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태연한거짓말-11화 (11/23)

11장

늦잠을 맘껏 자도 좋을 일요일 오전이다. 낑낑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침대 위로 뚫린 창을 통해 햇살이 쏟아졌다. 우경이 잠이 덜 깬 눈을 비볐다. 어제 커튼을 닫고 잤을 텐데……. 부신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켜 앉자 백설이가 침대 아래에서 앞발을 들어 올렸다.

“안 돼. 그럼 다리 아퍼. 무릎 아야아야 해.”

우경은 둔한 손을 뻗어 백설이를 안아 침대 위로 올렸다. 그러고 보니 방문도 열려 있다. 엄마가 들어와서 커튼을 열어 놓고 방문도 열고 나가신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9시 50분이었다. 일어나긴 해야 했다.

“백설아, 언니 완전 늦잠 잤네.”

우경은 흐트러진 머리를 묶고 팔을 쭉 위로 올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주방으로 나갔다. 식탁 위엔 동그란 접시와 당근 주스가 놓여 있다. 사과 두 쪽과 삶은 달걀, 토스트 한 쪽과 딸기잼이 아침 메뉴였다. 싱크에서 손만 씻고 당근 주스를 마시며 접시 아래로 눌러져 있던 쪽지를 읽었다.

[우경, 엄마 아빠랑 운동 삼아 수목원 간다. 달걀 꼭 먹어. 너 좋아하는 반숙이다.]

‘달걀’과 ‘반숙’에 밑줄을 쫙쫙 그어 두었다. 두 분이 하는 운동이라면 주로 아파트 단지 한 바퀴를 도는 건데 오늘은 일찍부터 서둘러 경기도 근교에 있는 수목원까지 가신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 엄마가 일요일 수목원 갈 건데 같이 갈래, 하고 물어봤던 게 생각났다. 혹시 전화라도 하셨나 싶어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문자가 한 통 들어와 있었다. 우경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확인하면 전화 주세요.]

태준섭이었다. 수신은 8시 57분. 가슴이 파도라도 삼킨 것처럼 울렁거렸다. 액정의 초록색 수화기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움찔거리며 배회했다. 우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여기서 키스라도 할래요?’

금요일 밤 물음이 떠올랐다. 재빠르게 퇴근하라던 경고도.

이 남자는 도저히 우경이 감당할 수 없는 남자이다. 한 번 말리기 시작하면 끝을 볼 것만 같았다.

이쯤에서 그만.

고개를 젓다가 끄응, 소리가 나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내내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백설이가 앞발을 들어 우경이 앉아 있는 의자에 걸쳤다.

“백설이, 엄마가 백설이 혼자 두고 가 버렸어? 우웅, 어떡해. 언니랑 같이 산책 가야겠다.”

우경이 포크로 사과 한 쪽을 조그맣게 썰어 내어 얌전하게 앉아 있는 백설에게 내밀었다. 사각사각 씹는 소리를 들으며 우경도 사과를 베어 물었다. 풋사과의 새콤한 맛이 입속 가득 퍼지자 저절로 눈이 감긴다.

엄마가 강조 표시까지 한 달걀 껍데기를 벗겨 내고 흰자를 조금 떼어 내 백설이를 주고 반숙으로 잘 익은 노른자에 소금을 콕 찍었다. 달걀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핸드폰으로 습관처럼 포털 메인을 훑었다.

응? 우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자에 대한 기사인데 제목이 조금 신경이 쓰였다. 메인에 띄워진 기사를 클릭하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에이블 대표 소운이었다.

“네, 대표님.”

- 응, 응.

“우리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했죠?”

- 응, 그렇지. 근데 너 기사 확인했어?

“네?”

- M신문 메인 기사 확인해 봐.

우경이 클릭하려던 기사였다.

“TK전자 기사죠? 안 그래도 제목만 보고 지금 확인하려던 참이었어요. 왜요? 안 좋은 내용이에요?”

- 음……. 돌려 까기?

“아.”

- 반도체 현장 기사 아직 안 냈지? 왜?

“내부적으로 방향과 시기를 조율하느라고.”

반도체는 TK 정통성의 상징과도 같았다. 태준섭이 전면으로 부각되는 기사에는 반발이 심하다는 내용은 삼키고 우경은 말을 얼버무렸다.

- 확인하고서 이야기하자.

소운이 전화를 먼저 끊었다. 기사를 클릭하는 우경의 손이 조금 떨렸다. 한 줄 한 줄 읽어 내리는 동안 얼굴이 굳어졌다. TK전자 반도체 이슈에 대한 비판, 태준섭에 대한 비아냥이 고루 섞인 기사였다.

우경이 핸드폰 문자를 다시 열었다.

혹시 이 기사 때문에 연락한 걸까. 태준섭의 문자를 읽고서 버튼을 누르려는데 벨이 울렸다.

“네, 본부장님.”

답이 없어 우경은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수신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이런……. 우경이 이마를 짚었다. 번호는 태준섭이 아니라 태이섭 상무였다.

“죄송합니다. 상무님.”

- 아니에요. 태준섭 상무 전화 기다리고 있었나 봐요.

“그런 건 아닙니다. 연락드리려던 참이어서…….”

- 무슨 일로?

우경이 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 비밀입니까? 둘이 비밀 있어요?

이섭의 어조에 불쾌감이 배어났다.

“죄송합니다. 그런 건 아닌데…….”

재갈을 물려 놓고 싶다던 준섭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경은 속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섭이 얕게 웃었다.

- 농담했어요. 좀 봅시다. 기사가 하나 터졌어요. 매너 없게 일요일에 말이죠.

“네, 안 그래도 지금 읽었습니다.”

- 송백재 심기가 불편하세요.

“아……. 어떡하죠?”

- 대책 내놓아야 하는데 일요일 오전이라 임원 소집까진 그렇고 내부적으로도 수선 떠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좀 그래요. 태준섭 본부장 관련이기도 하니까……. 일단 연우경 팀장이랑 유인목 실장님 만나서 상의 좀 할까 합니다. 우경 씨, 나오려면 얼마나 걸려요?

우경이 시계를 확인하며 준비 시간과 지하철 이동 시간을 계산했다.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 시간 반 정도요.”

- 그렇게나 오래 걸려요?

오늘 하필이면 아빠 엄마가 차를 쓰셔서 운전하고 갈 수도 없다.

“죄송합니다. 회사랑 집이 거리가 좀 있습니다. 택시를 타고 가면 좀 더 줄일 수 있습…….”

- 우경 씨 집이 어디죠?

이섭이 망설임 없이 물었다.

“여기……. **동 하늘채 아파트예요.”

- 데리러 갈게요. 회사 가는 길이에요.

“네?”

우경이 크게 되묻는데, 아래에서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백설이 앞발로 우경의 다리를 긁으며 캉캉 짖기 시작했다. 우경이 아, 조용히. 쉿. 하다가 백설을 답싹 안아 무릎 위로 올렸다. 수화기 너머 웃는 소리가 들렸다.

