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태연한거짓말-21화 (21/23)

21장

비행기는 연착됐고, 앞서 도착한 비행기들과 같이 공항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나리타 공항에서 지하철에 오르고 두 번을 갈아타고 나서야 준섭이 머물고 있는 호텔 근처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지하철역에서 나오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제대로 찾아왔다면 호텔은 지하철역에서 300m만 걸어가면 나올 것이다.

고층 호텔이니 단번에 찾을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오산이었다. 핸드폰은 꺼져 있고, 머릿속으로 익혀 두었던 약도만으로는 방향을 두 번이나 잘못 짚었다. 갔던 길을 되돌아와 반대편으로 갔다가, 다시 길을 건너기도 하면서 지하철역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그러는 동안 눈발은 점점 굵어졌다.

우산도 없이 굽이 가느다란 힐을 신고 우경은 드러난 발등까지 흠뻑 젖어 버린 채로, 눈이 쌓인 거리를 헤맸다. 편의점이라도 찾아서 우산을 사야 하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가는데, 오른편으로 준섭이 묵고 있는 호텔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고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호텔 전면에 황금빛 불빛이 반짝였다. 꼭대기 층에서 시작해서 점점 폭이 사선으로 넓어지며 미끄럼틀처럼 아래로 내려오는 황금빛 길이 눈 오는 검은 밤을 배경으로 홀로 화려하게 빛이 났다.

눈두덩을 덮는 눈발을 걷어 내며 우경은 황금빛 길을 바라보았다. 산타클로스가 썰매를 타고 내려올 것만 같은 길이었다. 착한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길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성냥갑을 쥔, 춥고 배고픈 소녀처럼 우경은 조금씩 몸을 떨며 호텔로 다가갔다. 눈에 온통 젖어 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서는 우경을 향해 벨보이가 다가왔다. 도와드릴까요. 묻는 물음에 괜찮다고 말하며 얼은 손으로 손수건을 꺼내어 물기 젖은 머리를 대충 닦았다. 우경은 물방울을 떨어뜨리기에 미안할 만큼 반질거리는 대리석 바닥을 조심스레 걸어가 프런트 데스크로 다가갔다.

데스크에서 먼저 온 손님들을 응대하는 동안 우경은 기운 빠진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러다가 자신을 향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객실 예약하셨습니까?”

“아, 아니요.”

“죄송합니다. 오늘 이용 가능한 객실은 없습니다.”

젖어 있는 우경을 향해 직원이 상냥한 말투로 거부 의사를 전했다.

“여기 호텔 투숙객을 만나기로 했는데, 핸드폰 배터리가 없어서 전화를 못 하겠어요.”

“그러세요? 호실과 투숙객 이름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아니요, 제가 전화할게요. 혹시 핸드폰 충전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직원이 우경이 내미는 핸드폰을 들어 살펴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마치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우경을 향해 웃어 보이며 자그마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트렁크를 맡길 때 작성하는 포맷이 프린트된 종이였다. 이름과 연락처를 쓰자, 한쪽은 핸드폰 위에 붙이고 다른 쪽은 우경에게 주면서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찾으러 오실 때 종이를 보여 주세요.”

“감사합니다.”

돌아선 우경의 눈에 그제야 로비에 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이 들어왔다. 성인 키의 두 배는 훨씬 넘어 보이는 높다란 트리를 향해 우경은 천천히 걸어갔다. 바로 앞까지 다가가 우두커니 서서 젖은 코트에 손을 찔러 넣고 틈이 없을 만큼 촘촘히 박힌 은빛 전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부탁으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트리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는 커플이었다. 활짝 웃는 연인에게 닿는 시선에 부러움이나 서러움 비슷한 감정이 드러날까 봐, 우경도 활짝 웃었다.

구두 속에서 퉁퉁 부은 발이 아팠지만, 젖은 옷을 입은 채로 초일류 호텔의 소파에 덥석 앉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경은 다니는 사람이 적은 뒤편으로 물러나 가만히 서 있는 편을 택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트리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그 트리에 붙어 있는 붉은 공단 리본을 하나, 둘, 아래에서 위로 숫자를 세어 가기 시작했다.

셋, 넷, 다섯…….

들뜬 웃음소리, 활기찬 목소리, 트리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에게서 따스한 냄새가 났다.

이곳에서 춥고 외로운 사람은 우경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성냥을 다 팔지 못하고 들어오면 안 된다는 호통을 듣고서, 크리스마스이브에 언 발을 동동 구르는 동화책 속의 아이도 아닌데……. 한 번씩 한기가 들어 몸을 떨면서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면서, 우경은 고개를 숙였다.

* * *

맥없이 떨어진 시선 끝에 구두가 들어왔다. 우경이 고개를 들기 전에 어깨 위로 두툼하고 큼직한 코트가 걸쳐졌다.

“아…….”

“어이가 없네.”

준섭이 우경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지금 동경의 호텔 로비에서 연우경이 불쑥 나타난 상황이 어이없다는 것 같기도 하고, 눈에 흠뻑 젖은 꼴이 어이가 없다는 뜻 같기도 했다. 우경 입장에서야말로 로비에서 맞닥뜨린 준섭이 어이가 없었다.

“본부장님, 저는…….”

“일단, 올라갑시다.”

준섭이 어깨를 감싸며 움직였다. 우경은 손을 떨어내고 준섭의 코트를 벗으려 했지만 준섭은 코트를 다시 걸치게 하고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우경은 준섭이 이끄는 방향으로 반쯤 끌려가듯이 움직였다. 이러다가 어디서 사진이 찍혀 회장에게 전송될지 모를 일이었다. 우경이 걸음을 멈추고 발끝에 힘을 주며 버텼다.

“이거, 벗을래요. 그리고 혼자 걸어갈 거예요.”

“왜.”

“저 코트 입고 있어요.”

“젖었잖아.”

“괜찮아요. 본부장님 코트, 길고 무거워요. 움직이기 불편해요.”

준섭이 우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추위로 떨리는 몸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입술은 새파래져서.”

준섭이 코트를 다시 고집스레 걸치게 하고는 말했다.

“안고 올라갈까?”

“본부장님.”

“길고 무거운 코트 걸쳐서 움직이기 불편하면, 업든지 안든지 할 테니까.”

태준섭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특히나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 때면…….

우경이 할 수 없다는 듯 코트 깃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잘 움직이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준섭이 좀 시니컬하게 말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우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준섭은 제일 꼭대기 층 버튼을 누르고 뒤로 물러섰다. 같이 탄 사람들이 중간 층수에서 내릴 때까지 준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둘만 남게 되자 우경에게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왜 그 꼴로 여기 있어?”

답을 하지 않자 준섭이 비스듬히 얼굴을 기울이며 다시 물었다.

“트리 앞, 산타 선물인가? 루돌프 썰매 타고 오는 길에 눈 맞았어?”

“우산을…… 못 챙겼어요.”

스스로 생각해도 적절하지 않은 답을 아무렇게나 하면서 우경은 준섭을 빤히 쳐다보았다.

“산타 선물이라면 싫어요? 왜, 눈에 젖어서?”

“기막혀서.”

준섭이 작게 중얼거리고는 열리는 문으로 먼저 내렸다.

호텔룸으로 향하는 준섭을 따르면서 우경은 설움으로 목구멍이 빠듯하게 죄어들었다. 복도 중간에서 멈춰 선 우경을 향해 준섭이 큰 걸음으로 되돌아왔다. 눈에는 못마땅함이 서려 있는데 어깨를 감싸 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가자.”

“화났어요?”

우경의 물음에 준섭이 걸음을 멈추고 약간 소리 내어 웃었다. 올려다보는 우경의 젖은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주고는, 체온을 재어 보듯이 이마를 덮었다. 온기에 저절로 움츠러드는 우경의 어깨를 끌어안고서 준섭은 룸까지 곧장 걸어갔다.

