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에이블 대표 소운은 우경의 메인 요리 접시를 보며 볼을 뿌하게 부풀렸다.
“너 너무 안 먹는다.”
소운이 비싼 저녁을 사 준다고 스테이크를 시키자고 했는데 소화가 안 된다며 극구 사양하고 시킨 파스타가 반 넘게 남았다. 그릇을 치우는 웨이터 보기에도 조금 미안했다.
“나 혼자 고기 썰었네. 와인이라도 시킬걸 그랬어.”
“운전하셔야 하는데요. 다음에 감자튀김 안주에 맥주 한 번 사 주세요.”
“그럼, 그럼. 열 번도 사 준다, 맥주 좋지.”
소운이 시원하게 답했다.
메인 디시를 반이나 남겼지만 여전히 배는 고프지 않았다. 우경은 디저트로 나온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삼키고 푸딩은 톡 건드려 보기만 했다. 소운이 보더니 조금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기사 신경 쓰여서 그러니? 잘 해결될 거라며.”
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 실장이 언론사 서너 곳을 접촉했고 우경과 같이 보도 자료를 몇 가지 버전으로 완성시켜 준섭의 컨펌을 받았다.
언론사에 배포될 기사의 참고 자료로 사진과 내용을 보내면서 마지막에 우경이 사진 몇 장을 더 첨부했다. 유 실장이 그건 본부장님 컨펌을 받은 사진이 아닌데, 하는 눈초리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으로 추가로 첨부된 사진까지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외적인 케이스가 될 가능성이 높다. 태준섭이 컨펌하지 않은 사진이지만 우경은 마지막 순간에 내렸던 제 판단이 옳았기를 바랐다.
반도체 생산 현장으로 출장을 갔을 때, 준섭이 방문한 공장 앞에 시위하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경호원으로 바리케이드를 쳤지만 준섭은 내버려 두라는 신호를 했다. 병색 짙은 모습을 찍은 사진이 붙은 팻말을 들고 서 있던 사람들은 오랜 투쟁으로 목소리마저 지쳐 있었다.
준섭은 그들을 향해 불편한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대외적인 얼굴을 하고서 적절한 예의를 갖춘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다. 무표정에 가까운 태준섭은 늘 그렇듯이 위압적이고 거만해 보였다. 그런 채로 태준섭은 그중 한 사람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한마디도 음성으로 내지 않고 다만 손을 들어 경호원들과 직원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메시지만 전할 뿐이었다.
태준섭은 얼굴 앞까지 다가온 팻말에 붙은, 털모자를 쓰고 있는 환자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요구에 아무런 답을 주지는 않았다. 뭐라 답을 해 보라는 욕설에도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규모는 결정되지 않았지만 합의와 배상으로 내부 정책적 결정은 이루어진 상태였다.
‘곧 회사 내부 결정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제안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오랜 시간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서 정해진 태준섭의 멘트였다. 하지만 준섭은 욕설을 들으면서도 입을 떼지 않았다. 털모자를 쓴 앙상하게 마른 사진 속 환자와 눈을 맞추고만 있었다. 우경은 카메라로 그런 그를 담았다.
푸딩을 톡톡 두드리며 카메라 렌즈에 담았던 준섭의 표정을 되씹던 우경이 소운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오늘 그래도 일요일인데 빨리 결정되어서 다행이야.”
“아……. 네.”
우경이 얼마간의 걱정을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 실장님이 컨트롤을 잘하세요. 회장님 비서실에서 계속 계셨던 분이라서 여러 면으로 대단하고 완벽하신 분이에요.”
“오, 같이 일하면 배우는 것도 많겠다.”
“저야 열심히 잘 듣고 잘 보고 있는 수준이죠. 뭐.”
“그나저나 휴일인데 회사 가서 일하고 직장 상사랑 저녁이나 먹고. 스케줄 너무 심심한데? 남친 안 만나?”
“아시면서.”
우경이 입을 약간 내밀며 아이처럼 비죽했다.
“우경이 넌 언제까지 모태솔로할 거야? 거기 TK에 어때? 괜찮은 남자 없어?”
“많죠. 다 똑똑하고 능력 있고 외모 준수하고 그러니까 자신감은 저절로 붙은 사람들만 잔뜩.”
“너한테 잘해 주고 그러는 사람 없어? 호감을 표시하는 남자?”
“딱히…….”
우경이 애매하게 웃었다.
“어이그. 어련하겠어. 말 안 해도 다 알아.”
“뭘요, 뭘 아세요?”
“너 1학년 아르바이트 때부터 10년 가까이 봤는데, 네가 모태솔로인 이유를 내가 완벽하게 분석했잖아?”
“정말요?”
우경이 뜻밖의 말에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
“첨에는 네가 너무 눈이 높다고 생각했지. 웬만한 남자가 다 눈에 안 차서 튕기는 건가 그랬어. 그런 걸로 뒷담하는 여자들 남자들 고루고루 있었고. 아, 뒷담. 난 안 했어. 그리고 했던 사람들도 금세 오해 풀었고. 알지?”
어떤 분위기를 말하는지 알고 있다. 새로운 집단에 속할 때마다 조금씩 겪었던 일이라서 우경은 이런 평가가 오히려 익숙한 편이었다. 일에 관련된 사교성은 좋은 편이지만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고 완전히 마음을 터놓기까지 조금 신중해지는 것도 그런 어색하고 서름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약간만 흐르면, 대부분의 사람들과 무난하고 좋은 관계를 맺었다. 가장 서먹했던 곳이 CS였다. 그건 입사하자마자 이은철이 주도하여 따돌리는 분위기가 컸고 그 속에서 우경이 조금 더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었기 때문이다.
“눈 안 높아요. 남자들이 눈에 안 차다니요. 저 그런 거 없어요.”
“그런 공식적인 멘트라니. 난 뒷담한 사람 아니라니까. 첨부터 우리 우경이 넘넘 예쁘고 눈이 완전 높아도 될 만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아오, 무슨 넘넘 예쁨이에요. 홍보 회사 다 멋지고 예쁜 사람들뿐이었는데.”
우경이 손을 저었다.
“야아.”
