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태연한거짓말-14화 (14/23)

14장

우경은 느리게 샤워를 하고 더 느리게 보디로션을 발랐다. 스킨만 바른 얼굴에 투명한 팩 한 장을 붙이고서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는 시를 읊듯이 조용조용 노래를 불러 주는 가수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옆에 두었던 핸드폰을 한번 들었다가 날짜와 시각만 확인하고는 도로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오늘이 금요일.

한 주가 휘리릭 지나갔다. 마치 몇 배속으로 재생시키는 영상처럼 지나가서 금요일 밤이라는 사실이 약간 얼떨떨할 정도였다.

조간신문에 실렸던 태준섭 사진 한 장으로 가슴 졸였던 월요일 오전부터 고민으로 초조했던 오후까지 그 하루만 느리게 재생하기를 한 듯 길고 길었다. 양 뺨을 꾹 누르며 ‘수요일’이라고 했던 준섭은 수요일 저녁 시간에 문자를 보내왔다.

[미안합니다. 오늘 약속이 길어집니다.]

다음 날 우경이 본부장실에 들어갔을 때 준섭은 짤막한 지시와 검토에도 시간을 쪼개어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경까지 바싹 긴장이 되어 빠르게 대답하고 지시 내용을 되묻는 일 없이 기억하려 애썼다. 서둘러 나가려 하는데 준섭이 손가락을 움직여 툭 책상을 두드렸다. 쓱 우경을 훑어보더니 물었다.

“포켓 없습니까?”

“네?”

우경은 주머니가 없는 바지와 카디건 트윈 니트 차림이었다. 준섭이 가까이 와 보라 손짓하더니 양복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얼결에 내민 손에 쥐여 준 걸 보고 우경은 웃음을 터트렸다.

“디저트로 나온 건데, 몇 개만 팔라고 했더니 판매는 안 한다고 공짜로 줬습니다. 대신 포장 박스는 없다고.”

모양과 색이 조금씩 다른 납작 동글한 초콜릿 다섯 개가 금가루를 콕콕 박고서 쿠키나 빵을 포장하는 비닐 안에 들어 있었다.

“본부장님 드세요. 초콜릿 좋아하시잖아요.”

“당연히, 내 걸로 열두 개는 빼 뒀습니다.”

우경이 눈을 크게 뜨자 준섭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딱딱한 평소 이미지가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부드러운 눈웃음이 잡히는 얼굴이 너무 좋아 우경은 하마터면 손을 뻗을 뻔했다.

“어제 미안했습니다.”

초콜릿을 내려놓은 우경의 손을 덮어 쥐면서 준섭이 말했다. 우경은 저도 모르게 눈을 살짝 감았다. 손만 감싸 쥐고 있을 뿐인데 온몸을 끌어안는 것처럼 안정적인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런 표정이면 키스하고 싶어지는데.”

우경이 급히 손을 빼어 냈다. 붉어졌을지도 모를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숙였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이제는 낮고 허스키한 보이스가 매력적인 여자 가수의 노래가 나오고 있다. 우경은 화장대 앞에 앉아 팩을 떼어 내고 머리를 매만졌다. 조금 망설이다가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액세서리함을 열어 하나만 먹고서 비닐 포장 그대로 두었던 초콜릿을 꺼내었다. 펼친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올려 두고는 비닐 위로 톡톡 초콜릿 다섯 개를 차례로 두드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일어서서 침대 위에 던져두었던 핸드폰을 확인했다. 문자 알림음은 무의미한 스팸이었다. 문자창과 메시지 어플을 다 확인했지만, 준섭으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부재중 전화도, 만날 약속에 대해 일방적인 통보도 없었다. 당연한 일인데 마음이 비스킷 조각처럼 툭 소리를 내며 귀퉁이가 부서지는 것만 같다.

10시 5분.

액정 숫자만 멍하니 보면서 떠도는 잡념이 가라앉기만 기다릴 뿐이다.

태이섭 상무실에 갔던 날 이후 준섭의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수요일 약속을 취소하는 문자를 받았을 때는 느닷없이 날아온 성적표의 엉망인 숫자를 확인하는 것처럼 당황스럽고, 동시에 실망하고, 그러면서 실망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준섭이 우경과 이제 거리를 두는 건가 싶었지만 초콜릿을 내밀던 분위기는 지극히 친밀했다.

믿고 싶을 대로 믿으면서 주말이 오기 전엔 연락을 주겠지, 그런 기대로 오늘 아침부터 이 시간까지 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우경은 핸드폰을 화장대 위에 엎어 두고, 준섭이 줬던 초콜릿 봉지를 벌려 동그란 초콜릿 하나를 끄집어냈다.

입술 사이로 밀어 넣고 가만히 다물자 초콜릿이 겉면부터 천천히 녹기 시작했다. 혓바닥 아래로 침이 고였다. 달콤함이 입속 가득 퍼지는데 눈가가 쓰라려 왔다.

고작 하루를 기다리고는 지쳐 버린 얄팍한 인내심이 한심하다.

몇 번이고 태이섭과의 대화를, 그 대화를 전하는 자신과 준섭의 대화 장면을 반복해서 떠올렸다. 이섭의 어조와 표정, 그를 전해 듣는 준섭.

진창에 빠질 거라는 이섭의 경고에 우경이 알 수 없는 다른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대로 자연스레 제자리로 돌아가는 일이 최선일 테고, 이성적인 준섭은 그 최선을 이미 실행에 옮겼는지도 모르겠다.

우경은 남은 초콜릿을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혀 위에 둔 초콜릿은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도 형체도 없이 녹아 버렸다. 달큰하고 뻑뻑한 감촉이 남아 있지만, 그 역시 곧 사라질 흔적이다. 두 사람의 관계 같아 다시 조금 서글퍼진다.

“우경아.”

문 밖에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우경은 침을 삼키고는 답했다.

“네.”

“나와. 드라마 시작했는데.”

“네, 나가요.”

그제야 샤워 전에 요즘 엄마가 심취한 드라마를 같이 보기로 했다는 걸 기억해 냈다. 문을 열고 나가니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이게 다 뭐야아?”