방 안은 온도를 높여 두었는지 열어 둔 문틈으로 훈기가 끼쳤다. 들어서자마자 준섭이 양손으로 우경의 뺨을 감싸 쥐면서 눈매를 찡그렸다.

“차가워.”

“지하철역에서 방향을 잘못 잡았어요. 코앞에 두고 계속 뱅글뱅글 돌아서…….”

준섭이 입술을 포개자 따스한 기운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준섭이 입술을 붙였다가 떼어 낼 때마다, 혓바닥을 제 입속으로 빨아들이다가 놓아줄 때마다 조금씩 몸이 덥혀져 갔다.

“미친놈처럼 전화를 걸어 대고 메시지를 보내고.”

“아…….”

“무슨 사고라도 났나. 아님 잠수 타 버린 건가. 별생각을 다 했는데.”

“핸드폰이 방전되어서……. 맞아요, 핸드폰……. 아. 핸드폰을 두고.”

“응?”

우경이 그제야 프런트 데스크에 맡겨 둔 핸드폰을 떠올리며 말했다.

“프런트에 핸드폰 충전 부탁했어요. 찾아와야 하는데.”

준섭이 주머니에서 제 핸드폰을 꺼내더니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하룻밤쯤, 그런 거 없어도 되지 않나?”

젖어 버린 우경의 코트를 벗겨 내고 따뜻한 품으로 당겨 안으며 말했다.

“우선, 더운물에 좀 씻자. 녹다 만 눈사람도 아니고…….”

* * *

욕실에서 물줄기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준섭은 전원이 꺼진 핸드폰의 검은 화면을 검지로 가볍게 문질렀다. 오늘 늦은 오후부터 밤까지 저 핸드폰을 내내 들고서 마음을 졸였다.

점심 약속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표면적인 이야기 외에 좀 더 구체적인 사업 논의까지 진전되었고 식사를 마칠 즈음에는 D통신사 사장의 호의로 근처 관광 명소까지 같이 둘러보며 담소를 이어 갔다.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우경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그 후로 전화기는 꺼져 있다는 응답만 반복했다. 메시지를 보내고 기다리다가 다시 전화를 걸기를 반복하면서 준섭은 오늘 점심에 우경과 했던 마지막 통화를 찬찬히 반복해서 떠올렸다. 무언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뭉툭하고 둔한, 그렇지만 분명히 좋지 못한 예감이 들었다.

이섭에게서 전화가 온 건 그즈음이었다.

- 잘되어 가?

전화를 받자마자 이섭이 툭 던지듯 내뱉었다.

“뭘.”

- 광내야지. 내일 선보는데.

이섭의 말투에서 취기가 느껴졌다. 준섭이 피싯 웃었다.

“내일 뭘 하든, 광은 이미 충분한데?”

- 재수 없긴.

이섭이 핫, 김빠지는 웃음을 웃더니 확인하듯 덧붙였다.

- 너 다 알고 갔지?

“뭘 알아.”

- 최지분. 그래, 지분을 가지신 최하영 씨 말이야.

“아, 피로연?”

쓰읍, 이섭이 잇새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역시……, 하는 소리도 들렸다.

- 네, 네. 잘해 보세요, 태준섭 본부장님.

“잘하고 말고 할 거 없어.”

-아, 이미 광이 충분해서?

“내가 뭘 얼마나 노력하든 네가 망쳐 줄 거잖아.”

준섭이 정곡을 찌르자 이섭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 내가? 내가 왜? 혹시, 손 안 대고 코 풀 거라 기대했다면 미안.

“무슨 말이야.”

준섭이 핸드폰을 고쳐 쥐며 물었다.

- 말 그대로, 미안합니다. 네에, 본부장님 뜻대로는 안 되신다고요.

“내 뜻이 뭔데.”

- 왜 이래, 못 알아들은 척.

“태이섭.”

- 왜? 태준섭.

“나 최하영 씨랑 잘해 볼 생각 없어.”

- 그러시던가요.

준섭이 미간을 찡그렸다. 연우경을 준섭과 엮은 것부터 이섭의 농간이었고, 둘의 관계를 모조리 보고 받고 사진까지 수집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준섭이 최하영과 선을 보게 될까 들어 둔 보험이 자명한데 지금 이섭이 하는 말은 준섭이 하영과 피로연에서 만나고 자연스레 정식 선으로 이어져도 그 카드를 쓰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태이섭, 너 피로연에 최하영 씨가 초대받은 건 언제 알았어?”

- 본부장님 출장 가시고 알았지, 아니었음 곱게 가게 내버려 뒀겠어?

준섭이 눈을 가늘게 뜨며 제가 알지 못하는 상황을 최대한 진실에 가깝게 추측하려 애썼다.

“혹시…….”

- 뭐.

“나 출장 간 뒤에, 연우경 만났어?”

이섭이 풋, 소리를 내며 비웃었다.

- 왜, 뭐가 무서워?

“우경이한테 무슨 소릴 했어.”

- 우, 경, 이~?

빈정거리는 웃음소리에 머리끝이 바싹 서는 기분이었다.

“태이섭!”

- 직접 물어봐. 무슨 소릴 들었는지, 나한테 이러지 말고. 네?

이섭이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다시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우경의 전화기는 여전히 꺼져 있다는 응답만 들렸다. 초조하게 몇 번을 반복하다가 준섭은 다른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후론 지루한 기다림이었다. 지시한 내용에 대해 보고를 받았을 때, 준섭은 빠르게 시간을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항공편 출발 시각을 따지면 이미 연우경은 나리타 공항에서 호텔로 오고도 한참이 지난 시각이었다. 벌써 캄캄한 밤이고, 굵어진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젠장. 준섭이 급하게 코트를 껴입고 방을 나섰다. 어디선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무작정 호텔 밖으로 나가 찾아볼 요량으로 급히 내려갔을 때 반짝이는 트리 근처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우경을 발견하였다.

녹아서 물이 되어 가는 눈사람처럼 온통 젖어 버린 우경이 파리한 안색으로 준섭을 올려다보았다. 반가운 내색도 없이……. 슬픔과 원망, 고민과 피로감이 배어 있는 눈빛으로.

나를, 그렇게 못 믿나.

준섭은 이를 질끈 깨물었다.

* * *

뜨거운 물이 몸에 닿자, 살 것 같았다.

준섭에게 말해야 하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우경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위로 물줄기를 맞으며 눈물을 씻어 냈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눈을 감고서 그저 물을 맞고 서 있었다.

오늘 하룻밤, 단 하루만 더 꿈을 연장하고 싶었다. 성냥팔이 아이의 꿈처럼 거짓된 환영일지라도, 하룻밤쯤은 아침이 올 때까지 서로에게 밤을 온전하게 주는 완벽한 연인이 되는 꿈을 꾸고 싶었다.

눈물도 신파도 없는 밤.

우경은 거품을 일어 천천히 몸을 씻기 시작했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까지 말린 후, 배스 타월을 두르고 욕실 문을 살며시 열었다.

“저…….”

난감한 목소리를 내자 안쪽 소파에 앉아 있던 준섭이 우경을 향해 걸어왔다.

“옷은 클리닝 맡겼어.”

“아……. 네.”

바닥만 쳐다보는 우경에게 준섭이 무언가를 머리 위로 덮어씌웠다. 어어? 포근한 감촉에 고개를 들어보니 머리가 쏙 빠져나왔다. 준섭의 스ㅤㅇㅞㅅ셔츠였다.

“팔.”

“네, 네.”

얼결에 암홀로 팔을 넣었지만, 손이 도무지 나올 것 같지 않은 길이같이 느껴졌다. 얼떨떨해하는 우경 대신, 준섭이 빠르게 양 소매를 걷어 올려 주고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다. 말린다고 말렸는데 물기가 느껴졌는지 준섭이 머리칼에 다섯 손가락을 넣어 가볍게 흔들었다.

