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태연한거짓말-3화 (3/23)

3장

이섭은 주로 주중에는 회사와 가까운 주상 복합에서 지내고 주말을 포함하여 주3일 정도는 한남동 본가로 들어갔다. 오늘 저녁은 한남동에서 수진의 가족과 같이하기로 했다.

찡찡거리는 수진을 위한 에클레어 한 박스, 그리고 차 안을 가득 채울 만큼 향이 좋은 꽃다발을 옆에 두고서 이섭은 한남동 본가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기사가 에클레어 박스를 들고 꽃다발은 이섭이 직접 들었다. 현관까지 나온 선애를 향해 큼지막한 꽃다발을 내밀었다.

“어머, 웬 거야.”

“문자 보고서요.”

“응?”

향기를 맡느라 고개를 숙였던 선애가 눈을 들었다. 선애의 문자는 아버지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기분 별로인 아버지 덕분에 어머니가 스트레스잖아요.”

“고맙다. 내 아들.”

꽃다발을 꼭 안고 있는 선애는 조금 지쳐 보였다.

태서우 부회장은 회장과 달리 움직임도 성격도 급했다. 불행히도 머리 회전은 회장보다 늦어 종종 엇박자가 났다. 그런 엇박자들이 결정적인 실책이나 실수로 잡히면 한바탕 수습을 위해 분주해지곤 했다. 물론 이번 경우처럼 크고 복잡하게 얽혀 회장에게 완전히 눈에 난 적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집안 분위기가 좋을 리가 없다. 이섭은 태서우 부회장의 불편한 심기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선애에게는 꽃을, 아버지랑 마주 앉아 밥 먹으면 체할 거 같다는 수진에게는 에클레어를 안겼다. 덕분에 식사 시간은 참석자들의 약간의 인내심에 향기롭고 달콤한 여유가 더해져 무난한 대화가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최 교수님 말이야.”

태서우가 선애를 향해 말했다. 이섭은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며 태서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집안 저녁 식사 자리에서 화제에 올릴 수 있는 최 교수는 단 한 명이다. 최일문 교수. 회장님이 TK를 시작할 때 금전적 투자는 물론 인맥과 해외 연결까지 지대한 도움을 준 최운 가문의 최일문 교수이다.

최운 가문은 현재야 TK그룹의 자산 규모에 비할 수는 없지만 10대에 걸쳐 만석꾼 집안을 이은 자산가 가문이고, 투자하고 관여하는 굵직한 사업체들 중 TK도 포함된다.

창립 시기부터 성장 동력이 필요하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구원 투수 노릇을 했던 최운 가문이 보유한 지분은 조금씩 변동 되었고, 현재는 어패럴 지분만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태시환이 보유한 지분, 태서우가 소유하거나 받을 지분, 태이섭의 지분 모두를 계산해 봤을 때, 지배 구조 개편과 승계에 있어 TK 그룹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변수를 어패럴이 쥐고 있다는 점이다.

최운 가문은 유달리 손이 귀하고 최일문 교수의 아우가 요절한 까닭에 현재 TK의 주식은 전량 최일문이 보유하고 있다.

“최일문 교수가 다음 주에 출판기념회를 한다고 하던데.”

“그래요? 다음 주 언제요? 주말?”

선애가 반색하며 답했다.

“혹시 출판기념회에 최 교수님 딸도 참석할까요?”

“뭘 그러겠어. 독일에 처박혀서 한국에 나오지를 않으려고 한다는데. 이름이 최하영이라고 했지?”

이섭의 긴장의 원인인 여자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이섭은 국을 한 번 휘이 저었다. 최일문의 무남독녀. 그러니까 최일문의 TK 주식을 고스란히 상속받을 여자. 최하영. 자연스레 집안끼리 혼사를 하면 좋겠다고 암묵적 합의는 되었으나, 당사자는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한국에 들어올 수 없다며 확고한 의사를 밝혔다.

전공이 뭐래더라. 철학? 미학? 얼어 죽을.

10대에 걸쳐 내려오는 고고한 만석꾼 부잣집 피는 그런 고상함을 추구함으로써 돈 외적인 부분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고 싶어 한다. 유전자에 새겨져 내려와 배를 곯아 본 기억이 없어서 그렇다. 또한 재산이란 투쟁해서 지켜야 겨우 제 몫이 된다는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올해는, 올해는 하며 보낸 해가 몇 번째인지 모른다. 올해 겨울에는 한국에 나온다 했으니 조금만 더 참으면 될 일이다. 이제 가을이다. 은근한 무시에 상처받은 자존심은 결혼이라는 세리머니로 두 계절 안에 회복될 테니.

“워낙 조용조용 사는 사람들이라 최 교수 집안에서 오랜만에 하는 큰 행사인데…….”

쩝 하고 못마땅하게 입맛을 다시며 태서우가 이섭을 흘긋 바라보았다.

“회장님께서 직접 가시겠다네.”

“네? 아버님이 저희랑 같이 출판기념회에 가신다고요?”