- 백설 공주님?

“네.”

- 담에 공주님 발바닥 한번 보여 줘요. 오늘은 바쁘고……. 내비게이션으로는 20분 나옵니다. 기다릴 테니 준비되면 연락 주세요.

20분? 우경이 벽시계를 확인하며 눈을 크게 떴다.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세수, 양치, 샤워. 어떡하지…….

우경은 백설이를 내려놓고서 욕실까지 뛰어갔다.

토독 토독 운전대 위에서 검지가 까닥거리며 작은 소음을 만든다. 고개를 빼고서 창을 바라보다가 룸미러로 앞머리 모양을 바로잡고, 면도가 된 턱까지 꼼꼼히 살폈다. 통화를 마치고 정확히 28분 후,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6분 후였다.

가을이어서, 여자를 기다려 본 적이 까마득해서, 일요일 오전이 상쾌해서, 어쩌면 그 모든 이유로 이섭은 조금 들뜬 상태였다. 나올 때가 되었는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파트 통로에서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멈춰 서서 좌우로 두리번거리더니 깜박이를 켜 둔 이섭의 차를 발견했는지 빠르게 다가왔다. 차창을 열자 조금 놀라는 표정이다. 왜? 이섭이 눈을 깜박였다.

“타세요.”

조수석 문을 열면서도 우경은 약간 머뭇거렸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꾸벅하고 우경이 차 안으로 들어오자 샴푸향인지 보디워시인지 물기를 머금은 향이 확 끼쳐 들었다. 으흠, 이섭은 목을 괜스레 가다듬었다.

“상무님께서 운전하시는 줄은…….”

놀란 이유가 그거였나? 별말도 아닌데 기분이 좋아진다.

“왜요, 못 미더워요? 나 운전 잘해요.”

“아, 아닙니다.”

우경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당황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바람을 불어넣는 것처럼 이섭의 기분이 붕 뜬다. 엑셀을 밟자 그르릉 엔진 소리가 힘차다.

날씨가 화창하여 지나는 길에 늘어선 가로수가 더 선명해 보인다. 차창 너머 보이는 나뭇잎은 물이 들어 노랗기도 하고 붉기도 하다.

“단풍 들었네요. 저렇게 반반 붉게 물들기도 하나?”

이섭이 혼잣말처럼 묻자 우경이 반가운 내색을 하며 답했다.

“벚나무예요. 봄엔 온통 꽃으로 하얗거든요. 그런데 저는 가을 벚나무도 좋아요. 단풍이 넘 예쁘게 들어요.”

“오호, 벚나무였구나. 우경 씨는 올봄에 벚꽃놀이했어요?”

우경이 으응,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회사 가고 오는 길에 보긴 했어요.”

“출근길 벚꽃은 그냥 본 거고 놀이는 아니잖아요. 제대로 해야지.”

“딱히 갈 기회가 없었어요.”

“남친 없어요?”

“그러게요. 아직…….”

오디오 음악 소리가 조금 높아지고 이섭의 목소리도 조금 높아졌다.

“정말 없어요? 한 번도?”

우경이 답을 정확하게 하지 않고 웃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상무님은 벚꽃 구경도 가시고 그러세요?”

“그럼요.”

이섭이 신호에 차를 멈추고 몸을 비스듬히 돌려 우경을 보았다. 우경이 눈을 맞추고 말했다.

“좀 신기해요. 그런 것도 하시고.”

이섭이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신기하긴요. 말하면서 또 웃었다.

“여의도 전경련 회관 가는 길이요.”

아, 하면서 우경이 웃었다.

“여친이 없어서…….”

‘나도 한 번도 진하게 연애했던 여자가 없었다.’는 말은 너무 채신머리 없어 보여서 관두었다.

블루투스로 연결된 카 오디오에서 남자 가수가 부르는 팝송이 흘러나왔다.

Nobody gonna holding me back, 누구도 날 멈출 수가 없어.

자주 듣던 곡이긴 하지만 혼자 운전할 때도 노래를 따라 부른 적은 없었는데, 이섭은 저도 모르게 가사를 흥얼거렸다. 아차, 싶어 멈추고서 우경을 바라보자 우경은 편안한 미소를 띠고서 이섭의 노래에 호응하듯이 말했다.

“이 노래 저도 좋아해요.”

“오, 그래요?”

이섭은 볼륨을 조금 더 올리며 가속 페달을 밟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세 회사 근처였다. 조금 더 달렸어도 좋겠다 싶을 만큼 상쾌한 드라이브였다. 이섭이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며 물었다.

“반도체 관련 기사 자료 준비한 거 있죠?”

“아……, 네.”

이야기를 잘만 하던 여자가 조금 머뭇거렸다.

“반도체가 내부적으로 좀 복잡했죠. 투자 규모까지는 도출했다고 해도 장기 전략 방향성이나 내부 정보 유출 의심도 있고 무엇보다 산재 처리가…….”

우경이 입을 꼭 붙인 듯 답이 없었다. 쳐다보니 그제야 네에, 하고 단순한 답만 했다. 불쾌감이 훅 잽처럼 들어온다.

주차장 입구로 들어가며 이섭은 참지 못하고 빈정거렸다.

“왜요, 본부장 비서실에서 다룬 자료들은 모두 기밀이랍니까.”

“…….”

우경은 곤란한 듯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이섭의 눈치만 보았다. 회사 상무, 그것도 저를 고용한 상무에게 기밀이라 말 못 한다는 소린 할 수 없을 테고 난감하겠지.

이섭이 후진으로 차를 주차시키고는 우경을 쳐다보았다. 비딱한 눈길이었다.

“왜, 본부장이 협박이라도 했나요?”

“아닙니다.”

우경이 너무 긴장하며 답을 하자 이섭이 픽 하고 웃었다.

“진짜 뭐 있는 것처럼 그러네. 뭐 있어요?”

“아니요. 아시듯이 제가 그럴 만한 위치가 아닙니다.”

위치라……. 이섭이 되씹고는 도어록을 풀었다.

“내려요.”

우경이 고개를 조금 숙이고 문을 열었다. 이섭이 좀 더 빠르게 내려 운전석 문을 세게 닫고는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상무님.”

우경이 이섭을 부르며 쫓아갔다.

“왜요.”

돌아선 이섭이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최종 보고 라인이 나라고 분명히 말했던 걸로 아는데요?”

이섭이 걸음을 옮기자 우경은 따라가면서 설명을 이었다.

“언론사에 배포할 자료 초안은 잡았습니다. 여러 버전으로 진행했습니다. 그중 두세 개는 비워진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버전으로 언제 해야 할지 계속 조금씩 변경이 있어서…….”

엘리베이터로 연결되는 문 앞에서 이섭이 멈춰 섰다. 잔뜩 긴장한 우경을 보고 후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말하든 말든 그닥 중요할 게 없어요. 어차피 태준섭 상무가 크리티컬한 정보는 우경 씨 눈이나 귀로 안 넣어 줄 테고, 나도 그 사실을 아니까. 다만, 이런 식으로 태준섭 사람처럼 구니까 기분이 좀 상하네요.”

