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수마가 어깨에 매달려 질질 끌려오는 기분이다. 졸음에 잠긴 눈을 반쯤만 뜨고서 워킹 클로젯에 들어섰다. 일렬로 걸려 있는 슈트를 훑어가던 손이 멈추었다. 목요일이다. 습관처럼 블랙 슈트를 내리다가 도로 걸어두고는 회색 더블 슈트를 선택했다.
거울을 보며 검은빛에 가까운 짙은 청색 타이 대신, 회색 계열의 타이 중 가장 튀는 디자인을 골랐다. 그래 봤댔자 무늬는 없고 질감이 달라 튀는 정도이지만, 준섭으로선 파격이었다. 마지막으로 준섭은 슈트 상의 윗 주머니에 흰색 행커치프를 직각을 살려 꽂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 * *
송백재의 공식적인 안주인은 지난 28년 동안 공석이다. 태 회장의 첫 번째 부인, 지윤의 생모는 시골에서 아무렇게나 짝을 지어 준 초등학교 졸업도 못 한 여자였다. 회장이 젊은 시절 서울에서 장사를 하고 사업을 일구는 동안 시골에 쭉 있었던 탓에 첫 번째 부인과는 이혼하기 전까지 제대로 된 결혼 생활도 하지 않았다. 지윤 역시 아버지의 사랑이나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태시환 회장의 영원한 사랑이었던 태서우와 태서희의 어머니, 선애의 시어머니는 서희가 결혼식장에서 사라진 후 쓰러졌다. 태 회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는 5년 남짓 더 생을 유지했을 뿐이다. 그 이후 선애는 28년간 안주인의 공석을 반쯤만 채우는 며느리로 역할했다.
이른 새벽부터 선애가 송백재에 들렀다. 태서우 자택은 송백재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물리적 거리의 수 배, 수십 배에 달할 만큼의 막막한 거리감이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날은 성큼 가까워졌다 싶다가도 어느 날은 까마득히 밀쳐져 있었다. 이제 선애는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거리감을 좁히려 무리하지도 않는다. 다만 정해진 최선을 다할 뿐이다. 마음만 고쳐먹으면 송백재 시어른은 편한 면이 있는 분이었다. 굳이 선애에게 집안 살림을 도맡으라 부담을 주지도 않아 청소와 요리를 하는 여자 고용인들만 실수 없이 관리하면 그만이었다. 그 외 인테리어나 예술품 배치와 교환, 손님 초대와 같은 크고 작은 행사도 선애 몫이긴 했으나 불만을 가져 본 적은 없었다.
매일 새벽 회장의 조식을 챙기는 일 역시 선애가 무리를 해서 거리를 좁히려 할 때나 해당했던 일이다. 회장은 선애가 오거나 그렇지 않거나 살가움의 정도를 달리하지 않았다. 아침잠이 많은 남편을 깨우고 학교를 가야 하는 아들딸을 앞세워 기를 쓰고 송백재에서 새벽 조식 자리를 같이 하려 하던 선애는 어느 순간 회장의 마음을 읽고는 필요할 때만 새벽 방문을 했다. 오늘같이 요리를 책임지는 고용인이 독감이 걸려 출근하지 않을 때와 같은 경우다. 선애의 송백재 새벽 출근은 월요일부터 나흘째다.
“사모님.”
작은 그릇에 떠온 지리 국물을 맛보며 선애는 조금 찡그렸다.
“간이 맞지 않으세요?”
“좀 비려요. 통마늘 말고, 마늘 다져서 반 스푼만 더 넣어요. 양념장에 청양고추 세 토막만 넣었다가 빼세요.”
선애는 다이닝룸에 내어갈 은수저의 광택이나 그릇을 꼼꼼히 점검했다. 은은한 푸른 꽃무늬가 들어간 식기들은 가을이 들기 전에 꺼내 놓았던 것이니 내주쯤 교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장이 밥그릇과 국그릇은 까다롭게 반응하여 조심스럽지만 디너웨어 변화는 대체로 좋아하는 편이었다.
“사모님, 이것도 한번 봐주세요.”
선애는 덜어 온 도라지 초무침을 천천히 씹었다. 요즘 들어 입맛이 없다고 하는 회장을 위해 나물 한 가지는 초무침으로 바꾸라고 했다.
“단거 조금만 더. 요즘 입맛이 쓰다고 하세요. 꿀은 너무 입에 붙으니까 자일로스 약간만.”
“네, 사모님.”
28년째 송백재에서 사모님이라 불리는 사람은 선애뿐이었다.
몇몇 여자들이 애매한 직함을 가지고, 때로는 여사님 정도의 호칭으로 불리며 송백재에 거주했지만, 안주인의 그림자 위치도 되지 못했다. 길게는 5년, 짧게는 1년 정도 머무르다 떠나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태시환 회장의 세 번째 부인을 꿈꾸었고 선애에게 지루한 기 싸움을 걸어왔다.
피곤해하던 선애도 경험을 통해 깨우쳤다. 하잘것없는 신경전이었다. 나긋한 웃음으로만 응대하며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면 그만이었다. 그녀들은 스스로 제 기간을 단축시키며 짐을 꾸려 송백재를 떠나야 했다.
태 회장이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여자들마저 들이지 않게 되었는데, 묘하게도 시기가 태준섭이 대학을 졸업하고 기숙사를 나와 TK 입사를 하면서부터, 정확하게는 회장의 수행 비서나 기사가 사용하는 별채에서 기숙하면서부터였다.
태준섭은 공식적으로 태 회장의 수행 비서였고 기사 노릇이나 경호원 노릇까지 했으니 별채에서 머무는 데에는 큰 위화감이 없었다. 자연스레 준섭은 24시간 태 회장의 수족이 되었다. 한 번씩 선애가 그 점을 경계했지만 서우를 비롯해 다른 모든 이들은 본채 안에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고용인 수준이라며 선애의 우려를 가벼이 무시했다.
“아버님, 사람들 눈도 있는데 준섭이가 별채에서 계속 있는 건 아무래도 부자연스럽습니다.”
선애가 몇 번이나 태 회장을 설득했다. 따로 살 집을 구하기도 하고, 차라리 제 집에 데리고 있겠다는 말도 했지만 회장은 매번 선애의 논리에는 동의를 하면서 선뜻 이사날을 정해 주지 않았다. 태준섭 그 아이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다. 좋다는 내색도 싫다는 내색도 하지 않을뿐더러 선애의 속마음이나 의도에 대한 불쾌함이나 궁금증까지 표면으로 나타나는 부분이 없었다.
선애의 노력과 정성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정작 태준섭이 나가게 된 계기는 직원의 실수 때문이었다.
누구였더라. 물산 쪽 부사장 아들이었다는 건 기억나는데 당사자는 물론이고 부사장 이름이나 얼굴도 가물거렸다. 다만, 그 사건이 벌어졌을 때 회장의 진노는 생생하다.
송백재에서의 약속 상대는 부사장이었는데, 그 참에 TK 과장으로 있는 아들을 인사시키고 싶었던 부사장의 욕심이 화를 자초했다. 부사장 부자를 막아서는 태준섭을 송백재의 경호원이나 경비 정도로 오인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부사장은 무지했고 아들은 알량한 자만심으로 최악의 상황을 만들었다. 삿대질이 태준섭의 이마로 향하고 어깨를 밀치다가 뺨을 때리고 손이 잡혀 제압당하자 발길질을 하며 욕설을 질렀나 본데, 회장은 그날 부사장이 보는 앞에서 송백재에 있는 모든 경호원을 그곳에서 내보냈다.