소운이 정색을 하며 불렀다.
“인정할 건 해야 대화가 이어지지. 너 겪다 보니 내가 결론 내렸잖아. 넌 남자들이 지분거리는 건 칼같이 쳐내고, 그 외의 시도는 단순히 호의라는 선에서 정리하고 커트하더라고.”
“네?”
“그러니까, 남자들이 너한테 이성으로서 특별하게 보이는 관심이나 친절을 자연스레 아, 이건 예의와 호의. 그러니 특별할 게 없네. 감사합니다아. 하고 예쁘게 웃고 커트 친다고. 그럼 한 번, 두 번 하던 남자들도 아닌가 보다 하고 떨어지지. 너 그러면 연애 못 한다?”
우경이 소운의 분석 결과를 듣기가 민망하여 푸딩을 조각내어 입에 넣었다. 부드러움이 혀를 감쌌다.
“너, 내 말 잘 들어야 해. 응? 특별한 관심을 주는 미혼의 멋진 남자를 이건 당연한 호의일 뿐. 그렇게 취급하고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끊어 내지 마.”
우경이 푸딩 스푼을 입에 물고 소운을 향해 방긋 웃었다.
* * *
평소보다 길고 조금 더 지치는 송백재에서의 시간이었다. 약간 고달프긴 했지만 결국 원하는 대로 회장의 승낙도 받았고, 아침부터 소란을 일으켰던 기사에 대한 대응도 결정되었다. 저녁 식사 동안 태서우와 태이섭이 준섭을 한 번씩 떠보았지만 준섭은 무난한 답으로 일관했다. 내일이면 태서우가 TK그룹의 대표 자격으로 산재 피해자 대표와 만나고 피해자 측이 요구했던 수준을 수용하는 합의서를 작성할 것이다. 태서우의 이미지 회복에 득이 될 터이니 준섭으로서는 손해인 셈이다. 그 의도를 알고 싶어 몸이 달아 있지만 달은 채로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과를 하던 중에 준섭은 좀 일찍 일어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화장실로 이어지는 복도에서 이섭과 마주쳤을 때 쓸데없는 신경전을 하고 싶지 않았다. 준섭이 까닥 눈인사를 하고 스쳐 지나려는데 이섭이 팔을 붙잡았다. 이런 터치는 잘 하지 않는 녀석인데, 사감을 실어 잡은 부위에 뭉근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준섭이 돌아보았지만, 이섭은 턱을 비스듬히 치켜올리고 내리까는 시선으로 준섭을 보기만 했다.
“왜.”
“무슨 약속인데 시계를 10분 간격으로 계속 봐?”
“비밀.”
준섭이 짧은 답으로 무시하고는 팔에 붙은 손을 털어냈다.
“왜애, 낮에는 업무가 바쁘셨나? 큰소리치더니 너도 맘대로 잘 안 돼?”
이죽거리긴. 준섭이 츠, 하는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낮에 할 건 했는데, 밤에 마저 해야 할 일이라서.”
이섭이 벌어진 입을 수습하려는 듯 손으로 쓱쓱 문질렀다.
“넌 블러핑이 체질이야. 좆도 없는 놈이 꼭 다 가진 것처럼 굴거든.”
“제대로 있어. 까 줘?”
준섭이 버클 위로 손을 올리자 이섭이 질겁을 하며 손을 쳐냈다. 준섭이 크게 웃었다. 놀려 먹는 재미, 라는 말이 웃음 속에 섞여 들어왔다. 이섭이 호주머니 속에 무안한 손을 찔러 넣었다.
“그래서, 백설 공주 만나?”
준섭의 눈을 보면서 이섭이 빙글거렸다.
“아하, 별명은 아직 몰라? 나한테 벌써 말해 주던데.”
“무슨 소리라고, 알아.”
“오, 그래서 백설 공주님 만나시나?”
“그렇다면?”
“되게 예쁘지?”
“그래.”
“애교도 넘치고, 우아하고.”
“응.”
이섭이 입 끝을 올리며 웃었다.
“발바닥 만지러 가는구나?”
“뭐?”
“코 바짝 붙여서 냄새도 맡고 조물조물 만져 봐. 말랑말랑 끝내줘. 복잡한 생각 다 날아가고, 기분 좋아지거든.”
이섭이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을 꺼내더니 준섭을 향해 검지를 뻗었다. 저도 모르게 준섭이 주먹을 꾹 쥐고 있었다. 이섭이 톡 검지로 튀어나온 관절을 건드렸다.
“또 인간적이네. 이 모습. 태준섭 본부장이 이런 얕은 수에도 걸리나?”
“무슨 소리야.”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세요. 여기서 뻥카 날리지 말고요. 네?”
이섭이 마치 세 번째 손가락을 날리고 싶었다는 듯 검지를 세워 보였다.
* * *
소운과 식사를 마무리하고 바로 이동했더니 30분 일찍 준섭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우경은 시각을 확인하고는 준섭이 사는 주상복합 건물 맞은편 커피 전문점에 들어갔다. 허브티 한 잔을 들고 창가 카운터로 향할 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벨 소리만으로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우경이 손에 든 머그잔을 급히 내려놓고 가방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
저도 모르게 한숨처럼 소리가 나온다. 멈췄던 벨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우경이 의자에 앉으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상무님.”
- 미안해요, 저녁 시간에.
“아니에요.”
- 통화 괜찮아요? 집에서 쉬는데 전화했나요?
“괜찮습니다.”
- 친구 만나요? 밖인 거 같네요.
“……네.”
이섭이 잠시 답이 없었다.
- 친구 약속 무르고, 나 잠깐 보면 안 될까요.
“네?”
우경이 시각을 확인했다.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있다.
“혹시 송백재 다녀오셨나요? 무슨 급한 변경이라도……. 오늘 보도 자료 본부장님한테 컨펌받았는데, 벌써 보냈거든요. 수정 요구하려면 아직 여유 있습니다. 아, SNS.”
우경이 이맛살을 찡그렸다. 기사가 공식적으로 나가기 전에 SNS에서 공장 현장 사진이나 투자 규모 연설문 내용의 일부를 올리기로 했다. 공식 채널과 비공식적 홍보 인력을 통한 채널 두 가지 다 가동하기로 했는데…….
