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 1. 3월 6일, WT-1
- 우리나라 모 기업에서 대기오염을 획기적으로 정화할 수 있다는 기술을 만들어냈다는 기사 다들 보셨지요? 지금, 이 방송을 녹화하는 도중에도 우리나라에 기술을 실시간으로 적용 중이라고 하던데요. 정말 효과가 있을까요?
- 그 기업이 처음 설립되었을 때 내건 슬로건이 '새로운 고향'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새로운 고향이란 화성을 말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실제로도 탐사선을 화성으로 보낸 적도 있고요. 지금 나오는 기술은 화성 테라포밍을 연구하면서 나온 부산물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시간이 지나야 확실하겠지만 안전성 테스트도 거쳤다고 하니 효과는 기대해 봐도 좋을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이 기술이 지구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주기를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지금 그 기업이 등장한 지 시간이 얼마나 됐죠? 1년이에요. 겨우 1년이라고요. 이 단기간에 대체 뭘 어떻게 안전성을 테스트했다는 겁니까? 단순 기사 내용만 볼 것이 아니라 저희는 의심해야 해요. 이 기술이 공기 정화에 탁월하더라도 인간이나 다른 동물들에게 치명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면? 그때 가서 후회하면 늦습니다!
- ···저기 박사님. 1년이 아니라 설립된 지 10년 가까이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뭐요? 크흠, 아무튼 제 말은 그 기업의 뭘 믿고 기술을 바로 적용하냐 이 말입니다! 제가 입수한 영상을 보시지요.
여기 보면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차에서 내리는 게 보이죠? 야심한 새벽에 번호판도 없는 차에서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내려서 무언가를 한다.
충분히 이상하지 않습니까? 더 이상한 것은 이자들이 다녀간 뒤로 나무들의 크기가 맨눈으로 식별될 정도로 커졌다는 겁니다. 이자들이 지금 하는 게 단순 공기 정화 기술 적용이 맞는지 다른 목적이 있는지 나라가 직접 개입해서 알아내야 해요!
- 박사님···. 이거 조작된 영상이라고 하는데요. 소스가 확실하지도 않는 영상을 방송에 가져오시면 어떡합니까?
- 이게 조작된 영상이라니! 난 그런 말 못 들었소! 지금 날 무시하는 거요?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지금 화면은 자칭 박사라는 사람이 나와 초반에는 논리적으로 보이는 주장을 내뱉다가 연이어서 잘못된 정보라는 지적에 말문이 막히자 이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빽빽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칭 전문가라는 사람들끼리는 진지할지는 몰라도 이런 방송을 진지하게 보는 일반인들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난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이 있는 것을 아는가?
참 듣기 좋고, 팔자 좋은 말이다.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먹을 밥이다. 당장 먹고살기 바쁜데 대기오염이 어떻고 공기 정화 기술의 부작용이 어떻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수많은 멸망론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술 안줏거리로나 희생당하면 다행인 게 현 위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TV에 흘러나오는 땍땍거리는 소리가 거슬리기도 했고 방송에 흥미가 떨어지기도 해서 리모컨을 들어 전원을 껐다.
벽면에 걸린 시계는 오후 6시 34분을 가리키고 있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3월···5일이었나?'
방에만 있다 보니 날짜 감각이 흐려졌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 순간.
띡!띠딕!띡!
누군가 급하게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려는 소리가 들렸다.
해가 저물어서 어둡고 혼자이기까지 한 방에 누군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려고 한다면 오싹한 느낌이 드는 게 보통이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문을 향해 걸었다.
어차피 내 방에 올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초조한 얼굴을 한 채 들어온 누나는 방 안에 내가 있는 것을 확인하더니 눈에 띄게 안도한 기색을 보였다.
'···무슨 일이 있나?'
"누나. 오랜만-"
"어휴, 집이 이게 뭐야? 좀 치우고 좀 살아! 이게 집이야? 돼지도 이렇게는 안 살겠다."