“머리 더 말려 줄까?”

“아니요.”

우경이 짧은 원피스 같은 스ㅤㅇㅞㅅ셔츠 밑단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뭐 좀 먹을래?”

그러고 보니 방 안에서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났다.

안쪽으로 가 보니 테이블 위에 따뜻한 양송이 스프와 오트밀, 데운 우유, 그리고 과일과 치즈, 올리브와 와인이 세팅되어 있었다.

우경에게 의자를 빼어 주고 숟가락을 쥐여 주며 준섭이 말했다.

“스프부터 먹어. 우유도 좋고.”

와인잔을 흘끗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챘는지 준섭이 잔을 옆으로 치워 놓으며 우경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따뜻한 걸 먼저 먹어.”

올려다보는 우경을 향해 준섭이 몸을 기울였다. 우경의 정수리에 턱을 대어 가볍게 문지르고는 물었다.

“어떻게 온 거야.”

“산타 선물이라면서요.”

준섭이 우경의 머리와 이마가 이어지는 부분을 검지로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좀 더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1년 동안 울지 않고 있었더니 산타가 감동했나. 제대로 서프라이즈긴 했어.”

이번에는 우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런 고백만으로도 다시 마음이 슬픔으로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우경이 속입술을 꾹 깨물었다.

“전화받고서……, 너무 보고 싶어져서.”

“응.”

“그래서 무작정 공항으로 갔어요. 비행기표는 여기저기에 부탁해 보고 그러고도 공항에서 오랫동안 대기했어요. 확정되면 알려 드리려 했는데, 배터리가……. 바로 탑승해야 해서 어디 충전 맡길 곳도 없었고…….”

“그래.”

준섭이 우경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며 손끝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좋아. 보고 싶었고 그래서 서프라이즈 산타 선물, 그 외엔 다른 이유가 없어?”

우경은 입술을 달싹이다 물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준섭의 시선은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사무실에서도 침대에서도 한 번씩 우경을 깊숙한 부분부터 긴장하게 만들었다. 모든 걸 환히 들킬 것만 같은 시선에 언제나 가슴이 달아올랐다.

여전히 우경의 눈만 바라보는 준섭을 향해 우경이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을 했다.

“꼴은 좀 그랬지만, 선물 받아 줘요.”

흰 와이셔츠에 양복바지, 여전히 외출복 차림으로 있는 준섭을 향해 우경이 손을 뻗었다. 벨트 버클을 만지작거리는 손을 잡아 손등을 가볍게 엄지로 문지르며 준섭이 말했다.

“나도 씻고 나올게.”

우경은 준섭이 움직이는 뒷모습을 길게 쳐다보았다.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에도 우경은 고개를 반쯤 비튼 채 가만히 있었다. 손에는 준섭이 쥐여 준 스푼이 있지만, 도무지 삼킬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전면 창 너머 눈발이 흩날리는 밤이 보였다. 어둡고 추운 겨울밤은 따뜻한 실내에서 내려다보면 동화처럼 꾸며 놓은 놀이동산처럼 반짝인다. 평소라면 몰래 사진이라도 찍어 놓고 싶은, 넓고 고급스러운 호텔룸도 준섭이 주문한 룸서비스나 와인도 비현실적이었다. 아니, 태준섭이라는 남자 자체가 성냥 한 개비를 그어 만든 환상 같았다.

피로감과 노곤함, 억누르려 해도 통제되지 않는 슬픔이 굵은 사슬이 되어 몸을 감고 있는 것만 같았다.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우경의 맞은편으로 준섭이 다가왔다. 젖은 머리칼에 배스 가운 차림으로 앉으며 준섭이 툭 테이블을 두드렸다.

“왜 안 먹어. 다른 거 시킬까.”

“비행기에서 먹었어요.”

우경이 웃으며 답했다.

“와인 마실래요.”

우경이 와인잔에 손가락을 대자, 준섭이 잔을 제 앞으로 옮기고는, 두 개의 잔에 미리 열어 두었던 와인을 차례로 따랐다. 제법 많은 양의 와인이 담긴 잔을 향해 내미는 우경의 손을 무시하고 턱을 까닥 들어 보였다.

“스프부터.”

“식었어요.”

“데워 오라고 할게.”

일어서는 준섭을 향해 우경이 손을 저었다.

“먹을게요.”

우경이 스푼을 들고 식은 스프를 크게 떠올렸다. 세 번을 떠먹고 스푼을 내려놓자 준섭이 고개를 저었다.

“다 먹어.”

우경이 후, 숨을 내쉬고는 스푼을 들었다. 일부러 스프 그릇을 긁는 소리를 내며 한 번 더 먹고는 딱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쳐다보는 우경에게 준섭이 말했다.

“우유.”

“왜 그래요?”

“잘 먹어야 해서.”

“내가 뭐 크는 애도 아니고.”

준섭이 팔짱을 끼고 몸을 뒤로 젖히고는 우경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레 시선의 방향이 아래로 향하자 더없이 오만해 보였다.

“애라니.”

입을 약간 벌리고 웃는 웃음이 어딘가 모르게 못마땅해하는 것 같다.

“하루 종일 굶은 얼굴이야. 그래선 오늘 밤 선물이 안 될 텐데.”

순간적으로 달아오르는 뺨을 감추려 우경이 우유를 급하게 들이켰다. 냅킨으로 입술을 닦으며 준섭을 바라보았다.

“이제 와인 마셔도 돼요?”

“그래.”

우경이 손을 뻗었지만 준섭은 와인잔을 쥐고는 말했다.

“이리로 와. 그게 좋겠어.”

우경이 망설이는 동안 준섭은 와인잔을 테이블 위에 붙인 채로 빙글 흔들었다. 붉은 와인이 둥글게 출렁이자 짙은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잔에 만들어진 와인의 눈물을 보며 우경이 일어섰다. 몇 발 움직이다가, 배스 타월을 가슴 위로 두른 채로 준섭의 스ㅤㅇㅞㅅ셔츠를 껴입은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이겠다는 생각에 어정쩡하게 멈춰 섰다. 준섭이 웃으며 팔을 벌렸다.

“이리 와.”

길게 휘어지는 눈을 보며 우경이 걸음을 떼었다. 준섭 앞으로 다가가자 우경의 손가락에 와인잔을 끼워 주며 한 번 더 웃었다.

“건배할까.”

준섭이 우경의 손에 들린 와인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건배사 같은 건 없었다.

마지막 밤을 위하여, 쯤이 되려나. 그런 자조적인 생각을 하면서 우경이 웃었다. 한 모금 와인을 삼키고 우경이 다시 준섭을 향해 웃었는데, 준섭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물끄러미 우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왜……, 그렇게 봐요.”

“아니.”

준섭이 팔을 뻗어 허리를 쓰다듬나 싶더니 부드럽게 몸을 끌어당겼다. 그런 접촉만으로도 가슴 아래 꾹꾹 눌러둔 욕망이 솟았다. 이 남자를 놓아야 한다는 절망감은 더 빠르고 뾰족하게 솟아 우경의 심장을 찔렀다. 우경은 숨을 깊이 삼키며 고통도 삼켰다.

자연스레 준섭의 다리 위에 앉게 된 우경이 한쪽 팔을 들어 준섭의 목을 감았다. 팔걸이가 있는 1인용 소파에 가까운 의자였지만 아무래도 옆으로 비스듬히 앉게 되자 균형이 불안정한 느낌이었다. 우경이 상체를 바싹 준섭에게 붙이자, 아직 물기에 젖은 준섭의 머리칼에서 샴푸 냄새가 났다. 어느새 눈자위가 아파 왔다. 붉어지는 눈을 들키기 싫어 우경은 준섭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고 물에 젖어 더 짙어진 머리칼에도 입을 맞췄다.