선애의 물음에 태서우는 더욱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애써 대수롭지 않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불안해하는 선애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코웃음을 쳤다.

“이번엔 나는 안 가려고.”

“아니, 왜…….”

눈을 크게 뜨고서 이유를 따지려던 선애가 입을 다물었다. 부릅뜬 눈으로 이섭과 눈이 마주쳤다. 이섭이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 회장님이 저번 일 이후 비난 여론과 사회적 이목 때문에 태서우 회장의 공식적인 대외 업무를 거진 다 금지시켰다. 최일문 교수의 출판기념회 참석 역시 회장에게 윤허받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설마…….”

차마 말하지 못하는 선애의 말을 톡 가로채면서 수진이 빠르게 물었다.

“할아버지 가실 때 누가 따라가나 신경 쓰이세요?”

“얘는.”

“그러네요. 뭐. 근데 엄마는 너무 예민해요. 아니다 너무 과민해. 그 사람에 대해서만요.”

선애가 교양 어린 눈짓으로 수진을 제지했다. 수진이 이 모든 눈치가 우습다는 듯이 경쾌하게 웃었다.

“아참, 말하니 생각나네. 오빠. 기사 봤죠? 은근히 그 인간을 돌려 까기 하는 기사인데 그 인간 사진이 아주 비열해. 사진에서 비열함으로 방점을 찍더라?”

이름을 대놓고 부르지는 못하고 그 사람 혹은 그 인간이라고 칭한 남자에 대해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멀뚱거리다가 대하 튀김을 씹어 먹는 이는 수진의 남편 승찬밖에 없었다. 승찬을 옆눈으로 쳐다보던 수진이 정말 단 디저트가 당긴다는 표정으로 와인을 마셨다. 이섭은 덤덤한 웃음을 만들었다. 올라간 입술 끝이 바르르 떨려 뺨을 두어 번 문질렀다.

설마 최일문 교수 출판기념회에 그 자식을.

태. 준. 섭.

질긴 고기를 씹듯이 이섭은 한 자 한 자 잇새에 넣어 소리를 짓눌렀다.

* * *

스크린에 일정이 빼곡하게 적힌 스케줄이 띄워졌다. 비서가 능숙한 어조로 일정을 다시 설명했다.

오후 2시, TK전자 이미지 광고 경쟁 PT. 다음 일정은 3시이다. 이동 거리를 따지면 PT에는 얼굴만 비추고 나오도록 되어 있다.

“오늘 PT에 참여하는 회사가 몇 개죠?”

비서가 급히 태블릿을 확인하고는 답했다.

“1차 제안서 제출 회사는 스물다섯 개였고, 그중 다섯 개 회사가 PT 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화면을 바꾸자 PT 대상 선정 업체명이 적힌 서류가 띄워졌다. CS는 당연히 들어가 있다.

“네, 알겠습니다. 이제 나가 보세요.”

비서가 나가자 준섭은 자리에서 일어서 창가로 붙어섰다.

CS라…….

경쟁 PT까지는 올라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거기엔 개인적인 호기심도 작용했다.

바닥에 흐트러진 카피들. 물어뜯은 입술. 간절함을 담은 눈동자.

그녀가 어떤 카피를 다시 뽑아 올지 한번 보고 싶었다. PT에 참석하려나…….

준섭이 창에 희미하게 비치는 제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조금 들떠 보인다.

어이없어.

고개를 젓고는 책상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빠르게 버튼을 누르고 암호 같은 지시를 내렸다.

“지금 올려요. 연속해서 10분 간격으로.”

정확하게 3분 후, 포털 메인에 TK 광고 공개 입찰 경쟁 PT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기업 광고 과연 누구에게. 새로운 광고계의 신데렐라 탄생?’

‘90억 물량 TK전자 기업 이미지 광고는 누구 품으로.’

‘광고계의 이변. TK 대형 광고 30년 만에 CS아닌 타 대행사로?’

TK가 기업 광고 공개 입찰 공고를 내고 3주가 지난 시점에서 처음으로 포털 메인에 기사가 실렸다.

태준섭이 CS를 보이콧하면서 TK전자 기업 광고에 브레이크가 걸리자 내부에서는 태준섭과 태서우-태이섭의 사이에서 눈치를 보느라 숨을 죽였다. 원칙대로 하라는 송백재 태 회장의 전갈 이후 TK전자 이미지 광고는 공개 입찰 형태로 공고가 났다.

태준섭이 CS를 초청 대상에서도 제외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CS를 참여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선택된 것이었다. 하지만 TK의 파격적인 결정은 국내 언론 어디에서도 제대로 기사화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홍보성 단신 기사 정도만 올랐다가 그나마도 포털에서 내려졌다.

CS애드에 미칠 영향, 그로 인해 태이섭이 받을 부정적 영향을 막기 위해서 부지런히 손을 쓴 까닭이었다. 준섭은 모르는 척 내버려 두었다. 1차 서류 심사 통과자로 경쟁 PT 대상자가 된 회사가 어디인지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심사를 맡을 회사 임원들 선정 역시 준섭에게 따로이 보고하는 자도 없었고 보고하라 지시하지도 않았다.