공식적인 이유는 직무 태만, 송백재에서 난동을 방치했다는 것인데, 태준섭 폭행 때문이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든 명백하게 각인되었다.
그날, 준섭의 붉어진 뺨을 감싸는 회장의 손이 벌벌 떨렸다.
“감히, 누가, 누가, 누가아!”
목소리가 갈라지도록 소리를 지르며 회장은 눈이 붉어졌다.
마르고 긴 체형의 회장은 팔다리도 긴 편이었다. 요즘이야 몸이 불편해 많이 둔해졌지만 그때만 해도 팔을 드는 각도나 속도까지 계산된 듯이 느리고 정확하게, 부드러운 절도를 실어 움직였다. 제사 때면 흰 도포를 입은 회장이 걷고, 지시를 하고, 절을 하는 모습은 꼭 춤사위처럼 아름다웠다.
그런 회장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회적 기품을 바닥에 던지고 몸을 벌벌 떨면서 시위하는 고용인들 앞을 뱅뱅 돌았다. 그러다가 검지를 세워 아무에게나 모욕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다. 가족 몇몇 외에는 좀체 드러내지 않는 회장의 격렬한 분노가 여과 없이 쏟아졌다.
고용인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부사장 부자는 기세에 눌려 무릎을 꿇었다. 아무도 제대로 보지 못했을 회장의 눈을, 선애는 기억한다. 태서희가 사라진 그 식장에서 봤던 광기 어린 눈빛과 같았다. 회장이 손을 올린 채 부사장 부자에게로 걸어갔다.
“회장님.”
얼어붙는 공포 속에서 오로지 한 명만 침착하게 움직였다. 태준섭이 회장 앞으로 다가갔다. 부사장과 아들을 막아서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이미 이성적 판단력을 잃은 회장에게서 오직 분노만이 생생했다. 가장 소중한 새끼를 공격당한 짐승의 것처럼 동공이 작아진 눈이 격렬한 감정으로 희번득거렸다.
“저를 벌하십시오.”
회장이 태준섭의 뺨을 대신 내리쳤다.
“못난 자식. 여기가 어디라고 맞고 다니나! 니가 내 앞에서! 이 송백재에서!”
태준섭에게 손을 대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적어도 눈과 귀가 있는 곳에서 회장은 결코 태준섭을 건드린 적이 없다. 딱 한 번, 그때 외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단 한 번의 공개적인 손찌검이 태준섭의 지위를 공고하게 만들었다. 태준섭에 대해서는 발길질도, 손대는 것도, 학대에 가까운 과중한 업무 지시도 본인만이 할 수 있다는 선언과 같았다.
확대 해석이라고 했지만, 선애는 회장의 서희에 대한 애증과 집착이 광기를 더해 준섭에게 고스란히 옮아갔다고 믿는다. 회장은 준섭을 누구에게도 빼앗길 생각이 없다. 또한, 도망칠 수 있는 힘을 쥐여 줄 생각도 없다.
그래서, 선애는 준섭을 경계하면서도 안심했다. 회장은 준섭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 자유를 주지 않는다. 그런 연유로 TK에서 오직 회장만 바라보며 회장을 위해서만 존재하도록 지분도, 돈도, 충분한 권력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선애는 다이닝룸 테이블에 수저를 놓는 위치를 확인하고 지리 그릇의 위치를 1cm가량 옮겨 두었다.
“국물 떨어지는 것 많이 싫어하십니다. 수저 길이와 손 위치 생각해 보세요. 거리가 너무 밭아도 안 됩니다.”
수저를 가지런하게 매만지는데, 조간 브리핑을 위해 출근한 유 실장이 선애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선애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주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밥을 푸는 양과 모양을 확인하고 다이닝룸으로 오니 태준섭이 들어서고 있었다.
자리에 서서 선애를 향해 허리를 굽혀 깍듯하게 인사하는 준섭을 보며 마음이 수축하는 기분이었다. 준섭에 관한 한, 선애의 마음은 찡그리기만 해서 보기 싫게 잡힌 주름 가득한 늙은 마녀의 얼굴처럼 험하고 딱딱하게 쪼그라져 있다. 굳어지는 얼굴을 펴면서 선애가 미소를 지었다.
“조간 브리핑 면제 아닌가? 본부장되고 나서.”
“자주 오지 못합니다.”
준섭은 왜 이 시간에 선애가 다이닝룸에 있냐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다만 찬을 놓는 고용인을 향해 물었다.
“최영순 씨는 결근입니까?”
“독감이 걸려서 월요일부터 나오지 않고 있어.”
선애가 대신 답을 했다.
“몰랐습니다. 새벽부터 수고가 많으십니다.”
“내 일인걸.”
선애가 매끄럽게 웃었다. 준섭이 선애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이닝룸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섭이 회장의 발소리를 들었나 보다. 귀도 밝지. 선애가 미간을 찡그렸다.
다이닝룸에 들어서는 회장을 향해 선애를 비롯해 모두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지만, 회장은 제 옆에서 부축을 하고 있는 준섭만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렇게 입으니 좋구나. 왜 여태 이리 안 입었노?”
“아, 달라 보입니까?”
선애의 눈이 가늘어졌다. 들어설 때부터 신경에 거슬렸다. 준섭은 이섭에 비해 패션이나 차림새가 투박하고 거칠다 싶었는데 오늘따라 행커치프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나왔다. 그레이 슈트가 다소 거북할 만큼 딱딱한 준섭의 이미지를 중화시키자 지적인 도회미가 더해졌다.
“이제 이미지 관리도 하고 해야 한다.”
“제가 뭐라고.”
“시간이 없어서 여자를 도통 못 만나서 그런가 준섭이 니가 좀 입성이 거칠었다.”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농담을 건네며 회장이 웃었다.
“오늘 태준섭 본부장 촬영 있습니다.”
유 실장이 대화에 슬며시 말을 얹었다.
“TK전자 매장 방문 일정이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몇 컷 촬영할까 합니다. 해외 홍보용 기사 사진으로 고려하고 있습니다.”
“거 좋다. 옷도 그래서 이리 입었나.”
“그렇지는 않지만.”
검지로 이마를 슬쩍 긁어내리더니 준섭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홍보 담당 직원이 밝은 톤을 권유하긴 했습니다.”
“그, 직원 말이가?”
“네.”
“이름이, 연…… 운경……?”
회장이 눈썹을 찡그리더니 이름 따위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똘똘한 놈이네. 이미지도 잘 잡고.”
선애는 준섭과 준섭을 바라보는 회장을 번갈아 보았다. 끈끈한 집착과 애정, 증오와 소유욕이 질척거리는 눈빛이다. 선애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본부장, 혹시 연애해?”
“네?”
“얼굴이 환해. 옷이 날갠가.”
준섭은 답하지 않았지만, 회장이 잘라서 부인했다.
“본부장 요새 잘 시간도 없다. 연애는 무슨. 애미가 칭찬이라고 하는 말이 근거 없는 헛소문으로 돌면 우짤라고 그런 소릴 하노?”
“죄송합니다. 아버님. 너무 좋아 보여서요. 본부장 나이도 있으니까, 연애도 하고 그래야죠.”