“상무님, 그건…….”

이섭이 갑자기 손을 뻗어 우경은 입을 다물고 상체를 반사적으로 물렸다.

“잠시만요.”

어깨 근처로 다가온 손가락이 뭔가를 집어 들었다.

“좀 신경 쓰여서.”

우경의 머리카락이었다. 덜 마른 머리를 묶을 수가 없어 풀었더니 어깨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아…….”

이섭이 친근한 표정으로 웃었다.

“급하게 나왔나 봐요.”

우경이 조금 붉어져서 웃었다.

“가시죠.”

이섭이 말하고는 갑자기 붙박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우경의 등 뒤로 시선을 던지고 서 있는 이섭의 표정이 거칠게 변했다. 이런 얼굴이 있었나 싶을 만큼 인상이 달라 보이는 눈빛이었다. 뒤를 돌아본 우경이 아, 하고서 숨을 멈췄다. 큰 걸음으로 태준섭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웬일이야.”

물은 사람은 이섭이었다. 우경은 좀 당황하면서 이섭을 올려다보았다.

집을 나서기 전에 준섭에게 전화를 했지만 두 번 다 통화 중이었다. 문자를 보내려다가 이섭의 문자를 받고서 마음이 급해 옷을 껴입고 내려갔고 차 안에서는 이섭의 시선이 불편하여 연락하지 못했다. 당연히 준섭이 먼저 회사에 나와 있는 줄 알았다. 도착해서 만나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웬일이냐는 이섭의 물음이 뜻밖이었다.

“골프 아냐?”

“전자 권 사장님이 가셨는데?”

이섭이 황당하다는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너 누구랑 골프인데, 펑크를 내?”

“그러는 태이섭 상무님이야말로 웬일이십니까.”

깍듯해서 더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리는 말투였다.

“보면 몰라? 일하러 왔잖아. 기사 터져서, 골프 간 너 대신 송백재 호출 갔다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준섭이 정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태이섭 상무님, 언제부터 내 일에 이렇게 열심이었나.”

이섭이 답을 하지 못하고 입만 벌렸다가 다물었다.

“됐고.”

준섭의 시선이 그제야 우경을 향했다. 우경은 저절로 긴장이 되어 목덜미에 자잘하게 솜털이 일어서는 기분이었다. 화를 내도 할 말이 없다. 준섭의 문자에 답도 하지 않고 여기에서 마주쳤으니……. 우경은 준섭의 입술만 쳐다보았다.

“더 자라고 전화 안 했더니…….”

뜻밖에 너무 부드러운 말투였다. 우경이 숨을 멈추었다. 준섭이 머리라도 쓰다듬을 듯 다정하게 물었다.

“회사까지 왔네요. 그렇게 걱정됐습니까? 내가 애도 아닌데.”

우경은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눈만 점점 더 크게 떴다.

준섭이 한 발 가까이 오더니 자연스레 손을 올려 우경의 어깨를 툭툭 털어 냈다. 왜 그러냐고 묻기 전에 준섭이 답했다. 시니컬한 말투였다.

“이물질이 묻어서.”

이섭이 잔뜩 약이 올라 준섭을 쳐다보았다. 이게 뭐지? 준섭이 뻔뻔하게 고개를 숙여 우경의 어깨에 대고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우경이 당황스러워하며 조금 물러섰다.

“괜, 괜찮습니다. 세탁하고 오늘 새로 입은 옷인데. 뭐 안 묻었을 텐데…….”

우경과 눈이 마주치자 준섭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이섭이 어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줬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걸 보고서……. 일부러.

우경은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려 두 사람 시선을 피해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태이섭 상무, 내 일은 내가 합니다.”

준섭이 두 사람을 남겨 두고 유리문 옆에 있는 인식기에 사원증 카드를 접촉했다. 열리는 문 사이로 준섭이 먼저 들어가고 우경이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따라 들어갔다.

“본부장님.”

우경이 불렀지만 준섭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먼저 연락드리고 여쭤 봤어야 하는데 제가…….”

엘리베이터 상향 버튼을 누르고 준섭이 그제야 우경을 쳐다보았다.

“내가 연락 달라고 부탁했을 텐데.”

“저는…….”

준섭이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올 필요 없었습니다. 몇 가지 요청만 하려고 했어요. 유 실장 회사 나온다고 했고, 그 정도는 내가 처리할 수 있기도 하고.”

우경은 준섭의 싸늘한 눈을 보면서 고개를 숙였다. 변명은 많지만 할 수가 없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요. 오늘은 잘난 그 입 닥치고 많이 반성하면 좋겠네.”

준섭이 덤덤한 얼굴로 독설을 내뱉고는 핸드폰을 들어 버튼을 눌렀다. 차 쪽으로 걸어가면서 통화를 하던 이섭이 멈춰 서더니, 호주머니에서 다른 핸드폰을 꺼내었다. 휙 뒤를 돌아다보며 이섭이 눈을 번득였다. 거리가 꽤 멀었지만 두 남자의 시선이 엘리베이터 앞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날카롭게 부딪쳤다. 준섭이 전화한 사람이 자신이 맞다는 표시로 제 핸드폰을 검지로 가리켰다.

“오지 그래? 할 말 있는데.”

이섭의 답을 듣지 않고 종료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그사이 도착해서 문이 열렸다.

“태이섭 상무와 둘이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경 씨는 집에 돌아가도 좋습니다.”

우경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있는 긴 손가락 끝을 확인했다. 집으로 가라면서 엘리베이터를 홀딩하는 이유는 타고서 올라가라는 뜻인가. 우경은 눈을 들어 준섭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가서 집으로 가지 않을 거면.”

“네.”

“올라가서 반성이나 하고 있든가.”

“……네.”

“이럴 때만 답 꼬박꼬박 잘하지. 응?”

준섭이 버튼을 누른 손을 떼고 에스코트하듯이 앞으로 오른팔을 뻗었다. 문이 닫히기 전 예의 바른 신사처럼 인사를 한 것도 같았다.

우경이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후, 준섭은 천천히 방향을 틀어 신경질을 숨기지 않으며 걸어오는 이섭을 유리문 너머로 느긋하게 응시했다.

기사가 터진 건 골프장으로 가는 길에 알았다. 준섭은 송백재의 역정을 고스란히 전화로 받아 냈다. 노친네가 한 해가 다르게 역정이 늘어 간다. 체력이 달리는 게지.

TK전자 깎아내리기는 반도체에 집중되었다. 여차하면 중국에 밀린다, 안이하고 느긋하게 구는 사이에 정보가 새고 있다, 내부 비리가 있다, 산재로 희생당하고 고통받는 직원들을 외면하는 도덕적 이슈가 있다, 늘 비슷비슷한 레퍼토리인데 뭘 그렇게까지 싶었다.