심사 일정과 심사단 구성 완료 같은 두루뭉술한 보고만 받고서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사안을 검토했다. 그러는 동안 느긋하게 앉아 태이섭이 부지런히 뛰며 수습하는 모양을 한 번씩 구경하였다. 심사단 명단을 보며 약간의 실소를 했을 뿐이다.

높은 나무에 올라가 빈둥거리며 낮잠을 자다가 제일 위, 가장 잘 익은 과일을 툭툭 따고서 아래에서 장대를 들고 선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기분으로, 준섭은 방금 올라온 기사를 하나씩 클릭했다.

기사들의 맥락은 하나였다. 이번 광고 입찰은 TK가 사돈 회사에 일감을 몰아준다는 비난 여론을 의식한 상징적 입찰이라고 평가했다. 공개 입찰의 배경에는 최근 그룹의 구태를 타파하고 혁신과 투명성을 강화하겠다고 공언하는 혁신전략기획본부 태준섭 상무가 있다고 했다.

일부 대형 광고사는 공개 입찰을 알고서도 참여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경쟁사 제품을 맡고 있다는 업계 관례뿐 아니라, 사돈 회사인 대기업에 일감을 몰아주지 않으려 완전 공개 입찰을 하는 것인데 대기업이 될 확률이 미미하다는 이유였다. CS가 공개 PT 대상자가 된 것은 그런 면에서 의외지만 오히려 명쾌한 승부를 가리겠다, 사돈 회사와 밀월을 깔끔하게 끝내겠다는 TK의 의도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CS와 밀월을 끝낸다라…….”

태준섭은 목을 길게 뒤로 젖혔다. 밀월, 꿀과 달콤함이 흐르는 신혼 기간. CS와 신혼은 이미 예전에 태서희가 팔목을 그었을 때 끝내야 했다. 태이섭이 무슨 수를 쓰든, 이렇게까지 기사가 도배가 되었는데 TK가 CS를 선택하는 부담을 질 수는 없을 것이다.

* * *

준섭은 백반 차림 정식을 천천히 꼭꼭 씹어 먹었다. PT 장소는 건너편 호텔 홀이었다. 산업통상자원부 차관보는 TK의 개혁 의지를 치하했다.

“이번 TK 공개 입찰에 중소 벤처 광고 대행사까지 다 기회가 열려 있었다면서요.”

“네, 그렇습니다. 1차 제안서를 제출한 광고 대행사 중 열 개는 5인 이하 광고 대행사였습니다. 그중 두 개가 2차 경쟁 PT 대상자로 선정되었고 나머지 두 개 역시 중소형 광고 대행사입니다.”

차관보는 중소형과 벤처 기업 후보가 대다수라는 말에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CS를 제외한 PT 대상 회사를 턱없이 약한 후보로 만든 태이섭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다.

“이런 시도가 기업 생태계에 긍정적인 효과를 차례로 가져올 겁니다. 과감한 결정을 내려 줘서 고맙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차관보는 뒤이어 TK의 공개 입찰은 정부의 혁신 드라이브와 발맞추는 행보라고 강조하면서 흡족함을 감추지 않았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와야죠. 정부 혁신 드라이브에 도움이 된다니 영광입니다.”

대통령 비서실과 직통 라인인 차관보의 말은 곧 비서실의 뜻이었다. CS에게 일감을 몰아줬던 TK가 중소 업체에게 대규모 광고 물량을 내어놓기로 한 결정에 청와대가 기뻐한다는 말이다. 경쟁 입찰에서도 CS로 광고를 주려고 했던 태이섭의 안이한 계획에 브레이크가 걸려야 한다. 동행한 김세한 전무의 얼굴이 안쓰러울 만큼 퍼렇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준섭이 김세한 전무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김세한은 양해를 구하며 화장실을 간다고 했다. 뒷모습을 보자니 이미 손은 핸드폰 버튼을 누르고 있다. 몹시도 급하겠지. 입찰에서 CS가 결정되면 불어닥칠 후폭풍을 보고하느라 죽을 맛일 게다. 태이섭이 수화기 너머에서 어떤 소리를 질러 대고 있을지 궁금하다.

“식사는 입에 맞으셨습니까?”

준섭이 정중하게 여쭈었다.

“네, 여기 깔끔하게 요리를 잘하네요.”

“다행입니다.”

태이섭이 엿을 먹는 동안 꼭꼭 씹어 삼킨 2만 3천 원짜리 바싹불고기 백반 정식은 꿀맛이었다.

* * *

포털의 파급력은 예상대로 위대했다. PT 장소인 호텔 앞에 늘어선 기자들을 보고는 준섭이 눈을 찡그렸다.

“돌아가.”

“네.”