“SNS에 올릴 일부 관련 정보는 기사보다 조금 먼저……. 그런데 SNS 배포도 아직은 안 됐습니다. 변경하고 늦출 수 있어요.”
- 아, 하…….
수화기 너머로 좀 허탈한 웃음이 들렸다.
- 숨도 안 쉬고 그렇게 빨리 말하다니. 말릴 틈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좀 너무 놀라서…….”
- 왜 지나치게 바짝 긴장해요? 별거 아닌데.
이섭의 반응에 탁하고 맥이 풀렸다. 하긴, TK 같은 그룹 차원이나 태이섭 상무의 입장에서야 이 정도 잡음으로 인한 송백재의 지적이나 분노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제 입장에서는, 그래도 본부장님 배속으로 처음 하는 일인데요.”
- 그렇게, 본부장과 잘해 보고 싶어요?
이섭의 말투가 평소와 다르게 이질적이었다. 우경이 핸드폰을 조금 떼었다가 다시 귀에 붙였다. 입을 다물고 소음 속에서 집중하기 위해 귀만 열었다. 침묵의 몇 초가 지나자 이섭이 먼저 말했다.
- 답 줘요.
“당연히, 잘해 보고 싶습니다.”
- 그거 말고 앞에 물었던 말. 친구 버리고 지금 나 만나자고요.
우경이 가슴 중간쯤 막혀 있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곤란합니다.”
- 친구 아직 안 왔잖아요.
떠보는 이섭의 말에 우경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곡해 없이 진실에 가까운 답을 찾으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 *** 고객님, 라떼 두 잔 나왔습니다. 하는 소리 들리거든요. 커피 전문점 안 같은데, 친구 앞에 앉혀 두고 이렇게 오래 통화 안 할 거잖아.
우경이 난감한 상황에서 벗어나려 짐짓 과장되게 밝은 목소리로 받아쳤다.
“우아, 상무님. 청력이 좋으시네요. 거리가 좀 있는데.”
이섭이 소리 내어 웃었다.
- 우경 씨는 보기보다 되게 노련해요. 처음 이미지는 토끼나 사슴 같았는데 말이죠.
“죄송합니다. 상무님.”
- 왜요, 노련한 초식 동물이라서? 아님 토끼인 양 페이크 쳐서?
“아니요. 보기보다 제가 좀 더 둔합니다. 돌려서 꾸짖으시면 뭘 잘못한지 잘 몰라서 더 꾸중 들을 때도 많습니다.”
이섭이 하, 하며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 나 열 받게 하고 있는 건 알아요?
“지금 알았습니다.”
- 내가 우경 씨 거기 꽂았어요. 그 의미 모릅니까?
“……저는.”
갈증이 일었지만 김이 올라오는 머그잔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바싹 마른손이 잔을 놓칠 것만 같았다. 우경은 버석거리는 입술을 억지로 떼었다.
“저는, 주어진 일만…….”
- 연우경.
우경이 숨을 멈추었다.
- 또박또박, 커브 아니고 스트레이트로 말할 테니 새겨들어요. 너 내 사람으로 꽂았다고. 내, 사, 람. 이제 알아들었어요?
우경은 숨을 멈춘 채로 뜨거운 머그잔만 감싸 쥐었다. 연둣빛으로 변해 가는 머그잔 속, 푸른 찻잎이 투명한 티백 안에서 자잘하게 흔들렸다. 눈앞이 어질거리고 손끝이 시렸다.
- 내가 찾았고, 내가 직접 접촉했고, 계약도 내가 시켰고. 그래, 본부장실까지 내가 밀어 넣었어. 그러니까 본부장 줄타기하지 말아요.
“상무님.”
- 지금 거기서 당장 나와서 택시 잡아타고 우경 씨 집으로 가.
“저는…….”
이섭이 우경의 말을 더 듣기 싫다는 듯 말을 끊었다.
- 연우경 씨.
그 순간 빠앙, 경적 소리가 길게 울렸다.
“상무님, 지금 운전 중이세요?”
- 그래요, 나 운전 중인데 열 받아서 속도 미친 듯이 올리게 만들지 말아요. 내 말 들어. 집으로 가세요. 그 새끼 잡놈이야.
핸들을 쥐고서 이섭이 이를 악물었다. 핸드폰 너머 아무런 답이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말을 더 하려 할 때, 이섭의 귓속으로 여자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 끊겠습니다. 친구가 왔습니다.
이섭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앞으로 몸이 기울어졌다가 펴졌다. 붉은색 신호등을 노려보다가 퍽, 소리가 나도록 손으로 운전대를 내리쳤다.
그래, 너를 잡놈한테 꽂은 나도 잡놈이지.
우경은 핸드폰을 엎어 두고 천천히 허브티를 마셨다. 반쯤 남았을 때, 절반의 혼란함이 비워진 것만 같았다. 나머지 혼란은 부딪혀서 해결할 부분이었다. 우경이 엎어 둔 핸드폰을 들고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
- 네.
“본부장님?”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는 듯해서 우경이 되물었다. 송신구에서 남자의 웃음소리가 성큼 건너왔다.
- 전화해 놓고서…… 왜 묻습니까.
“목소리가……. 감기세요?”
- 아니.
“아……. 꽉 메인 거 같아서.”
- 기다리느라 목이 길어져서 그렇습니다.
뜻밖의 말에 우경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약속 시간 10분 전이에요.”
- 그러네요.
“집 앞 커피 전문점이에요.”
- 나오라고?
“네.”
- 흐음…….
좀 곤란하다는 반응이었다. 무턱대고 집으로 올라오라고 하면 딱 잘라 거절할 생각이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뵙고 말씀드리겠다는 멘트까지 준비하고 있는데 불쑥 답이 들렸다.
- 5분.
오라고 해 놓고선 온다는 말에 당황한 사람은 우경이었다. 아……. 하는 소리가 전해졌는지 전화기 너머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 내빼지 말고 있어.