우경의 엄마는 거실 탁자 위에 소주병을 놓고는, 한잔해야지이, 하며 소주잔을 흔들어 보였다. 소주병 옆에 있는 노릇노릇 바삭하게 구운 먹태 구이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우경은 깎아 둔 배 한 쪽을 찍어 아버지께 내밀었다.

“얘, 주도를 지키자. 술부터 한 잔 하고 안주.”

엄마가 소주잔을 급히 채워 아버지께 드렸다. 아버지는 양손에 배와 소주잔을 든 상태로 건배를 했다.

소주는 쓰고, 배는 달았다.

소파에 세 가족이 나란히 앉았지만 드라마는 엄마 혼자 몰입했다. 우경은 아버지 잔을 한 번 더 채워 드렸다. 먹태에 마요네즈와 와사비 간장을 섞은 소스를 넉넉하게 찍어 아버지 입에 넣어 드리고, 엄마에게도 드렸다. 자꾸 백설이가 낑낑거려 무릎 위에 올려 두고서 배를 조금 잘라 입에 넣어 주었다. 이 맛이 아니라는 듯 백설이가 배 조각을 혀로 밀어냈다.

“에고공, 먹태 냄새가 아니에요?”

백설이가 킁킁거리며 아빠 무릎 위로 올라갔다. 고개를 들고서 초롱초롱 아빠 손에 들린 먹태만 쳐다보았다.

“이거 먹을래?”

아빠가 먹태 한 조각을 내밀자 냉큼 받아 먹고는 다시 엄마에게로 건너갔다.

“언니한테 가. 엄마는 없어.”

엄마가 먹태 대신 뽀뽀만 잔뜩하고는 백설이를 다시 우경에게로 보냈다. 배 조각을 코앞으로 건넸지만 백설이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한 조각 맛을 본 먹태에 대한 의지는 아직 불타오르고 있는 중이다.

“먹태 먹어야겠어요?”

우경이 결국 먹태를 조그맣게 끊어 백설에게 내밀었다. 동그란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다. 앞발은 자동으로 들려 올라갔다. 기대감으로 벌어진 입을 보면서 조금 놀릴까 하다가 순순히 먹태 조각을 넣어 주었다. 순식간에 마시듯이 먹어 치우고 백설이 다시 앞발을 들어 올렸지만, 우경은 단호하게 손을 저었다.

“이건 짜서 더는 안 돼. 내일 북엇국하면 줄게.”

마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시무룩하게 쳐다보는 백설이 머리를 길게 쓰다듬었다. 우경도 백설이에게 주고 남은 먹태에 소스를 찍어 입속에 넣어 씹었다. 바삭하며 부스러지는 먹태가 고소하고, 부드럽게 혀를 감던 소스는 톡 쏘는 와사비 맛과 어우러져 저절로 침이 괴였다.

“엄마 먹태 짱. 파는 거 보다 맛있어. 저번에 엄마랑 맥주 먹으러 갔던 그 호텔 바 안주만큼 맛있는데?”

“내가 또 요리는 좀 해. 한 번 보면 ㅤㅊㅘㄱ 하고 레시피가 떠오르잖아?”

“우경이 네 엄마가 손맛이 좋아.”

엄마는 아버지 칭찬에 자화자찬을 더했다.

“손맛이 아니라, 센스가 좋은 거야. 내가 미슐랭 가이드 음식점도 안 가 봐서 그렇지, 가 보면 또 흉내 낼 수 있거든?”

우경은 홀짝 잔을 비웠다. 세 잔째다. 목이 뜨끈해졌는데 한 잔만 더, 라고 생각하면서 새 병을 비틀어 열고는 잔을 채웠다.

“이야아. 쟤 좀 봐. 어쩜 양복이 모델보다 잘 어울리네. 저 배우 이름이 뭐랬지?”

엄마의 감탄에 화면을 보니 공유의 자리를 위협하는 남자가 풀샷으로 잡혔다. 촬영 감독의 혼신을 바친 앵글 덕분인지 남자 배우 홀로 스토리와 상관없이 런웨이 모델처럼 보였다.

“저번에도 말해 드렸는데. 현…….”

“아유, 쟤 엄마 좋겠다. 아니야. 쟤 여친이 좋지 엄마가 무슨 상관이야. 사람이 태어나서 저런 남자랑도 한번 사귀어 보고 그래야지. 기럭지 예술. 슈트 핏 환상! 상체 근육이 딱 내가 좋아하는 정도야. 저기서 팔 근육만 펌핑되면 양복 핏 확 죽는다? 쟨 어깨 자체가 벌어졌네. 딱 좋을 만큼. 다리도 세상에, 분위기 넘 고혹적이지 않니? 냉미남이야. 웃는 건 좀 순해 보이기도 하고 응?”

이름은 안중에도 없다. 공유도 한참 만에 외우셨으니……. 그저 슈트발 최강, 피지컬 투로 기억될 배우이다. 엄마의 끝없는 찬사에 아빠가 허허 웃었다. 엄마가 그제야 아빠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듯 입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맞잖아아, 우경이 너 전에 저 배우 좋다 그랬잖아? 그치?”

소주 두 잔에 발그레해져서는 아빠를 흘끗흘끗 살피면서 엄마는 괜히 우경을 끌어다 붙였다.

“우리 우경이 저런 남자랑 딱 어울릴 텐데, 그쵸, 여보오?”

“그런데, 인상이 좀 차가워 보이지 않아?”

“아니야. 쟤 웃으면 순해. 웃을 때가 진짜거든.”

“우경이, 너는 저런 남자가 좋아?”

아버지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우경이 까르르 웃었다.

“저는, 아빠 같은 남자가 좋아요. 아빠가 저 배우보다 훨씬 멋져요.”

“아오, 얘. 네 아빠 진짜로 믿는다. 응?”

“왜요, 아빠 진짜 멋있잖아. 아빠도 슈트 핏 좋고 미남이고 선생님이고 시인이고 완전 우아하네.”

“하긴 내가 편지에 홀딱 반해서는. 아주 큰 병원 하는 집 의대생을 거절했잖아. 그 남자가 나 좋다고 얼마나 찾아오고 그랬는데.”