우식이 대답을 하고는 재빠르게 차 방향을 바꾸었다. 한 바퀴 빙 둘러 호텔 후문 쪽 지하 주차장으로 진입하면서 은근슬쩍 물었다.

“왜 그렇게 싫어하십니까.”

“뭘 말이야.”

“언론 노출이요. 너무 피하시니까 가져다 쓰는 기사 내용이나 사진이나…….”

우식이 말끝을 흐렸다. 준섭은 우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다. 교묘하게 깎아내리고 이미지를 흠집 내는 기사와 사진들이 정말 안타깝다는 듯이 우식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그 사진은 너무 이사님, 아니, 본부장님과 다르게 나왔습니다.”

“사진 잘 나와 뭐 하게. 나 배우할까?”

“아. 아니지만, 그렇지만, 배우하셔도 좋을 만큼.”

준섭이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우식아. 너 말주변 많이 늘었다. 그런데 말야.”

“네.”

“내가 너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 어눌한 말주변이거든.”

“아, 죄, 죄송합니다.”

우식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모자란 말주변이 매력이라고. 아부 떨지 마.”

준섭이 차 문을 달칵 열었다. 우식이 급히 운전석에서 내려 뒷좌석 문 앞으로 돌아왔다. 준섭이 내리자 문을 닫고는 할 말이 더 있는 듯 우물쭈물 서 있었다.

“응?”

“본부장님.”

“응.”

“아부 아닙니다. 지금 저기 몰려 있는 기자들이 본부장님 사진을 찍으면 발로 찍지 않는 이상 그 사진보다는 낫고, 좀 잘 찍으면 배우보다 훨씬.”

우식의 목소리에 억울함이 배어났다. 준섭이 우식의 어깨를 툭 두드리고 걸어갔다.

경쟁 PT 장소인 홀에 가기 전, 준섭은 20층에 있는 호텔 스위트룸으로 들어섰다. 경쟁 PT 대상자들이 제출한 1차 서류를 가지고 오라 일러두었다. 여태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았던 요청이 당황스러웠는지 박 이사가 바싹 긴장하며 데스크 옆에 서 있었다.

준섭이 서류 점수표를 옆에 두고서 빠르게 광고 제안서 PPT를 넘겼다. 제출 서류는 각 회사당 열 장씩이다. 회사 설명이나 기존 프로젝트 제출 서류는 확인하지 않았다. 50장을 훑어보고 다시 돌아가 CS애드 PPT 하드커버를 펼쳤다. 메인 카피를 한 번 더 읽고서 준섭이 고개를 들었다.

“박 이사님.”

“네.”

“CS, 저번 미팅보다 발전적인 내용입니까?”

“그래도 상당히 다르게…….”

박 이사가 목대가 벌겋게 달아올라 시선을 아래로 낮췄다. 준섭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CS 직원이 그날 들고 왔던 카피. 그게 훨씬 나았는데요. 그런데 믿을 수 없는 결론을 들고 왔네요.”

프린트물 위로 손가락을 툭툭 두드리며 준섭이 물었다.

“CS 담당 AE 안 갈렸습니까? 내가 무능하다고 했을 텐데. 보고 싶지 않다고도 했고.”

“저, 그게…….”

답을 못하는 박 이사를 두고서 준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된다. 첫 번째가 CS였다.

한 방울만 더해지면 와르르 물을 쏟아 낼 물병처럼 여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바닥에 붙은 종이를 집어내는 검지 손톱 끝이 붉어졌다. 입술만 물어뜯으며 어지간히 잘 참는구나 싶었다.

여자 대신 파일을 정리해 주고 또 떨어뜨린 붉은 플러스펜을 쥐었다. 준섭의 손에서 펜을 가져가기 위해 여자가 손에 힘을 줄 때마다, 그 힘이 손바닥을 통해 몸으로 흡수될 때마다 머리끝이 찌릿해졌다. 펜이 아니라 블라우스 소매 아래로 드러난 가느다란 팔목을 쥐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전투력을 비웃자 준섭을 똑바로 쳐다보며 여자가 물었다.

‘이름 뭐예요?’

느닷없는 직구에 명치를 맞는 듯 얼얼했다. 붉은 빛이 희미하게 도는 커다란 갈색 눈동자가 준섭을 향했다. 빨개진 눈가와 마치 지금 거절당하면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눈동자를 하고서 준섭의 입술만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그 눈을, 볼 수 있으려나.

브랜드에 스토리를 담겠다는 네 카피는 어디다 버리고 이런 허접쓰레기를 또 들고왔나, 물어볼까.

홀로 향하는 걸음이 빨라진다.

경쟁 PT가 진행되는 홀에 수행원 없이 혼자 들어서는 남자가 태준섭이라고 생각하는 기자는 한 명도 없었다. 박 이사는 빠른 준섭의 걸음에 못 미쳐 숨을 몰아쉬며 저만치서 따라올 뿐이었다. 신분증 확인 없이 깍듯한 인사를 하고 문을 열어 주는 경호원을 보고서야 뒤늦게 셔터를 눌렀지만 뒷모습 반쪽이 전부였다. 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홀 내부를 가로지르며 준섭은 사람들을 빠르게 훑었다. 없다. 다시 볼 필요도 없을 만큼 그 어깨, 그 머릿결, 그 목덜미를 가진 여자는 없다. 미팅과 다르게 여러 명의 제작팀이 왔지만 연우경은 없다.