“그래, 혼기가 넘었다. 연애는 못 해도 장가는 가야지. 내년에는 보낼 작정이다.”
덜컥, 선애가 떨어지는 마음을 움켜쥐듯 주먹을 쥐었다.
내년……, 장가라니? 설마 최 교수댁을 생각하시는 걸까.
선애가 불안감으로 떨리는 손을 감추었다.
회장이 지리를 내려다보며 손짓으로 고용인을 불렀다.
“본부장 걸로 한 그릇 가져와라.”
“아닙니다. 먹었습니다.”
“브리핑은 유 실장이 할 거고 준섭이 니는 먹으면서 듣고 묻는 거만 답하면 된다.”
자리에 앉는 준섭을 보던 선애는 감정을 감추려 눈을 아래로 깔았다. 마음이 수축하다 못해 돌덩이처럼 차갑고 딱딱하게 굳었다.
“준섭아, 외숙모가 신경 썼다. 오늘은 특별히 더 맛있을 거다.”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준섭의 인사에도 굳은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회장의 시선을 느끼고서야 선애가 말라붙은 뺨에 미소를 만들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맛있게 들어, 본부장.”
“애미는 이제 가 봐라. 부회장 출근 준비시켜야지.”
“괜찮습니다.”
“가 봐라. 본부장이랑 할 말도 있다.”
회장은 선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짧게 지시했다.
* * *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선애는 집으로 돌아가 꼼짝 않고 거실에 홀로 앉아 고민에 빠졌다. 새벽녘에나 들어온 서우가 일어나려면 한참이었다. 조간신문을 꼼꼼히 읽으며 선애는 뒤엉킨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마지막 면까지 다 읽고서야 어느 정도 계획이 섰다. 선애는 주방으로 가서 조식 준비를 확인한 뒤에 서우의 침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퀴퀴한 술 냄새에 향수 냄새가 뒤섞여 속이 뒤집혔다. 선애는 커튼부터 완전히 열어젖히고 서우를 깨웠다. 몇 번을 부르고도 한참이었다. 선애는 문가에 떨어져 서서 서우가 꿈지럭거리며 일어나는 모양을 한심하다는 내색을 감추며 지켜보았다. 침대에 앉아서 도저히 일어나기 싫다는 듯 꿍꿍 소리를 내는 서우를 향해 물었다.
“요즘 들어 혹시, 최일문 교수님과 무슨 이야기 있었어요?”
“응? 무슨 소리야?”
서우가 눈을 끔벅거렸다.
“이섭이 혼사 이야기요.”
“내년이면 딸도 나이가 서른둘이니, 혼인을 시켜야겠다 그런 말은 했지. 전에도 듣지 않았어?”
서우가 입을 벌릴 때마다 절은 술 냄새가 푹푹 났다.
서우는 어제도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를 시간에 들어왔다. 엉망으로 벗어던진 옷가지가 불결하고 혐오스러웠다. 새벽에 송백재로 가기 전, 일하는 사람 눈이 무서워 선애가 직접 저질스러운 향수 냄새가 절은 속옷까지 몽땅 세제를 푼 물 속에 담가 버렸지만 저 몸뚱이만큼은 세제 통에 넣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인간이 나이를 먹으면서 여자를 들이는 수준은 더 떨어지는 건지. 이번엔 배우도 아니고 가수도 아니고 백화점 직원도 아니고 2류 룸살롱 출신 마담이었다. 회사 앞에 꽃집을 차려 줄지, 가로수길에 핸드백 숍을 열어 줄지 아직 정해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서우에게 끝없이 여자를 대 주고 고물을 챙기는 정신 썩은 인간들은 잘라 내고 또 잘라 내도 소용이 없었다. 하긴, 태시환 회장이 손을 들었는데 누가 감당을 할 수 있을까.
“내년 언제쯤이요,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안해보셨나요?”
서우가 성가시다는 듯 인상을 그렸다.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혼사하자고 할 텐데 뭘, 내가 최 교수한테 사돈해 달라고 매달릴까.”
선애는 서우와 대화를 포기하고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송백재에서 쪼그라든 마음이 삐죽한 돌덩이가 되어 명치에 콱 박혀 있다. 준섭을 바라보던 회장의 얼굴과 내년이면 장가를 보내겠다는 선언을 떠올렸다. 선애는 불안감에 손끝을 깨물었다.
“준섭이는 요즘 회사에서 어때요?”
“그 자식 이야기는 아침부터 재수 없게.”
서우가 인상을 험악하게 그리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알몸에 끈을 채우지 않은 로브 차림인 서우를 쳐다보는 선애의 눈빛이 냉랭했다. 어슬렁거리는 걸음걸이조차 보기 싫어 선애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보여 주고 싶은 꼴이 없어, 지난봄 이섭이 회사 근처 아파트를 얻겠다며 늦는 날엔 거기서 잠만 자겠다고 했을 때, 그러마 하고 허락했다. 서우의 어떤 것도 이섭에게 물들이고 싶지가 않았다.
“선물을 해야겠어요.”
“무슨 선물?”
“최 교수 부인 생일이 다음 달이에요.”
“뭘 그렇게까지. 갑자기 들이대는 것처럼 보이면 말이야, 모양새만 더 우스워.”
선애가 서우가 흐트러뜨린 베딩을 정리하며 보이지 않게 눈살을 찌푸렸다. 서우는 늘 저런 식으로 기회를 놓쳐 왔다. 반복된 실수를 하면서도, 다 된 밥을 잘 푸는 일조차 적절한 노력이 필요하고 타이밍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진리를 깨우치지 않는다. 선애가 허리를 반듯하게 펴며 상냥한 어조로 설명했다.
“최 교수 부인이 다니는 성당에서 하는 봉사 모임이 있어요. 다음 주부터 사흘 동안 소외 계층 지원 바자회를 해요.”
“가려고?”
“물건 좀 사고 기부하려 했는데, 하루 정도 도울까 봐요. 일손이야 달릴 테니. 자연스럽게 시간 보내면서 이야기해 봐야죠. 최하영, 그 딸도 엄마와 생일이 같아요. 12월이 생일이라 생일 때면 한 번씩 독일로 가서 연말을 같이 보내는 것 같던데, 상황 봐서 하영 양 선물도 자그마한 걸로 준비하고요.”
서우가 머리를 긁으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당신은 성당도 안 다니는데.”
“성당 식구 아니라고 바자회에 물건을 못 사게 하겠어요. 일손 달리면 거드는 정도일 테니, 제가 알아서 해 볼게요. CS 쪽에서 조용히 취재도 하라고 해서 기사도 잘 뽑을 거고.”
서우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늘어지는 하품 소리를 들으며 선애가 시각을 확인했다. 출근은 당연히 늦겠고, 10시 회의 시간까지는 맞추겠지, 하는 희망을 담아 비서에게 전갈을 넣었다. 벌써부터 하루의 절반 이상은 살아 낸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리며 피로감을 호소했다.
* * *
8시 50분. 우경이 시각을 다시 확인했다. 오전 회의가 9시로 잡혀 있다. 아직 태준섭은 출근 전이다. 송백재에서 이야기가 길어진다고 유 실장님을 통해 전갈이 들어왔는데, 회의 시간을 늦추라는 지시는 없었다.
“연 팀장님, 뭐 들으신 거 없으시죠?”
양지은 대리가 초조한 내색으로 물었다.
“아니요.”