무어라 답하기 전에 끊어진 핸드폰을 우경은 잠시 동안 그대로 들고 있다가 머그잔 옆에 두었다. 핸드폰 화면이 가리키는 시각은 9시 50분.
엄마랑은 소운을 만나기 전에 통화했었다. 소운과 저녁을 같이 먹고 내일 나갈 홍보 건을 급히 마무리 짓고 들어가야 해서 늦어질 것 같으니 먼저 주무시라는 인사를 했다.
‘그래, 너무 늦지는 마.’
엄마의 목소리가 생각나자 심장 아래가 콕콕 쪼이는 듯하다. 백설이를 안고서 소파에서 우경을 기다리다 잠이 들 엄마로선, 결코 상상하지 못할 일탈을 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유리창 너머 대로변에는 택시 두어 대가 손님을 기다리며 서 있다. 6차선 도로 건너편에 솟아 있는 주상 복합 빌딩을 담는 마음이 착잡하다. 택시 타고 지금 집으로 가라던 이섭이 떠오른다.
‘그 새끼 잡놈이야.’
태이섭의 외부적인 이미지와 연결 지을 수 없는 저급한 비난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 생생한 진심이 느껴졌다. 택시 한 대가 떠나고 있다. 반쯤 남은 허브티를 보다가 남은 한 대의 택시를 망설이며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우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몸을 창 쪽으로 기울였다.
초록불 신호가 깜박인 지 한참인데 건너편 인도를 빠르게 뛰어오던 남자가 멈추지 않고 횡단보도에 진입했다. 트레이닝복 차림의 남자는 스ㅤㅇㅞㅅ셔츠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다.
6, 5, 4…….
신호등 초록 그림 아래로 점멸하며 숫자가 바뀌었다. 아닐 텐데 비슷한 사람인가. 우경은 눈을 깜박였다. 태준섭은 운동선수처럼 빠른 속도로, 이 시간에 저런 차림으로 뛰어다닐 사람이 아닌……. 의심이 멈추었다. 커피 전문점 유리 벽 앞까지 속도를 줄이지 않은 남자가 핸드폰 액정을 코앞에 붙였다.
[00:54:28]
54초 28, 타이머로 맞춰 둔 화면의 숫자를 읽는 동안 눈이 커진다.
하아, 하……. 남자의 벌어진 입에서 나온 숨이 부옇게 창을 흐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후드 아래 흐트러진 검은 머리가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기다리라는 듯 남자가 손짓을 하고는 정문을 향해 뛰어갔다.
“아.”
우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커피숍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남자에게 멈춘다. 이제 보니 회색빛 트레이닝복도 온통 물기에 젖어 있다. 엉망인 차림으로 숨을 몰아쉬면서 쏟아지는 시선을 가르며 남자가 오직 우경을 향해서 큰 걸음으로 왔다. 우경은 키가 커서 한참 올려다봐야 하는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
[00:08:20]
“세이프.”
타이머를 정지시키면서 남자가 웃었다.
“아…….”
우경은 입을 벌린 채 손을 뻗었다. 남자의 머리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또르르 손끝으로 옮아왔다.
“왜…….”
묻는 입술이 이유 없이 떨린다. 남자가 트레이닝 바지 호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얼결에 주먹 아래로 손바닥을 펼쳤다. 남자의 손에서 우경의 손바닥 위로 톡톡 떨어진다. 우경이 떨어지는 작은 물체를 보고는 다시 시선을 들었다. 희고 동글동글한 새끼손톱만 한 단추들이다. 그 밤에 준섭이 블라우스에서 뜯어내 버린 단추.
“이건…….”
“미안해.”
우경이 단추를 꽉 쥐었다. 주먹이 조금씩 흔들렸다.
“빌어먹게 작아. 덕분에 한참 바닥을 기었지. 개처럼.”
“왜요?”
떨리는 우경의 턱을 엄지로 쓱 문지르고는 남자가 말했다.
“연우경 너 꼬시려고.”
우경이 마시던 잔을 단숨에 비워 버린 남자가 빈 잔을 들고 일어섰다. 한켠에 있던 우경의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다른 손은 단추를 쥐고 있는 우경의 주먹을 감쌌다. 그 채로 스ㅤㅇㅞㅅ셔츠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는 카운터를 향해 걸어갔다. 머그잔을 반납구에 내려놓고 정문을 열 때까지, 시선들이 두 사람을 쫓아왔지만 상관없었다.
“잘 뛰어?”
“네.”
“좋아.”
깜박거리는 초록불을 보면서 준섭이 달리기 시작했다. 우경의 머리칼이 바람에 날렸다. 웃음이 터졌다. 빨간불로 변하기 전 건너편에 도착해 숨을 몰아쉬면서 우경은 다시 웃었다. 이대로 길 한복판에서 껴안고 입을 맞출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여전히 젖어 있는 준섭의 머리칼을 보며 우경이 말했다.
“안 추워요?”
“추워.”
우경이 손을 들어 준섭의 뺨을 감쌌다. 입술이 손바닥을 찾으려는 듯 움직였다. 준섭의 손과 붙은 채로 스ㅤㅇㅞㅅ셔츠 주머니 속에 들어간 우경의 손에서 땀이 배어났다. 우경이 뺨을 감쌌던 손을 조금 움직여 준섭의 입술 위로 손바닥을 올렸다. 젖은 머리칼 아래 검은 눈이 일렁였다. 혀가 할짝이는 느낌에 저절로 어깨가 움츠려졌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준섭은 호주머니 안으로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불편하게 현관문을 열고 나서야 손을 빼어 내고는 대신 허리를 끌어안았다. 준섭이 입술을 부딪치며 중얼거렸다.
“미치는 줄 알았어.”
우경이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혀가 먼저 붙잡혔다. 갈증 난 사람처럼 힘껏 빨아들이자 뿌리까지 삼켜지는 것만 같았다. 숨이 목까지 차올랐을 때 준섭은 우경을 놓아주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느라 벌어진 우경의 입술에 시선이 달라붙었다.
“또박또박 답하는 네 입술을 볼 때마다, 내 입술이라도 대신 씹고 싶었지.”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이번에는 아랫입술을 깊게 맞물었다. 우경이 흐읍 숨을 멈추었다. 긴장이 느껴졌는지 준섭이 웃었다. 입을 맞물고 있어서 그 웃음이 여린 안쪽 살을 흔들며 스며드는 것 같았다.