하긴, 이번엔 묘하게도 태준섭을 저격하면서 송백재를 건드리긴 했다. 태준섭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낙하산 인사에 전기본이라는 허울 좋은 기구를 두고 실상 태시환이 1인 지배를 하는 구태 중의 구태, 구시대적 경영 방식이라는 비난이었다.

태준섭이 자리와 직함과 다르게 회장의 허수아비라는 식의 대담한 비판은 내부 인사의 말을 빌어서 인용되었다. 로열패밀리라는 것도 일반 임직원은 몰랐을 만큼, 원래 회장의 가장 충직한 비서였지 않냐는 말은 회장의 개를 순화시킨 표현일 테다. 태시환을 정면 저격하는 기사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송백재의 역정 중 반도체 관련해서 왜 여태 언론 보도가 없었냐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쿡 머리를 쑤시면서 떠오른 얼굴이 있다.

반도체 관련이면 송백재의 화살이 그 여자에게 갈지도 모른다. 그렇게나 애를 쓰고 노력했는데 그리고 잘 해냈는데 이런 식으로 취급받게 두는 일은 부당하니까…….

준섭은 통화를 위한 스스로의 논리를 한 번 더 점검하고는 핸드폰 창에 여자의 이름을 띄웠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시각을 확인했다. 일요일 아침이다. 아직 단잠에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시간의 길이를 재어 보듯이 수차례 확인하고는 문자를 보냈다.

다음부턴 지루한 기다림이었다. 가슴 한구석에 두드러기라도 난 것처럼 가렵다가, 저리다가, 목까지 간질거려와 한 번씩 기침을 했다. 젠장.

여자의 연락을 기다리면서, 준섭은 눈을 감았다.

기사를 곱씹으며 배경을 여러 방향으로 추측해 보던 중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반색하며 확인했지만 유 실장이었다.

“네.”

- 지시대로 검토했습니다. 이야기 넣었고, 점심에 해당 기사 쓴 기자와 만나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송백재 다시 들어가는 길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반도체 기사가 연기된 건 실무진 책임이 아니라고 설명드려 주세요. 윗선에서 오케이 사인이 안 났다고, 다른 사람 끌어들일 필요 없이 내가 커트했다고 하셔도 됩니다.”

우경을 보호하려는 의도를 읽었는지, 유 실장이 잠시 답이 없었다.

“사실이잖아요.”

- 네.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 그리고, 저…….

준섭이 핸드폰을 떼려다 말고 다시 귀에 붙였다. 의도된 망설임에서 유 실장이 전달하고 싶은 정보가 있다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읽혔다.

“네, 듣고 있습니다.”

회장 비서실 출신 베테랑답게 유 실장은 정보를 흩뿌리는 법을 안다. 건빵 봉지 속 별사탕처럼 흩어진 정보를 주워 먹는 건 눈이 좋은 사람의 몫이다. 예외적인 일인데, 태이섭이 이 건으로 움직일 것 같다는 정보였다. 유 실장의 별사탕에 포함되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준섭은 즉각적으로 우경을 떠올렸다. 우경을 바라보던 얼빠진 모습의 이섭이 겹쳐졌다.

이 자식. 뭘 하려고.

이후론 손이 먼저 움직였다.

“권 사장님?”

- 아, 네네. 본부장님.

“부탁이 있어서 전화드립니다. 제가 좀 급해서요.”

근처 다른 클럽에서 협력사와 골프가 잡혀 있던 권 사장에게 전화해 라운딩을 넘겼다. 눈치 빠른 권 사장은 태서우에게 먼저 보고하는 악수를 두지는 않았다.

클럽하우스에 미리 도착한 권 사장이 최 의원은 아직 도착 전이라고 전화를 해 왔다. 라운딩은 못 한다 하더라도 골프 접대의 주인공에게 얼굴은 비칠까 했다. 준섭은 차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검은색 세단에서 내리는 정치인을 확인했다.

도어록을 풀고 내리려는 우식을 준섭이 저지했다.

“우식아, 잠깐.”

촉은 늘 동물처럼 좋았다. 재빠르게 몸을 숨겼지만 준섭의 눈에 이미 잡힌 후였다. 태서우의 수족 중 하나이다. 가장 은밀한 업무를 맡기는 에이스. 이를 테면 뇌물 전달 같은 업무를 믿고 맡기는 사람.

골프 접대의 주인공은 평소 모는 차가 아닌 다른 차를 몰고 왔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우식이 룸미러로 준섭을 살폈다.

“차 넘버 말이야, 렌트한 차 같은데.”

우식이 빠르게 수첩을 뒤졌다.

“최유환 의원 차종이랑 번호가 다릅니다.”

“임 부장이 왔어. 뭘 할 심산인지 뻔하긴 한데. 최 의원이랑 접촉하는지 살펴봐.”

“네.”

우식이 차에서 내리면서 호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서 앞에 두었다. 우식은 보기와 다르게 눈치가 빠르다.

“그래, 난 서울로 먼저 가야겠다.”

“네, 처리하고 보고드리겠습니다.”

준섭이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전, 우식에게서 전화가 왔다.

- 본부장님, 사진 전송했습니다.

“사이즈는?”

- 골프백입니다. 임 부장까지 야무지게 찍었습니다.

준섭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수고했다.”

준섭이 통화를 마무리하고 운전을 시작했다.

골프백 안에 꽉꽉 채운 현금을 야무지게 챙기신 최유환 의원이 지금쯤 권 사장을 만났으려나. 권 사장이 태준섭 본부장은 송백재에 급한 일이 있어 오는 길에 돌아갔다고 말하면, 자연스레 고령인 회장의 건강 문제 정도로 이해할 것이다.

최 의원, 음흉하긴. 뇌물은 태서우 부회장한테 받고, 청탁도 태서우 청탁을 봐줄 거면서 준섭을 엮어 넣었다. 최 의원은 모르는 척하겠지. 조카가 외숙부 일 부탁하는 거라 생각하고, 태서우 일이 곧 TK일이며 태준섭 일 아니겠냐. 스스로 그렇게 믿으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검찰 측에 털리게 되면 태서우는 모르는 일이 되고 반사적으로 얻을 태준섭의 이득만 강조될 테니까. 꼼짝없이 뇌물공여죄를 뒤집어 쓰게 된다.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이 바빴다. 그러면서도 핸드폰은 한 번씩 확인했다.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우경에게서 답이 없었다. 준섭을 완벽하게 거부하던 여자는 주차장에서 이섭과 마주 보고 있었다.

혹시나 하며 예상했던 그림인데도 속이 뒤집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과 귀와 코와 입, 준섭의 눈은 오로지 우경한테만 꽂혀 있었다. 이섭이 우경의 어깨로 손을 뻗는 순간 참지 못하고 튀어 나갔다.

우경이 탄 엘리베이터가 14층을 지나고 있을 때, 이섭이 유리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섭의 대포폰 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제대로 자극을 받아 독이 오른 상태이다. 아까 주차장에서 태이섭이 준섭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얼굴에 스치는 낭패감을 보고서 알았다.

태서우, 태이섭. 같이 꾸미고 있었구나.

