 팬심이나 동경이, 사랑과 다르다는 정도는 알아.”
물론, 잔뜩 부풀고 커진 동경은 사랑과 구분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난, 옳은 행동을 한 거야.’
미소 짓는 리지에게, 이번엔 클라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지 씨. 혹시 손수건··· 안 필요하세요?”
“괜찮아. 선덜랜드 스태프는 선수와 함께 싸우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열세 번째 플레이어잖아?”
리지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었다.
“발을 멈추지 마라. 고개를 떨어뜨리지 마라. 휘슬이 세 번 울리기 전까지 아무것도 멈추지 마라. 그러니까.”
그리고 몇 걸음을 더 걸은 다음 덧붙였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는, 이 잔디 위에서는 울지 않을 거야.”
* * *
다미가 투어를 다녀올 때에도, 나는 아직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상태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반드시 성공하는 프러포즈 문구 백선!] 같은 서적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하긴, 희주가 구해온 거니 오죽하겠냐 싶다마는.
그나저나 반지 디자인은 괜찮은 건가?
희주에게 맡겼더니 영 미심쩍고 불안하다. 물론 냉정하게 따져 보면 나보다야 희주가 반지 잘 고르긴 할 거다. 백화점 명품관을 제집 드나들듯한 기간이 얼만데.
평소였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리미트리스의 넘버 투라면 완벽한 모범 문구를 준비했을 것이고, 받는 사람이 절대로 불평하지 않을 반지를 골랐을 테니까.
다미는 절대로 내 이야기에, 안 된다거나, 불가능하다고 대답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리미트리스 부사장 찬스는 쓸 수 없다. 프러포즈 멘트, 내밀어야 할 반지를 본인에게 구해 달라고 부탁하는 건 너무나도 막장이니까.
“사장님?”
어느새 다미가 리버뷰 브래서리에 돌아왔다. 나는 아직 생각 정리를 못 했는데.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정말 멋진 경기장이네요. 축구는 잘 모르지만, 반할 것 같아요. 사장님은 아주···.”
그때, 레스토랑 창밖에 내다 보이는 경기장의 푸른 잔디 위에, 붉은색 카트가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잭의 결혼식을 위해 새긴 문구, [Will you marry me?] 위쪽에 추가로 다른 글자가 생겨났다.
[Just say it.]
순간, 환청이 들린 것만 같았다. 불과 몇 시간 전, 바로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린 신랑 신부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 울린다.
[별로 어렵지도 않슴다. 일단 한쪽 무릎 꿇으면 됨다.]
[그냥 왼쪽 재킷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 걸 내밀면 된다니까요?]
순간, 등을 떠밀린 것 같았다. 전적으로 비유적인 의미로. 그래서 나는 빛의 경기장 잔디 위에 응원처럼 새겨진 멘트를 곁눈질하며, 턱시도 재킷 안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낸 다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다미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나는 금방 차분함을 되찾았다. 다미는 눈이 워낙 커서, 원래 눈웃음이 어색하게 보인다는 걸 알기 때문에.
“네!”
“···나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러네요. 하지만, 제가 사장님 말씀에 단 한 번이라도 아니라고 답한 적이 있었나요?”
다미의 예쁜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미소만은 내가 기억하는 모든 웃음 중 가장 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