우경이 관자놀이와 귓바퀴까지 입을 맞추는 동안, 준섭은 천천히 와인을 마셨다. 벌어진 입술로 아주 약간씩만 흘러 들어가는 와인을 보며 우경이 물었다.

“맛있어요?”

“괜찮은데.”

“비싼 거죠?”

우경이 고개를 돌려 와인병에 붙은 라벨을 읽으려 눈을 크게 떴다.

“글쎄……. 추천만 받고 가격은 확인 안 했어. 3, 40만 엔 정도 하지 않을까.”

“와…….”

우경이 순수한 놀라움과 약간의 빈정거림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저는 와인 맛을 몰라서…….”

우경이 손에 든 와인을 주스처럼 마셔 버렸다. 무시무시한 가격의 와인이 콸콸 쏟아진 입속은 혀끝부터 식도까지 온통 얼얼한 느낌이었다. 준섭이 그런 우경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역시 맛을 모르겠어요. 떫다고 생각했는데, 입속에 길게 남은 향은 향긋하기도 하고 뭐라 한마디로 평가하긴 힘든 맛. 난 아무래도 소주 체질인가 봐요. 이런 비싼 것들은 어울리지 않아.”

새삼스레 송백재의 위압감과 회장 앞에서 벌레처럼 초라해지던 자신이 떠올랐다. 차라리 잔뜩 취해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우경이 어지러워 준섭의 몸에 얼굴을 붙이자, 준섭은 등을 받치고 있던 손을 조금 더 올려 우경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고개 들어 봐.”

준섭은 와인 때문에 점점 붉어지는 뺨을 보면서, 비어 있는 우경의 손에 제 와인잔을 끼워 넣고는 뒷머리를 약간 더 끌어당겼다.

닿지 않은 부분까지 솜털이 일어설 만큼 가까이에서 준섭의 입술이 이마와 콧날을 차례로 스쳤다. 그러다가 각도를 틀어 비스듬히 입술과 입술이 밀착했을 때 우경은 약간 몸을 떨었다.

“비싼 와인이야, 흘리지 마.”

준섭이 농담처럼 말하며 아랫입술을 빨아들였다. 젤리처럼 입술이 삼켜졌다가 약하게 깨물리길 반복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우경은 출렁이는 와인잔을 꽉 움키며 신음을 흘렸다.

“저, 저……, 와인……, 쏟아질 것 같아요.”

“마셔 버려.”

우경이 와인을 들이켜자 기다렸다는 듯 다시 입술이 붙었다.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지만 소용없었다. 반쯤은 턱으로 반쯤은 준섭의 입으로 와인이 흘렀다. 준섭이 와인이 묻은 턱을 혀로 길게 핥아 올렸다.

우경이 고개를 뒤로 젖히자 이번엔 와인을 스스로 마시고는 우경의 벌어진 입술로 밀어 넣었다. 몸속에 퍼져 버린 알코올과 지쳐 버린 감정 때문에 우경은 탈력감으로 몸을 늘어뜨렸다.

“맛있어?”

혓바닥으로 와인이 남은 우경의 입속을 휘저으며 준섭이 물었다. 우경이 으응, 답하자 만족스러운 듯이 혀를 비비며 스ㅤㅇㅞㅅ셔츠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가슴 위로 겹쳐 둔 수건을 풀어 내리자 우경이 진저리를 치듯 몸을 움츠렸다. 솟아오른 정점을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으며 준섭이 뻔뻔하게 말했다.

“와인 더 마셔.”

우경이 몽롱한 눈을 하고서, 오기를 부리듯 잔에 남은 와인을 다 삼키는 순간 준섭의 입술이 달라붙었다. 혀와 와인을 같이 흡입하면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머릿속이 아득해질 만큼 끈질긴 키스였다. 겨우 떨어졌을 때 우경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준섭이 우경의 손에 아슬아슬 뒤집힌 채로 잡혀 있는 와인잔을 바로 세우더니 다시 와인을 채웠다. 올려다보는 우경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굉장히 붉어졌는데, 알아?”

와인 때문인지 격한 키스 때문인지 몸이 달아올랐다.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숨도 열감기 환자처럼 뜨거웠다.

“이렇게 해. 저 와인을 다 마시는 걸로. 거짓말하느라 얼굴이 붉어져도 표시가 나지 않으니까.”

무슨 말인지 되묻기 전에 와인을 머금은 준섭의 입술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혀가 만나 서로의 것을 비빌 때마다 와인의 향이 한층 더 짙어져 호흡기를 강하게 밀고 들어왔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와인.”

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섭은 한쪽 팔로는 노곤함으로 늘어지는 우경의 등을 받쳐 비스듬히 기대도록 하고는 스ㅤㅇㅞㅅ셔츠를 위로 걷어 올렸다. 우경이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가슴을 가리려 했지만 한쪽 팔은 준섭의 등 뒤로, 다른 손은 와인잔을 쥐고 있었다.

준섭이 고개를 숙여 와인을 적신 입술로 가슴을 물었다.

“아…….”

우경의 몸이 출렁이자 장난처럼 말했다.

“쏟지 않으면, 상을 줄게.”

달아오른 몸보다 더 뜨거운 입술 속으로 바싹 일어선 돌기를 빨아들이자 평소보다 배는 강한 자극이 단번에 머리끝까지 솟아올랐다. 고개를 들면서 준섭이 아직도 손에 걸려 있던 와인잔을 테이블 위에 두었다.

아래부터 끌어올려 순식간에 스ㅤㅇㅞㅅ셔츠를 벗겨 버리고 우경을 아이처럼 안고 일어섰다. 우경은 준섭의 목을 끌어안고 다리를 둘러 허리를 감았다.

등에 닿는 침대가 서늘하면서도 포근했다. 우경은 떨어지려는 준섭의 목을 끌어안았다. 잠시만, 이라 말해도 고개를 마구 흔들고 비비면서 준섭을 놓지 않았다. 준섭이 그런 채로 배스 가운 매듭을 풀었다.

“아.”

아랫배에 닿는 선명한 느낌 때문에 우경이 눈을 크게 떴다. 여전히 아래와는 다른 얼굴을 하고서 준섭이 키스를 시작했다. 가슴에 그리고 입술에 부드러운 접촉이 이어졌다. 서두름 없이 중심을 쓰다듬고, 허벅지를 쓸어 주는 손길도 더없이 좋은데 우경은 계속 허리를 들어 올리며 맞닿는 부분을 비볐다. 준섭이 일부러 물러서 거리를 만들어도 자석처럼 다시 붙어 올라가길 반복했다.

왜 그래. 묻는 대신 준섭이 우경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마께에 머무르던 준섭의 손을 우경이 끌어 내렸다. 입을 크게 벌려 검지를 뿌리까지 넣고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너무 급하게 빨아들이다가, 아이가 젖꼭지를 빠는 듯한 소리가 몇 번 울렸다.

“연우경…….”

당혹스러워하는 준섭을 올려다보면서 중지까지 같이 삼켜 버렸다. 뺄 수 없도록 양손으로 준섭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준섭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급하게 들이켠 와인으로도 쓰다듬고 핥아 주는 자극으로도 우경의 몸은 충분히 열리지 않았다. 애절할 만큼 그를 원하는데, 준섭을 포기시켜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이 우경을 끝없이 나락으로 잡아끌어 내렸다.

그런 우경을 내려다보던 준섭이 힘을 주어 손을 갑자기 털어 내고는 우경의 발목을 잡았다. 넓게 벌리게 하고서 중심에 얼굴을 묻었다. 바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준섭의 머리칼에 찔러 넣으며 우경은 몸을 들썩였다.

준섭이 고개를 들었을 때 우경은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강건한 팔이 허리 뒤를 받쳐 끌어 올리는 대로 몸을 일으키고 무릎을 넓게 벌려 준섭의 허벅지 위로 앉았다.

