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텍사스로 사람은 뉴욕으로(3)
“마린스는 11라운드 포기하겠습니다.”
마린스가 11번째 지명을 포기했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이번에 드래프트 된 선수의 총 숫자는 103명. 모든 팀이 11번째 드래프트까지 선수를 다 데리고 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단장님.”
“그게 그리 큰 비용이 필요한 투자는 아니라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더군.”
본래 마린스의 여러 플랜 가운데는 11라운드에 중앙고의 안병영을 데리고 오는 플랜이 있었다. 물론 안병영의 개인성적에 대한 기대감이 그리 컸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판단한 안병영의 프로 성공 가능성은 1% 미만.
“구속은 조금 올라왔지만,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나마 장점이던 로케이션이 굉장히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구위가 깃털 같습니다. 고교레벨에서는 나무 배트로 정타를 맞추기가 힘든데, 안병영의 경우 얻어맞은 공이 장타로 연결되는 비율도 너무 높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1라운드에 안병영을 데리고 올 계획을 세웠던 것은 어디까지나 최수원 때문이었다.
내년에 있을 드래프트의 권리야 올 시즌 꼴찌팀이 가져간다지만 최수원이 KBO를 택할지 MLB를 택할지는 현시점에서 확언할 수 없는 부분이다.
“같은 팀 선수를 데리고 오는 건 어떨까요.”
“고작 그 정도로 선수 마음이 달라지겠어?”
“저맘때 애들한테는 의외로 이런 정에 호소하는 게 잘 먹힐 때도 있습니다. 저희 때도 대학 세트로 보내준다고 해서 한 단계 낮춰서 가고 그런 경우 있었잖습니까.”
“그래서 조규혁이를? 흐음······. 3라운드 1번 치고는 너무 약하잖아. 그렇다고 4라운드 마지막까지 돌아올 것 같지는 않고······.”
“조규혁이야 어차피 알아서 프로에 갈 선수니까 그리 고마워하지 않겠죠. 차라리 안병영이 어떻습니까. 한 11라운드 정도에요.”
이전까지 2차 10라운드나 마찬가지인 11라운드 선수의 계약금은 통상적으로 3천만 원. 거기에 올 시즌 프로야구 최저 연봉인 3천만 원을 더하면 총 6천만 원이다. 영 투자하지 못할 금액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야구부의 친구라면 구제를 해줄 때 고마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선배를? 차라리 귀엽고 싹싹한 후배라면 또 모른다. 하지만 선배를? 물론 최근에 최수원과 안병영이 자주 붙어 다닌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친분 때문일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동급생 가운데 프로 진출이 애매한 박경석 같은 녀석을 11라운드로 데리고 와준다면 그게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KBO리그 2025년 드래프트
안병영을 뽑아가는 팀은 없었다.
***
비행기는 불편했다.
이코노미석이었기에 너무 당연했다. 게다가 오른편 옆자리에 앉은 것은 규혁 선배. 실로 곤욕이었다. 190cm에 88kg. 179cm에 97kg. 애당초 둘 다 이코노미석에 어울리는 체구가 아니었다.
솔직히 아버지한테 말해서 비즈니스 정도는 끊어달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국의 정서를 생각할 때, 대표팀이 돼서 단체로 미국에 나가는데 제일 어린 선수가 혼자 비즈니스를 끊어서 탄다면 이래저래 쓸데없는 이야기가 많이 나올 것이 뻔했다. 잠깐만 참으면 될 일을 굳이 구설수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참으로 멍청한 생각이었다.
13시간. 그래, 무려 13시간이다. 대체 회귀 전에 나는 이코노미석을 어떻게 참고 탔던 것일까를 회상해봤는데 회상을 해보니까 회귀 전의 나는 키가 이만큼 큰 이후로 이코노미석에 탄 적이 없었다.
“야, 수원아. 여기 최신 영화도 있어. 와, 혹시나 해서 핸드폰에 오프라인 모드로 저장해 왔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네.”
규혁 선배는 커다란 몸을 용케도 그 작은 의자에 구겨 넣은 채 스크린 여기저기를 눌러가며 기내 서비스를 만끽하고 있었다.
“기내식은 역시 미국 가는 거니까 미리 적응도 할 겸 양식이 좋겠지?”
“네, 먹고 부족하면 더 달라고 해보세요.”
“진짜? 리필도 되는 거야?”
“원래는 안 되는데 보통 그냥 더 달라고 하면 더 주더라고요.”
“대박······.”