누나는 태연한 척 잔소리를 시작했지만 나는 누나의 손끝이 떨리고 있는걸 볼 수 있었다. 오자마자 인사도 생략하고 잔소리부터 하는 누나에게 뚱한 얼굴을 보였지만 누나는 신경도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나는 연신 투덜거리는 누나의 말에 방을 둘러보았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한 방 안, 건조대가 있지만 여기저기 널려 있는 옷가지들, 간이 책상에 쌓인 컵라면들, 베란다 구석에 놓여 있는 세탁기와 옆에 놓인 입구가 반쯤 열린 쌀 포대.
이 정도면 괜찮은데? 쓰레기만 없으면 괜찮지 않나?
전역한 지 6개월이 지난 나에게 이 이상의 깔끔함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 분명하다.
"정리는 내가 나중에 할 테니까 그냥 놔둬. 갑자기 무슨 일이야?"
"얘는?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동생 보러 오냐? 나 네 누나야."
널브러진 이불을 들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얼굴을 찌푸리던 누나는 이어지는 내 말에 한숨을 폭 쉬고 이불을 내려놓았다.
"내가 누나를 모를까? 손 벌벌 떨리는 게 뻔히 보이는데. 무슨 일 있지?"
"······."
누나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불안한 기색을 띠는 얼굴, 흔들리는 동공, 조금씩 떨리는 숨소리를 보고 있자니 나에게도 불안한 느낌이 전염되는 기분이다.
나는 누나에게 다가가 떨리는 손을 잡아주며 물었다.
"왜 그래? 뭐 때문에 그러는 거야?"
누나는 입을 여는 대신 리모컨을 들어 TV전원을 켰다. 그러자 내가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채널이 눈에 들어왔다.
'저 양반들은 아직도 싸우고 있네. 쯧쯧'
"저 방송에 나오는 기업이 우리 아빠 회사인 건 알지?"
"당연하지. 누나가 저기서 일하게 됐다고 엄청 좋아했잖아. 저게 왜?"
"···아직, 아직 확실하진 않은데. 이 회사 무언가 이상해."
"무슨 소리야 그게? 누나네 아버지 회사가 이상할 게 뭐가 있다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이상하고, 내가 연구하는 것도 이상하고, 심지어 우리 아빠도 이상해. 이상해···이상해 이상해 이상하다고···!"
누나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지고 갑자기 추위를 심하게 느끼는 듯 연신 팔을 쓸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상태가 실시간으로 안 좋아지는 것을 보니 나는 사정을 듣는 것보다 병원에 데려가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고 택시를 부르기 위해 폰을 들었다.
그러자 누나는 황급히 손을 뻗어 폰의 화면을 가렸고 급격히 안정된 얼굴로 말했다.
"미안. 내가 요즘 피곤해서 그래. 사람이 너무 피곤하면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하기도 하잖아? 나도 그런 거야. 걱정할 필요 없어. 그것보다, 후으으···내가 비타민 하나 챙겨 왔는데 이거 꼭 먹어. 너 생각해서 가져온 거니까."
누나는 그때까지 어깨에 메고 있던 핸드백을 열어 자그마한 알약 하나를 꺼냈다.
"···이게 뭔데?"
"말했잖아. 그냥 비타민이야. 젊을 때부터 건강 관리 해야지."
나는 누나가 건네주는 알약을 손에 받았다. 알약에는 작은 글씨로 'WT-1'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내가 손에 올려진 알약을 멀뚱멀뚱 보고만 있자 누나는 컵에 물을 담아오며 재촉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콜록, 빨리-콜록! 빨리 먹어. 단순한 비타민이라-콜록-니까?"
"아, 알았어. 컵 이리 줘.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응."
나는 한 손에는 알약을, 다른 한 손에는 컵을 들고 있다가 눈 딱 감고 알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내가 진짜 알약을 먹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를 지켜보고 있던 누나는 꿀꺽 하는 물 넘김 소리와 함께 목울대가 움직이자 다행이라는 듯 웃음을 보였다.