아빠가 오, 그러셨어. 눈을 찡긋하자 엄마가 샐샐 웃으면서 아빠 옆구리를 쿡 두드렸다.

“내가 그래도 연남균 씨한테 홀라당 빠져서 얼굴도 마주 안 봤어요.”

엄마의 애교를 들으며 우경은 잔을 마저 비웠다. 팔이 뻣뻣해지는 느낌이 꽤 취한 것 같았다.

화면에는 상체 근육이 완벽하고 다리는 길고 곧은, 고혹하고 차가운 매력이 있으며 미소를 지을 때면 연약미가 있는 배우가 클로즈업되어 있다.

태준섭 그 남자는, 어깨는 더 넓고, 부피도 더. 근육의 짜임새는 견고하고, 턱선은 완강하고 웃을 때는…….

홀짝, 우경은 떠오르는 남자의 슈트 핏을 지우며 잔을 비우고, 다시 홀짝, 눈이 접히는 순한 웃음을 짓는 남자의 얼굴을 지우며 잔을 비웠다. 어지럽다. 그러고 보니 엄마의 자랑인 먹태는 조그만 조각 하나 외엔 손도 대지 않았다.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니 눈앞에 배 한 쪽이 보였다. 응? 하는 우경을 향해 아빠가 웃었다. 드라마에 빠진 엄마와 다르게 아빠는 우경을 계속 살핀 눈치였지만 왜, 무슨 고민 있어? 라는 걱정 대신 배를 권했다.

“시원해. 한 쪽 더 먹어.”

눈이 마주치자 아빠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경은 안경테 너머 아빠의 웃는 눈을 마주하다가 괜스레 무안해져서 시선을 돌렸다. 배를 와작 씹으며, 한 손으로 달아오른 뺨을 감쌌다.

드라마가 끝나기 전부터 꾸벅꾸벅 조시던 아빠와 엄마가 먼저 안방으로 들어가고 졸졸 따라가던 백설이 아무래도 먹태에 미련이 남았는지 다시 우경에게로 왔다. 먹태 부스러기를 핥으려는 백설에게 손을 저었다.

“안 돼애.”

답삭 안았더니 백설이가 턱을 핥기 시작했다.

“간지러. 그만해.”

우경은 취기로 둔해진 손을 휘저었다. 한참 백설이를 피해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다 갑자기 기운이 빠져 소파에 기대었다. 말랑말랑한 백설이 발바닥을 만지며 멍하니 화면 꺼진 TV만 바라보았다.

몇 시나 되었을까. 태준섭은 집에 들어갔으려나.

쓸데없는 생각이다. 우경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배 접시 위에 먹태 부스러기가 남은 접시를 포개고 그 위로 소주잔 세 개를 올렸다. 주방으로 가져가서 접시와 소주잔은 싱크에 넣고, 빈 소주병은 재활용품을 모아 두는 박스에 두었다. 먹태 부스러기에 진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마지막 순간까지 꼬리를 흔드는 백설이를 데리고 우경은 침실로 들어갔다.

취기가 오른 몸이 노곤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눕자마자 눈을 감았다. 깜박 잠이 들었나 싶은 순간 위잉, 소리가 울렸다.

위잉 위잉 진동 소리에 눈을 떠 보니 화장대 거울이 푸른빛이다.

위이잉, 진동이 한 번 더 푸르게 퍼졌다. 눈을 깜박거리다가 우경이 벌떡 일어나 화장대 앞으로 갔다.

[본부장님]

화면에 뜬 글자에 눈이 번쩍 떠졌다.

“네, 여보세요?”

- 자는 거 깨웠습니까?

아침처럼 단정한 목소리다. 잠이 덜 깨어 그런 건지 핸드폰 주위로 희고 푸른, 둥그런 빛이 뻗어 나와 우경은 그 속에 들어서 있는 것 같다. 우경은 표시가 나지 않게 송신구를 막고 목을 가다듬었다.

“아니요.”

- 안 자고 뭐 해요, 이 시간에.

“으응…….”

우경은 눈을 부비고 액정 시각을 확인했다. 11시 41분이다. 우경이 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자 준섭이 웃었다. 웃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웃는 얼굴이 연상되었다. 초콜릿을 쥐여 주던 때처럼 순해 보이는 얼굴이다.

- 이만 자요.

전화를 끊으려는 준섭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본부장님.”

- 응?

“뭐…… 하세요?”

- 나? 우경 씨한테 전화 걸었잖아요.

“아……, 그렇구나.”

준섭이 또 웃나 보다. 아니, 눈만 감으면 준섭의 웃는 얼굴이 보이는 걸까. 아무래도 소주 다섯 잔에 취했나 보다.

- 약속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네…….”

- 내일은 라운딩 있고.

“네…….”

- 모레는 점심 약속 소공동. 저녁은 송백재.

“아……. 네…….”

준섭이 이번에는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

- 왜 대답이 그렇죠?

“네?”

- 혹시.

“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귓가에 솜털이 바싹 일어섰다. 목덜미로 소름이 조르륵 내려왔다.

- 보고 싶은데. 볼까?

“아.”

- 왜 이번엔 네, 가 아닙니까.

“아, 아, 네네.”

준섭이 푸훗 하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화끈 열이 올랐다.

- 하늘채 아파트 앞입니다.

“네?”

- 편의점 보이네요.

“내려갈게요.”

- 이 시간에 괜찮습니까?

“아마, 네네.”

준섭이 묻는 말에 답하면서 우경은 원피스 잠옷을 벗어던졌다. 잡히는 대로 스웨터를 껴입고 레깅스를 발에 넣고는 쭉 끌어올렸다. 선택할 여지도 없이 제일 가까운 곳에 둔 머플러를 둘둘 목에 두르고 반코트를 덧입었다. 몸은 둔한데 마음은 한없이 바빴다. 급히 움직이다가 쿵 발끝을 화장대 의자에 찧어서, 아욱. 비명을 낮게 지르고는 콩콩 토끼발로 서너 번을 뛰었다.

같이 나가자고 꼬리를 흔들며 쳐다보는 백설이에게 우경이 몸을 기울여 말했다.

“백설이, 언니 다녀올게. 금방 올 거야. 캉캉 짖으면 안 된다. 응?”