“강우식 대리한테 한 번 더 전화해 봐야겠어요.”
지은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강 대리 너무 비협조적인 거 알죠? 무슨 형님 모시듯이 본부장님한테 그런다니까요. 유치하게 나랑 경쟁하는 것도 아니고. 머리도 짧고 검은색 양복 입고 외모도 꼭 오해하기 좋게 조직 스타일이잖아요. 질 떨어…….”
지은이 수화기를 든 채로 얼어붙었다. 본부실 문이 활짝 열리고 태준섭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갈한 행커치프를 꽂은 옅은 회색 더블 슈트에 같은 톤의 니트 타이를 맨 준섭을 바라보는 양 대리의 눈이 커다래졌다. 우경도 용원도 바뀐 스타일에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밝은 톤 슈트를 입은 준섭은 처음이었다.
‘시키는 대로 할게.’
준섭이 지난 일요일 밤 했던 말이 떠오르자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눈 돌아가게 입어 줄게.’
그런 말을 내뱉으며 틈 없이 붙어 와 들쑤시던 감각이 뜨겁게 재생되었다.
환한 아침에 홀로 기억만으로 달아오르는 자신이 부끄러워 우경은 시선을 낮추었다. 준섭이 스쳐 지나며 우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이미 신경 세포가 곤두서 있다. 시선이 닿는 정수리가 따뜻하고 간지럽다.
“회의 준비는 차질 없습니까?”
“네, 네. 본부장님.”
양 대리가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답했다. 준섭이 고개를 끄덕하고는 본부장실로 들어섰다.
“어떡해요오.”
양지은 대리가 울상을 하고서 우경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으셨음 어떡해요.”
“못 들으신 거 같은데요?”
“본부장님 귀 밝아요오오. 강 대리 말한 건데 본부장님이라고 오해하면 어쩌죠?”
양지은이 질 떨어지는 조직 같다고 비난한 이미지에는 태준섭도 포함된 것 같았지만 우경은 모르는 척 웃었다.
“하긴 저렇게 입으시니까 본부장님 딴사람 같네? 원래 패션이 좀 보수적이었잖아. 오늘 행사 때문인가.”
용원이 물어보자 지은이 스케줄을 확인하며 답했다.
“매장 방문이요.”
“아, 그래서 신경 쓰셨구나.”
매장 방문 스케줄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 해외 홍보용 기사 자료로 쓰일 사진을 위해 고른 옷일 뿐인데. 가슴이 따끔거렸다. 부끄러움과 실망과 약간의 어울리지 않는 비참함이 거친 돌가루처럼 속을 쓸어내리는 것 같았다.
“연 팀장님 위 아파요?”
지은이 물어 고개를 들어 보니 제 손을 배 위로 올려 보였다. 저도 모르게 가슴 아래를 지그시 누르고 있었나 보다.
“조금 그러네요.”
“여기가요. 완전 완전 위장병의 진원지잖아요. 사람 너무 긴장시켜요.”
“우리 점심 죽 먹을까요? 난 전복죽 먹을 거야.”
용원이 메뉴를 정했다.
“난 매운 낙지죽 좋아요.”
지은이 다음 메뉴를 골랐다. 우경이 아리는 속을 한 번 더 쓸었다.
오전 회의를 마친 후, 우경은 호출을 받고 본부장실에 들어갔다. 매장 방문 일정과 송백재 보고 문건을 훑어보면서 준섭이 물었다.
“오늘 저녁 메뉴 고릅시다. 고기 잘 먹습니까?”
답이 없자 준섭이 우경을 올려다 보며 다시 물었다.
“아님, 회가 나아요?”
“특별히 좋아하고 싫어하는 음식이 없어요. 본부장님 이동하기 편하신 장소로 정하세요.”
맘에 들지 않는 답이었는지, 준섭이 쥐고 있던 펜을 데스크 위로 내려두고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의자 방향을 회전시켜 우경과 마주 보는 각도로 맞추고 우경을 발끝까지 쓱 훑어보았다.
짧지는 않지만 몸 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H라인 스커트와 그 아래로 곧게 뻗은 가늘고 날씬한 종아리, 7cm 힐까지 내려갔던 시선이 곧장 얼굴로 돌아왔다. 눈이 마주치자 볼이 화끈거렸다. 커팅된 큐브가 귓불 아래로 늘어져 달랑거리는 드롭 귀걸이를 향하는 시선에 귓등도 붉어졌다.
“오늘 예쁘게 입었네.”
“아니에요. 그냥, 대충…….”
“그래요? 난 신경 써서 입었는데.”
“아…….”
우경이 그레이톤 양복을 보면서 약간 웃었다.
“어떻습니까?”
“좋아요. 오늘, 사진도 잘 받으실 것 같아요.”
“매장 때문 아닌데.”
준섭이 팔걸이에 놓여 있는 손을 아래로 한 번 툭 두드렸다.
“우경 씨는 대충 입고, 아무거나 먹으면 되고.”
그렇지 않은데, 이제 와 예쁘게 보이려 금쪽 같은 아침잠을 줄이며 옷을 고르고 입었다가 벗고, 다시 매치를 하고, 모조리 다시 벗어 버리고, 귀고리를 붙였다 떼었다 법석을 떨었단 말을 하지 못했다.
“어디서 뭘 먹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좀 허탈하네.”
준섭이 의자 방향을 틀어 다시 데스크로 향했다. 보고서를 덮고 서류철을 건네주면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저녁까지 없다. 우경이 발을 떼어 거리를 약간 좁혔다.
응? 묻듯이 준섭이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우경을 쳐다보았다.
“저는요. 우동 좋아요.”
준섭이 그래요? 하는 표정이다.
“솥밥도 좋고요.”
준섭의 입술이 벌어졌다.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긴 눈매가 휘어지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아 우경도 따라 웃었다.
* * *
저녁을 먹기에는 다소 늦은 시간이었다. 강 대리가 운전하는 차에 오르며 우경은 강 대리가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스런 심정이었다. 혼자 찾기 힘든 장소라 강 대리를 보내겠다는 준섭의 일방적인 통보는 수긍할 수 없었다. 취재와 답사, 인터뷰로 서울 시내 지리에 익숙한 우경으로선, 도무지 혼자 찾기 힘든 레스토랑이 대체 어디란 말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우경이 대시보드의 시각을 확인하고 강 대리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강 대리님, 저녁도 못 드셨죠? 주소 알려 주시면 제가 갈 수 있는데…….”
“아닙니다. 저녁은 모셔다 드리고 저도 천천히 먹으면 되고요.”
우식이 고개까지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굳이…….”
우경이 말을 끊고는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섭의 경고가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태준섭과 이런 관계가 소문이 나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두려웠다. 애써 외면하고 합리화할수록 두려움은 더욱 강해지고 선명해졌다. 우경의 표정을 살피면서 우식이 물었다.
“혹시……. 부담스러워서 그러세요?”
우경이 자연스럽게 변명했다.
“본부장님 차니까, 약간 불편하긴 해요. 강 대리님한테 죄송하기도 하고.”