“씹을까 봐?”
눈을 깜박이자 장난처럼 입술을 깨물고, 혀가 성큼 들어와 여린 속살을 훑었다.
“푸딩 같아.”
“푸딩 먹어서…….”
“응?”
“저녁 디저트.”
준섭이 푹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허리를 굽히며 웃었다. 우경이 준섭의 후드를 머리에서 내리고 젖은 머리칼에 손을 묻었다.
“거품 묻을지도 몰라.”
“네?”
“비누칠하던 중이었거든.”
우경이 어이가 없어 하는 표정이자 준섭이 코끝에 입을 맞췄다.
“연우경 씨가 바로 왔으면 제대로 헹구고 말렸을 거야. 시간 계산 맞췄는데, 서두른 보람도 없이.”
“왜 굳이…….”
“응?”
“그 시간에…… 샤워를 해요?”
우경이 눈을 맞추고 묻고는 부끄러운 듯 다시 시선을 피했다. 송백재에 다녀오면 늘 그랬듯이 저녁 식사로 먹을 걸 뱉어 내고 양치질을 하고 몸을 씻어야 했다. 준섭이 답 대신, 우경의 머리를 매만지고 눈가를 엄지로 문질렀다. 우경이 간지러운 듯 눈을 찡그리더니 준섭의 손을 잡아 입가로 가져갔다. 차가워……. 도톰한 입술이 손끝을 물었다가 떼어 냈다. 준섭은 머리끝으로 피가 쏠리는 기분이다.
어, 하는 순간 덜렁 안고서 아이처럼 신발을 벗겨 던졌다.
“걸어갈래요.”
“응.”
답하면서 입술을 빨아 당겼다. 하늘빛 니트 재킷을 벗겨 떨어뜨리고 메고 온 우경의 가방도 바닥에 팽개쳤다. 귓불을 물었다가 쪽 소리가 나게 빼어 내고는 턱선을 따라 움직이던 입술이 목덜미를 훑고 내려왔다. 니트 속에 들어오는 손이 너무 차가워 우경이 움칫 몸을 웅크렸다.
“차가워?”
“네.”
후, 후……. 준섭은 제 손을 꺼내어 입에 대고 입김을 불어넣으며 데우려 했다. 우경이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깨물었다. 머리는 흐트러져 젖어 있는 채로, 후후 손을 부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스스로 생각하고도 말이 되지 않는다고 인정했다. 태준섭이 귀엽다니.
태준섭이 다시 손을 니트 속으로 밀어 넣었다. 열심히 불었지만 여전히 손은 차갑다. 온도차가 느껴졌는지 준섭이 손을 빼어 내고 옷 위로 우경의 등만 쓸어내렸다.
두 사람은 무어라 말할 사이도 없이 미술관 회랑 같은 공간을 빠르게 지나 마스터룸으로 이어지는 분리된 공간의 중문으로 들어섰다. 준섭의 말대로 샤워 중에 바로 뛰쳐나온 것인지 샤워실 문도, 중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준섭이 스ㅤㅇㅞㅅ셔츠를 머리 위로 벗자,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몸이 드러났다. 우경이 준섭에게로 손을 뻗으며 다가갔다.
“이러고서 젖은 채로……. 안 추웠어요?”
“추워.”
준섭이 작은 세면대에 달린 온수 탭을 열었다. 뜨거운 김이 오르는 물에 손을 담그고 씻더니 우경을 향해 돌아섰다. 니트 속을 파고드는 손이 따뜻했다. 온기를 담은 부드러운 악력이 우경의 몸을 데웠다.
“괜찮아?”
우경이 끄덕이는 동시에 니트가 벗겨졌다.
후크가 풀리는 감각에 우경이 준섭에게로 몸을 바싹 더 붙였다. 속옷이, 붙어 있는 둘 사이 피부를 자극하며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우경이 흠칫하며 몸을 떼자 목덜미를 깨물던 입술이 아래로 성큼 내려왔다. 이어 망설일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깊이 흡입했다. 뜨거운 점막 사이로 잔뜩 예민해진 부위가 빨려 들어가자 우경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가슴에 닿는 머리칼은 차갑고, 머리칼에서 전해지는 샴푸 냄새가 짙었다.
“나도, 씻고 싶어요.”
“싫어.”
우경의 가슴팍에 코를 묻고 숨을 깊이 들이켜며 준섭이 말했다.
“냄새 좋아.”
“그, 그런 말은…….”
“맛있기도 하고.”
준섭이 가슴을 과일처럼 베어 물었다. 아……. 우경이 소리를 삼켰다.
“손이라도 씻을래요.”
준섭이 얼굴을 묻은 채로 끄덕였다. 작은 세면대 앞으로 우경을 데려다 놓고 등 뒤에서 손을 뻗어 물을 틀었다. 화장대 겸용인 세면대에 앞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간접 조명이 켜지는 커다란 거울이 붙어 있어 우경과 준섭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 거울 속 제 모습이 민망하여 우경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준섭이 뒤로 감싸 안듯 양팔을 두르고 우경의 손을 하나씩 잡았다. 비누 거품을 일어 미끌거리는 손가락 사이로 열 손가락이 천천히 파고들었다. 깍지 사이를 비빌 때마다 몽글거리는 느낌에 깊숙한 곳까지 간지러웠다.
비누기를 씻어 내자마자 우경이 몸을 돌렸지만 준섭에게 어깨가 잡혔다. 똑바로 거울을 향하게 세워 놓고서 왼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어깨부터 씹을 거야, 라고 한 말이 그제야 생각이 났다. 거울 속 비치는 가슴을 한 팔을 들어 가리며 우경이 자그맣게 물었다.
“어깨, 그럴 거예요?”
거울 속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아까……. 회사에서.”
“아하…….”
준섭이 그제야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표정이다. 어깨 위에 둔 손을 내리고 그 자리에 입술을 붙이자 우경이 긴장으로 몸을 움츠렸다. 이를 세워 긁어 대는 감각에 발끝까지 저릿해졌다. 가슴을 가렸던 팔은 무력하게 아래로 떨어졌다.