준섭이 모르는 척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며 흘끗 돌아다보니 이섭은 급히 핸드폰을 들었다.

아마 태서우? 어쩌면 골프장으로 보냈던 에이스. 공식폰인 걸 보니 태서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섭이 공식폰으로 서우에게 보고를 하는 사이, 준섭은 이섭의 대포폰으로 전화를 건 것이다.

“태준섭, 이 번호는 어떻게 알아?”

이섭이 채 준섭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물었다.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해 숨을 조금 크게 내어 쉬는 모양이 통쾌하다.

“글쎄. 다른 번호는 통화 중이길래. 내 폰에 번호가 있더라고. 언제 저장했는지 모르겠는데?”

“너 내 뒤도 캐고 다녀?”

준섭이 빙긋 웃었다. 그럼 너를 캐지 안 캐겠니, 하는 의미를 읽었는지 이섭이 이를 악물었다.

“이런 시답잖은 2G폰 이야기는 그만하고.”

준섭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권 사장님은 라운딩 잘 하고 계실 텐데, 편히 골프 즐기시게 둬.”

“무슨 말이 하고 싶어?”

“최유환 의원. 돌아가는 꼴을 보니 얼마 안 남았잖아? 검찰이 자료 모으고 있다던데, 내가 아는 걸 부회장실에서 모르나. 이유가 뭘까. 효용 다해서 버릴 패에, 뇌물도 바르고.”

“입조심해.”

“검찰 자료에 하나 더 얹어 뇌물 공여자는 그날 같이 라운딩을 했던 TK 임원이라는 식으로 흘리겠지. 세트로 나도 묻고 싶었나 본데.”

“무슨 헛소리야.”

이섭이 멱살을 잡을 듯이 붙어 섰다.

“보험 정도로 이해할게. 나도 보험은 좋아하니까. 종류별로 다 들고 있거든.”

“양아치 새끼. 니가 지금 감히 우릴, 나와 태서우 부회장님을 겁박해?”

“겁박이라니. 관용이지.”

준섭이 이섭의 어깨에 먼지를 털어 내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들키지 마. 시시하잖아.”

준섭이 씨근덕거리는 이섭에게 핸드폰 화면을 내밀었다. 우식이 전송한 사진이다. 최 의원 트렁크로 들어가는 골프백이 참, 선명하게도 찍혔다. 주위를 살피는 태서우의 에이스 임 부장과 그 에이스가 사주한 멀끔한 직원의 얼굴까지.

“지금쯤 저 직원 자술서도 확보되었을걸?”

이섭이 입꼬리를 비딱하게 올렸다.

“태준섭, 이건 뭔지 난 도통 모르겠고.”

이섭이 평상시의 위선적인 미소를 띠고는 조근조근 말했다.

“니가 하는 구린 짓은 알아. 니가 부회장님이랑 나한테 하는 치사한 짓 말이야. 구덩이 구덩이 파헤쳐 놓고 곳곳에 덫을 치고, 곳곳을 들쑤시고 협박하고. 그래서 이 번호도 따냈어? 또 누구한테 깡패처럼 굴었길래. 불어.”

“기억을 못 하겠는데. 솔직히 몇 명인지도 기억이 안 나. 여러 차례 받은 거라서.”

“뭐?”

준섭이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나야 늘 그런 놈 아니었나. 특별히 누굴 차별해서 깡패 짓 했어야지.”

“회사 임직원들이야. 우리 회사 가족이라고. 넌 그 사람들한테 그따위로 바닥으로 굴고도 부끄러움이란 게 없어?”

이섭의 얇고 이지적인 입술이 여리게 떨렸다. 말대로 저열한 순간조차 우아함이 깃들었다. 가끔씩 태생적 차이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 이섭이 떨리는 입술로 독설을 내뱉었다.

“하긴 알 리가 없지. 강씨인데.”

“그래, 난 너처럼 우아하진 못하지. 쓰레기 강지욱 아들인데. 당연하잖아, 응?”

웃으며 하는 준섭의 말에 이섭의 눈이 가늘게 찡그려졌다. 진심으로 경멸하는 짐승을 보듯이.

“너 정말 쓰레기구나. 니 친부에 대해 그렇게 싸가지 없이 말하냐?”

“대신 말해 드렸죠. 우아한 그 입 더러워질까 봐. 태이섭 상무님. 네, 태서우 부회장 아드님. 대단하신 내 외사촌.”

“그래, 너랑 내가 사촌으로 묶이다니 끔찍해. 넌 우리 집안을 말아먹으러 들어온 이물질이야. 어디서 이런 잡종 양아치 새끼가 TK에서!”

“이물질, 잡종 양아치. 그거, 다 아는 이야기고.”

모욕을 당한 준섭의 대응이 너무 평온해 이섭이 오히려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이섭이 턱짓으로 이섭의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너 지금 부회장님이랑 통화 중 아니었나?”

“그렇다면 왜.”

“반도체 산재 보상 결정 좀 더 과감하게 하시라고 말씀드려.”

“뭐?”

“주도권 잡아서 보상금 올려 합의하시고, 사진도 찍으시라고. 어떤 수준으로 결론 내리시든, 송백재는 내가 설득할 테니.”

지루하게 끌었던 산재 보상 합의는 이미지 타격이 컸던 태서우에게 좋은 기회이다. 걸림돌은 송백재였다. 공식적인 보상은 물론 산재 인정조차 거부하는 분이다.

하나 양보하면 열을 내놓으라 한다, 물에 빠진 놈 구해 주면 보따리 찾는 격이다, 벽돌 하나 상하게 하면 종내에는 집이 무너진다, 같은 식의 송백재의 고집이었는데 그걸 준섭이 해결해 준다고 했으니 절대적으로 유리한 제안이다.

그 속내를 추측하려 이섭이 미간을 찡그렸다.

“산재 합의금 타결 발표는 내일이야. 누굴 얼굴로 세울지는 정하시라고.”

준섭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열리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며 이섭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데려다줘서 고마워. 연우경 말이야.”

닫히는 문틈 사이로 그림처럼 잘생긴 이섭의 얼굴이 우그러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터엉 하고 귓전을 때렸다. 그제야 막혔던 숨이 터진다. 준섭은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쓰레기 강지욱 아들인데.

제가 뱉은 말이 칼끝이 되어 내장을 휘젓는다. 구역질이 올라와 준섭은 입술을 손바닥으로 거칠게 문지르고 양손을 펴 열 손가락 끝을 머리에 파묻었다. 손바닥으로는 양쪽 눈을 가렸다. 어떤 때는, 눈을 뜨고 악몽을 꾼다.

‘준아.’

뉴욕을 떠난 지 2년, 세 번째였다. 준섭은 두 번째 학교를 옮겼다. 옮길 때마다 환경은 더욱 나빠졌다. 처음엔 부산의 아파트에서 고용인 둘과 살았다. 다음엔 지방 소도시. 이번엔 강준이 아닌 가명으로 불리던 시골 구석의 기숙사 학교였는데, 지욱은 다시 준섭을 찾아냈다.