조그만 머리를 손바닥으로 쓱쓱 쓸어 주자 백설이는 까맣고 동그란 눈을 맞췄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꼬리를 작게 흔들었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보고서 핸드폰을 코트 호주머니에 넣으려는데 통화 중이라는 표시가 아직 떠 있었다.

“아.”

우경이 핸드폰을 들고 조금 난감한 기분이 되어 버렸는데 준섭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모든 걸 느긋하게 듣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였다.

- 연우경. 빨리 와.

밤 기온은 한겨울처럼 차가웠다. 찬바람을 맞으며 편의점으로 달려가는 동안 심장이 우두두두 말발굽 소리를 내며 뛰는 것 같았다.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섰다. 오후나 저녁 시간이면 중·고등학생들 몇 명이 머리를 맞대고 컵라면이나 삼각김밥을 먹고, 밤 시간이면 맥주캔을 들이켜는 아저씨들이 앉아 있는 동그란 테이블은 태준섭이 등장하는 배경으로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준섭이 전화로 ‘편의점’이라고 했을 때 우경은 속으로만 조금 웃었다. 하지만 긴 트렌치코트를 덧입고 있는 남자는 오전보다 오후보다 우경의 머릿속 저장되었던 어떤 모습보다 매력적이었다. 몇 미터 거리를 두고서 우경은 멈춰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흰 입김이 느리게 퍼져 나갔다.

준섭이 멈춰 서 있는 우경에게로 걸어왔다. 움직임에 따라 트렌치가 약간씩 흔들렸지만 태준섭의 걸음은 평소처럼 곧고 강건한 직선의 느낌이다. 처음 TK 로비에서 보았을 때에도 그랬다. 목표 지점을 향해 흔들림 없이 걷는 걸음걸이조차 우경은 마음을 뺏겼다. 우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로 발만 꼼지락거렸다. 화장대 의자에 찧은 발끝이 스니커즈 속에서 욱신거렸다. 다가선 준섭의 구두 끝만 보다가 물었다.

“왜 오셨어요?”

숨도 안 쉬고 달려온 것에 비하면 퉁명스러운 물음이었다. 준섭이 답 대신 손을 들어 우경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고개를 들자,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는 머플러를 손으로 끌어 내렸다.

준섭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가까이 얼굴을 붙여 왔다.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잡혔다.

“술 마셨습니까?”

편의점 간판 불빛 아래에서도 취기로 달아오른 뺨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톡 뺨을 검지로 두드리고 귓불을 서너 번 간질였다. 우경이 움츠리자 말랑한 귓불을 검지와 엄지 사이에 넣고 꾹꾹 눌렀다. 의도가 있는 동작이 아닌데도 가슴부터 간질이기 시작한 감각이 곧장 아랫배까지 뻗어 갔다.

우경이 귓불을 내어 준 채로 준섭을 빤히 쳐다보았다. 준섭에게서도 희미하게 알코올향이 났다. 하긴 이 시간까지 이어진 약속이라면.

우경의 시선을 읽었는지 준섭이 묻지 않은 질문에 답했다.

“나는 와인 좀 마셨어요. 통화나 할까 했는데.”

준섭이 고개를 조금 더 기울였다. 속삭이는 듯한 말투였다.

“목소리를 들으니 보고 싶어져서.”

“거짓말. 미리 와 있었잖아요. 통화했을 때 벌써 하늘채 아파트라고.”

준섭이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취해도 머리는 돌아가네. 거짓말 못 하겠어.”

우경이 무안하여 시선을 낮추고는 툭툭 발끝을 바닥에 굴렀다. 침착하고도 싶고 약간은 새침을 떨고 싶기도 한데 마음이 문제였다. 눈치 없이 자꾸 부풀어 올랐다. 술 때문이다.

“혼술 좋았습니까?”

“혼자 아니고, 엄마 아빠랑요. 저는 소주랑 먹태랑 배 먹었어요. 엄마가 좋아하는 드라마 보면서요.”

“아하.”

준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경 씨는 좋아하는 드라마 아니고?”

“저는 몇 번 안 본 거라서……. 아빠는 강제 시청이고요. 엄마도 드라마 줄거리보다는 거기 나오는 남자 배우에 꽂히셔서. 한참 공유만 무한 재생 반복하시다가. 최애 피지컬 투 탄생했어요.”

준섭의 눈썹 끝이 조금 올라갔다. 눈이 마주치자 푹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터트린 웃음이 어색했는지 준섭이 검지를 들어 제 눈썹 위를 만지작거렸다.

우경은 그러는 준섭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면서 숨을 들이켰다. 체향이 콧속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어지러울 만큼 무겁고 짙은 향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향에 안정감이 느껴졌다. 호흡에 섞여 들어오는 남자의 체향이 마치 어중간하게 비워져 불안하게 기우뚱거리던 몸속 어느 부분을 꽉 채워 주는 기분이었다.

“12시 통금이면 지금 뛰어가도 늦겠는데.”

“음…….”

우경이 답을 잠시 미루었다. 나올 때도 아무 눈치를 못 채신 거 보면 깊이 잠드셨을 가능성이 높았다.

“엄마 아빠 주무세요.”

“그럼 30분만 통금 어깁시다.”

내민 손을 얼결에 붙잡았더니 준섭이 코트 속 주머니에 잡은 손을 집어넣었다. 우경은 주위를 흘끗 살폈다. 늦은 시각이어서 사람들도 거의 없고,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는 주민을 만날 확률도 희박했지만 아무래도 집 근처라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산책이나 할까. 달밤이라 좀 우습겠지만.”

“전, 좋아요. 산책로 있어요.”

너무 좋아하는 건가 싶었지만 입술 끝이 저도 모르게 올라가 있었다. 우경이 올라간 입술 끝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저기 저쪽. 조금만 걸으면요.”

깊어진 가을의 밤은 차고 상쾌했다. 그러고 보니 붉게 물들었던 단풍잎들이 절반은 넘게 떨어져 있다. 바람에 마른 낙엽이 바닥을 스스스 소리를 내며 굴렀다.

“본부장님 차는 어디에 있어요?”

“근처에서 대기 중.”

