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홈런을 그냥 잘 침-145화 (145/175)

146화. 갈비찜의 자격(2)

와, 솔직히 지금까지 투수 놈들이 가끔 기록은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뭐 이딴 소리 하는 거 다 뻥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다.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다. 근데 이게 또 역사가 하루 이틀 된 것도 아니고 심지어 데일리스포츠라 30개 팀이 일 년에 162경기씩 뛰어댄다. 연간 경기 수만 거의 2500경기쯤 된다는 뜻이다. 결국 어지간한 건 죄다 이미 있는 기록이다.

그런 상황에서 유의미한 기록을 만들고 있다? 그걸 대체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참고로 난 61호 홈런에 도전할 때 매 순간 그걸 의식하고 타석에 섰었다.

근데······. 그게 진짜 되네?

이게 타격하랴 피칭하랴 너무 정신도 없었고 솔직히 아까 1회에 출루 허용하면서 기록 생각을 머릿속에서 조금 지웠던 게 컸던 것 같다.

그나저나 이제 좀 이해가 된다.

왜 덕아웃에서 사람들이 뭔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는지. 그리고 이주혁이 왜 저렇게 이를 악물고 수비를 하는지. 왜 정지운 저놈은 고작 에러 하나로 대역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조용해졌는지.

아, 근데 또 알고 나니까 정지운한테 새삼 화가 난다.

저 녀석 에러만 아니었으면 나 지금 퍼펙트가 진행 중이었던 거잖아?

타석에 두 번째 타자가 들어왔다.

아······. 근데 솔직히 기록이 진행 중인 걸 알고 나니까 의욕이 확 살아나긴 살아난다. 근데 문제는 의욕은 의욕이고 냉정하게 몸 상태가 영 별로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 경기 시작부터 컨디션이 엄청 좋았던 것도 아니고 후우······. 솔직히 여기서 가장 합리적인 판단은 안타 맞기 전에 강판당하고 시즌 전체를 생각해서 개인의 기록에 연연하지 않았다. 라고 입을 털면서 만약에 거기서 계속 던졌더라면 같은 이야기들이나 사람들 입에 오가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수원 선수 지친 기색이 조금 엿보입니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죠. 이 선수 놀랍게도 올해 열아홉의 신인입니다. 게다가 투타 겸업까지. 덕분에 직전 공격 이닝에 너무 열심히 달렸어요. 체력적으로 참 힘들 겁니다. 그래도 기대해볼만 한 점은 그런 와중에도 거의 157에 육박하는 공을 던졌다는 점이겠죠.]

[자, 최수원 제 1구!!]

기록이란 원래 할 수 있을 때 해둬야 하는 법이다. 솔직히 오늘도 위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주혁만 정상 컨디션이었어도 노히트? 깨져도 진작에 깨졌을 거다.

그래, 이주혁의 연속 호수비라니. 이건 노히트 제발 세워달라고 하늘이 등 떠미는 거다.

156.8km/h의 속구가 날았다.

-부웅!!!

“스트라잌!!!”

로케이션이 영 별로다.

커맨드가 슬슬 맛이 가고 있다는 증거다.

브레이브스의 덕아웃 어딘가.

오늘 나의 심적 멘토인 학폭 조창혁 선생을 한 번 바라봤다. 물론 덕아웃 어디에 쳐박혔는지, 아니면 먼저 씻고 조기퇴근이라도 하신 건지 내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뭔가 그분의 그 피칭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에 용기가 다시 차오른다.

그래, 지금 필요한 것은 그러한 무대뽀 정신이다.

악력이 떨어져 커맨드가 흔들린다고 제구에 더 신경을 쓴다?

아니, 어차피 내 장점은 송곳같은 커맨드가 아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건 커맨드다.

한복판에 들어가도 상관없다는 느낌의 강력한 속구.

157.7km/h.

쥐어짠다는 느낌으로 던진 공이 존의 외곽을 예리하게 공략했다. 진짜 스트라이크 존 한 복판을 노리고 던진 공이었는데 운이 좋았다.