강지욱이 찾을 때마다 태 회장은 준섭을 질책했다. 비서가 대어 주는 휴대폰 너머, 단 몇 마디가 전부였다.

-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구나. 몹시 실망이다.

준섭에게 주어지던 지원은 학비를 제외하고 완전히 끊어지다시피 했다.

숨바꼭질도 지긋지긋했다. 곧, 건장한 남자들이 들이닥치겠지. 지욱을 막아서며 말할 것이다.

“회장님이 기다리십니다.”

지욱은 기꺼이 그들의 차를 타고 가 버리고, 테이블을 마주 두고 협상을, 그리고 임시방편적인 보상을 받을 테다.

TK가 분양하는 강남 한복판의 가장 큰 평수의 아파트, 상가, 현금.

꼬박꼬박 뭘 줘야 했는지 회장의 비서가 보고하듯 준섭에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준섭은 내일이면 또 어디론가 보내질 테다. 여기에서 더, 어디로 떨어져야 하나. 준섭은 이를 악물었다. 지겨워. 지겨워.

그 꼴을 내일이면 또 당하겠구나.

어디로 옮기든 매일매일, 밤은 지독하게 길고 추웠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입술을 깨물다가, 베개를 끌어안다가 그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죽여 울었다.

마지막 크리스마스. 창 너머 보이던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 엄마의 마지막 선물…….

싸구려 화가의 복제판 그림으로 덧붙여 두었던 액자를 한 번씩 만져 보고 그 손끝을 머리에 묻고 손바닥으로 눈물을 꾹 누르며, 준섭은 잠이 들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만큼 지욱에 대한 원망이 커져 갔다. 원망이, 혐오가 되고 준섭은 지욱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들끓었다. 지욱을 더없이 좋아했던 자신에 대한 염증과 후회가 서서히 준섭을 망가뜨려갔다.

“준아.”

물러서는 준섭을 향해 뻗어 오는 손, 준섭의 손과 꼭 닮은 손이 떨렸다. 저를 올가미 삼아 엄마를 사냥한 아버지.

“싫어. 가까이 오지 말아요.”

꼭 닮은 얼굴도 거울처럼 같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누가 그래? 태시환 회장이 그래? 서우가 그래? 누가, 누가 그래? 감히 너한테!”

준섭이 이를 악물었다.

“착각 말아요. 나 그 집 사람들 얼굴 구경도 못 했으니까. 할아버지도, 아니, 회장님도 뉴욕에서 열다섯 살에 만난 게 마지막이었어.”

“그럼, 그런 소릴 왜 해!”

고개를 들어 보니 엘리베이터는 지하에 멈춘 채 그대로였다. 33층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너 정말 쓰레기구나.’

이섭의 말이 목을 찌른다.

‘니 친부에 대해 그렇게 싸가지 없이 말하냐.’

친부. 준섭은 마른세수를 하며 엘리베이터 층수 버튼을 눌렀다.

지욱에게 악을 쓰는 제 모습이 엘리베이터 문에 비춰 보인다. 그럴 수 없는데 꼭 거울을 보는 것처럼, 영화를 보는 것처럼 보인다. 수백 번, 수천 번도 더 떠올린 장면이라 그렇다.

눈이 뜨거워진다. 준섭은 엘리베이터 상단 디지털 숫자만 쳐다본다. 고개를 좀 들고서, 붉어지는 눈을 스스로에게도 감추며.

이제 그만. 마지막 장면까지는 그만.

기억을 끊어야 한다. 더는 그만.

늦었다. 벌써 발이 얼어붙는다.

설산, 나무. 다시 악몽이 시작된다. 추워. 준섭은 제 팔을 문질렀다. 악몽을 끊게 해 줄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떠올린다. 여자의 몸, 포근한 체취, 오직 준섭에게만 집중하는 열기 어린 눈동자. 그거면 족하다.

엘리베이터가 느리다. 원래 이렇게 느렸나, 감옥 같은 답답함이 목울대를 짓누른다. 준섭은 빌어먹을, 욕설을 씹는다.

복도에서 달리지는 않았지만 뛰는 것만큼 빠른 속도로 걸었다. 본부실 문을 활짝 열었지만 여자가 없다. 젠장. 준섭이 우두커니 서서 양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눈을 감고 후훅, 숨을 내쉬었다. 분노와 짜증이 정수리까지 치받았다.

애써 이성을 끄집어내어 스스로를 설득했다. 올 필요가 없었다고 집으로 가라고 하지 않았나. 책임감으로 꾸역꾸역 올라왔다가 정작 본부실로 와 보니 유 실장도 없어 둘만 있게 될 상황이니 가 버렸겠지.

지난 며칠 내내 차가운 거절만 반복하던 여자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이섭의 평가가 맞다. 파견직이라도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인데, 본부장 직함을 달고서 양아치처럼 굴었다.

연우경은 아버지가 교장 선생님이라고 했다. 고지식한 분이라 비싼 타이를 학교에 하고 가지도 못하시는 분, 존경받고 사랑받는 인품이라 오래전 졸업한 졸업생이 때 되면 인사를 드리러 오는 분. 예쁜 강아지가 애교를 부리고, 엄마가 늦은 퇴근을 걱정하는 평범하고 따뜻한 가정이 저절로 연상된다. 집으로 돌아가서 강아지 발바닥을 만지면 다 잊어버릴 수 있다고 했지. 그러고 보면 연우경의 눈빛은 늘 맑고 단단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그런 가정이 있으니까.

그래서 나 같은 놈을 볼 때, 한 번씩 경멸감을 감추지 못하나.

그래서, 새하얀 이섭을 보면 긴장감을 풀 수 있나. 따뜻한 가정의 냄새에 동질감이 느껴져서?

열등감이 똬리처럼 뱃속에서 뭉쳐진다. 준섭은 고개를 숙여 손가락은 머리칼에 반쯤 파묻고 손바닥으로 꾹 감은 눈을 힘주어 눌렀다. 시린 손끝이 머리칼 속 체온으로 덥혀지고 분노로 뜨거워지는 눈은 손바닥으로 식어 간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준섭이 뒤를 돌아다보았다.

우경이 한 손에 파일을 안고 서 있었다.

“어디 다녀옵니까.”

“홍보실에 있던 자료 좀 찾으려고요…….”

“올라가서 반성하라고 했더니.”

우경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늦잠을 잤습니다. 일어나자마자 태이섭 상무님 전화받고 너무 당황해서.”

늦잠……. 태이섭 전화……. 침대에서 잠이 덜 깨어 이섭과 통화하는 여자가 상상이 되자 쾅하고 몸속 어딘가가 터지는 기분이다. 하. 소리를 내며 준섭이 비웃었다. 한 걸음 다가서자 여자가 조금 더 뒤로 물러선다.

“반성 대신 변명입니까.”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연락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요.”