준섭의 걸음이 약간 빨라졌다. 준섭의 속도를 맞추느라 숨이 가쁘다 싶을 즈음에 우경은 준섭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간 손을 조금 움직였다. 준섭이 걸음을 멈추고 우경을 내려다보았다. 이유 없이 목이 타는 기분이다.

“추워?”

준섭이 우경의 머플러를 다시 끌어 올려 코끝을 가렸다. 귀도 가려 주려다가 귓불을 다시 만졌다. 간지럽기도 하고 알알하기도 한 감각이 목덜미까지 퍼져 나갔다. 귓등이 따끈하게 열이 올랐다. 준섭이 아쉬운 듯 귓등을 검지로 서너 번 쓰다듬고는 머플러로 귀를 가렸다.

“그런데요…….”

준섭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우경이 물었다.

“응?”

“왜 여길…… 자꾸 만져요?”

은밀한 부위도 아닌데 말하면서 괜히 부끄러워졌다.

“귓불이요.”

“아…….”

준섭이 웃었다. 우경은 그 웃음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딱딱한 이미지와 다르게 회사에서 준섭은 생각보다 자주 웃는 편이었다. 회의 중에 다른 임원들은 하루 한 번도 웃지 않는 사람처럼 준엄한 얼굴로 앉아 있어도, 준섭은 그들을 향해 미소를 자주 보였다. 그 웃음은……, 분명 그 웃음도 준섭의 웃음인데 준섭의 것이 아니었다. 비즈니스적 매너나 혹은 상대를 압도하기 위해 구사하는 어법이나 제스처처럼 미소나 웃음 역시 전략적 무기 중 하나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그래서 준섭은 그런 웃음을 지을수록 더 단단하고 견고한 이미지의 갑옷을 입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우경과 친밀하게 눈을 맞추고 웃는 웃음은 약간은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비어 보이기도 하고, 연약해 보이는, 좀체 드러내지 않는 내부의 깊숙한 어느 부위를 희미하게 비추는 반사경 같기도 했다.

준섭이 웃음을 거두지 않고서 물었다.

“귓불. 내가 자주 그러나?”

“네…….”

“귀여워서 그래.”

“네?”

“점이 귀여워서.”

“아. 그런 말은 좀 적응이…….”

준섭이 다시 웃었다. 머플러 속으로 손을 넣어 점이 있는 부위를 쓰다듬고 귓불을 꾹꾹 눌렀다.

“말랑말랑 촉감도 좋고. 만지면 기분이 좋아져.”

“백설이 발바닥처럼, 그런가요?”

“응?”

“저도 우리 집 강아지 발바닥 만지는 거 좋아하거든요. 말랑말랑 촉감도 좋고 냄새도 좋아서 코에 대고 킁킁거리다가 만지다가 그래요. 잡념이 훅 사라져요. 귀찮아하면서도 발바닥 내어 주고 있는 백설이도 짱 귀엽고. 막 더 사랑스럽고.”

“백설이, 별명은 백설 공주?”

“네.”

하, 준섭이 소리를 내며 짧게 웃었다.

“그런데, 그걸 이섭이가 어떻게 알아?”

화를 내는 투는 아닌데 긴장으로 목이 뻣뻣해졌다. 우경이 당황스런 시선을 낮추었다.

“응?”

우경이 슬쩍 준섭을 한 번 살피고서 답했다.

“사진 봤어요. 엄마가 백설이 미용하고 예쁘다며 사진 찍고, 그러면서 또 너 좋아하는 발바닥이라고 발바닥 사진을 찍어 보내 주셨거든요. 회사 로비 앞에서 그 사진 보고 있는데 태이섭 상무님이 보시고…….”

거짓말하는 것도 아닌데 변명을 길게 늘이는 것 같아 우경이 단호하게 덧붙였다.

“정말이라고요. 백설이 본 적도 없고. 제가 보여 드린 것도 아니고.”

“알았어.”

준섭이 귓불로 다시 손을 뻗었다. 손톱으로 긁다가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힘을 주어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우경이 참을 수가 없어 고개를 옆으로 빼었다.

“가만.”

준섭이 다가서며 귓가에 속삭였다. 간지럽기도 아릿하기도 한 감각을 견디며 우경이 준섭을 올려다보았다.

“백설이 같네.”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 준섭이 손을 떼었다.

준섭의 머리 위로 통통해지기 시작하는 반달이 보였다. 아파트 단지 둘레로 만들어진 산책로에는 키가 큰 나무 사이로 가로등이 밝혀져 있었지만, 벤치 아래에 밤 그늘이 짙어 가끔 연애에 열중한 중고생들이 숨어드는 장소이기도 했다.

주위를 살피던 우경이 어색하게 준섭과 눈이 마주쳤다. 이유없이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피하며 스니커즈 앞 코를 바닥에 대고 앞뒤로 까닥거렸다. 고개를 약간 숙이자 머플러가 콧등을 감쌌다.

“저…….”

우경이 무언가 말하려 입을 벌렸을 때, 준섭은 머플러를 순식간에 턱 아래까지 끌어 내리고는, 우경의 얼굴을 완전히 드러나게 만들었다.

시선이 천천히 그리고 오래 머물렀다. 속눈썹 하나하나까지 세필 붓으로 다시 덧그리는 듯한 시선이었다. 마치 얼굴을 보러 왔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의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취기가 늦게 올라오는지 뱃속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눈앞이 이지러졌다가 선명해지곤 했다. 둥글게 퍼지는 달빛처럼 준섭을 이루는 외곽선이 흐려 보였다. 우경이 붉어진 얼굴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을 때, 준섭은 우경의 머플러를 바로잡아 주었다. 혹시나 붙잡고 키스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예의 바르고 신중한 동작이었다.

“맘 같아선…….”

준섭이 말을 끊고는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먹태와 배, 그리고 소주?”

“네? 아, 네네.”

“맛있었어?”

“네. 소주랑 배가 의외로 잘 맞았어요. 먹태는 엄마가 처음 시도했는데요. 전에 엄마랑 같이 근처 호텔 맥주 바에 간 적이 있거든요. 만 원에 무제한 맥주라고 엄마가 흥분해서 같이 가자 하셨는데, 결국 한 잔씩만 먹었어요. 너무 시끄럽고 취한 아저씨들도 많고. 그래도 거기 먹태 안주는 최고였어요. 엄마가 그거 따라 만드셨는데 맛있었어요.”