어디 잠시 자리를 비운 걸까.

웅성거리는 소음과 이내 이어지는 인사들에 건성으로 반응하며 준섭은 열리는 문만 바라보았다. PT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들으나 마나 한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되었다. 불 꺼진 홀에서 푸르거나 붉거나 흰, 스크린 불빛을 받으며 준섭은 줄곧 기다렸다. 문 틈에서 기다란 빛이 보이기를, 문이 열리면 발목이 가늘고 종아리가 날씬하고 허리선이 날렵한 여자의 실루엣이 보이기를.

“혹시…… 지시하실 사항이 있으십니까.”

준섭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박 이사가 귀에 대고 나지막이 물었다. 준섭은 검게 입을 닫고 있는 입구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 * *

“굿모닝! 오늘 날씨 겁내 좋다. 오늘 우리 어디 야외 테라스 이런 데서 점심 먹을까?”

커다란 가방을 책상 위에 던져두며 소운이 인사했다.

소운과 우경의 인연은 대학 1학년 때 홍보 회사 아르바이트를 할 때부터였다.

우경이 CS애드로 회사를 옮길 무렵 소운은 ‘에이블’이라는 작은 홍보 회사를 설립했다. 세 명으로 시작한 회사가 이제는 두 배로 직원이 늘어 여섯 명이다. 일감도 늘고 직원도 늘었지만, 소규모 홍보 회사는 워낙 경기를 타는 직종이라 홍보 단가를 원하는 수준만큼 받기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출혈 경쟁을 하는 업체들 사이에서 에이블 재정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우경도 수임하는 홍보 수익의 일정 비율을 받기로 계약하고 입사했으나 이번 달 예상 금액은 CS 월급에 한참 모자랐다.

“찾았다! 브런치 특가. 통신사 카드 행사로 3인 이상 40% 할인이다. 오오. 선착순 열 팀 디저트 공짜. 잠시만 잠시만!”

우다다닥 키보드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소운이 “예이!” 하고 주먹을 쥐었다.

“사장님, 성공?”

현아가 커피를 건배하 듯 들어올렸다.

“현아야. 나 존경해. 열 팀 안에 들었습니다 여러부운. 무려 크레페와 아이스크림입니다. 근데 이런 거 공개 안 하고 척 쏴야 사장 폼이 나는데 그치. 자세가 안 나오네.”

소운이 무안하게 웃고는 우경을 향해 말했다.

“우경아. 뭔가 조짐이 좋지 않니? 점심 먹고 나면, 대기업 홍보 문의가 짠 하고 들어 오는 거지.”

우경이 “그럼요. 올 겁니다!” 하고 힘주어 말하며 파이팅하는 자세를 취했다. 소운은 본디 유쾌한 성격이고 긍정 에너지가 넘치지만 요즘 들어 자꾸 우울해지는 우경을 챙기려 조금 더 오버하고 있다. 나이 많은 큰언니처럼, 우경에겐 소운이 모든 걸 다 내보이고 흐트러진 모양새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 그럼 행운의 브런치 먹고 나면 짠 하고 TK가 막 홍보일 던져 주고 그러는 건가요? 생각만 해도 좋네. TK, 뭐라도 한 조각 던져 주면 우리는 갑자기 업계 순위 쭉 올라가고 홍보 문의 막 쏟아지고, 대출금도 갚고요. 저도 연봉 짱짱 올라가고, 그럼 집에서 독립도 해야지.”

“TK는 무슨.”

소운이 우경의 눈치를 살피며 현아에게 말했다.

“왜요. 연우경 팀장님이랑 사장님 전에 피플앤미디어 있을 때 TK 하셨잖아요. 연 팀장님은 TK 전담이었다고 하던데. 혹시 알아요? 연 팀장님 찾아 TK에서 줄 수도 있죠. 꺄악, 그럼 저 회사 근처 오피스텔로 독립합니다. 출퇴근 세 시간 미치겠어요. 오피스텔 가면 한 시간 더 자고 화장도 곱게 먹고 옷도 샬랄라. 그럼 남자도 생기고.”

“현아야, 너 머리 흔들다가 우유병 떨어진다.”

우유를 팔아 남자에게 구애를 받는 상상의 단계를 거듭하는 동화 속 처녀처럼, 소운이 우스꽝스럽게 머리를 흔들었다.

“이렇게 말이에요?”

아니 아니 싫어요, 남자의 구애에 거절하는 모습을 흉내 내는 현아를 보며 우경도 현아도 웃음을 터뜨렸다.

TK라니…….