그만. 우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으으. 신음이 깨문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귓불을 잘근 씹자 고통과는 또 다른 쾌락에 눈이 번쩍 떠졌다. 거울 속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들뜬 눈은 커다랗게 벌어져 있고 뺨은 장밋빛이다. 붉은 입술을 깨물고 있지만 열기를 감출 수가 없다. 준섭의 손이 가슴 위에 있다. 뺨보다 더 짙은 빛깔의 선단이 뭉개어질 때마다 목구멍으로 수증기 같은 숨이 차올랐다. 우경이 상체를 비틀었지만 다시 붙잡혔다.
“가만히 있어야 제대로 씹어 주지.”
준섭이 어깨를 핥으며 말했다. 우경이 고개를 저었다.
“싫어?”
“응. 싫어.”
거울 속 남자의 얼굴에 요게, 하는 표정이 스쳤다. 갑자기 가슴에서 손이 떨어지나 싶더니 바지가 내려갔다. 속옷까지 벗기려는 손을 붙잡았지만 소용없었다. 발목에 걸린 바지 때문에 우경은 비틀거렸다. 이렇게 밝은데. 다 보일 텐데. 거울인데……. 우경이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싫어 싫어. 울 것 같은 목소리에 남자가 멈추고서 우경을 가만히 쳐다봤다.
“창피하다고요.”
여기, 너무 밝고 거울인데……. 우경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들었다.
아까 커피 전문점에서, 이런 관계는 하지 않겠다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려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다.
준섭의 기분을 읽으려 했지만 알 수가 없다. 화난 것 같기도 하고 그저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원래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처음도 아닌데 여기까지 이렇게 와 놓고서 내숭을 떠는 것이라 비웃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침착하게 말하고 싶은데 울음이 넘어왔다. 우경은 결국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뒤에서 등을 감싸며 준섭이 안아 주는 것 같다. 우경은 울음소리를 삼켰다.
“울 것까지야 없잖아.”
부드럽지 않은 말투에 다시 울음이 넘어왔다.
“재밌어하잖아요. 나는 이렇게 속수무책인데. 정말……. 어후…….”
우경이 눈물을 닦고는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돌려 거울이 아닌 진짜 준섭을 쳐다보았다. 아직 젖어 있는 머리가 먼저 보인다. 이런 꼴로 달려오지만 않았다면, 태준섭 본부장처럼 냉정하게 끊어 내며 지시했더라면.
아니, 이 모습조차 전략이겠지. 치밀한 사람이니까.
“뭐가 불만이야. 내가 너처럼 징징거리지 않아서?”
준섭이 서슴없이 트레이닝 바지를 벗어 내렸다. 바라보던 우경의 눈이 커졌다.
“속옷 챙길 시간이 부족했거든.”
“아.”
우경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준섭이 그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뜨거움에 저절로 오그라드는 손을 억지로 붙이며 준섭이 말했다.
“속수무책은 나야. 재밌어하는 사람은 너고.”
거울 속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젖은 머리를 한 남자의 뺨이 불그스름해 보인다. 남자의 벌어지는 입술이, 그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뜨거운 숨이 좋아 몸이 저릿해졌다.
“어, 어떻게 해요.”
“좋으실 대로.”
* * *
눈을 깜박일 때마다 졸음이 깜박깜박 쏟아졌다.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고 등까지 쓸어내려 갔다. 깜박 우경이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준섭의 어깨와 가슴 사이에 반쯤 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나, 가야 해요.”
“응.”
그러면서 또 등을 쓰다듬었다. 둔부를 감싸는 손길에 우경의 바싹 붙은 몸이 긴장했다.
“늦으면…….”
우경이 준섭의 손을 털어 내며 상체를 반쯤 일으키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내밀한 통증이 등줄기를 따라 찌릿하게 몸을 휘돌았다. 찡그려지는 표정을 읽었는지, 준섭이 검지로 눈썹을 쓰다듬었다. 눈썹 끝에서 내려간 손가락이 귓바퀴를 지나 귓불 뒤쪽을 건드렸다. 점을 찾아 만지작거리는 손길을 떨어내듯 우경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 잠들 것 같아요. 더 늦으면 엄마가 많이 걱정하세요.”
우경이 침대 아래로 한 발을 뻗어 내리는데, 준섭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여기 잠깐 있어.”
침실 문을 열고 나갔던 준섭이 우경의 옷가지를 한 손에 쥐고 들어왔다. 다른 손에도 무언가 들려 있었다. 우경이 의아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데 준섭이 옷가지를 침대 위에 올려두고 다가섰다. 한쪽 무릎만 침대에 닿도록 구부리고 우경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들고 왔던 건 따뜻한 물로 적신 타월이었다.
“벌려 봐.”
우경이 무릎을 붙이며 고개를 저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조금 전까지 드러내고 있었으면서. 내내 만지게도 했으면서. 그래도 싫어.
“싫어요.”
준섭의 입가에 웃음이 비치다가 사라졌다. 손으로 무릎을 감싸자 우경이 힘을 꽉 주면서 수건으로 손을 뻗었다.
“내가, 내가…….”
“내가.”
준섭이 말을 끊고는 무릎을 둥글게 쓰다듬었다. 소름이 일어나는 허벅지를 무감한 얼굴로 훑어보고는 말했다.
“내가 벌리면 핥을 거야. 샅샅이.”
한번 그렇게 해 보라는 듯 준섭이 손등으로 허벅지를 느리게 쓸었다. 우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원하는 대로 무릎에 힘을 뺐지만 준섭은 검지를 세워 무릎 모양을 따라 둥글게 원을 그릴 뿐 감싸 쥐는 척도 하지 않았다. 도와줄 생각이 없으니 스스로 해 보라는 식이었다. 우경이 다시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톡, 둥글게 움직이던 검지가 무릎을 두드렸다. 신호처럼 우경이 조금 더 공간을 만들었다.
톡,
조금 더.
톡,
조금 더.