“조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우경이 할 말을 마쳤다는 듯 고개를 틀며 옆으로 비켜섰다. 준섭이 불쑥 손을 뻗어 우경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아, 소리를 내며 우경이 몸 쪽으로 끌려왔다. 손가락에 닿는 머리칼에 아직 물기가 남아 있다. 손으로 흐트러뜨리자 샴푸향이 확 끼쳤다.

이러고서 태이섭 차를 타고 왔다고? 나란히 앉아서?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그런 채로 우경의 뒷머리를 붙잡았다. 고개가 들려서 우경이 준섭을 바라보았다.

“변명 더 해 봐.”

우경이 머리를 붙잡은 준섭의 손을 떼어 내려 고개를 비틀었다. 이런 시도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준섭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다시 우경의 고개를 돌려놓았다. 우경의 눈이 찌푸려졌다. 그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내 연락은 왜 씹습니까.”

“씹다니요…….”

“그래, 그럼 태이섭이랑 통화하고 같이 오느라 깜박 잊었습니까?”

“그런 적 없습니다.”

차분한 목소리에 약이 바짝 올랐다.

“놓으…….”

놓으라 말을 하기 전에 입을 막았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다고 한 주제에 잘도 떠들긴. 혀를 밀어 넣자 침입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우경은 이를 맞물었다. 조개처럼 닫힌 치열을 훑으며 준섭은 방어를 비웃듯이 몸을 더 밀착시켰다. 딱딱한 플라스틱 파일이 우경의 가슴을 짓눌렀지만 우경은 파일을 고집스레 쥐고 있었다.

“파일 좀 내려놔.”

귓속말을 하며 귓불을 깨물었다. 우경이 하악 숨을 뱉으며 도리질을 쳤다. 까만 점이 있는 귓불을 쪽 빨아들이자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면서도 말은 듣지 않았다.

준섭이 손을 뒤로 둘렀다. 매끈한 허리선을 훑는 척하다가 순식간에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손바닥에 동그란 엉덩이가 잡혔다. 단추나 지퍼가 없는 검은색 바지를 마치 언제라도 내려 버릴 수 있다는 듯 손이 자유롭게 움직였다.

“아, 이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을 테다. 둘 사이를 막고 있던 파일이 그제야 사라졌다. 반쯤 들린 상태로 우경이 본부장실로 밀려 들어갔다. 엉덩이를 놔주자 급히 뒷걸음질 치다가 벽에 등을 부딪쳤다. 머리는 준섭이 받쳐 준 손바닥 덕분에 찧지 않았다. 준섭이 후우 숨을 길게 내어 쉬고는 우경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금요일 밤에, 처리할 일 같은 건 없었습니다.”

준섭이 스스로 말하고도 어이가 없어 조금 웃었다.

“취했고, 그랬더니 그냥 오게 됐습니다.”

되도록 그러지 않으려 하지만 상대에 따라 과음을 하게 되는 날이 있다. 와인에 취했다 싶은 순간부터 여자의 붉은 입술이 떠올랐다. 눈을 감아도, 술을 들이켜도, 머리가 짓이겨지는 듯한 일 이야기를 하면서도 취한 상대가 던지는 거북한 농담에 비위를 맞춰 주면서도 여자만 떠올랐다. 따뜻하게 달아오른 몸이나 부드러운 고무공 같던 가슴이나 저만 바라보던 유혹적인 눈동자가 번갈아 가며 가슴을 들쑤시고 머리를 휘저었다.

“사무실 들어서서 연우경 씨 혼자 있는 거 보는 순간 터질 거 같았는데.”

준섭이 우경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떼어 냈다.

“용원이 자식.”

우경이 숨을 작게 몰아쉬었다.

“그날 연우경 씨가 여기 들어왔으면.”

“아…….”

준섭은 벌어지는 우경의 입술을 빨아들이고 혀를 밀어 넣었다. 안쪽 볼살이 탱탱하고 달콤한 푸딩 같다.

니트 속으로 손을 넣어 내내 파일로 가리고 있던 가슴을 쥐었다. 속옷까지는 들추지 않았지만, 말랑거리는 가슴을 원하는 대로 손에 넣자 준섭의 입에서 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난 며칠간 너무 만지고 싶어 손이 움찔거릴 지경이었다. 솟아오른 정점을 얇은 브래지어 위로 문지르자 우경이 혀가 빨리는 채로 고개를 저으려 했다.

“싫어?”

혀를 놓아주며 물었다. 우경이 감은 눈을 뜨고 준섭을 쳐다보았다.

“화, 내는 건……. 싫어요.”

우경이 부어오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키스는 좋은데…….”

눈에 불꽃이 튀기는 기분이다. 깜찍하긴. 준섭이 키스 대신 가슴 위로 올린 손을 가차 없이 움직였다. 제법 아플 텐데 우경은 미간을 찌푸릴 뿐 소리를 지르진 않는다.

“은근히 사람을 가지고 놀지, 네가.”

우경이 눈만 맞추고는 입을 떼지 않았다. 정점을 살살 손끝으로 긁자 우훅 숨을 내쉬면서도 또박또박 말했다.

“실장님 불렀다면서요.”

“아. 잊고 있었네.”

우경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준섭이 그 틈을 기다렸다는 듯 니트와 브래지어를 한꺼번에 젖혀 올렸다. 아악, 우경이 니트 끝을 잡아 도로 내리려 했지만 준섭이 더 빨랐다.

“이 방엔 노크 없인 안 들어와.”

유 실장은 지금 빌어먹을 기사를 올린 기자를 만나고 있는 중이다. 점심시간이나 되어서야 올 테지만, 우경이 알 리가 없다. 양 팔목이 벽에 고정되게 잡혀서 숫제 울 것 같은 표정이다. 니트를 쇄골까지 밀어 올린 덕에 준섭은 지난 정사에서 남겼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쇄골 아래에 만들었던 붉은 자국을 혀로 핥자 우경이 몸을 떨었다. 힘이 풀리는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밀어 넣었다. 툭 쳐올리자, 발끝이 바닥에서 아슬아슬하게 떨어졌다.

“본부장님.”

우경이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불렀지만 소용이 없다. 열기로 우경의 눈이 뜨뜻하게 젖어 갔다. 준섭의 입술이 발갛게 곤두선 부위를 맴돌았다. 미칠 것 같아. 우경의 입에서 으흑하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소리가 신호나 된 것처럼 정점이 입속에 빨려 들어갔다. 세차게 빨아들이자 목덜미가 틀어 잡히는 기분이었다.

뾰족하게 세운 혓바닥이 예민하게 부푼 덩어리를 한껏 굴렸다. 아직 지난번의 자극이 다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통각과 쾌감이, 누군가가 들어올 수 있다는 불안감이 몸을 조각내듯 뒤덮었다. 우경은 준섭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불분명한 음절을 만드는 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혹시라도 밖에 도착한 실장에게 들릴까 봐 우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준섭이 갑자기 입술에서 가슴을 뱉어 냈다. 파고들었던 다리를 빼어 내자 우경이 후우 한숨을 쉰다.