몸을 겹치고서 우경은 준섭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숲 같던 눈에 우경이 담겨 있다.

서로의 눈만 보면서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 다른 모든 것들이 날아갔다.

사랑해요. 우경은 혀를 깨물어 고백을 삼켰다.

와인에 젖은 몸이 남김없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준섭의 쇄골을 깨물며 우경이 울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상이에요?”

“응?”

“비싼 와인 안 쏟았는데.”

준섭이 소리 내어 웃었다.

“여유로운 거 보니 상이 아니네.”

준섭이 보여 주겠다는 듯 가슴 위를 찌릿할 만큼 강하게 빨아들이고 물기 묻은 부위를 손으로 둥글게 원을 그렸다. 그 감각에 우경이 정신이 팔리는 순간 아래에서 빠듯하게 치받아 올렸다. 우욱 하며 신음을 삼키자 검지를 아랫니에 걸며 입을 벌리고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이 빠르게 떨렸다. 준섭이 넣어 둔 검지를 깨물어도 소용없었다.

아아, 한 번 터진 소리가 멈춰지지 않았다.

밤새, 울게 하고 싶어.

우경은 어느 순간 엉망이 된 얼굴로 울고 있었다. 간간이 눈이 그친 밤하늘이 창 너머로 보였다. 별처럼 수놓아진 도심의 풍경도.

뜨거움과 격렬함으로 준섭을 향한 끊어 낼 수 없는 마음도 버겁게 커져 버린 감정도 다 닳아 버렸으면…….

이 밤, 우경은 성냥을 한 개비씩 불붙이는 체념과, 이율배반적으로 마지막까지 움키고 싶은 환상에 매달리며 준섭을 절박하게 원했다.

* * *

눈꺼풀을 두드리는 햇살에 우경은 몸을 뒤척였다. 포근한 이불이 주는 온기 때문이었는지, 우경은 긴 꿈을 꾸고 있었다. 이마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깜박이면서도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나가 봐야 해.”

침대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준섭은 코트만 제외하고 완벽한 슈트 차림이었다. 창에서 들어오는 햇살 때문에 눈이 부셔 우경이 찡그리자, 준섭이 큰 손으로 눈 위를 덮어 주었다. 햇살을 받은 준섭의 손가락 사이사이가 붉게 물들었다. 우경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준섭의 향과 온도가 피부 속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나……. 너무 오래 잤죠?”

우경이 이불 밖으로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주위를 더듬거렸지만 걸칠 만한 옷가지가 잡히지 않았다. 우경의 손을 쥐면서 준섭이 상체를 반쯤 일으켜 주었다. 이불로 가슴을 가리고서 우경이 준섭을 바라보았다.

“물 마실래?”

준섭이 가볍게 머리칼을 만져 주고, 협탁 위에 두었던 물잔을 집어 내밀었다.

목이 말랐었는지, 물이 차갑고 달았다. 반 넘게 비우고 잔에서 입을 떼자 준섭이 다시 물컵을 협탁 위로 놓으며 말했다.

“먹을 거 시켜 놨어. 커피도 있고……. 뭘 좋아할지 몰라서 미국식 일본식 다 시켰어. 둘 다 먹어도 돼.”

우경은 준섭만 찬찬히 쳐다보면서 답을 하지 않았다. 한 번도 준섭이 멋있지 않은 적이 없지만, 신경 써서 골라 입은 최고급 슈트를 입은 남자는 향기까지 완벽하여 우경의 모든 감각 기관을 일시에 흔들었다. 오늘 그를 보는 누군가도 분명히 한눈에 반하겠지.

준섭이 우경의 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나는 지금 나갔다가, 되도록 빨리 올게.”

“어디 가세요?”

알면서 묻는 물음이었다.

“결혼식. 일본 U전자 회장님 아들.”

우경은 시트를 만지작거렸다.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경의 손끝과 입술, 눈을 차례로 바라보던 준섭이 물었다.

“할 말 없어?”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서 우경은 이미 준섭이 무언가를 눈치채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경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쉽게 답을 하지 않는 우경을 잠시 쳐다보다가, 준섭이 가볍게 어깨를 쓸어주고는 일어섰다. 벽장으로 가 걸어 두었던 스ㅤㅇㅞㅅ셔츠를 들고와 우경 옆에 두었다.

“옷은 오늘 저녁쯤 클리닝 마치고 가져다준다고 했어.”

“네.”

“다녀올게.”

준섭이 우경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돌아서는 준섭에게 우경이 탁하고 무언가를 바닥에 내뱉듯이 말을 던졌다.

“오늘 그 피로연에서 누구 만나게 되는지, 그 의미가 뭔지 들었어요.”

“중요한 사람들은 많이 만나. 그래서 가야 해. 아니라면 너랑 하루 종일 붙어서 동경 관광을 하겠지.”

“본부장님, 저는…….”

“피로연에서 한 시간 정도. 왕복 거리까지 넉넉잡아 두세 시간. 그 뒤로는 같이 있을게.”

“아니요. 저는 서울로 갈래요. 얼굴 봤고 목소리 들었고. 충분해요.”

우경이 준섭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잠시 말을 멈췄다.

성냥갑에 남은 하나의 성냥으로 용기를, 결단을, 단호함을……. 그래서 최고의 거짓말을 할 수 있도록.

“좋았어요. 어젯밤도……. 실은 좋아하지 않은 날이 없어요. 하지만 순간일 뿐이에요.”

순간일 뿐이라는 말이 스스로에게 상처를 덧입혀 우경은 입을 꾹 다물었다. 준섭은 화를 참느라 눈을 가늘게 뜨고 우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내지 말아요. 부정하지 않아도 좋아.

당신에게 우리는 어차피 그런, 순간에 지나지 않는 관계였다고 해도 나는 좋아.

내게는 평생을 지배할 강렬한 순간.

준섭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물었다.

“순간이라니, 무슨 말이야.”

“처음부터 나와는 맞지 않는 남자라 마음이 불편했어요. 그런데도 쉽게 벗어날 수가 없더라고요. 금단의 열매 같은 거……. 나한테는 태준섭이라는 남자가 그랬어요. 눈을 두지 않았어야 했는데, 팔을 올려 열매를 따지 않았어야 했는데, 맛보지 않았어야 했는데……. 매번 그만하자, 이제는 그만두자, 그러면서도 대책 없이 끌려가고. 내내 맘속에 갈등이 생겨서 괴로웠어요. 그러다가 계약이 끝나면 못 보게 될 테고 자연스레 멀어지겠구나. 그러니 12월까지만……. 그런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어요.”

“너, 무슨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거야.”

우경이 고개를 저었다.

“듣긴 했어요. 그게 이유가 아니에요.”

“최하영 때문이라면.”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여자의 이름에 가슴이 갈라지는 것만 같았다. 우경은 덤덤한 표정을 만들었다.

“네, 그분 이야기 들었어요. 태이섭 상무님한테서.”

“알아.”

무엇을 알고 있다는 뜻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가 없어 우경이 준섭을 빤히 쳐다보았다. 태준섭을 상대로 트릭을 쓰게 될 줄 몰랐다. 송백재의 개입을 결코 태준섭이 알아서는 안 된다.

이 거짓말과 속임수가 부디 들통나지 않기를.

우경은 필사적인 기분이 되어 모든 가능한 답에 대한 대응을 빠르게 찾으려 애썼다.

“이섭이한테 들었어.”

“아, 네…….”

“이섭이가 우리 둘 사진도 찍었을 텐데.”

우경이 답을 하지 않고 바라보자 준섭이 단호하게 덧붙였다.

“사진 뿌려 주면 고맙지.”

하아, 저도 모르게 우경은 한숨 같은 웃음을 뱉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어. 내가 처리하면 돼. 최하영 만나서 내가…….”

“본부장님.”