“아, 근데 남들한테 다 알려주지는 마시고요. 개수 제한 있어서 괜히 다 떨어지면 선배도 못 먹습니다.”
규혁 선배의 목소리가 매우 작아졌다.
“아, 그래? 그러면 양식 먹고 한식으로 더 달라고 해도 괜찮은 거야?”
“보통 한식이 더 인기 있으니까 한식 먹고 남는 거 달라고 하면 양식으로 줄 거야.”
“어? 백하민. 너 자는 거 아니었어?”
“자려고 노력한 거지. 아무래도 여기서 미국 가면 거긴 낮이니까. 미리미리 시차 적응 해둬야지.”
내 왼편.
통로 쪽 좌석에 앉아 있던 백하민이 안대를 들어 올렸다.
“아, 그러면 나도 좀 자둬야 하나?”
고민에 빠진 선배를 뒤로하고 백하민이 나를 바라보더니 툭 질문을 던졌다.
“너 메이저 바로 갈 거냐?”
“글쎄요······. 선배님은요?”
“선배님은 무슨. 같은 학교 다닌 것도 아닌데. 그냥 형이라고 불러. 그리고 나는······.”
백하민은 어제 있었던 드래프트에서 전체 1번에 지명됐다. 내가 회귀하기 이전 마린스는 전체 1번으로 정병철을 지명했었는데 이게 바로 그 나비효과라는 것일까?
하지만 정병철에게 미안하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정병철은 나에게 큰 절 몇 번 해야 한다. 마린스 거르고 서울 엘리츠라니. 아······. 아닌가? 엘리츠면 마린스랑 그렇게까지 큰 차이는 아니려나?
아무튼 본래는 호명되자마자 곧바로 사인했던 백하민은 하루가 지나고 비행기를 타고 출국하는 오늘까지 사인하지 않았다. 지금 비행기에 탄 선수들 가운데 나를 제외한 모두가 어제 드래프트에 지명이 됐고, 그 가운데 1라운드들은 모조리 사인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백하민이 답했다.
“이미 드래프트 참가신청서도 제출했고 1라운드로 뽑히기까지 했는데 내가 메이저를 어떻게 가겠냐.”
“참가신청서야 제출을 하건 안 한 건 외국 가면 어차피 2년 KBO 못 뛰는 건 똑같잖아요. 뭐, 별 의미도 없죠.”
“그야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국민 정서라는 게 다르지. 게다가 마린스 팬들 분노도 엄청날 거고. 그 팀 팬들 무섭잖아.”
“그건 그렇죠. 근데 어차피 미국 가면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써도 되잖아요. 안 그래요? 솔직히 선배님 미국에서 제안 오기는 왔죠?”
백하민은 나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네가 생각할 때는 내가 미국으로 가면 어떨 것 같은데?”
백하민이 메이저라······.
잠시 생각을 해봤다. 가능할까? 솔직히 모르겠다. 분명 그날 백하민이 경기에서 보여줬던 포텐셜은 열여덟이라고 믿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날 보여준 공만 보면 거의 메이저 Mop-up Pitcher 수준, 그러니까 패전처리조 수준이다.
하지만 투수라는 것은 종종 긁히는 날에는 자기 기량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준다. 백하민 역시 그런 날이었을 수도 있다.
게다가 내가 회귀하기 전 백하민은 연이은 부상으로 커리어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던 투수였다. 팔꿈치를 다치고, 어깨를 다치고, 허리를 다치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확신이 들었다.
백하민은 미국에 가면 안 될 것 같다. 1라운드로 KBO에 입성했으니 제법 관리를 받았을 텐데도 저렇게 펑펑 터졌다. 하물며 마이너에서 시작한다면? 게다가 마이너는 의료보험도 제대로 안 된다. 메이저에 간다고 해봤자 KBO보다 계약금 몇억 정도 더 받는 수준일 텐데 그거 의료비로 내고 나면 손에 남는 것도 없을 거다.
물론 내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고 해봐야 백하민이 고개를 끄덕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라운드에서 몇 번 부딪혀보니 승부욕이 보통이 아니던데, 오히려 내 말이 맞나 틀리나 시험해보겠다고 메이저에 돌진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글쎄요······. 이제 고3 올라가는 제가 알면 뭘 얼마나 알겠습니까.”
내 대답에 백하민이 고개를 저었다.
“쪼유가 그러더라. 너 이상하게 미국 쪽에 해박하다고. 아, 쪼유가 내 중학교 후배인 건 알고 있지?”
쪼유 이 놈 하여간······. 내가 대충 얼머무렸다.