“화 안 내면 좋아?”

우경이 고개를 얄팍하게 끄덕였다. 지난번 이 사무실에서 눈을 똑바로 뜨고 거절하던 여자가 떠오른다. 맛있는 식사 한 번이면 족하다고 했던가.

이섭 앞에서는 잘도 웃었으면서, 내내 한 번 제대로 눈 맞추고 웃어 주지도 않았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살덩이를 함부로 문지르자 아흣, 소리를 내며 손등을 깨물었다. 얼마나 봐주고 있는지도 모르고 원망스러운 눈이다.

“제대로 답.”

손을 잡아 소리를 막고 있는 손등을 떼어 내면서 여전히 한 손으로는 자잘한 괴롭힘을 멈추지 않았다. 신음성에 섞여 여자의 답이 잘 들리지 않았다.

“응?”

“……좋, 아.”

준섭이 답하는 우경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혀를 넣어 소유를 확인하듯이 속살을 둥글게 휘저었다. 그런 뒤에 브래지어를 바로잡아 주고 니트를 곱게 내렸다. 아직 붉어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우경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오늘 밤, 10시.”

우경의 눈이 커다래진다.

“태이섭 만나는 거 한 번만 더 눈에 띄어.”

준섭이 우경의 왼 어깨를 꽉 쥐었다. 오늘 여기부터 씹을 거야.

* * *

유 실장과 소회의실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준섭은 본부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받고, 그리고는 겨우 얼굴을 비치고 송백재 갑니다. 한마디만 했다. 유 실장이 약간 머뭇거리는 내색이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부회장님 연락 왔습니다. 제시하신 대로 송백재 설득해야죠. 배상 범위, 합의금 규모, 사과문 다 마무리 지을 겁니다.”

준섭이 유 실장 앞으로 다가가 서류 가방에서 프린트된 종이를 꺼냈다. 빠르게 훑어보더니 유 실장이 미간을 찡그리고는 후, 짧게 한숨을 지었다. 늘 완벽하게 이미지를 관리하는 유 실장이 그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 조건을 설득하신다고요.”

“네.”

“부회장님과 한 번 더 말씀해 보시면…….”

“10년을 끌었어요. 이제와 합의는 잘해야 본전, 잘못하면 뺨 석 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회장님 현재 입장에서야 확실한 스포트라이트와 박수를 원하실 수밖에요.”

유 실장이 말을 꾹 누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준섭의 속을 알 수 없어 고민스럽다는 표정도 순식간에 지워 버리고 심상하게 인사했다.

“다녀오십시오.”

“오늘 못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좀 많이 터질 것 같아서.”

준섭이 덤덤하게 말했다.

“저녁 식사 전까지는 해결을 봐야, 제가 부회장님과 회장님 양쪽으로 얻어터지는 걸 피할 수 있을 텐데.”

우경은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몰라 준섭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눈이 마주치자 준섭이 웃어 보였다. 긴 눈매가 접히는 웃음이다.

“내가 또 욕먹는 건 전문가 수준이라서. 알아서 잘할 테니, 마무리하고 연락 주십시오.”

우경은 잠시 동안 멍하니 준섭이 나간 문만 쳐다보았다. 유 실장이 흠, 하고 소리를 냈다. 정신이 들어 쳐다보니 농담처럼 덧붙였다.

“그 규모로 산재 합의는 삶은 호박에 이도 안 들어 갈 소리라 하시겠죠. 얻어터진다고 하셨지만 설마 제대로 패기야 하시겠습니까.”

“네?”

“연세가 여든이 넘으셨잖아요.”

기껏해야 꿇어앉히고 힘없는 발길질이겠지. 유 실장이 작게 중얼거렸다.

“저 잠시만요…….”

우경이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엘리베이터까지 달려갔지만 이미 준섭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한 후였다. 우경은 버튼을 누르고 발을 잘게 굴렀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변하는 숫자판만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지하층에 도착하자마자 유리문 밖으로 정신없이 달려 나갔는데 준섭이 보이지 않았다. 우경은 무작정 주차장을 가로지르며 뛰어가 주차된 차들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며 두리번거렸다.

어디쯤에 차가 있었을까. 차 번호가…….

카디건을 벗어 두고 와서 그런지 차가운 공기에 소름이 돋았다. 우경은 목을 움츠렸다. 제 양팔로 니트 한 장만 입고 있는 몸을 감싸며 자책했다.

바보같이, 목에 걸린 사원증 외엔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다. 핸드폰을 가져왔어야 하는데, 바로 뛰어나오느라 맨몸이었다. 주차장 가운데에 덩그러니 서서 구두 끝만 쳐다보는데 끼이익 하고 바닥 긁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자 바로 앞에 차가 멈춰서 있다. 우경이 헤드라이트에 부신 눈을 찡그렸다.

혹시, 라고 생각하는 순간 심장이 쿵하고 몸 전체를 울리는 기분이었다.

번호가…….

태연한 척 표정을 감추고 우경은 숨을 참으며 차 옆으로 걸어갔다. 선팅이 짙게 된 창이 내려갔다. 운전석에 앉은 준섭이 우경을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본부장님.”

우경이 차창으로 바싹 다가갔다.

“무슨 일 있습니까.”

조금 빠르게 호흡하며 우경이 준섭에게 말했다.

“물어볼 게 있어서요.”

준섭이 말해 보라는 듯 얕게 턱을 움직였다.

“왜, 그러세요?”

“뭘 말입니까.”

“합의요.”

답하기 싫다는 듯 준섭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안 그래도 기사 때문에 송백재 심기 불편하시다는데, 이거 가져가시면 더 많이 꾸중 들으신다고…….”

“전략적인 포석이라고 합시다. 꾸중이야 듣겠지만 결과를 내가 원하는 대로 가져가면 되니까.”

“혹시 그 사람들, 전에 출장 가셨을 때.”

산재 피해자를 언급하자 준섭이 조금 눈썹을 찡그렸다. 불쾌감이나 화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보다는 정곡에 다가갈 때, 내부의 진심을 들키고 싶지 않을 때 짓는 표정이라는 걸 우경은 알아차렸다. 준섭의 그런 습관을 언제부터 알게 되었는지 스스로에게 당황하며 준섭의 찡그린 눈매만 바라보았다.

우경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럼, 안녕히…….”

인사를 하며 목덜미가 시려 약간 움츠렸다.

“연우경 씨.”

부름에 고개를 들자 준섭의 입술이 조금 웃는 듯이 벌어졌다.

“겉옷도 안 입고서, 안 춥습니까.”

우경이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감기 걸리겠어. 준섭의 목소리가 자그맣게 귓전을 울렸다.

비가오던 그날도 비웃은 거 아니고, 진심으로 물은 거였나요. 우경은 묻고 싶은 물음을 삼키고 답했다.

“추워요. 조금.”

“이리 와.”

준섭이 창밖으로 왼팔을 뻗어 우경의 목을 감쌌다. 얼굴을 끌어와 훔치듯이 짧게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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