우경의 시선이 모니터 날짜를, 이어 포털에 올라오는 실시간 기사를 더듬었다. 오늘이 TK기업 이미지 광고 공개 PT 날이다.

태준섭, 오만한 그 남자도 참석하겠지. 이번 카피는 무어라 평할까.

‘그렇게 비를 맞고서 안 춥습니까.’

입가에 스쳤던 건 비웃음이었다. 우경은 비를 맞고 있는지도 몰랐다. 흠뻑 젖은 블라우스를 빗줄기보다 더 차가운 시선이 훑어 내렸다. 그 시선에 목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심장은 뜨거워지는데 시선이 닿는 블라우스 속, 두 겹의 속옷 아래로 살갗이 곤두섰다.

우경은 소슬한 한기를 느끼며 팔을 문질렀다. 차가운 빗줄기를 기억하는 몸 때문이다. 그 남자 때문이 아니다.

* * *

새끼. 엿을 이렇게 먹이나.

이섭은 김 전무의 전화를 받고서 이를 악물었다. 청와대가 주목하고 있다니, 게임 셋이다. 적어도 TK전자 기업 이미지 광고 건은 태준섭에게 완벽히 놀아났다. 일부러 경쟁 PT 후보에 올린 회사까지 약체로 골랐다. 이견 없이 CS애드로 넘길 수 있었는데 태준섭이 VIP라인을 교묘하게 자극했다.

CS애드의 TK 광고 독점을 막는 동시에 마진률이 제일 높은 기업 이미지 광고에 직접 칼을 대면서 CS애드-태서우-태이섭으로 이어지는 은밀한 비자금 거래에 태준섭이 경고장을 날린 것이다.

“선빵을 날리셨겠다…….”

이섭이 TK전자 기업 광고 수주에 대해 떠들어 대는 기사 화면을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내렸다. 데스크 위에 올려 둔 봉투를 뒤집자 사진 서너 장, 이력서와 USB가 봉투 속에서 떨어졌다. USB를 꽂고, 비밀번호가 걸린 폴더를 열고서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화면 속에 남자는 뒷모습만 보인다. 펜을 건네고 떨어진 종이들을 무릎을 굽혀 주워 준다. CCTV 화면 속 여자의 얼굴과 이목구비는 오래된 영화 장면처럼 흐릿하다. 이섭은 책상 위에 흐트러진 사진을 가지런히 놓으며 화면 속 여자와 사진을 번갈아 보았다. 증명사진만 봐서는 몸집이 작을 것 같았는데 남자와 마주 보고 서 있는 여자는 예상보다 키가 더 크고, 잘록한 허리에 팔다리가 가늘고 길어 보인다.

이섭은 화면을 다시 거꾸로 돌려 재생시킨다. 바닥에 무릎을 꿇다시피 앉은 여자와 마주 앉은 준섭이 바싹 가까워졌다. 여자의 몸이 준섭을 향해 기울어졌다가 멀어진다. 이섭은 화면을 앞으로 넘기고 정지버튼을 눌렀다. 준섭의 등에 가려져 있던 여자의 손과 준섭의 손이 보인다. 무언가를 같이 잡고 있다. 여자가 당기면 남자가 힘을 주어 도로 여자가 끌려오게 만든다. 이섭의 눈이 가늘어진다.

“뭐지? 설마 펜?”

처음 준섭이 주워 준 펜이다.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태준섭, 여자와 이런 장난질도 하나.”

태준섭의 손을 잡고 바닥에서 일어선 여자가 무언가 말을 한다. 선명하지 않은 화면으로도 여자의 간절함이 느껴진다. 등만 보이는 준섭의 망설임을 여자는 몰라도 이섭은 안다.

“한눈에 반하셨다……?”

화면을 내리고서 이섭은 깍지 낀 양손으로 머리 뒤를 받쳤다. 등받이에 몸을 묻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의자를 작게 회전시켰다. 그러다 한 손을 뻗어 여자의 사진을 집어 올렸다. 팔을 높이 올려 사진을 허공에 띄우고 올려다보았다.

확대된 증명사진 속 여자의 눈, 코, 입. 그리고 목덜미……. 결이 좋고 숱이 많은 갈색 머리칼을 보다가 머리색과 비슷한 눈동자를 보았다. 사진으로는 차가워 보이는 얼굴인데 화면 속 여자는 이상하게도 이섭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준섭을 간절하게 바라보던 여자의 눈빛은 흐린 화면에서도 명료하게 전달되었다.

풍성한 머리칼이 시트 위에서 헝클어지고, 어딘가 묘하게 색기가 흐르는 입술이 벌어지고 커다란 갈색 눈동자에 열기를 담고서 올려다본다면……. 어쩐지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다.

비를 맞고 준섭을 기다렸다고 했던가.

이중 스케줄 굴리느라 1분 1초가 아까운 새끼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종이 쪼가리를 줍고 펜을 들고 장난질을 치고 머뭇머뭇 갈 길을 못 갔는데, 그 여자가 비를 맞고 기다리고 있었다니 환장했겠네.