-딱!!!

완벽하게 밀린 타구.

앞서 멍청한 에러로 오늘 나의 퍼펙트를 깨트린 대역죄인 정지운이 무난하게 타구를 낚아채 1루의 이규만에게 건넸다.

“아웃!!!”

[와, 이 선수 대체 뭐죠? 조금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 않나 싶었는데 여기서 구속을 또 끌어올립니다.]

[심지어 방금은 로케이션도 굉장히 좋았어요. 거의 완벽하게 바깥쪽 낮은 코스로 들어갔습니다.]

투아웃.

와, 이제 노히트까지 딱 네 타자 남았다.

경기가 계속됐다.

***

9회 초.

마린스의 덕아웃이 목소리를 낮췄다.

기묘한 정적.

그 정적 속에서 가장 속이 타는 남자는 역시 정지운이었다.

노히트노런은 분명 대기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지운은 팀 동료가 그 기록을 세우는 것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최수원의 노히트가 바로 정지운 자신 때문이라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덕분’이 아닌 ‘때문’이라는 점이다.

‘망할······. 나는 왜 하필 오늘 경기에 스타팅이었을까?’

3회에 저질렀던 에러가 눈앞에 선하다. 솔직히 고척돔의 인조잔디는 개똥 같다. 이건 내야수에게 너무 가혹한 환경이다.

그래서였을까? 사실 아까 7회와 8회 안타가 나올 것 같을 때 내심 안도를 했었다. 아니, 근데 왜 평소에 뇌절 수비로 유명한 이주혁은 하필 이 타이밍에 슈퍼세이브를 두 번이나 하는 걸까?

‘야, 이대로면 그거 맞지?’

‘네.’

‘와, 이거 내가 다 떨리네. 수원이가 이거 하면 우리 팀에서는 처음인가?’

‘아뇨. 41년 전에 한 번 하신 분 계십니다. KBO 전체 기준으로는 열여섯 번째고요.’

‘하민이 너는 뭐 그런 걸 다 외우고 다니는 거야?’

‘그게······. 저도 언제가 하고 싶던 거라서······.’

‘아, 그래? 그러면 내일 네가 열일곱번째 하면 되겠네.’

‘하하······. 저도 그랬으면 참 좋겠습니다.’

‘아니다. 아예 넌 퍼펙트게임 하면 더 좋겠다. 퍼펙트게임은 몇 번이나 있었냐?’

‘아직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

‘네, 2022년에 한 번 할 뻔했는데 팀이 9회까지 점수를 못 내는 바람에······.’

가까이 앉은 탓에 다 들렸다.

자신의 에러만 없었더라면 최초의 퍼펙트가 될뻔했던 역대 열여섯 번째 노히트노런. 심지어 그 무산된 퍼펙트가 팀이 점수를 못 내서 무산됐다는데 최수원 이놈은 그럴 걱정 없으려고 1회에 대뜸 선제 홈런포를 쏘아 올렸다.

‘근데 하민아, 너라면 지금 쉬는 시간을 좀 주는 게 좋을 것 같냐. 아니면 어깨 식기 전에 빨리빨리 공격 이닝 끝내 주는 게 좋을 것 같냐?’

‘보통이면 좀 빠른게 너무 쉬는 것보다 낫기 한데. 지금 수원이는 좀 많이 지쳐 보여서 그래도 한 10분은 쉬게 해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그래? 근데 우리 애들이 그게 되려나 모르겠네······.’

6번 타자 사울 로페즈부터 시작되는 타선.

무려 4점을 추가했던 직전 이닝. 그 맹렬했던 공격의 출발점이기는 했지만 사실 사울 로페즈에게 타격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딱!!!

3구째에 내야 따볼아웃.

사울 로페즈는 딱 사울 로페즈 다운 플레이를 보여줬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주혁의 타순.

[이주혁, 이주혁 선수가 타석에 올라옵니다. 직전 타석에서 안타를 하나 기록했던 이주혁 선수. 과연 이번 타석에서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되는군요.]

점수는 11:0.