우경이 하는 말을 들으며 준섭이 피식 웃었다. 아. 우경이 툭툭 제 입술을 두드렸다.

“오늘 저…… 너무 길게 떠들죠?”

“소주랑 먹태, 먹어 보고 싶네.”

준섭이 혼잣말처럼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닌데…….”

우경이 말을 우물우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저 취해서요. 지금은 밤바람 쐬고 많이 깼는데 그래도 좀 취했어요. 아무 말이나, 막 말하는 거 같아요.”

“얼마나 마셨길래.”

“소주 다섯 잔?”

“꽤 마셨네?”

“네.”

준섭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걸어왔던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우경이 붙어 서서 따라 걸었다.

“편의점 들릅시다.”

준섭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편의점에서 준섭이 계산한 건 아이스크림 다섯 개였다. 원뿔 모양 아이스크림을 담은 비닐을 들고서 둘은 나란히 우경의 아파트 동까지 걸어갔다.

준섭이 동 건물 앞에서 비닐봉지를 우경의 손목으로 옮겨 주며 말했다.

“일요일 밤에 봅시다.”

“네.”

“식사는 같이 못 합니다.”

“네.”

돌아서려는 준섭을 우경이 불러 세웠다.

“본부장님.”

“응?”

“이거요, 아이스크림. 잘 먹을게요.”

“그건 먹으라고 사 준 게 아니고.”

“네?”

“부모님이 물으시면 핑계.”

편의점 다녀왔다는 핑계를 뒷받침할 소품이었다. 준섭이 뒤로 한 걸음 움직이며 손을 들었다. 우경이 손을 들자 손목에 매달린 비닐이 바스락거렸다. 우경이 먼저 돌아섰다. 하지만, 통로 입구로 들어가 비밀번호를 누르다 말고 도로 뛰어나갔다.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는 준섭 앞으로 뛰어오는 우경을 보고서 준섭이 눈을 크게 떴다. 우경은 숨도 고르지 않고 말했다.

“나 취했거든요.”

“그런데요.”

“나 밥 안 사 줘도 되고, 풀코스 먹을 시간 없어도 되고, 솥밥 먹을 시간조차 없어도 되고요.”

준섭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듯 가만히 우경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취해서 말이 헛나가는데도 익숙한 표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며 저를 직접 자르시라고 요구할 때도, 반도체 현장을 가게 되었을 때 처음 연설문 내용을 설명하면서도 보았던 얼굴이다. 태준섭은 우경을 재촉하거나 다그치는 대신 귀 기울이며 기다려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우경은 태준섭의 그런 간극이 좋았다.

바람이 차서 그런지 목이 아프고 가슴이 뻐근해 왔다. 우경이 하아, 숨을 뱉어 내고는 말했다.

“나 12시 넘어서도 잠깐 내려올 수도 있고요.”

“응.”

“그러니까, 아……. 그러니까.”

우경은 손을 들어 어질거리는 눈을 꾹 눌렀다. 무슨 사이인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준섭에게 우경은 단순한 섹스 파트너 이상이 아닐 텐데, 이 밤에 찾아와 줬다는 것만으로 너무 들떠 버렸다. 다른 남자들과 연애를 한두 번쯤 했더라면 좀 더 능숙하고 세련되게 굴 수 있었을까.

완전히 엉망진창이다. 우경이 마구 쏟아 낸 말을 어설프게 마무리 지었다.

“여기 근처에 야식 파는 가게도 있어요. 어묵도 맛있고 우동도.”

준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사 드릴게요. 오늘 말고 다음에요.”

“그럽시다.”

우경이 고개를 숙였다. 준섭이 어깨를 부드럽게 잡는 순간 안녕히 가세요.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고개를 지나칠 정도로 푹 숙여 인사를 했는데, 얼굴을 들 때까지 준섭이 어깨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저…….”

우경이 스니커즈로 바닥을 톡 가볍게 건드렸다. 준섭이 이젠 양어깨를 잡았다. 어? 하기도 전에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입술은 콧등을 가볍게 누르고 떨어졌다. 우경이 무언가 말하려 입을 벌렸다가 동그랗게 오므렸다. 마치 처음 입술을 맞댄 것처럼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태준섭과 첫 키스라면, 다른 거 다 아니고, 오늘을 기억할 거야. 그런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렸다. 홀로 시작한 연애 감정이다.

우경은 다가왔던 만큼 빠른 속도로 돌아서서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 비닐이 찰랑찰랑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통로 입구 비밀번호를 다다다닥 누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들어와 침대에 뻗어 누울 때까지, 백설이를 꼭 안고 발바닥 냄새를 맡기 전까지 미친 듯이 숫자를 세었다.

숫자를 세는 일에 열중하여 제가 저지른 모든 수치를 반복해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543, 544, 545…….

우경은 눈물이 차오르는 눈을 꼭 감았다. 준섭에게 연애를 하자고 일방적으로 조른 셈이다. 몇 번 입을 맞추고 섹스를 하더니 정신이 나가 버렸다. 얼마나 황당해할까.

549.

위이잉 우경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받을 용기가 없어 뒤집어 두었지만 진동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590.

우경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 연우경 씨.

준섭의 차분한 목소리가 두려워 어깨가 움츠려졌다.

“제가 했던 말이요, 한 귀로 흘려 주세요. 너무 졸리고 정신이 없어서요. 아무래도 취해서요……. 제가 그렇게 사리 분별이 떨어지는 사람은 아닌데요.”

준섭이 지지부진한 우경의 변명을 깔끔하게 잘랐다.

- 먹태도 먹고 싶고, 어묵도 먹고 싶네요. 소주도 마십시다.

이런저런 늘어놓은 아무 말 대잔치를 준섭의 언어로 들으니 창피함에 발끝이 오그라들 지경이었지만, 심장이 팡팡 고무공처럼 튕겼다. 아무래도 알코올에 젖은 뇌가 자제라는 기능을 상실한 것 같았다.