“아하하. 그건 그냥 쪼유가 워낙에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 걸 겁니다.”
“그래? 메이저 쪽에서 너한테 자주 접촉해서 그런 건 아니고? 뭐, 아무튼지 간에 그냥 네 생각은 어떨 것 같아? 메이저는 턱도 없다고 말해도 화 안 낼 테니까 그냥 솔직히 이야기해 줘.”
“그러니까 이건 그냥 어디까지나 선배님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론 적인 겁니다.”
“알겠어. 내가 알아서 걸러 들을게. 그리고 형이라고 하라니까 그러네.”
내가 메이저에서 뛰던 시기를 기준으로 미국에서 1라운드로 드래프트 된 선수가 메이저에 데뷔할 확률은 70% 남짓이다. 1라운드와 2라운드 사이 샌드위치 픽은 50%대. 2라운드만 되도 50% 미만으로 떨어진다.
여기서 진짜 무서운 점은 말 그대로 데뷔만 할 확률이 이만큼이라는 점이다. 그냥 콜업되서 몇 이닝, 혹은 몇 타석을 소화하고 평생 메이저를 못 밟은 선수들을 제외하고 유의미하게 경기를 뛴 선수들로 범위를 좁히면 1라운드가 40% 미만. 샌드위치 픽부터 2라운드까지는 15%. 그 이하는 10%가 채 되지 못한다.
콜업까지 걸리는 기간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최근 1, 2라운드의 상위픽들이 마이너에 머무는 기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내가 메이저에 뛰던 당시 2라운드 이상만을 대상으로 했을 때 평균 3년 반. 그것도 몇몇 스몰마켓들이 조금 빠르게 선수들을 콜업해서 그 정도였지, 양키스나 보스턴 같은 명문 팀들은 1라운드들을 4년 넘게 마이너에 썩혀두는 경우도 흔했다. 아마 룰5 드래프트가 없었더라면 그 이상도 내버려 두지 않았을까 싶다.
반면 KBO에서 포스팅까지 걸리는 시간은 일곱 시즌.
물론, 이후 메이저에 진출할 때는 전체 계약 금액의 15%에서 20% 정도를 원소속 구단에 지급해야 한다.
“하지만 금액적으로 봤을 때 메이저리그에 올라간다고 해도 3년은 최저 연봉이죠. 기대치로 봤을 때 아마 MLB에서 얻을 수 있는 누적 수익은 KBO 거쳐서 가는 것보다 그리 크지는 못할 겁니다. 아마 높은 확률로 더 적을걸요?”
“근데 4년 차부터는 연봉협상 자격이라는 게 생기지 않아?”
“그렇기는 하죠. 근데 사실 그것도 역대 최고 기록이 한 천만 달러 정도? 신인왕에 MVP까지 했을 때 기록이에요. 근데 그만한 실력이 KBO에 있었으면 아마 포스팅 직전에는 연봉이 이미 10억 가까이 될걸요? 게다가 그만한 실력에 포스팅으로 메이저에 가면 구단에 돈을 주긴 해야 하지만 일단은 FA니까요. 한 4년 계약 맺는다고 치면 연봉협상 4년 차부터 6년 차까지. 그리고 FA 1년 차 연봉보다 훨씬 큰돈을 받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메이저 커리어에 차이가 나겠지. 게다가 리그 수준이 높을수록 얻을 수 있는 경험치도 훨씬 클 거고.”
“그건 그렇죠. 하지만 그 모든 건 아무 일도 없이 메이저에 드래프트 1라운드급 평균 이상으로 쭉쭉 치고 올라간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잖아요. 가뜩이나 외국에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데 사람들 관심도 없는 곳에서 3년이나 눈물 젖은 마이너의 빵을 먹어야 하고요. 반면 한국에서는 그만한 재능이면 1년 차부터 전국구급 스타에 여러 가지로 케어받을 수 있죠. 게다가 생활비며 이것저것 생각하면 그 차이는 더 클 겁니다.”
“말만 들어보면 너도 KBO를 선택할 것처럼 이야기한다? 아니, 잠깐만 그게 아니면······.”
메이저 1라운드 드래프트들 이상.
아마 백하민이 말하려다가 멈춘 말은 그게 아니었을까?? 내가 그냥 웃으며 답했다.
“글쎄요? 저야 조금 더 지나 봐야 알 일이죠.”
나의 그 대답에 백하민이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13시간의 비행이 이어졌다.
우리는 시카고에 도착한 비행기에 내려 곧바로 다시 뉴욕주 올버니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물론 이번에도 좌석은 이코노미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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