연우경.

이력서에 적힌 이름을 한 번 더 읽어 보았다. 연우경은 태준섭의 발목을 걸어 자빠뜨릴 수 있는 훌륭한 덫이 될 수 있다. 이섭의 예감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 * *

송백재 호출은 예상하지 못한 시간이었다. 조간 회의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기다리고 서 있던 비서실장이 이섭에게 귀엣말로 송백재 호출을 전했다. 이 시간에 예고없는 호출이라면 독대를 뜻한다. 급한 사안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 이섭에게만 조용히 일러둘 말이 있다는 뜻이다. 이섭은 조금 상기된 얼굴로 차에 올랐다.

최 교수님의 출판기념회가 오늘 몇 시라고 했더라.

최하영은 사진으로만 흘끗 보았다. 최하영은 사실 이섭에게는 이름도 중요하지 않았다. 최지분이라고 해도 좋았을 것이다. 오로지 TK어패럴 지분 5%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취향이냐고 묻느냐면 단연코 ‘노’다. 여성스러움을 말려 버린 외모였다. 지적이라고 입력해 두는 편이 나아서 ‘지적인 외모의 최지분 영애’ 이렇게 외워 버렸다. 어이없는 건 지적인 외모의 비여성스러운 최지분 양을 위해 이섭의 이성 관계는 표백제에 담근 것만큼이나 순결하다는 점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고고한 만석꾼, 존경받는 학자 집안인 최운 가문의 전통은 도덕성이었다. TK그룹과 혼사를 결정하는 것도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졌다. 기력이 쇠한 최운이 세상을 뜨기 전 매일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손을 붙잡는 태 회장에게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세상을 하직해야 하는 사람이 제정신일 리가 없으며 당연하게도 그렇게까지 약해질 수가 없다. 여우 같은 태 회장의 전략이 적중했다.

최운은 유언으로 TK 집안과 후손 간의 결혼을 말했고 손 귀한 집안의 최지분 양 외에는 그 유언을 따를 수 있는 대상자가 마땅치 않았다. 집안 자체도 그렇지만 금지옥엽 무남독녀를 떠받들며 키워 온 최일문 내외의 기준은 명확했다. 부부 생활에 충실하지 못할 남자는 딸의 짝으로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최운이 숨이 넘어가기 전, “그럼요. 아버지. 성실하게 가정을 지킬 수 있는 남자라면.”이라는 단서를 붙이는 치밀함을 보였다고 한다. 아무튼 법적 효력이 있는 유언장에서도 최지분 양의 남편은 여자관계가 클린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었고, 최 교수는 그 부분을 신념처럼 챙긴다고 했다. 태서우의 여자관계까지 꼬박꼬박 최일문 귀로 들어간다는 말이 낭설은 아닐 테다.

“젠장.”

기사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소리는 입술 끝에 닿을락 말락 하다가 날숨에 묻혔다. 최운의 유언장 덕분에 태이섭은 연애 한 번 진하게 하지 못하고 이제나저제나 한양 간 서방님 기다리는 아낙처럼 홀로 수절이다.

사실 약간의 결벽과 강박 덕분에 농밀한 밤 생활을 일회성으로 즐기는 일은 맞지 않았고, 마음이 동하는 여자는 최지분과의 결혼에 혹여 걸림돌이 될까 깊어지기 전에 제 감정을 필터링하고 자체 정리를 마치곤 했다.

일단 TK 태이섭을 대하면 여자들은 단 하나의 예외 없이 어부를 잡아먹는다는 세이렌의 열망보다 열 배는 더 끈질기고 짙은 욕망을 불태운다. 물미역 같은 욕망이 발목을 칭칭 감아들어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기 전에, 주머니 칼을 꺼내야 한다. 자의 반 타의 반 수절 인생 33년이다.

이섭은 차창 밖으로 빠르게 변하는 풍경에 시선을 던졌다. 이제 더 미룰 수가 없다. 조만간 최지분 양과 혼사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를 원한다.

* * *

“태이섭 상무 왔나.”

회장이 서재 데스크에 앉은 채로 들어오라 손짓을 했다. 이섭은 실망과 당황스러움을 감추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독대가 아니었다. 회장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눈인사를 건넸다.

“태준섭 상무도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래, 내가 두 사람 다 불러 놓고 상의할 게 있어서 불렀다. 태이섭 상무가 의견을 한번 말해 봐라.”

“네? 무슨 일이신지.”

회장이 데스크 위에 둔 프린트된 기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 봐라.”

기사의 제목은 ‘TK, 어디까지 혁신인가’였다.

회장의 수족 같은 수행비서에서 이사로 파격 발탁, 단숨에 상무 승진과 더불어 그룹의 혁신전략기획실의 수장이 된 태준섭은 알고 보니 태 회장의 외손자였고, 따라서 로열패밀리의 낙하산 승진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 속에 구태와 혁신이라는 새시대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처지라는 것이다.

