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415화 (415/422)

우리에겐 축구가 있다 (2)

다미가 진정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울고 난 다음에도 다미는 변함없이 예뻤지만,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화장이 살짝 번졌던 것이다. 아무래도 희주가 평소 쓰는 제품보다는 워터프루프 성능이 떨어지는 걸 쓰던 모양이다.

눈물이야 닦아 주면 된다지만, 화장이 번지는 문제는 나로서는 도저히 해결이 힘들었다. 덕분에 먼저 퇴근한 희주에게 급히 SOS를 보내야 했다.

[그야 다미 언니는 워터프루프 안 쓰지. 평소에 화장 연하게 하니까 굳이 필요 없었을걸? 일단 집으로 데려와.]

그런 과정을 거쳐, 다미는 선덜랜드 시내에 위치한 내 집으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그냥 리미트리스의 의전용 팬텀을 쓸까 싶었는데, 다미가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울고 난 얼굴을 기사에게 보이는 걸 망설이는 듯했다.

“그럼 내가 운전할까?”

“아뇨. 사장님은 무릎 안 좋으시잖아요. 제가 할게요.”

“됐어. 영국은 한국하고 방향이 반대라서, 처음 운전하면 헷갈리니까.”

“그치만.”

자꾸만 내 무릎을 흘끗거리는 다미를 향해, 짐짓 자신 있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왜, 내 운전 못 믿어?”

평소엔 기사 딸린 차를 타고, 아니면 희주에게 운전을 전적으로 떠넘기고 있긴 하다. 귀찮기도 하고 가끔씩 무릎도 욱신거려서. 그래도 내 운전 실력이 나쁘지는 않다··· 최소한 희주보다는 잘할 거다.

그렇게 박박 우긴 끝에, 결국 내가 선덜랜드 로드스터 핸들을 직접 잡기로 했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지요?”

룸 미러를 신중하게 조정하는 사이 다미가 한 번 더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별수 없다. 이 차를 내가 직접 모는 건 처음이거든.

“슈마허가 핸들 잡아도 이런 조건이면 룸 미러부터 고치지 않을까?”

긴장을 풀려고 그렇게 우스갯소리를 했더니, 다미가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껏 차분함을 되찾은 다미는, 집에 도착해서 희주 얼굴 보자마자 또 한바탕할 뻔했다. 희주가 다미 껴안고 울었거든··· 이러려고 데려오라고 한 거냐? 아니면 자기 화장품 워터프루프 성능 과시하려고?

뭐, 희주 쓰는 화장품이 좋기는 한지, 여동생의 화장은 조금도 번지지 않았다··· 잠시 후, 말끔해진 두 사람이 거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오빠, 신혼집은 어디다 차릴 거야?”

신혼집이라. 그 전에 결혼식이 먼저 아닐까.

“타인위어에 차리면 다미 언니가 리미트리스를 챙기기 힘들 테고, 서울이면 오빠 구단주 업무에 지장이 생길 텐데···.”

희주가 나와 다미 눈치를 살살 살피기 시작했다. 덕분에 속셈을 알았다. 구단주인 내가 자리를 자주 비우면 자연스럽게 구단 권력을 승계할 속셈이란 걸.

‘내가 누구? 선덜랜드 축구단 오너 동생!’ 같은 소리를 하면서. 여자 속은 어려워도 여동생의 속내를 파악하는 정도는 조금도 어렵지 않다.

“뭘 그런 걸 묻고 있어. 당연하게도 답은 ‘둘 다’지.”

“즉, 신혼 초부터 롱디하시겠다는 뜻이군요. 다미 언니는 괜찮아요?”

그러자 다미가 재빨리 대답했다.

“제가 아예 타인위어에 계속 와 있는 건 좀 그렇지만, 며칠 자리 비우고 왔다 갔다 하는 정도는 문제없어요. 요즘엔 화상회의도 잘되어 있고, 전자결재도 많으니까요.”

나도 거들었다.

“지금의 선덜랜드는, 구단주가 모든 업무에 직접 관여해야 할 정도로 형편없는 구단이 아니니까. 아예 서울에 가 있는 건 그렇지만, 며칠 비우는 정도는 문제없겠지.”

그러자 다미가 배시시 웃었다.

“그렇지만 부모님께 인사드리셔야 하니까, 처음 한 번은 돌아오셔야 해요. 대신 제가 매주 올게요. 리미트리스는 주 5일제니까··· 주말마다 언제든지 영국에 와 있을 수 있어요!”

“괜찮겠어? 비행기 자주 타면 힘들 텐데···.”

“그렇지만··· 사장님을 자주 못 뵙는 게 훨씬 힘든걸요.”