직전 타석에서 안타를 쳐서일까? 아니면 연속을 두 번이나 호수비를 한 덕분일까. 이주혁은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각을 느꼈다.

설마 이것이 가끔 선배들이 말하는 한꺼풀을 벗었다는 것일까?

초구.

낮게 깔려오는 137km/h의 속구 혹은 투심.

어쩌면 그것을 언젠가는 현실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생겨났다.

1군에서 홈런을 못 쳐봤다뿐이지 고교무대나 2군에서는 그도 충분히 많은 홈런을 쳐봤다. 이런 감각이야 익숙하다.

넘어간다.

타구는 쭉쭉 뻗어갔다.

누구보다 빠른 이주혁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광속의 주루를 아주 조금 늦췄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어지간한 타자의 전력 질주만큼 빨랐지만 말이다.

[쭉쭉 뻗어 나가는 타구!! 큽니다!!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아······.]

하지만 야속하게도 타구는 담장을 넘어가지 못했다. 심지어 안타도 아니었다. 중견수 신희성의 글러브가 이주혁의 타구를 받아냈다. 조금 전 그가 훔쳤던 안타를 되찾아가는 느낌이었다.

1루를 지나 2루를 향해 달려가던 이주혁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투아웃.

정지운이 고민 끝에 결심했다.

그래, 그래도 노히트에 최대한 도움이 되자. 비록 퍼펙트를 못하는 것은 자신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노히트까지 방해할 수는 없다.

수원이에게 1초라도 더 쉬는 시간을 주자.

-딱!!!

2구째 내야 뜬공.

9회 초 마린스의 마지막 공격이 공 여섯 개만에 깔끔하게 끝났다.

***

와······. 이 새끼들 진짜 사람새끼들인가?

아니, 그냥 방망이 안 휘두르고 있어도 공 아홉 개는 보는 건데 공 여섯 개에 삼자범퇴 실화냐? 과장 조금 보태서 이제 막 의자에 궁둥이 붙였더니 바로 다시 공 던지러 나가라고 하는 느낌이다.

후······.

아니, 아니다.

괜히 잘 쳐서 타석 한 번 더 서기라도 했으면 오히려 더 힘들 뻔했다. 던지던 감각을 조금도 잊어버리지 않게 해주려는 세심한 배려라고 생각하자.

그래도 아쉽긴 아쉽다. 브레이브스의 7, 8, 9번 타자도 쟤들 같았다면 정말 노히트 날로 먹는 건데······.

문제는 브레이브스의 9번 타자인 희성이 형. 여기는 강한 2번을 사용하는 만큼 9번 타순에도 상당히 강한 타자를 배치한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힘들 거라는 뜻이다.

선두타자.

-딱!!!

볼카운트 1-2에서 무려 3개나 파울을 친 끝에 마침내

-부웅!!

“스트라잌!! 아웃!!”

떨어지는 커브볼로 삼진.

그리고 사실상 브레이브스의 최약체인 8번.

속구, 속구, 또 속구와 속구.

결과는 볼카운트 1-2.

슬슬 커맨드가 아니라 컨트롤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분명 전부 존에 넣으려고 던진 공인데 빠졌다. 게다가 하나 걷어내기까지 했다. 아니, 솔직히 우리 팀 최약체인 쪼유였으면 걷어내려다가 내야 땅볼 아웃이었을 텐데······.

아주 단단히 작정한 모습으로 방망이를 쥔 타자의 모습이 사뭇 비장했다. 하긴······. 역대 최연소 노히트를 허용한 팀에 포함되고 싶지는 않겠지.

다섯 번째.

서클 체인지업.

-부웅!!!

“스트라잌!! 아웃!!!”

타이밍을 완벽하게 빼앗았다.

와······. 힘이 빠져서 그런가? 이건 솔직히 진짜 좋았다. 어쩌면 오늘 던진 서클 체인지업 중에서 제일 좋을지도 모르겠다. 머릿속 한구석에 방금 감각을 새겼다. 나중에 연습할 때 도움이 좀 될지 모르겠다.