두드리는 지점에서 뜨거운 동심원들이 찰랑찰랑 퍼져 나가 이마 위까지 밀려왔다. 이제 충분하지 않냐고 소리라도 지를 것 같을 때 아래로 온기가 느껴졌다. 따뜻한 수건이 주는 안온감과 어색한 부끄러움이 동시에 몸을 쓸어내렸다.
“대체 왜 그래요?”
우경이 감은 눈을 뜨며 물었다.
“도망가지 말라고.”
수건을 바닥에 던져 놓으며 준섭이 팬티를 발아래로 끼워 넣었다. 쭉 끌어 올리며 말했다.
“엉덩이 들어.”
우경이 눈을 맞췄다. 준섭의 눈썹 끝이 들렸다가 떨어진다. 입기 싫어? 우경은 얌전히 허리를 들어 올렸다. 준섭이 팬티를 끌어 올리고, 허리를 받쳐 몸을 일으켰다.
“말 잘 듣는 강아지, 그런 거 기대하세요?”
푸훗, 준섭이 기막히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자만심은.”
“자만이라니, 저 말씀이세요?”
준섭은 답 없이 브래지어를 손 위에 올려놓고 만지작거렸다.
“그럼 네가 말을 잘 들어?”
우경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 같은 강아지, 안 키워.”
침대 위로 연보랏빛 레이스 브래지어가 툭 도로 던져졌다. 우경이 몸을 사리기도 전에 어깨가 잡혀 밀리고 등이 침대에 다시 붙었다. 다리를 잡은 준섭이 별 힘을 들이지도 않았는데, 몸이 확 아래로 끌어당겨졌다. 어지러워 우경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리를 최대치로 벌리게 하고서 준섭이 몸을 겹쳐 왔다. 속옷 두 겹을 사이에 두고 하체가 맞물렸다.
“해 볼래? 말 잘 듣는 거?”
손으로 눌러 바닥에 고정시킨 팔을 바둥거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한 손으로 양 팔목이 잡혔다. 준섭이 다른 손으로는 툭툭 가슴 끝을 당겨 올렸다. 수치심과 쾌감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우경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였다. 교묘하게 압박의 강도를 조절하던 하체를 갑자기 떨어뜨리더니 대신 까슬한 턱이 빨갛게 부푼 가슴을 문질렀다. 머리끝을 찌르는 통각에 몸을 비틀었지만 다음은 말랑하고 부드러운 입속이었다.
“잔뜩 예민해가지고는. 입으로만 건방이지.”
항의하고 싶은데, 감각이 너무 격렬했다. 잡힌 팔목은 느슨하게 누르는 것 같은데도 남자의 힘은 너무 압도적이어서, 어깨를 들썩일 수도 없었다. 그런 채로 가슴이 번갈아 쓸리기도 자근자근 씹히기도 그리고 부드럽게 달래지기도 했다. 차라리 꽉 움켜쥐어 주면, 세차게 흡입해 줬으면. 말하지 못하는 욕구를 삼키는 목구멍이 아프다.
놔줘……. 손을 휘저으려 하자 구속했던 팔은 풀어 줬지만 대신 양 가슴이 꽉 잡혔다. 우경은 하아 숨을 몰아쉬었다.
“아파. 싫어.”
“그래?”
단박에 놓고서 준섭은 우경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가슴을 들썩이며 우경은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입을 벌렸다.
“거짓말이지. 응?”
아랫부분을 천천히 제 것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오만하게 내리는 판단을 부정할 수 없었다. 혀로 적셔 놓은 젖꼭지에 가해지는 감질나는 터치가 전류처럼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붙어 있는 아래 부위가 자극받을 때마다 그리고 자극이 멈출 때마다 마치 그곳이 숨겨 둔 심장처럼 펄떡펄떡 뛰었다.
노골적인 의도를 가진 자극이었다. 온몸이 액체처럼 울렁이는데 갈증이 계속 일었다. 가슴에 붙은 손을 완전히 떼어 내자 아랫배에서 전해지는 흥분이 한층 선명했다. 바싹 마른 성대를 긁으며 신음이 터졌다. 차라리 가리고 있는 천 조각을 찢어 줘 버렸으면, 쾌감에 뇌가 잠식되는 것만 같았다.
틈 없이 붙어 자극당하는 하체와 다르게 타액이 번들거리는 가슴은 고스란히 공기에 노출되자 스치는 입김에도 귀까지 저려 왔다. 몸이 느끼는 변화를 모조리 알아챘다는 듯 준섭이 이번엔 여유롭게 손등으로 가슴을 쓰다듬었다.
우경이 갈증이 이는 입을 벌렸지만, 키스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다만 거리를 두고 내려다보며,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한 번 더 입을 벌렸을 때, 빨갛게 된 유두를 가차 없이 긁어내렸다. 목이 저절로 젖혀졌다. 목소리가 갈라질 만큼 육체가 데워졌는데 여전히 절정은 닿을 듯 잡히지 않았다.
우경은 준섭의 어깨를 두드리고 밀치다 힘을 다해 움켜쥐었다. 손톱이 깊이 박히는데도, 상처를 내며 긁어도 남자는 눈썹 한 올 움직이지 않는다.
제발, 아아, 싫, 싫어. 으응, 나 좀…….
아아, 제발. 나 좀, 나 좀 어떻게.
불분명한 의미의 말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떨어지면 붙으려 엉덩이를 들썩이고 붙으면 괴로움에 머리를 흔들었다. 장난처럼 가슴 끝을 엄지와 검지로 쥐고 둥글게 말아 비빌 때마다 그 손이 툭 하고 뽑듯이 떨어질 때마다 성대를 긁으며 소리가 나왔다. 채워지지 않는 극한의 자극에 이가 간지러워 맞물다가 벌리다가 혀를 긁어내고 씹었다. 어느새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이럴 거면서…….”
남자의 목소리가 웡웡 울려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벌어진 입속으로 무언가가 들어왔다. 손가락이 혀를 문지르고, 속살을 빙글 휘젓자 침이 고였다. 처음으로 아랫도리나 가슴이 아닌 부위에 가하는 접촉이었다. 우경은 우유병을 빠는 아이처럼 정신없이 깨물고 흡입했다.