“저는 전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연 팀장님도 저랑 같이 가시는 게 좋으세요. 거기가 입구가 좀 애매해서요.”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우경이 괜스레 가방에서 자료 파일을 꺼내 무릎 위로 펼쳤다. 홍보 관련으로 보고할 사항이 있어 가는 거라고 강 대리가 봐줬음 하는 마음이었지만 강 대리는 우경이 가방에서 뭘 꺼냈는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강 대리가 운전을 하면서 흘끗흘끗 우경을 몇 차례 살피는 모습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좌회전 신호를 받기 위해 차가 멈춰 서자, 우경이 강 대리와 눈을 맞췄다. 강 대리는 말할 타이밍을 잡아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예상 가능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러 가지 옵션으로 준비해 두었지만, 우식이 불쑥 꺼낸 말은 예상 범위가 아니었다.
“여러 번 가셨는데.”
“네?”
“하늘채 아파트요.”
“아.”
“한 번은 가자고 해서 달리다가 바로 돌아가자 그래서 방향 돌렸고요, 이번 주 화요일도 갔어요. 화요일엔 너무 취하셔서 잠깐 잠드셨거든요. 깨웠더니 다시 집에 가자고 그러시더라고요. 아무튼 세 번은 더 갔어요. 차에서 내리신 건 지난주 금요일 한 번이었는데.”
모든 예상 질문과 답변이 머릿속에서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우경은 당황하여 벌어진 입을 겨우 다물었다.
“맞으시군요. 하늘채.”
우식이 가슴을 막 주먹으로 문지르며 후우 후우 숨을 내쉬었다.
“아님 어떡하나 심장 벌렁거렸는데.”
우경이 차마 우식과 눈을 맞출 수 없어 시선을 떨어뜨렸다.
“제가 주제넘게 한마디만 드릴게요. 이거 말하시면 저 자른다 하실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말은 해야지 싶어서.”
그사이 좌회전 신호가 떨어져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식이 핸들을 좌측으로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시선은 전방만 향하고 있어 표정을 완전히 다 볼 수는 없었다.
“우리 상무님, 진짜……. 어휴. 연 팀장님은 TK 얼마 안 계셔서 더 모르시겠지만요, TK 다녀도 다들 모르고 욕만 하고 그러는데. 본부장님 진짜 쉬는 날도 없고, 잠도 못 주무시고, 그러니까요. 시간이 없는 거지 성의가 없는 건 아니고요.”
우경은 갑작스러운 강 대리의 말에 무어라 답해야 좋을지 몰라 자료 파일 모서리만 만지작거렸다.
“어떤 날에는 너무 외로워서 저렇게 일을 하시나 싶기도 하고.”
“아…….”
우경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우리 본부장님 가족이 없으시잖아요. 저도 고아지만 그래도 동생은 둘이나 있거든요. 이제 다 커서 돈도 벌고…….”
붉은 신호등 앞에서 차를 멈추고는 우식이 제 가슴을 문질렀다.
“제가 여기 들어오기 전에 한참 고생할 때요, 한겨울에 벽돌 나르다가도 걔들 생각만 해도 막 가슴이 뜨뜻해지고 그런 거 있었거든요.
“……네.”
“저 학교 다니면서도 막일도 하고 대리도 뛰고 그러다가 우연찮게 본부장님 차를 몰았어요.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동생들이랑 통화하는 거 들으셨는지……. 제 동생이 병이 있어요. 그때도 병원에서 퇴원을 못 했거든요. 가불하고 빌리고 해도 33만 원이 모자라서……. 차에서 내리시면서 딱 모자란 금액만큼 돈 더 주셨어요. 그 뒤로 계속 지정해서 대리 불러 주시고, 그러고 몇 달 뒤에 저 입사도 시켜 주시고.”
우경이 우식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우리 상무님, 지인짜 진짜 좋은 분이세요.”
강 대리의 진지한 말에 우경이 무안한 웃음을 터트렸다.
“연 팀장님도 좋으신 분 같아요.”
“저는…… 그렇지 않아요.”
우경이 주먹 쥔 제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덮으며 자신 없게 말했다.
“아…….”
우식의 얼굴에 실망하는 빛이 서렸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는 핸들만 쳐다보더니 죄송합니다.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우식은 이후로 말없이 운전에만 열중했다. 양지은 대리의 표현이 과한 면은 있지만 그런 우식의 모습은 아무래도 쉽게 말을 걸 수 있는 상대라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우경은 하릴없이 무릎 위에 올려 둔 리서치 자료를 뒤적이다가 한 번씩 창밖을 보았는데 차는 점점 익숙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만 여러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다가 결국 화가 난 우식이 우경을 하늘채 아파트 앞에 떨어뜨리려 하는 건가, 하는 상상까지 다다를 무렵 우식은 하늘채 아파트 진입로를 지나쳤다. 차는 4차선 도로에서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고 일방통행로를 한참 둘러서야 멈추었다. 운전석에서 내려 차 문을 열어 줄 때까지 우경은 조금 멍한 상태였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식이 깍듯한 인사를 더하며 우경이 내린 차 문을 닫았다. 우경이 가만히 서서 간판을 쳐다보고 있자, 우식이 빠른 걸음으로 가게 문 쪽으로 다가갔다.
“아니에요, 제가 들어갈게요. 여기 차 못 대는 곳인데, 일방통행로라서…….”
“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우식이 뒤에 붙어 서기 시작하는 차들을 보고 운전석으로 뛰어갔다.
‘남포동 오뎅집’
허름하고 익숙한 간판 아래 작은 문을 밀어 열었다. 훅한 더운 공기에 짭조름한 어묵 국물 냄새가 진하게 섞여 들어왔다. 냄새만으로도 금방 식욕이 돌았다. 가게의 테이블은 이미 만석이었다. 들어서는 우경을 봤는지 안쪽 구석 자리에서 남자가 일어섰다. 시끌거리는 소음과 시선들 사이를 가르며 우경은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영화 시사회에나 어울릴 듯한 외모와 패션으로 남자는 우경의 동네 맛집에서 일어서, 프렌치 레스토랑에서나 어울릴 매너로 등받이가 없는 동그란 의자를 빼내 주었다. 외투를 걸어 둘 곳도 없는데 남자는 우경의 외투를 받아, 제가 벗어 두었던 코트 안으로 포개어 넣고 반으로 접어 제 옆자리에 두었다.
“여긴, 어떻게.”
우경의 외투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꼼꼼히 감싸 넣는 남자의 손만 바라보며 우경이 물었다. 고작 외투일 뿐인데 마치 몸 전체가 남자한테 포근하게 안겨 있는 기분이 들어 가슴이 찰랑거렸다. 손가락을 바라보는 제 눈에 열기가 도는 것만 같아 우경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남자의 답은 간결했다.
“먹고 싶어서 찾아봤습니다.”
“여기 어묵이랑 우동 맛있어요. 소주랑 야식 먹으러 엄마랑 가끔 오는 곳이에요.”
“제대로 찾았네요.”
준섭이 정말 기쁘다는 듯이 웃었다. 반질거리는 멜라민 마감이 되어 있는 테이블 위에 놓인 보랏빛 싸구려 플라스틱 잔에 물을 따라 주는 준섭을 우경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오후에 TK 핸드폰과 태블릿 전용 플래그십 스토어에 들어서던 준섭의 모습이 갑자기 생각났다. 사전에 알리지 않은 방문이었다. 그레이 슈트 차림으로 차에서 내려, 고작해야 2, 3분 걸었을 뿐인데, 준섭은 서울의 핫 플레이스에서 시선들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누구야, 배운가? 누구지? 일반인?
속삭이는 소리나 시선들, 슬며시 핸드폰을 드는 행위를 우경은 잡아낼 수 있었다. 홍보일로 현장을 오래 다닌 습관 때문이었다.