정말요? 정말? 하고 물을 것만 같아 우경은 이불을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 그리고.

준섭의 말에 우경은 이불을 꽉 깨물며 귀를 기울였다.

- 밥은 못 먹어도 섹스는 합시다.

우경의 벌어진 입에서 이불자락이 떨어졌다.

“네.”

답을 하고서 우경은 스스로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준섭의 웃음이 동시에 귀를 파고들었다.

- 잘 자요.

“네. 본부장님도요.”

준섭은 한 번 더 웃었다. 나는 그러지 못할 것 같지만 말입니다, 하는 말은 웃음에 섞여서 정확하지 않았다.

* * *

11월의 일요일 밤인데, 나른하게 데워진 몸은 늦여름 오후 같다. 우경은 천천히 눈을 떴다. 준섭의 어깨를 베고 코끝을 목덜미에 묻고 깜박 졸았던 모양이다. 초점이 흐린 눈으로도 준섭의 눈동자는 선명하다. 웃고 있구나. 우경의 이마를 쓸어 주는 손길보다 더 부드럽게, 준섭의 눈이 웃고 있었다.

“나 잠들었어요?”

등을 감싼 억센 팔이 주는 안온함이 늘 체력적으로 한계까지 몰렸던 우경을 일시에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랬나. 몰랐는데…….”

“거짓말. 보고 있었으면서. 나 잠들면 깨워 주기로 해 놓고선.”

“아직 시간 괜찮아.”

준섭이 우경의 콧등에 입을 가볍게 맞췄다.

“5분만 더 있어. 데려다줄게.”

이마 위로 흘러내린 준섭의 머리칼은 이제 물기가 다 말라 있었다. 오늘도 우경이 도착하기 직전에 샤워를 마친 듯 보였다.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우경이 물었다.

“슈트 입은 본부장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요, 이렇게 흐트러진 머리칼은 보면서도 상상이 잘 안 돼요.”

“그런가.”

“좀 부드러워 보이는 이미지도 좋은데……. 왜 매번 슈트를 비슷한 색으로만 입어요? 사진 정리하다 보면 다 똑같은 거 같아. 옅은 색 슈트 입어 보면 어때요?”

“응?”

“좀 더 환하게.”

“생각해 볼게.”

준섭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손을 끌어내려 손톱에 입을 맞추며, 우경의 제안에 건성으로 답했다.

“하운즈투스 체크 같은 거요. 브라운…….”

우경이 얼굴을 조금 떼고는 준섭을 쳐다보더니 그레이가 낫겠어요. 말을 고쳤다.

“그레이톤으로 하운즈투스 체크에 약간 화려한 느낌의 타이.”

“왜. 내 패션이 너무 질 떨어지나?”

“아뇨, 패완얼.”

“응?”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 다해서. 아니다. 몸이 다하나?”

준섭이 우경의 코끝을 톡톡 두드렸다.

“연우경 씨, 너무 노골적이시네.”

“그런 말이 아닌데…….”

확 붉어지는 뺨이 사랑스러워 뺨에 입을 맞추고 말랑한 뺨이 닫는 감촉이 좋아 귓불을 삼키고 그러다가 다시 깊게 키스를 하고, 으응, 하는 소리를 들으며 목덜미를 핥았다. 우경의 피부는 희고 부드러운데, 그런 만큼 자국이 잘 남았다. 손으로 꾹 누른 자국도 발갛게 남을 만큼 예민했다.

신중하게, 상처가 남지 않도록 조심스레 굴수록 몸속 어디에 숨겨 두었는지 모를 가학성이 불쑥 목구멍을 들쑤시며 올라왔다.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다가 결국 갈증이 일어 쇄골 아래로 입술을 움직였다.

좀 전의 정사로 남긴 붉은 자국에 입을 맞대고 다시 깊이 빨아들이자 우경이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들어올렸다.

참을 수가 없어 가슴을 손에 맘껏 움켜쥐고 끄트머리를 괴롭히다가, 결국 붉어진 선단을 잇새로 밀어 넣었다. 아프지 않을 만큼 물고서 혀로 할짝이자 우경이 몸을 비틀었다.

“으으. 그러지…… 마.”

빠져나가는 덩어리를 다시 물고서 힘을 더했다. 혀끝을 단단하게 세워 혀끝처럼 단단해진 우경의 살덩이를 핥아 대자 어깨에 손을 올려 밀어 댔다.

“그러지 마……요.”

입을 떼자, 새침하게 토라진 턱을 치켜들었다.

“데려다준다고 했잖아요.”

준섭은 새침해서 더 귀여운 턱을 물었다. 사탕처럼 빨면서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 아아. 나 가야 하는…….”

5분 전에, 5분만 이따가 데려다줄게, 했는데 그런 약속으로 통제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건 우경의 상태도 마찬가지였다. 우경의 속에 몸을 묻고서 준섭이 말했다.

“너 뜨거워.”

솔직한 말이었는데 우경이 눈을 새치름하게 떴다.

“정말인데.”

귓불을 쪽 소리가 나게 빨고 코를 귓바퀴 뒤에 문지르며 속삭였다.

“좋아.”

“나도 너무…….”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치니 또 모르는 척 턱을 돌렸다. 강하게 부딪쳐 올리자 으흑, 소리를 먹어 버렸다.

“뭐라고? 응?”

흔들리면서 우경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응?”

흥분에 젖은 눈이 약간의 원망을 담고 있었다. 준섭의 감각이 한층 더 고조되었다. 응? 탄성 좋은 가슴이 이지러지도록 만지면서 재촉했다. 으응, 우경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다. 몸을 슬쩍 물려 엉켜 붙은 하체를 떼어 내자 우경이 다급하게 팔을 뻗어 목을 끌어안았다.

“그쪽이 아닐 텐데.”

준섭이 입가가 올라갔다. 우경이 울음이 터질 듯한 얼굴을 하고서 다리를 들어 둔부를 감쌌다. 못 이기는 척 얕게 움직이자 손끝을 세워 등을 할퀴었다.

“좋다고요!”

“이러는 게?”