타석에 문제의 신희성이 올라왔다.

31세.

외야수로 어깨가 좀 약점이고 발도 좀 느린데 그 대신에 타구 판단이 기가 막히다. 쉽게 말하자면 이주혁의 정 반대라고 보면 된다.

신고 선수 출신으로 방출 한 번 당했는데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브레이브스에서 나름 꽃을 피웠다. 나이가 있어서 FA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앞으로 6년. 내가 미국 가기 직전까지 브레이브스 1군에 꾸준히 붙어있었고 코치로도 대성해서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에는 브레이브스 감독 후보 1순위로까지 거론됐었다.

아무튼 장타력이 별로 없는데도 공 보는 눈이 또 기가 막혀서 볼넷도 잘 얻어내고 실투를 쳐서 안타를 만드는 능력도 출중하다.

한 마디로 내 구위가 쌩쌩할 때는 그냥 찍어 누르면 되는 타입이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타자라는 뜻이다.

쪼유가 던진 공이 노형욱, 강라온, 정지운, 규만 선배를 거쳐 다시 나에게 들어왔다.

공을 던질 때 다들 비장한 표정으로 뭔가 중얼거리는 걸 보면 그 나름대로 기운을 좀 불어넣은 것 같다. 과학적 근거 따위 전혀 없는 미신이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이 바닥에 미신 같은 게 한두 개도 아니고.

공을 쥐고 잠깐 등 뒤의 야수들을 짧게 바라봤다.

그 비장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 나도 일루수로 뛰던 시절에 완봉 같은 거 앞둔 투수를 향해 저런 표정을 지었겠구나.

너무 좋았다.

그래, 타격도 참 재밌지만, 저 기대 가득한 눈빛을 한몸에 받을 수 있는 이 마운드야 말로 나에게 딱 어울리는 자리다.

희성이 형이 자세를 잡았다.

초구.

잔재주 따위 없는 정면승부.

존을 관통하는 가장 빠른 속구다.

-뻐엉!!

아······.

빠졌다.

볼카운트 1-0.

두 번째.

어금니 꽉 깨물고 힘차게 다리를 내디뎠다.

159.7km/h.

그야말로 잔재주 따위 전혀 없는 정진정명한 정확하게 한복판에 꽂히는 속구. 아마 스트라이크 존이 과녁이었다면 10점 만점이 아니었을까?

-부웅!!!

“스트라잌!!!”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9회 말. 10시를 넘어가는 저녁. 이미 승패가 결정됐음에도 불구하고 저 많은 관중들이 자리를 뜨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나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좋은 선수와 스타의 차이는 무엇인가.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나는 분명 좋은 선수였다. 뭐 적당히 스타에도 포함이 될만했다. 하지만 슈퍼 스타의 자격이 있었느냐 묻는다면 글쎄······. 만약 진짜 슈퍼 스타라면 60개를 친 시점에서 어떠게든 이 악물고 61개를 쏘아 올리지 않았을까?

자신의 3000번째 안타를 홈런으로 장식했던 그 백 넘버 2번처럼말이다.

나는 내가 슈퍼스타의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겠다.

해내야 하는 순간에 해내는 선수만이 오직 그 자격에 어울릴 터이니.

간다.

마지막의 마지막.

응축된 힘을 가득 담아서 158.7km/h의 속구.

아······.

근데 하필 코스가 조금 전이랑 똑같이 또 10점 만점에 10점짜리네?

-딱!!!

1, 2루 방면으로 날아가는 잘 맞은 타구.

그 순간 정지운이 몸을 날렸다.

-퍼억

글러브에 맞고 떨어진 타구.

앞서 실책을 저질렀던 순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을 더듬지 않았다. 자세는 엉거주춤했으나 공을 던지는 손은 단호했다.

포물선을 그리는 하얀 공.

규만 선배가 그 공을 아주 가볍게 낚아챘다.

“아웃!!!!”

KBO 역대 16번째 노히트.

그것을 결정지은 것은 3회 퍼펙트를 날려 먹었던 정지운이 보여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호수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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