매장에 들어서서 핸드폰을 들고 시연하는 준섭을 우경은 도촬하듯이 촬영했다. 매장 손님들은 물론 직원들까지 준섭이 누군지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우경은, 그를 응대하는 직원들의 호의 섞인 시선과 미소, 질문을 하며 눈이 마주칠 때 보이는 긴장감 같은 것들을 약간의 거리를 두고 지켜보았다. 그중 누군가는 밀도 높은 매혹을 느낄 테고, 가슴이 뛰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우경이 사진만으로도 사로잡혔듯이 말이다.
새삼스레 태준섭이라는 남자가 타인에게서 끌어내는 호기심과 떨림, 오로지 본인에게만 집중하게 만드는 강한 인력 같은, 설명할 수 없는 파장이나 에너지 같은 것들에 우경은 다만 휘말렸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요즘 들어 우경을 자주 슬프게 만들었다.
“우동이랑 어묵. 소주? 그리고 또 뭘 시키면 좋습니까?”
태준섭이 벽에 붙은 단출한 메뉴판을 보며 물었다.
“물떡 추가하고, 튀김 먹어요. 오징어 튀김 맛있어요.”
우경이 일어섰다. 왜 그러는지 쳐다보는 준섭을 향해 설명했다.
“음식은 앞에 가서 주문해야 해요. 튀김이랑 어묵 꼬치 종류를 고를 수도 있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같이 갑시다.”
준섭이 따라 일어섰다. 테이블 사이로 난 좁은 통로를 준섭은 우경의 뒤에 바싹 붙어서 걸어갔다. 옆 테이블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레 움직이면서 우경은 두 사람을 향하는, 정확히는 태준섭을 향하는 눈길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조리대와 홀을 구분 짓는 카운터 앞에 서서 준섭은 열 개씩 정도 여러 칸에 나눠져 뜨거운 국물에 데워지고 있는 어묵 꼬치 종류를 조금 난감하다는 듯이 살펴보았다. 우경이 준섭에게 작게 말했다.
“제가 맛있는 걸로 주문할게요. 먹어 보고 다른 거 또 시켜요.”
한 뼘 거리를 두고 준섭이 응.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손님들이 먼저 주문한 음식을 바쁘게 그릇에 담고, 끓는 물에 채에 받친 우동발을 담그고, 어묵 꼬치의 위치를 바꾸던 아주머니가 그제야 우경에게 시선을 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우경이 빠르게 주문했다.
“부산 오뎅 1인분, 냄비 우동 하나, 오징어 튀김 1인분이요. 오뎅은 쭈글이 두 개랑 오징어 두 개 청양고추 하나 섞을게요. 물떡 두 개 추가하고요.”
“오뎅, 우동, 튀김, 물떡 두 개면 만 3천 4백 원이야. 쭈글이 둘, 오징어 둘, 고추 하나에 튀김은 오징어로만 맞지?”
“네. 감사합니다.”
우경이 답하며 동시에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냈다. 우경의 재빠른 주문과 아주머니의 거침없는 응대를 포함해 현금을 내밀고 거스름돈을 받는 모든 과정을 순식간에 치르고 나자, 준섭이 아연한 기색이었다.
“내가 사 주려고 했는데.”
말하면서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오늘은 제가 살게요. 양이 많지는 않아요. 먹고 맛있는 걸로 더 시켜 먹어요.”
그런 와중에도 준섭은 비스듬히 비켜서서 오른팔을 뻗으며 우경이 먼저 지나갈 길을 만들었다. 준섭을 스쳐 지나며 우경이 올려다보았다.
“응?”
나지막한 물음이 좋아서 입이 벌어졌다.
섹스 중에도 준섭은 응? 하고 그렇게 물으며 우경을 살펴 주곤 했다. 극한의 쾌감은 통각과 맞닿아 있고, 여전히 준섭은 우경이 받아들이기에 버거운 상대였다. 그럴 때면 잔뜩 찡그리고서도, 숨을 몰아쉬면서도 터질 듯한 감각을 누르며 준섭은 우경에게 응? 하고 물어 주었다.
눈썹을 약간만 올리고 묻는 물음이, 관찰하는 눈빛이, 어떤 상황에서도 인내심을 품고 있는 그 배려가 우경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더없이 좋았다. 순식간에 몸속 깊은 곳과 마음의 깊은 바닥까지 말랑거리며 무장 해제가 되었다.
하마터면 어묵집 중간에 서서 준섭의 턱 끝에 입을 맞출 뻔했다. 우경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좋아서요.”
준섭이 기막히다는 듯 웃었는데 뺨이 살짝 달아오른 것 같기도 했다. 더 보다간 진짜 입이라도 맞출 것 같아 우경이 먼저 테이블로 걸어갔다.
튀김가루와 쑥갓, 유부만 올린 우동, 어묵과 물떡, 바싹하게 다시 튀겨 낸 오징어 튀김으로 조그만 테이블이 가득 찼다. 따로 주문한 소주병을 열어 준섭이 우경의 잔과 제 잔을 채웠다. 건배사 없는 건배를 하고, 잔을 입에 대었다 떼면서 우경은 줄곧 준섭만 바라보았다.
준섭의 손 안에서는 너무 작아 보이는 소주잔에서 찰랑이던 투명한 알코올이 벌어진 입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잔을 비우느라 들어 올린 턱 때문인지 턱선이 두드러져 보였다. 날렵하고, 강인하고, 태준섭의 이미지가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는 턱선. 우경만 아는 뜨거움을 담은 입술, 냉정하고도 공허하고 그리고 까닭 없이 슬픈 눈…….
잔을 다시 채우며 준섭이 물었다.
“나 감상합니까?”
“아, 아니요.”
우경이 뜨거운 알루미늄 냄비를 조심스레 준섭 앞으로 밀어 두었다.
“우동 드세요. 들어간 건 많이 없는데 국물이 시원해요.”
우경도 잔을 비우고, 오징어 조각이 콕콕 박힌 어묵 꼬치를 들었다. 파가 송송 떠 있는 양념간장에 콕 찍어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우경과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어묵이다.
“남포동이요. 이 집 이름. 원래 남포동은 부산에 있거든요. 남포동 국제 시장에 우동이랑 어묵으로 유명한 집이 있대요. 원조는 못 먹어 봤어요.”
“그래요? 다음에 원조도 찾아가 볼까?”
준섭이 젓가락을 들더니 통통한 우동 면발을 집어 올렸다. 후루룩 소리를 내며 빨아들이고 하아, 입을 벌려 뜨거운 김을 내보냈다.
면을 씹어 삼키는 준섭을 우경이 가만히 쳐다보았다. 준섭은 숟가락을 들어 동글동글한 튀김가루까지 같이 국물을 크게 떠먹고 다시 우동발을 집어 들었다.
“맛있죠?”
우경과 눈이 마주치자 준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
준섭이 냄비를 우경 쪽으로 밀었다.
“먹을래요?”
우경이 숟가락을 들고 우동 국물을 떠올렸다.
“우동면도.”
거절할까 하다가 탱글한 면발을 보니 또 한 젓가락 맛보고 싶기도 했다. 약간만 집어 들어 호로록 삼키는 우경을 준섭이 내내 쳐다보고 있었다. 톡, 굵은 면발이 마지막으로 입속으로 들어가며 국물 한 방울이 턱에 튀었다. 거기에 신경을 쓰느라 우경은 켈룩 사레 기침을 뱉었다. 준섭이 냅킨을 빼어 우경의 턱을 닦아 주었다.