우경이 준섭의 말을 끊고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누군가 바윗덩이를 올려놓은 듯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송백재에 불려 가기 전이었다면, 준섭을 믿고 등 뒤에 숨어 미래를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장님은 준섭을, 자신의 손자를 완전히 부수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경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판단력 좋은 사람이 왜 그래요. 최하영 거절하면 이런 일 없을까요? 아니에요. 본부장님은 최하영만 놓치고, 또 다른 여자와 선을 보겠죠. 최하영보다는 훨씬 매력적이지 않은 조건의 여자와.”

“그럴 일, 없어.”

“아니요, 본부장님은 그럴 수밖에 없을 거예요.”

태준섭은 아무것도 아닌 고작 강아지 한 마리일 뿐이라고 말하던 태시환 회장이 어른거렸다. 태시환 회장의 개라는 별명은 과장이 아니었다. 우경이 무모한 고집을 부리는 준섭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좁고 높은 평균대 같은 입지.”

우경이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하자 준섭이 이를 악물었다.

우경은, 이 남자의 그림자가 보고 싶었다. 누구나 아는 앞면이 아닌 가까운 사람들만 아는 뒷면도 아닌, 자신조차 볼 수 없도록 숨기고 억눌러 검게 말라붙은 그림자를 보고 싶었다. 아무리 도망가고 싶어도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 같은 상흔을 치유할 수 있다면 바닥에 천 번이라도 입을 맞출 수 있을 텐데……. 천 번을 만 번을, 입술이 부르트고 갈라져 배어난 피로 그림자를 적실 때까지.

하지만 우경은 도리어 남자의 그림자를 더 짙게 만드는 존재일 뿐이었다. 우경이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부장님은 나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고,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살아왔는데, 죽은 엄마는 가슴에 묻고 설산에서 죽은 아빠는 악몽으로 남아, 춥고 외롭게 개만도 못한 취급받으며 살아왔는데…….

당신 지금 제정신이에요. 내가 뭐라고. 고작 세 달 만난 내가 뭐라고……. 바닥에서 피투성이로 기어 올라왔던 20년을 버려요.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그 입지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지금은 알겠어요. 이제 평균대가 아닌, 높고 넓은 길로 가세요.”

“필요 없어.”

“왜 이래요.”

“너야말로, 왜 이래. 너 동경에 왜 왔어. 어제 말한 대로 내가 보고 싶어서? 아님 최하영이랑 잘해 보라 시답잖은 소리 하러?”

“네, 맞아요. 이별 여행, 그런 거.”

“누구 맘대로.”

우경이 떨리는 몸을 감추고서 또박또박 받아쳤다.

“난 다른 여자랑 선보고 다니는 남자랑 몰래 만날 만큼 자존감이 없진 않아요. 도덕성이 떨어지지도 않고요. 뻔히 최하영 씨를 피로연에서 만날 거 알면서 나한테 숨기고 출장 왔다는 자체도 충분히 제가 본부장님과 그만둬야 할 이유였어요.”

“연우경 씨, 말 교묘하게 하네.”

준섭이 우경에게로 다가섰다.

“그러는 너야말로 이섭이한테 다 듣고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찾아와서 밤을 보내? 사람 바보 만들려고? 그게 아니라면, 그럼 어젯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어.”

우경이 떨리는 손이 보이지 않도록 이불을 말아 쥐었다.

“하룻밤쯤, 그러고 싶었어요.”

“뭘.”

무언가 변명을 하려 했지만 차갑게 떨어지는 물음에 순간적으로 입이 붙어 버린 것 같았다. 아무리 참아도 울음이 비구름처럼 시커멓게 차올랐다.

“무슨 하룻밤쯤.”

우경이 고개를 돌려 버리자 준섭이 드러난 맨 어깨를 붙잡았다. 쇄골 위를 검지로 쓱 선을 긋듯이 움직이자 몸이 저절로 굳어졌다. 쇄골 아래, 붉은 흔적을 엄지로 꾹 누르며 말했다.

“어젯밤을 설명해 봐.”

“손 치워 주세요.”

“왜.”

“말을, 할 수가 없으니까.”

“왜, 너무 좋아서? 원한다면 더 해 줄 수도 있는데, 지금 바로.”

우경이 그제야 준섭을 올려다보았다.

“좋아, 그렇게 쳐다보면서 말해 봐.”

우경의 어깨에서 손은 뗐지만 준섭은 여전히 침대에 바싹 붙어 서 있었다. 간신히 화를 참는지 턱 근육이 실룩였다.

“동경에는 헤어지려고 왔어요.”

“헤어지려는 결심이라…….”

준섭의 시선이 정사의 흔적을 겨우 가리고 있는 가슴에서 아랫배로 떨어졌다. 그것만으로도 우경은 몸이 욱신거렸다.

“그래서 나와 잤어? 몇 번이나, 뜨겁게. 엉망이 되도록.”

준섭이 상체를 기울이더니, 바로 이 침대에서 그러지 않았냐는 듯 툭, 손으로 침대 헤드를 짚었다.

“밤은……. 그래요. 미안해요. 그런데…….”

우경은 너덜해진 속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당연히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인데, 그러는 준섭을 비난할 수는 없는데, 수치심과 비참함이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입술을 물어 울음을 삼키면서, 우경은 준섭을 쳐다보았다. 준섭은 여전히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은 눈으로, 그러나 표정만은 평소와 다름없이 우경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룻밤쯤…….”

우경이 갈라진 목소리를 감추려 마른침을 삼켰다.

매일 밤 준섭의 침대에서 이제는 가야 하는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서로에게 얼굴을 묻던 애틋한 시간들이 스쳐 지났다.

“하룻밤쯤 완벽한 연인처럼……. 내내 아침까지 그래 보고 싶었어요.”

내 인생에 한 번쯤. 단 하루의 밤, 다시는 못 볼 당신과…….

“그래서, 만족했어?”

준섭의 입술이 차갑게 비틀렸다.

“네.”

“기막혀서……. 맞아. 연우경 씨 원래 대답은 꼬박꼬박 잘하지. 그래서 태준섭 너랑 해 볼 거 다 했으니 이만 털고 가시겠다?”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우경은 억울함을 마른 목구멍 안으로 쑤셔 넣었다. 준섭이 무언가 말을 더 하려 할 때, 진동이 울렸다. 준섭의 핸드폰이었다.

“연우경 씨는 만족해서 털고 가려나 본데, 나는 그렇게 못 하겠는데.”

멈췄던 진동이 다시 시작되자, 준섭이 찡그리며 코트를 덧입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핸드폰이 지이잉 계속 울렸다. 손목시계를 확인하고서 준섭이 핸드폰을 받았다.

“네, 알아요. 네, 지금 내려갑니다.”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준섭이 사무적으로 통보했다.

“두 시간 안으로 올게. 그때 다시 이야기해.”

우경이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는 안 돼.

‘준섭이 그러는 날엔 내가 줬던 걸 몽땅 뺏고,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처박히게 만들 거니까.’

회장의 잔인한 선언이 윙윙 울렸다.

준섭을 그렇게 다시 처박히게 할 순 없었다. 진창 따위, 우경은 털고 일어날 수 있다. 엄마도 아빠도, 백설이도 있으니까.

준섭에겐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 준섭을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게 할 순 없었다. 서우가 찾아왔던 날 이후, 준섭을 보면 추운 겨울 설산에서 길을 잃고서 우두커니 맨발로 서 있는 아이가 보였다. 준섭을 또,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 우경이 이를 꾹 맞물었다가 떼어내며 말했다.

“탐나는 것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이라, 비열하게 취하고 가차 없이 버려. 기억 못 하세요? 저한테 하신 말씀이에요.”

준섭이 굳은 듯 서서 우경을 바라보았다.

“미련한데 눈치가 빨라서 좋다고도 하셨죠. 처음부터 그런 관계로 시작했잖아요. 뭘 얼마나 더 지속하려 그래요? 취했으니 버려요.”