누나가 웃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순간 속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누나. 지금 상황 이상한 거 알지?"
"···응?"
"누나 상태도 별로 안 좋아 보이고."
"아냐! 나 완전 괜찮은데?"
"내가 먹은 게 진짜 뭔지 알려줄 생각은 없는 거고?"
"비-"
"-타민이라고 하지 말고. 그걸 누가 믿어? 누나가 주는 거니까 그냥 내가 믿고 먹은 거지."
내가 누나에게 타박하는 듯한 말투로 말하자 그제야 기가 죽은 누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뭘 또 기가 죽고 그래. 설마 누나가 나한테 독이라도 먹였겠어?"
"아니야! 진짜 그런 거 아니야!"
내 말에 화들짝 놀란 누나는 자기는 결백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런 누나에게 진정하라는 듯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무튼. 이제 알약 얘기는 됐고. 그냥 넘어갈 테니까. 그리고 저 방송에서 나온 화제이니까 묻는 건데. 저 남산타워 영상, 누나네 회사랑 관련 없는 거 맞아? 방송에선 조작이라고 하던데."
"음···. 나야 그냥 연구직이라 현장에서 하는 일은 잘 몰라. 하지만-콜록콜록- 뭔가 이상한 문서를 봐서-콜록콜록!"
"에헤이. 감기 걸린 것 같은데. 무슨 기침을 그렇게 심하게 해? 이거 약을 내가 아니라 누나가 먹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나는 연신 기침을 하는 누나의 등을 쓸어 주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따뜻한 물이라도 한 잔 가져다줄 테니."
그리고 부엌으로 가 커피포트에 물을 담았다.
전원을 눌러 물을 끓이려는 순간 몸 안쪽에서부터 기이한 열기가 올라오더니 얼굴에 모여 기침 소리와 함께 무언가 밖으로 쏟아졌다.
푸훕-!
후두둑-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입을 가렸지만 틈 사이로 빠져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피? 왜?
내 의문이 해소되기도 전에 다리의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쿵-!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누나는 갑자기 들린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에 놀라서 내게 달려왔다.
내가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본 누나는 급하게 내 어깨를 흔들면서 뭐라 뭐라 말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왜···이상···
-정신···
-제발···!
누나의 말을 알아들으려 노력했지만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점점 멀어지며 시야가 암전한다.
***
3월 6일 새벽 3시.
새하얀 입자들이 달빛에 반짝이며 남산을 기준으로 사방으로 퍼졌다.
입자들은 나무에 달라붙으며 그 크기를 불려 나갔다.
입자와 결합한 나무들은 꾸득꾸득 소리를 내며 점차 커지기 시작하고 나무의 꼭대기에 꽃봉오리가 맺히더니 이내 개화했다.
개화한 꽂은 보다 더 많은 흰색 입자를 사방으로 뿌리기 시작했다.
하얀 입자들은 바람을 타고 퍼지고 이내 또 다른 나무와 결합하여 마찬가지로 성장시킨다.
끝을 모르고 커지는 나무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뿌리를 내려 지반을 뒤흔들었다.
한밤중의 소란에 자던 사람들도 일어나 무슨 상황인지 보기 위해 창문을 열고 두리번거렸다.
갑작스러운 지진에 놀란 사람들이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흰색 입자들은 나무에, 건물에, 사람에, 동물에 가리지 않고 달라붙었다.
사람들은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변한 바깥을 확인했다.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기침하기 시작하더니 몸에 힘이 풀리는 듯 서서히 쓰러진다.
하늘은 고장이라도 난 듯 푸른빛과 검은빛이 점멸하며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색이 다른 빛들이 서로 부딪힐 때마다 대지를 덮는 파장이 발생해 사방으로 퍼졌다.
건물들의 불빛이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하며 야경이 아름답던 서울의 모습은 점차 사라져만 갔다.
···서울에 조용한 죽음이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