“전에도 그러더니.”
우경의 눈이 조금 커졌다.
“기억하세요?”
우동을 먹은 날이 언제였더라. 까마득한 예전 같은데 따지고 보면 고작 한 달하고 조금 더 지났을 뿐이다. 본부장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매달렸고, 그래서 겨우 주어진 30분. 그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는데…….
우경은 앞에 앉은 남자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지금은 태준섭이라는 남자에 대해 무얼 알고 있는 걸까. 가장 친밀한 행위를 여러 차례 나누고도, 결국은 아는 거라곤 그 행위가 전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경이 소주잔을 비우자 준섭이 잔을 채웠다. 그 잔도 비워 버리자 준섭이 어, 하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우경은 울적함을 지우기 위해 화사하게 웃었다. 상처를 받았는데 당신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상처이다.
남자는 몸을 열었을 뿐인데, 우경은 마음을 열었다. 그것뿐이면 좋았으련만 몸이 닿으며 몸속 깊은 곳, 가지고 있는지 인지하지도 못했던 신경이 벌어졌다. 얄팍한 꽃잎처럼 화려하게 벌어졌다가 꽃잎처럼 찢겨 너덜거렸다. 그건 또 하나의 마음이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단련된 탄성 좋은 마음이 아니었다. 예민하고 연약하여 바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속마음은, 몸처럼 고통과 같이 찢어지며 열렸다. 그 속으로 들어온 남자는 여린 조갯살에 박힌 진주처럼, 우경의 무언가를 자꾸만 갉아 내며 둥글고 아름답게 커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몸을 열지 않았을 텐데.
한 번 가지고 싶은 남자였을 뿐이라며 세련된 겉마음이 부추기는 용기를 믿지 않았을 텐데.
괜찮아.
우경은 속살에 무엇이 박혔는지도 모르고 어리둥절한 채로 진액을 뱉어 내 그걸 감싸고 또 감싸 몸속에서 키우는 진주 조개처럼, 하지만 입을 꽉 다물어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는 조개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까짓 조개도 사는데.
우경이 잔을 들어 테이블 위에 있는 준섭의 잔을 톡 부딪쳤다.
“혼자 마시네요.”
우경이 다시 홀짝 잔을 비웠다. 준섭이 말없이 어묵 국물을 작은 그릇에 덜어 내밀었다. 우경이 어묵 국물도 호로록 마시고 쭈글이 어묵 꼬치를 집어 들었다.
“오징어 어묵이 동그란 거거든요.”
“응.”
“엄마랑 내가 좋아하는 거예요. 둘이 오면 이것만 먹어요. 하나 남겼어요. 드세요.”
“그래요, 그럽시다.”
준섭이 둥글고 납작한 어묵 꼬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어묵을 먹을 때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기에, 양념장이나 국물 같은 건 흐르지 않는다. 깔끔하고 완벽하게 베어 물고 맛있게 삼키는 모습을 보는데 문득 그 입술에 자신의 어딘가를 물리고 싶다는 원색적인 충동이 솟았다. 우경은 주먹으로 제 입술을 문질렀다. 이가 가려워 입을 더 벌리고 손등과 이어지는 검지 아랫부분을 잘근 씹었다가 긁으면서 뱉어 냈다.
준섭이 느리게 어묵을 씹으며 립스틱 없이도 윤기가 도는 우경의 붉은 입술을 보았다. 그리고 부푼 꽃잎 같은 입술을 함부로 문지르는 손을, 나약한 손가락을 물어뜯듯이 씹어서 남긴 발간 잇자국을 차례로 보았다.
준섭이 갈증이 이는 사람처럼 소주를 들이켜고, 새 병을 헐었다.
“우리는, 기차역의 플랫폼에 서 있는 여행자들 같아서.”
우경이 새 병에 들어 있던 소주를 삼키고 말했다.
“그래서 좋아요.”
입가에 남은 알코올을 닦으려는지 우경이 다시 손을 들었다. 쓱 문지르고 잔에 남은 술을 마저 비웠다. 오징어 튀김을 한입 베어 물어 반질반질해진 입술을 보느라 준섭은 우경의 말 같은 건 반쯤만 알아들었다.
“여행자들은, 다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공통으로 아는 사람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죠. 플랫폼에 서 있는 여행자같이……. 우린.”
“그래? 플랫폼에서 그 여행자들이 섹스를 나눈다면.”
준섭이 냉소적으로 굴었다.
“시인 같은 화법은 취미 없는데.”
우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프랑수아즈 사강, 장 폴 사르트르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에서 나오는 말이에요.”
우경이 손을 저었다.
“취소해야겠네요. 사강과 사르트르를 올리는 순간 그들에게 너무 미안해졌어요.”
“왜.”
“몰라요.”
“기차 플랫폼은 마음에 드는데?”
“네.”
우경이 입술을 다시 문질렀다.
“저도요.”
기차 플랫폼에 서 있는 여행자 같은 대화를 나누며, 잔을 두어 번 더 비우고 테이블 위 우동도, 어묵도 다 먹었다. 우경이 조그맣게 잘라 둔 오징어 튀김을 젓가락으로 들었다가 놓쳤다. 놓친 조각을 준섭이 깔끔한 젓가락질로 집어 우경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니는 아름다우셨어.”
우경이 취기로 뻑뻑해진 눈을 깜박였다.
“아름답고 병약했어. 내면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사랑에는 어리석었지.”
준섭이 비어 있는 소주잔을 매만졌다. 검지로 둥글게 잔 주위를 굴리며 둥글게 말려진 유리잔 너머, 작은 테이블과 좁은 우동집 공간을 뛰어넘어,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누군가를 더듬는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를 하나도 닮지 않았어. 외모도 성격도 내면까지 아버지를 닮았다고들 해. 뻔뻔하고 비열하고 수치를 모르고, 사랑을 철저하게 이용할 만큼 이기적인 사람이었어. 내 아버지는.”
아버지를 말하는 준섭의 목소리는 덤덤했는데 무언가를 어금니로 짓이겨 삼켜 내는지, 턱 근육이 솟아올랐다가 내렸다.
“아버지는 웨딩드레스를 입을 여자를 임신시키고, 결혼식 당일 탈주시켰지. 어머니는 뱃속 아이를 선택했고, 아버지를 선택했고, 대신 자신의 인생을 포함한 그 외의 모든 것들을 버렸어. 나는 아버지의 유전자로, 어머니의 인생을 좀먹으며 자라나서 지금 이 자리에, 뻔뻔하고도 멀쩡하게.”
준섭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굳어진 우경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래도 교훈이라는 게 있잖아. 쓰레기에도 고통은 새겨져. 부모님 죽음이 남긴 교훈은 각인시켰으니 연우경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진 않아. 그건 믿어도 좋아.”
우경이 뺨을 두드리는 준섭의 손을 잡았다. 불쑥 솟아오르는 울음 덩어리를 삼키고 밝은 목소리를 만들었다.
“잠시만요.”
왼손으로는 손을 잡은 채로, 다른 손으로 핸드폰 사진 갤러리를 열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우리 백설이.”
우경이 핸드폰을 준섭 앞으로 돌려놓고 사진을 설명했다.