“연우경!”

“뻔한데, 뻔히 보이는데. 뭘 얼마나 더……. 최하영한테 말하면 해결돼요? 사진 뿌리면 돼요? 난 그럼 뭐가 되는데? 내가 왜. 당신네들 이권 다툼에 끼어들어서!”

어깨를 잡는 준섭의 손을 뿌리치면서 우경이 소리를 질렀다.

“알아요. 당신 나 처음 본 날부터 자고 싶었잖아. 한 번 자고 싶은 여자, 그것뿐이었잖아요. 그마저도 귀찮아서 안 하려고 했는데 태이섭 상무가 붙여 줬잖아. 최하영과 당신이 잘될 경우에 쓸 카드로, 나를 이용했잖아요. 그거 다 알면서 나랑……. 뻔뻔하게, 비열하게.”

“말 그따위로 하지 마. 그런 게 아니야.”

우경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요, 맞아요. 그게 우리 사이에 남은 진실이에요. 나도 당신한테 처음부터 끌렸으니까, 자석처럼…… 그냥 의지와 상관없이 끌렸어요. 그걸 누가 어떤 잣대로 평가하고 비난하겠어요. 아닌 줄 알면서 끌렸는데. 그래도 이젠 아니에요. 당신도 나도. 끝낼 시간이에요. 나는 당신이 최하영한테 뭘 어떻게 말하든 헤어질 거예요.”

“최하영, 최하영. 그만 이야기해! 내가 상관없다는데 내가 필요 없다는데 니가 왜!”

준섭이 어깃장을 부리며 버텼다.

“좋아요. 그럼 날 위해서 그만둬요. 최하영 거절해서 말 나오게 만들지 말아 줘요. 사진도 안 돼요. 송백재 회장님 아시면 어떡해요. 나 당신들같이 대단한 스케일을 가진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 거 감당 못 해요. 무서워요. 휘말리고 싶지 않아요. 충분히 버겁다고요! 내 맘, 내 입장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준섭이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알았어.”

확인을 위해 올려다보는 우경은 여전히 입술을 떨고 있었다. 준섭이 손가락을 입술 위로 올렸다.

“말 안 들어가게 할게.”

“고마워요.”

“다녀올게. 올 때까지 그대로 있어.”

우경이 약간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불로 알몸을 가린 제 모습을 한 번 보았다.

“하긴, 옷도 없잖아. 그대로 있어야겠네.”

“일부러 그랬죠?”

“맞아.”

준섭이 뻔뻔하게 말했다. 준섭의 포켓에서 지이잉 하는 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핸드폰 또 울려요. 이제 가세요.”

준섭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여기서 인사할게요.”

돌아다보자 우경이 어깨를 으쓱했다.

“옷이 없어서, 문까지 못 나가겠어요.”

겨드랑이 사이에 이불을 끼고서 우경이 손을 약간만 들었다.

준섭을 향해 웃으며 안녕, 인사했다.

안녕, 태준섭…….

환상보다 더 환상 같던, 그래서 잠시만 내 남자였던 남자.

안녕…….

“금방 올게.”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우경은 실룩이는 입술 끝을 최대한 당겨 올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이젠 남자의 구두굽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우경은 손을 들어 일그러지는 얼굴을 가렸다.

* * *

“부탁하신 것들입니다.”

준섭의 스ㅤㅇㅞㅅ셔츠 차림인 우경을 흘끗 보고는 직원이 쇼핑백 봉투를 내밀었다. 옷가지가 담긴 쇼핑백 세 개 외에 작은 봉투에는 핸드폰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여기, 사인 부탁드립니다.”

그러고 보니 컬을 넣은 쇼트커트에 이목구비가 시원한 직원의 얼굴이 기억났다. 어제 프런트에서 우경의 핸드폰 충전을 받아 준 사람이었다. 우경이 종이에 인도받았다는 사인을 하고 편지봉투를 열어 의류 구입 영수증을 살폈다. 우경이 건네고 남은 현금이 안에 들어 있었다. 우경은 봉투째로 직원에게 팁을 건넸다.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안 도와주셨으면 곤란할 뻔했어요. 옷이 너무 많이 젖어서요.”

어젯밤 우경의 모습을 기억하는지 직원이 상냥하게 웃었다.

“눈이 갑자기 많이 내렸죠?”

“네, 길을 잃어서 헤매느라…….”

“오늘은 날씨가 좋습니다. 혹시 필요하실까 봐 둘러보실 만한 장소들 표시한 지도를 가져왔어요. 쇼핑몰도 있습니다. 옷은 호텔 아케이드에서 급하게 산 거라 마음에 안 드실 수도 있어서요.”

“감사합니다.”

상냥한 인사를 몇 번이나 더 하며 직원이 떠난 후에, 우경은 빠르게 옷을 입기 시작했다. 청바지 단추를 채우는 손이 몇 번이나 헛돌았다. 돌아가는 비행기 시간은 아직 약간 여유가 있지만 달리 가야 할 곳도 없었다. 동경에서 아무것도 더 이상 기억에 담고 싶지 않았다.

* * *

흰 테이블보가 깔린 원형 테이블에는 센터피스가 놓여 있고 초대받은 하객 이름이 자리마다 배치되어 있었다. 준섭은 일본의 전자 기업 오너들과 같이 배석했다. 인사와 명함을 나누고 식사와 가벼운 대화를 하면서 피로연 절차를 지켜보았다.

정해진 식순에 따라 피로연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주인공 커플이 테이블마다 다니면서 인사를 하고, 한 차례 옷을 바꾸어 입고 다시 홀로 들어섰다. 이후로는 참석자들이 자연스레 자리에서 일어서 다른 테이블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소개를 받았다.

중요한 사람들과는 거의 인사를 마쳤다고 생각했을 때, 테이블에 앉아 있는 준섭의 곁으로 신랑 신부가 다가왔다.

“축하합니다.”

한 번 더 예의를 갖춰 인사하는 동안 신부가 누군가를 향해 손짓을 했다. 좀 떨어진 테이블 근처에 서 있던 여자가 커플을 향해 걸어왔다. 준섭과 중간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사진으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여자도 준섭의 얼굴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태준섭 상무님, 제 친구 최하영이에요. 지금 독일에서 박사 과정 중이고요.”

신부가 밝게 웃으며 여자를 소개하고선,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신랑의 팔을 잡아끌며 다른 쪽으로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태준섭 상무님.”

하영이 준섭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앉으세요.”

자리를 권하는 준섭을 바라보는 하영의 눈에 호기심이 서렸다. 며칠을 졸라서 온 전시회장에 들어서는 아이의 것과 비슷한 호기심과 가벼운 흥분이 표정과 눈빛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TK 지분의 상속자, 최운의 손녀라는 프레임에 갇혀 물리도록 듣기만 했던 여자는 예상보다 생동감이 넘치는 말투로 물었다.

“저는 누군지 알고 있어요. 참석하시는 것도 알았고요. 혹시 마찬가지셨나요?”

“네.”

“아하.”

하영이 답답한 듯 힐을 신은 발을 까닥거렸다. 처음부터 의자를 비스듬히 빼어 놓고 있어서 테이블보로 다리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다른 참석자들이 드레스나 화려한 원피스 같은 성장을 한 반면 하영은 슬랙스와 재킷 차림이었다. 미용실을 다녀오지 않아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단발머리와 어울려 되레 위화감이 없었다.

“평소엔 운동화나, 격식을 갖춘다고 해 봤자 단화를 주로 신어요.”

발에 떨어지는 눈길을 알아챘는지 하영이 설명을 덧붙였다.

“네……. 시선이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뇨. 저야말로 내내 쳐다보고 있는데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아닙니다.”

하영이 약간 고개를 기울이며 준섭과 눈을 맞췄다.