“그만.”
젖은 손가락을 빼어 내고 준섭이 우경을 일으켰다. 바닥을 딛게 하고 세웠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남자의 맨가슴에 얼굴을 기대었다.
아직도 감춰진 부위가 의지와 상관없이 움찔거렸다. 준섭이 등을 두어 번 길게 쓸어내리더니 상체를 숙여 침대 위로 던진 브래지어를 집어 들었다. 가슴 끝에 직물이 닿자 우경은 으으, 소리를 삼켰다.
“아파?”
우경은 눈을 찡그렸다.
“좋아.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도, 줄곧 쓰라리면 좋겠어.”
“왜요?”
우경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생각날 거 아냐. 저 개자식이 이렇게 만들었지.”
우경이 억울함에, 부푼 입술을 긁어내렸다. 그 모습이 더 맘에 든다는 듯 준섭은 볼을 톡 두드리고는, 침대 위에 올려 두었던 나머지 옷가지를 집어 왔다.
갈무리되지 않은 감각 때문에 까닥하기도 어려운 우경과 다르게 준섭은 다시 솟아오른 욕망 따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침착하고 빠른 손길로 옷을 입혔다. 순식간에 바지를 입히고, 니트를 머리 위로 넣고, 팔, 이라고 지시하여 우경이 팔을 들게 만들었다. 머리칼을 매만져 주고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엄지손가락으로 깨끗하게 정리했다.
마주한 남자는 닦을 눈물 자국이나 정리할 감각의 잔상도 없이 말끔한 얼굴이지만, 우경은 이제 읽을 수 있었다. 태준섭이 깊숙이 넣어 둔 본능적 욕구를.
“말 잘 듣는 강아지라고 했나?”
비틀린 욕망이 도사린 검은 눈을 보면서 우경이 고개를 저었다. 제 질문을 고대로 다시 반복했다.
“말 잘 듣는 강아지, 그런 걸 기대하시나요, 라고 했어요.”
“성깔 있는 고양이 주제에 꿈도 야무지지.”
“그래서, 빠지셨나요?”
의외의 반문이었는지 준섭의 눈썹이 조금 찡그려졌다. 감추고 싶은 속마음이 있다는 얼굴. 우경은 다시 물었다.
“내가 무엇이든 상관없을 만큼, 정신없이?”
준섭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맞아. 통제 불능이지.”
준섭이 트레이닝복을 빠르게 껴입었다. 불룩 솟은 부위는 여전했다. 하지만 주도권은 여전히 준섭에게 있었다. 앞섶을 스치는 우경의 눈길까지 준섭의 시선에 통제당하는 기분이었다. 캡모자를 눌러 쓰면서 준섭이 물었다. 정사의 흔적 따위는 없는 얼굴이었다.
“통금 있어?”
통금 17분 전이었다. 우경은 포기한 상태로 답했다.
“12시.”
“신데렐라 통금이네.”
빈정거리고는 준섭이 자신만만하게 덧붙였다.
“맞춰 볼게.”
“가능해요?”
“충분히.”
거만하게 들린 턱선이 우경의 경쟁심을 부추겼다. 우경이 충동적으로 준섭의 스ㅤㅇㅞㅅ셔츠 허리선을 들추며 몸을 붙였다. 탄탄한 가슴이 드러나게 하고 작게 솟아오른 동그란 살덩이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혀끝으로 핥자, 남자가 숨을 참아 내는 것이 느껴진다. 여전히 깊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서…….
이만 떼어 내려는 듯 우경의 어깨를 잡는 순간 다른 편을 꽉 깨물었다. 윽 하는 소리는 새어 나오다가 끊어졌다. 그 소리가 좋아 꾹꾹 씹었다. 그러면서 다른 쪽은 검지와 엄지 사이에 넣고서 힘껏 굴렸다.
더 이상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마로 떨어지는 숨이 잦고 뜨거웠다.
우경은 입을 동그랗게 만들고는 젖은 부위 위로 후우 숨을 불어넣었다. 벽같이 단단히 버티고 있던 남자의 몸이 일순 흔들렸다. 참을 수 없다는 듯 비벼 오는 하체의 절박함을 느끼며, 우경은 보란 듯이 입과 손으로 잡았던 걸 놓았다, 이내 할퀴고 긁고 다시 혀로 굴렸다.
얼굴을 떼어 내고 빤히 올려다보자, 남자의 입술이 벌어졌다. 삼킬 듯 다가오는 입술에 스ㅤㅇㅞㅅ셔츠 밑단을 물렸다. 어리둥절하며 커지는 눈을 보며 가슴을 다시 깊게 빨아들이다가 꾹 깨물었다. 두터운 직물을 뚫고 남자의 흥분 섞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우경의 머리칼을 파고드는 손가락이 다급하고 뻣뻣했다. 남자의 심장이 눈으로 보일 만큼 거세게 뛰고 있었다. 조그맣고 단단한 돌기를 혀로 간질이고 입을 떼어 낼 듯하다가 다시 질근 깨물자, 아하. 짤막한 한숨이, 뒤이어 으흑, 하는 낮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경은 찌를 듯이 비벼 오는 중심을 향해 몸을 밀착시켰다. 제대로 돌려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그저 꽉 눌렀다가 뒤로 몸을 뺐다. 이어 여태 굴리던 양쪽을 손과 이로 잡아당겨 튕기듯이 놓아주었다.
남자의 붉어진 뺨에 손을 올렸는데 손이 떨려 온도를 느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시선으로 남자의 눈과 콧날을 더듬으며 입에 물려 있던 스ㅤㅇㅞㅅ셔츠를 빼내었다. 하아, 남자의 입술에서 뿜어지는 호흡에 열기가 서려 있었다. 우경 역시 뜨거운 액체를 머금었던 것처럼 입속 전체가 덥고 혓바닥이 아릿했다. 우경은 숨을 조금씩 내뱉으며 침착해 보이려 애썼다. 열망으로 붉어진 눈을 보며 말했다.
“5분 더 단축해 주실 수 있나요?”
우경이 먼저 걸어 나갔다. 잠시 후, 기막혀하는 준섭의 웃음이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