어엉 우경이 놀림받아 화가 난 아이처럼 주먹질을 했다. 등을 때리고 어깨를 때렸다. 단번에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아아. 벌어지는 입에도 깊게 혀를 밀어 넣었다. 타액을 마음껏 빨아먹고 나서 준섭이 말했다.

“좋아?”

“아니, 너무 제멋대로…….”

숨을 할딱거리면서도, 감각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우경은 불만을 쏟아 냈다.

“시키는 대로 할게.”

뻔뻔하게 움직이며 말했다.

“회사 밖에서 만나는 날엔, 양복도 바꿀게.”

“정말?”

“눈 돌아가게 입어 줄게.”

우경이 양팔과 다리로 준섭을 꽉 끌어안았다.

하늘채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며 우경은 핸드폰을 다시 확인했다. 이미 통금은 30분도 넘게 넘긴 시각이었다.

“어머니께 연락드려야 하지 않아?”

“톡 보냈어요. 확인 안 하시는 거 보니 잠깐 졸고 계시는 것 같아요.”

“다음엔 통금 지키도록 할게.”

우경의 아파트 동 근처에 주차를 하고 준섭이 눌러 쓴 캡모자를 벗었다. 우경이 손을 뻗어 머리칼을 가지런히 정리하려 했지만, 제멋대로 말라 버린 머리칼이 쉽게 말을 듣지 않았다.

“오늘도 내가 오기 전에 샤워 급히 했나 봐요. 송백재 저녁 먹고 와서, 운동해요?”

“한강변 조깅할 때도 있고.”

“저녁 먹고 뛰면 속 불편하지 않아요?”

“오늘은 안 했어.”

“그런데 왜…….”

우경이 뭔가 더 물어볼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다가 이내 생긋 웃었다.

“송백재에서 일요일 저녁이요. 매주 정해진 행사 같은 거예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족이 다 모여. 아무래도 사람 수가 있으니 행사까지는 아닌데, 좀 거창한 편?”

“그런 저녁 식사엔 주로 메뉴가 뭐예요?”

“메뉴……?”

준섭이 눈썹을 찡그렸다.

“돌아가면서 바뀌는데, 주로 외부에서 오는 셰프가.”

“아. 그렇구나.”

격차가 느껴지네요, 우경이 웃음을 섞어 말했다.

“매번 맛있는 성찬이겠어요.”

“그래……. 그렇지.”

우경이 준섭을 빤히 쳐다보았다. 찡그려진 눈썹 앞머리를 검지로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맛 없나 봐요.”

“응?”

“그냥……. 제 저녁 메뉴와 너무 차이나서 괜히 해 본 소리예요.”

“저녁 뭐 먹었는데?”

“김치찌개. 돼지고기 넣고 끓인 거요. 뚝배기째로 놓고 먹었어요. 엄마는 별로 안 즐기시는데 아빠랑 제가 좋아하거든요.”

“김치찌개랑 소주 또 드셨나?”

우경이 하하 웃었다.

“딱 한 잔이요.”

올린 검지를 끌어당겨 준섭이 입속으로 삼켰다. 쪽 빨아들이며 말했다.

“또 먹고 싶네.”

“그런 말……. 듣기에 거북해요.”

“김치찌개 말인데.”

준섭이 비웃자, 우경이 손을 확 빼내고 주먹을 꽉 쥐었다. 놀림받았다고 생각하는지 원망을 담은 눈빛으로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사춘기도 아닌데 그 모습에 반응을 일으키는 몸이 기가 막힌다. 준섭이 팔을 뻗어 뒷머리를 확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웠는지 우경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깨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빨아들이자 우경이 주먹으로 가슴을 밀어냈다.

“여기선…….”

우경이 난감해할수록 욕망이 달구어졌다. 방향을 바꾸어 가며 집요하게 들러붙어 삼키고 씹기를 반복하자, 주먹을 얌전히 떨어뜨렸다. 반항을 그친 후에야 준섭도 입술을 놓아 주었다.

하악 숨을 들이키는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짓뭉개면서 말했다.

“예뻐 죽겠어.”

우경은 부어오른 입술이 아픈지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손가락을 안쪽으로 밀어 넣어 아랫 치열의 뿌리를 훑어가자 뜨겁고 단 침이 금세 다시 고였다.

“물론 맛있기도 하고.”

다시 붙은 입술로 타액을 삼키고 혀를 밀어 넣어 속살을 파헤쳤다. 울먹이는 신음을 듣자 정수리가 뻣뻣해질 지경이었다. 외투 속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만지자 싫어 싫어. 우경이 몸을 뒤틀었다.

“집 앞이라고요.”

“그래서, 참으라고?”

“네.”

준섭이 붙잡는 우경의 손을 가볍게 저지하고 니트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맨 가슴이 잡히자 우경이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얼마나 참는지도 모르고.”

준섭이 힘을 실어 가슴을 주물렀다. 우경이 속입술을 깨물며 견뎌 내는 게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내 맘대로 군다고? 천만에. 그랬다면 너 집으로 안 돌려보내.”

이미 꼿꼿해진 부위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너랑 있었던 침대에 혼자 들어가는 기분이 춥고 더러워. 너무 더러워서 다시는 너를 데려오지 않아야지, 이를 갈면서 잠이 들어.”

우경이 소리를 참느라 이를 맞물고 숨을 들이켜자, 잇새에서 만들어지는 파열음이 목덜미를 긁어내리는 것처럼 자극적이다.

“매일매일 내 침대에 두고, 매일 밤마다 매일매일매일, 밤마다. 밤새도록 만지고 먹을 거야. 네가 울어도 빌어도 멈추지 않아.”

준섭이 손을 빼어내 우경의 뺨을 쓰다듬었다.

“예쁘고 깨끗한 너한테 어울리지 않은 더러운 욕망이지.”

부어 있는 입술에 아이 같은 입맞춤을 하고 준섭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가세요. 연우경 씨.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왜…….”

맑은 눈에 반짝거리는 눈물을 매달고서 우경이 물었다.

“그렇게 쳐다보면, 동의한 걸로 오해하고 싶어지는데.”

우경이 고개를 저었다. 준섭이 우경의 뺨을 여린 풀꽃을 만지듯이 손끝으로만 쓰다듬었다.

“목요일에 밥 먹읍시다. 섹스는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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