“왜 여기에 우리 두 사람이 있는지 놀라지도 않고, 제가 궁금하지도 않고. 그런데 매너는 좋고. 원래 그러세요?”

“실은 궁금합니다. 최하영……, 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박사님?”

“아뇨, 아직 학위 받기 전이에요.”

“그럼…….”

“최하영 씨라고 하시죠. 저도 태준섭 씨라고 할 테니까.”

“그러죠.”

“그럼 궁금한 점이 뭔지 말해 주실래요?”

준섭이,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하영 씨 입장에서 이 자리에 오게 된 사람이 저라는 사실이 좋거나, 나쁘거나, 무의미하거나, 어느 쪽일까. 혹은 그 이상이 있을까, 좀 궁금했습니다.”

준섭의 말을 듣더니 하영이 하하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웃었다. 마른 듯한 턱선 때문이었는지 자존심이 무척 강하고 예민해 보였는데 웃으니 전혀 다른 얼굴처럼 보였다. 웃는 얼굴이 원래의 모습과 비슷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준섭은 하영의 답을 기다렸다.

“태준섭 씨가 와서 좋아요. 그리고 어느 정도 의도도 했어요. 엄마 아빠한테 계속 말했거든요. 나는 태준섭 씨를 보고 싶다고. 더 정확하게는 태이섭 씨보다 태준섭 씨를 보여 달라고. 아버지가 회장님께도 말씀하신 걸로 알아요. 우연도 겹쳤지만 누군가가 중간에 머리를 짜냈을 수도 있겠네요. 자연스러운 만남 이런 걸로요. 저는 모르는 척 왔고요.”

“그렇군요.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제 차례네요.”

눈썹을 슬쩍 밀어 올리는 준섭에게 하영이 웃으며 물었다.

“이 자리에서 최하영을 만나게 되어서 좋다, 나쁘다, 무의미하다? 어느 쪽이세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준섭이 피식 웃었다.

“아, 참고로 말씀드릴게요. 아까 제가 답할 때, 대체 아니 왜 나를? 이런 표정을 지으셨거든요? 제가 태준섭 씨 사진을 봤어요. 반도체 생산 현장 방문 사진이었는데 이렇게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있었어요.”

하영이 준섭을 향해 프레임을 잡듯 양손을 벌려 보였다.

“그 표정이 참 오랫동안 남아서 떠올릴 때마다 계속 궁금하더라고요. 일상성과 존재, 자신의 삶……. 제 전공이 하이데거예요. 그 사진 너머,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일상성이 아닌 자신의 삶, 고독, 아픔, 존재의 진실한 모습에 가까운 뭐 그런 걸 봤다고 생각했어요. 비웃으셔도 좋아요. 실은 막 끌어다 붙인 궤변이고 헛소리거든요. 내내 하이데거에 사로잡혀서 머리 싸매다 보면 좀.”

하영이 머리를 좌우로 까닥였다.

“사람이 약간 이상해 보일 수도 있어요.”

준섭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무식해서 말을 잘 못 알아듣지만, 좋은 말인 것 같습니다. 전 하이데거 하면 실존밖에 모릅니다. 고등학교 때 시험 보느라 외웠어요.”

“아하.”

하영이 재미있다는 듯 준섭을 바라보았다.

“전공자시라니 여쭤보는데, 대체 하이데거가 제대로 존재하려면 어떻게 하라고, 뭐라고 합니까.”

하영이 준섭의 물음에 마치 고등학생한테 설명하듯 답했다.

“일상에서 떨어져 나가서……. 그 일상은 타인이 지배하니까요. 그 후에야 비로소 죽음 앞에서 유한하고 고독한 자신만의 세계에 들어가고 거기서 존재 의미를 구할 수 있다. 삶의 주인이 되어라.”

“여전히 모르겠지만, 감동적이네요.”

“이제 제 질문에 대답해 주세요. 좋다, 나쁘다, 무의미하다. 어느 쪽?”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었는데, 약간 곤란해졌습니다.”

“왜요?”

하영이 생글거리며 물었다. 한층 더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전시회장에서 뻔한 줄 알았던 그림에 숨겨진 암호를 찾아내고 기뻐하는 아이같이…….

“비밀 연애 중이거든요.”

“아하?”

“회장님한테든, 하영 씨 부모님한테든, 하영 씨에게도 어떻게 매끄럽게 의사를 전달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화가 났어요.”

“누가요? 여자친구가?”

“네.”

“실토하기 전에 들켰나 봐요. 태준섭 씨 입장에선 좀 억울하겠어요.”

“그런 셈이죠.”

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하영을 준섭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가세요. 오해는 빨리 풀어야죠.”

일어서는 준섭이 확인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안다는 듯 하영이 빠르게 덧붙였다.

“실제로 봤더니 좀 안 맞더라고 할게요. 트집거리는 제가 몇 가지 중 맘대로 골라서 잡을게요.”

준섭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며 웃었다.

“아, 하이데거의 말을 해석하다 보면 그런 것도 있어요. 자신의 존재 방식을 문제 삼을 수 있는 존재, 그런 존재가 인간이다.”

준섭이 하영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최하영 씨.”

“만나서 즐거웠어요. 태준섭 씨.”

하영이 먼저 테이블을 떠났다. 다른 이와 담소를 나누면서 흘끗 돌아다보니 남자가 급한 걸음으로 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굿 럭. 존재하는 존재들을 위해.

* * *

호텔로 가기 위해 승용차에 오르며, 준섭은 초조하게 시계를 확인했다. 호텔 방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우경은 받지 않았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온 전화일지 모르니 못 받았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제 확인했던 한국으로 돌아가는 우경의 비행기표 시간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 설마…….

준섭은 다시 호텔 데스크로 전화를 걸었다.

“룸 3301호에 투숙하고 있는 태준섭입니다. 어젯밤 제 지인이 프런트 데스크에 핸드폰 충전을 맡겼습니다. 기종은 TK T12, 바이올렛 색상입니다. 제 손님이었는데 어제 찾는 걸 깜박했다고 해요. 지금 보관하고 있는지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직원이 확인을 하는 동안 기다리면서 준섭은 찡그려진 미간을 주먹으로 문질렀다. 호텔을 나오기 전 우경과의 대화를, 우경의 표정을 하나씩 떠올렸다. 설득했다고 생각했는데 설득당하기만 했다. 마치 다 해결되었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연우경, 너 대체 무슨 생각을…….

- 안녕하세요? 핸드폰 찾으신다고 하셨죠?

핸드폰 너머에서 처음 전화를 받은 남자 직원이 아닌 여자 직원이 준섭에게 물었다.

“네, 제 지인이 어젯밤에 잊어버리고 못 찾았다고 합니다.”

- 그 핸드폰은 제가 3301호에 가져다 드렸습니다. 연우경 씨가 직접 받으셨어요.

“네? 언제, 쯤입니까. 제가 외부에 있어서…….”

- 아, 그러시군요. 한 시간쯤 되었습니다.

불길한 예감으로 심장이 꽉 조이는 것만 같았다.

“혹시…… 다른 심부름도 하셨습니까. 제가 들어가는 길에 핸드폰을 대신 찾고 필요한 물품도 준비하기로 했는데.”

준섭이 기사를 의식하며 애매하게 묻자, 눈치 빠른 직원이 싹싹하게 답했다.

- 네, 입고 왔던 옷을 클리닝 맡겼다고 간단하게 입을 수 있는 아이템으로 부탁하셨습니다. 호텔 아케이드에서 준비해서 가져다 드렸습니다.”

젠장, 준섭이 소리 나지 않게 짜증을 삼켰다. 전화를 급히 끊으며 기사에게 지시했다.

“공항으로 갑시다.”

준섭이 기사가 네, 하고 답하기 전에 덧붙였다.

“중요한, 몹시 중요한 일입니다. 최대한 빨리.”

말을 하면서도 숨이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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