“아빠는 가난한 시인이었어요. 병원장 아버지를 둔 의대생 아들이 엄마를 쫓아다녔는데, 엄마는 아빠가 쓴 편지에 홀딱 반했다고 하셨거든요? 엄마가 나 가졌는데, 외할아버지가 엄마 쫓아냈대요. 그런데…….”
우경이 까르르 웃었다.
“아빠가 편지를 잘 쓰세요. 하지만, 아빠가 키도 크고 잘생기셨거든요? 엄마 얘기 듣고 그 병원장 아들이 물려받은 병원 찾아서 원장을 검색해 봤어요. 클릭 전에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인생의 갈림길을 미래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이잖아요. 마우스에 손을 올리고 심호흡도 했거든요. 두둥 사진이 떴는데. 와……. 엄마 순 거짓말. 아빠 외모에 반했으면서. 편지는 무슨.”
하핫, 준섭이 웃음을 툭 터트렸다.
“아빠 미남이죠? 엄마랑 식도 못 올리고 신혼 생활 시작하면서 시골로 가서 국어 선생님 하시고……. 아빠 학교에서 인기 짱이었어요. 여학교에도 많이 계셨거든요. 선생님 결혼 왜 그렇게 일찍 했냐고 막 우는 여학생들도 있었다는데. 물론 예전에 저 어렸을 때까지 이야기예요.”
“아빠 닮았네.”
준섭이 사진을 양 손가락으로 확대하며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닌가, 얼굴형은 엄마 같기도.”
사진 속 우경과 부모님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준섭의 입가에 미소가 잡혔다.
“엄마랑 웃는 게 똑같대요. 눈코는 아빠 닮았는데 턱선이랑 입매는 엄마. 얘는 우리 백설이. 내 동생.”
한껏 꾸미고서 희고 기다란 털을 가지런히 빗질한 모습으로 카메라를 새초롬히 응시하는 백설이를 우경이 검지로 가리켰다.
“짱 예뻐요. 실제로 보면 무지무지 엄청나게 예뻐요. 담에 보여 드릴게요.”
“응, 백설 공주님.”
우경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준섭의 손을 덮어 쥐었다가,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가늘고 길어 보이는데 우경의 손이 겹쳐지자 큼직하고 굵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툼한 손가락 사이로 가느다란 손가락을 조금씩 더 밀어 넣어 꽉 맞물렸다.
“나가요.”
“응?”
“찬바람 쐬고 싶어요.”
우경이 일어섰다. 잡은 손을 풀지 않아 둘 다 외투를 입지 못했다.
“다음에 다시 와서 오징어 어묵 더 시켜 먹고, 소주도 더 먹어요.”
“그러세요.”
준섭이 웃으며 우경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우동집 밖으로 나와서도 우경은 깍지를 끼운 손을 풀지 않고 더욱 틈없이 맞잡았다.
“안 추워?”
포개어진 두 사람의 외투를 한 팔에 걸고 준섭이 물었다. 골목길 가운데에 멈춰 서서 우경이 준섭을 올려다보았다.
“키스해 주면 안 돼요?”
심장이 쿵쿵쿵 울려 귓속이 시끄러웠다.
취해서, 슬퍼서, 제 속에 품은 진주가 아파서, 그 진주가 너무 예뻐서, 가엾어서.
그 모든 이유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준섭이 우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손에서 전해지는 악력이 아니었다면, 거절이라고 생각할 만큼 무표정하고 단단한 얼굴이었다. 이를 악물며 다물었던 입술을 떼어 내며 말했다.
“오늘, 섹스도 합시다.”
준섭이 달리기 시작했다. 큰길가로 뛰어가서 대기하고 있는 택시 문을 열고 호텔 이름을 말했다. 도착할 때까지 손을 꽉 잡고서, 우경은 쳐다보지 않았다.
* * *
호텔 복도에 깔린 카펫 위를 밟는 걸음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외투는 입고 있지 않았는데, 등이 뜨겁기도 하고 시리기도 했다.
도어 키로 문을 열자마자 어깨가 밀려 우경의 등이 벽에 붙었다. 준섭이 곱게 접어, 음식 냄새가 배지 않도록 싸 두었던 코트가 바닥에 떨어졌다.
덮치듯이 입술이 달라붙었다. 우경의 손이 준섭의 슈트 상의를 벗겨 내는 동안에도 서로가 서로의 것을 모조리 흡입해 버릴 것처럼 사납게 굴었다.
우경의 스커트 지퍼가 내려가고 스타킹이 억센 움직임을 견디지 못해 찢어졌다. 혀를 내어 주고 한껏 빨리다가, 다시 상대의 혀를 깨무느라 스커트를 찢어 버렸다 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준섭의 입술이 닿고 손이 닿고 몸이 붙는 자리마다 얄팍하게 닳아버린 신경을 따라 자극이 끝없이 전신으로 뻗어 갔다. 우경은 준섭의 목에 팔을 두르고 감각을 버티려 애를 썼다.
레이스 속옷은 언제 벗겨졌는지도 몰랐다. 준섭이 한쪽 무릎 아래에 손을 넣나 싶더니 무릎이 굽혀진 채로 다리가 높이 들어 올려졌다. 힐을 신은 한쪽 다리가 위태롭게 부들거렸다. 드러나는 부분에 수치심을 느낄 겨를도 없이 삽입이 이루어졌다. 충격으로 이마까지 찡하게 울렸다.
아픈데, 아파서 좋았다. 기억으로 새겨지길, 영원히 그 기억을 가지길 갈망하는 마음이 비이성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우경이 준섭의 어깨를 꽉 틀어쥐었다. 와이셔츠만 아니었다면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피를 낼 정도로.
준섭이 움직일 때마다 버티고 있는 발이 바닥에서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다가 다시 붙었다. 낯선 장소에서 낯설고 불편한 체위, 소스라치게 선명한 감각 때문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우경은 절정에 올랐다.
풀썩 주저앉을 듯이 비틀거리는 우경을 준섭이 받쳐 올렸다.
“똑바로.”
준섭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무너지는 자세를 더 높이 고정시켰다. 다시 파고들자, 우경의 입에서 으흑 하는 소리가 터졌다. 몸이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었다.
“너무 깊어. 너무…….”
칭얼거리듯이 말하며 준섭의 가슴을 밀었지만 소용없었다.
“아닐 텐데.”
준섭이 아직 멀었다는 듯 결합을 풀지 않고 한 번 더 움직였다. 우경의 발이 완전히 들리고 우경은 준섭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런 채로 툭 쳐올리자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일었다.
아닐 텐데, 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었다.
“숨 쉬어.”
치받으며 한 번 더 한계를 밀어 올렸다.
우욱 소리를 지르며 우경이 목덜미를 깨물었다. 온몸이 파들파들 떨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직.”
준섭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들어왔다. 바닥에서 완전히 떨어져 달랑거리는 발끝조차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아아……. 목구멍까지 박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소리 대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만할까?”
준섭이 젖은 눈가에 입술을 붙이며 물었다. 우경은 준섭의 와이셔츠를 찢을 듯이 구겨 쥐고는 고개를 저었다.
“끝…….”
“응?”
“끝……까지.”
준섭의 눈에 불꽃 같은 섬광이 터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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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소와즈 사강(Francoise Sagan, 1935~2004),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중에서 ‘장 폴 사르트르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에서 나오는 구절을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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