내가 한국에 가는 선택지는 없는 거야?

“장거리 비행은 관절에 좋지 못하다고 들었어요. 그러다 무릎에 물이 차서 은퇴하는 선수도 있다고 하니까···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주말마다 제가 움직일게요.”

다미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내 무릎에 향했다. 이런 표정을 한 다미는, 대체로 타협을 모르는 경향이 있다. 아무래도 나는, 양가 부모님 찾아뵐 때 말고는 한국 못 갈 모양이다.

하지만 잠시 후, 다미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음··· 한국도 영국도 민주주의 국가니까 다수결이 적용될 때는 조금 배려해 주셨으면 해요.”

“다수결?”

아무 생각 없이 되묻자, 다미가 목까지 빨갛게 변한 고개를 푹 숙였다.

“저··· 그러니까 제가 2인분인 동안에···.”

“그러면 당연히 내가 날아가야지.”

그러자 희주 얼굴이 구겨졌다.

“에휴, 내가 이꼴 보려고 밀어줬나 자괴감 들고 괴롭다 진짜. 다미 언니! 키 좀 줘 볼래요?”

“무슨··· 키요?”

“제가 잡아 드린 로열 스위트룸 키요. 내가 떠나야지.”

“네? 그, 그게···.”

다시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한 다미를 살짝 품에 끌어당긴 다음, 나는 여유 있는 목소리로 대신 대답했다.

“멀리 안 나간다.”

* * *

한편, 선덜랜드 구단주가 곧 결혼한다는 소식은, 의외로 빠르게 뉴캐슬까지 전해졌다. 축구계 인사들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투자업계의 소식이 빨랐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리미트리스 입장에서는 사장과 부사장이 서로 결혼하는 마당이라, 소문이 안 날래야 안 날 수 없었던 것이다.

“기어이 트레블까지 해버린 ‘그 팀’이 대체 이번엔 무슨 짓을 벌일지 궁금했는데, 구단주 결혼이라니··· 한숨 돌렸네요.”

회장 비서 사만다의 목소리는, 최근 1년을 통틀어 가장 밝았다. 지난 1년간, 뉴캐슬은 선덜랜드 상대로 지고, 지고, 또 졌기 때문이다.

참가하는 모든 대회에서 성적으로 밀렸고, 상대전적 완패라는 추가타를 먹었으며, 급기야 더비 라이벌의 트레블 달성으로 확인사살까지 당해야 했다.

억눌린 1년을 생각하면 눈물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올 시즌엔 선덜랜드 구단주가 신혼이라 좀 덜 빡빡하겠구나 생각하니 저절로 목소리가 올라간다. 귓가에는 환희의 송가가 들리는 것 같다.

정작 뉴캐슬 회장 나지프는 별로 기쁘지 않았는지, 심각한 얼굴로 줄곧 모니터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회장님, 뭐 하세요?”

“결혼 선물 고릅니다.”

사만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회장님. 물론 본업 관련해서는 같은 업계 사람이라 친분이 있으신 거 알지만, 여기선 더비 라이벌이라고요. 결혼 선물이라니 그 무슨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그래서 보내는 겁니다. 두 사람이 행복한 신혼 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요. 좀 더 욕심내자면, 그냥 신혼이나 푹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발끈한 나지프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일단 투자회사 관계자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텐데, 저는 축구단도 운영하니까 두 배로 신경이 쓰인단 말이죠.”

“네?”

“그동안 썬이 축구단 운영하러 타인위어에 붙어 있는 건, 투자업계에는 하나의 축복이었습니다. 물론 한국의 리미트리스 본사엔 신의 오른팔이 건재했지만, 그래도 투자의 신 본인이 자리를 비우는 건, 우리에겐 그나마 숨통이 트일 일이었죠.”

“아···.”

“그런데 이제 결혼한 투자의 신은 서울에 왔다 갔다 하겠죠. 그러다가 아예 서울에 뿌리내리고 다시 리미트리스 업무에 전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만다는, ‘그러면 선덜랜드 구단주 자리가 빕니다!’라고 대답할 만큼, 뇌가 빈 사람은 아니었다.

“···장기적으로 우린 말라 죽겠군요. 모기업이 치명적 타격을 입을 테니까요. 그럴 거라면 차라리 제발, 앞으로도 구단주 노릇이나 열심히, 성실하게 해 달라고 빌어야 하는 걸까요?”

그러자 나지프의 얼굴은 다른 쪽으로 일그러졌다.

“사만다, 정말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 경우, 신의 오른팔이 타인위어에 죽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사만다의 얼굴도, 나지프와 비슷해졌다.