뒤이어 태이섭이 아닌 태준섭이 발탁된 배경에 대한 추측성 의견은 태준섭이 그간 행했던 그룹의 뒷정리와 같은 일들을 은근슬쩍 암시하며 TK의 얼굴이 부드러움이 아니라 불도저라는 점은 구태를 처단하기 위한 고육지책일는지 모른다고 끝을 맺었다.

태이섭이 익히 아는 기사였다. 물론 거기에 붙어 있는 태준섭의 사진 역시 잘 알고 있다. 태준섭의 이미지를 은근히 갉아 내기 위해 손을 쓴 기사들과 사진이다. 회장이 쯔쯔쯧 혀를 찼다.

“기사는 지 멋대로 싸질렀다치고, 이 사진이 뭐꼬. 이제 준섭이도 TK 얼굴인데 처음 낸 기사에 사진이 이 모냥이니 죄다 이 사진만 돌아다니고 있다. 아니 도대체 이 사진이 어떻게…….”

“회장님, 사진 괜찮습니다. 나쁘지 않아요.”

준섭이 웃으며 회장의 역정을 슬며시 잘랐다.

“사진만이 문제가 아니고, 온갖 말들도 돌고 있는데 손 놓고 보기만 하는 기가. 대체 TK 홍보팀은 뭐를 하고 있노?”

이섭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회사 사정이 급박하다 보니 여러 사안들 때문에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제가 미처 손쓸 틈도 없이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섭이 준섭을 향해서도 가볍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 태준섭 상무.”

회장이 츳 하고 잇새로 못마땅하다는 소리를 냈다.

“준섭이가 나이는 같지만 생일이 아홉 달이나 빨라서 형이다.”

느닷없는 지적에 이섭의 귓가가 달아올랐다.

“전에는 회사 입사도 늦고 직급으로 낮아서 그랬다치지만, 이제는 대외적으로는 서로 존대를 해라.”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섭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회장이 옆에 선 준섭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준섭이 올해 나이가 몇이고?”

“서른넷입니다.”

“그래, 둘 다 나이가 찼으니 이제 혼인도 하고.”

회장이 손을 뻗자 준섭이 재바르게 물컵을 당겨다가 주름진 손에 쥐여 주었다. 물을 길게 마시고서 역시 준섭이 내민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회장이 말했다.

“찬물도 순서가 있으니 준섭이 니가 먼저 색시를 맞아야겠다.”

목젖을 걷어 차인 것처럼 이섭은 한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 회장을 알고 있다. 굳이 생일 달을 따져 가며 뜸을 들인 이유는 최지분 양의 정략결혼 대상자가 준섭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함이다.

그제야 태준섭의 차림새가 눈에 들어온다. 고만고만하게 평범한 슈트 차림이었는데 오늘따라 타이부터 와이셔츠, 건장한 몸을 완벽히 감싸 주는 핏의 브리오니 슈트까지 신경 써서 차려입었다. 그러니까 오늘 최일문 교수 출판기념회의 동행자는 태준섭이다.

이섭은 억지로 마른침을 삼키고 화사한 미소를 얼굴에 띠고서 말했다.

“실은 회장님께 홍보 관련해서 보고드리려 했습니다. 안 그래도 태준섭 상무 이미지 관리를 위해 전담팀을 조용히 꾸릴까 합니다.”

“괜히 티 나게 전담팀이다 뭐다 하면 말만 더 생기지 않겠나.”

“네, 회장님. 제가 연예인도 아니고 이미지 관리해서 뭐 하겠습니까. 저는 일만 제대로 하면 됩니다.”

준섭이 회장에게 하는 말을 자르듯이 이섭이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외부도 그렇지만 사내에서도 워낙 관심들이 많으니까요. 태준섭 상무에 대해서는 무척 조심스럽습니다. 늦어진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회장님 말씀대로 회사의 얼굴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관리는 회사 차원에서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태준섭 상무 관리는 기존 홍보팀 가동 방식과 다르게 최대한 조용히 자연스럽게 그렇지만 효율적으로 움직일 생각입니다.”

“그래? 태이섭 상무 말하는 걸 보니 뭔가 생각이 있구나.”

“물색한 인재도 있습니다. 확실한 방향으로 진행되면 곧 따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역시, 태이섭 상무는 내 마음을 한발 앞서서 잘 알고 있다. 내 너만 믿는다.”

회장이 눈이 가늘어지며 흡족한 웃음을 보였다. 준섭은 이섭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비딱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태이섭 상무.”

준섭이 데스크 위 사진과 이섭을 번갈아 보더니 매혹적인 저음으로 말했다.

“실은, 난 이 사진도 꽤 좋았습니다.”

이섭 역시 준섭만 알아챌 수 있도록 맘껏 빈정거렸다.

“이번엔 이 정도로 좋지 않을 겁니다. 몹시 마음에 드실 겁니다.”

“기대할게요.”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준섭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이섭은 결코 준섭이 상상할 수 없는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선비 같은 웃음을 돌려주었다. 이제 게임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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