그동안 사만다는, 선덜랜드 구단주 비서 이희주를 상대로도 버거운 싸움을 벌였다. 전적을 따지면 일단 사만다의 완패였지만, 그래도 내용은 나쁘지 않았다.

‘역시 투자의 신이라 불리는 사내는 여동생에게도 특별한 점이 있다.’는 정도로 넘길 수 있는 차이였다.

그런데 사만다의 상대가 신의 오른팔, 최다미로 바뀌는 순간 이야기가 아주, 아주 달라질 것이다. 졌잘싸는커녕, 모든 면에서 찍어눌릴 게 뻔하다.

사만다는 재빨리 스마트폰을 꺼냈다.

“뭐 합니까?”

“저도 결혼 축하 선물 보내려고요. 음··· 최고급 벌꿀주가 좋을 것 같네요. 그냥 오래오래 허니문이나 즐기라는 의미를 담아서요. 회장님은 뭐 고르셨어요?”

나지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슷합니다. 부부의 행복을 기원하는 보석··· 페리도트죠.”

두 사람은 미처 몰랐지만, 사람들의 선물 고르는 센스는 대체로 비슷했다. 아마도 바라는 바가 유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리미트리스의 사장-부사장은 당분간 그냥 신혼의 달콤함이나 즐겼으면’ 하는 것이 업계 종사자들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덕분에 벌꿀주는 꽤 흔한 선물이었고, 개중에는 좀 더 노골적인 물건도 섞여 있었다. 예를 들면,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장어 마늘 구이 식사권’ 같은.

식사권은 입구컷 당하긴 했다. 아직 결혼식도 안 했는데 왜들 이러냐는 선덜랜드 구단주의 핀잔도 원인이었지만···.

[식당 주소가 삼청동이네? 오빠, 이렇게 나사 풀린 사람도 투자업계에서 일할 수 있어?]

이후, 여의도로 반송한 식사권은 한국산 육쪽마늘로 바뀌어 다시 선덜랜드에 돌아왔다는 결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처럼 리미트리스가, 그리고 선덜랜드가 경영진 신혼 브레이크에 돌입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선덜랜드의 프리시즌 이벤트가, 로커 파크에서 펼쳐집니다!]

기사를 본 사만다의 비통한 절규가 뉴캐슬 회장 사무실에 울렸다.

“아, 그냥 빨리 살림이나 차리라고 좀!”

* * *

어림도 없지.

“네?”

크리그가 당황한 것처럼 보여서, 나는 재빨리 수습을 시도했다.

“아니, 정말로 은퇴 경기를 하지 않아도 괜찮겠냐는 뜻입니다.”

그러자 크리그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경기에서 팀의 트레블에 기여하며 트로피를 들었습니다. 선수로서 이 이상의 은퇴 경기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다른 경기를 더 만들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코치직 말인데···.”

그러자 크리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 팀에서 코치 크리그가 필요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 1군은 전부 저보다 기술적인 선수들이고, 전술 센스도 훨씬 낫지 않습니까?”

크리그에게도 애초에 ‘다른 팀에서 코치로 커리어를 이어나간다.’는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선덜랜드에서 코치하거나, 아니면 그냥 은퇴하는 선택이겠지.

“하지만 크리그 선수는 우리 공격진 사이에서 평이 좋던데요. 아주 잘 가르친다고요.”

종합적으로는, 바스티아노는 말할 것도 없고 베리와 터너조차 크리그보다는 훨씬 나은 스트라이커다. 이마의 숫자가 몇 배는 차이가 나니까.

단, 슈팅 기술 하나만 따로 두고 보면, 크리그가 그들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러니 크리그가 슈팅 전문 코치가 되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델랍이 스로인 전문 코치인 것처럼.

어차피 라이센스 취득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크리그가 톰슨처럼 며칠 만에 뚝딱 코치 라이센스를 가져오진 못할 테니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되겠지.

“축구와 완전히 거리를 둘 게 아니라면, 구단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코치가 아니면 앰배서더, 아니면 스카우터 자리도 괜찮겠죠. 페르난데스처럼 행정가로 일할 수도 있을 테니,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크리그를 살짝 불러 세웠다.

“그래서 은퇴식 말인데요. 로커 파크에서 하겠습니다.”

그러자 크리그가 어색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구단주님,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은퇴 경기가 필요 없습니다.”

“네, 은퇴 ‘경기’는 필요 없겠죠.”

어림도 없다니까? 어딜 그냥 가려고.

내 옆에서 희주가 실실 웃기 시작한다.

“사실, 오빠는 은퇴식 구상도 이미 준비해 놨어요. 축구 선수로서 언제나 꾸준히 노력해온 크리그 선수를 기념할 수 있는 행사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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