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 4. 모텔
툭-투두둑- 쏴아아아아-
빗줄기가 한 방울씩 내리더니 점차 굵어지며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시원한 비 내음이 내 코를 간지럽힌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올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끄응···."
열린 창문으로 빗물이 들어와서 그런지 방 안에 습기가 가득하다.
손으로 이불을 더듬어보니 이불 역시 습기를 머금었는지 축축한 느낌이다.
어제의 피로가 덜 풀렸는지 몸이 천근만근이다.
몽둥이로 맞은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린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발을 바닥에 대었다가 느껴지는 고통에 신음을 흘리며 발을 부여잡았다.
"아흐으-."
영문 모를 고통에 발을 바라보니 발바닥 피부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아. 어제 정신없이 뛰다가 슬리퍼가 사라진 것도 몰랐구나.'
나는 일단 급한 대로 베개 피를 벗겨 발에 돌돌 감았다. 천조각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알싸한 감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얼추 천을 발에 다 두르자 임시방편이지만 훨씬 나아진 느낌에 나는 안도하고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거센 빗줄기가 창틀을 때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어제의 일이 불쑥 떠오른다.
'이 창문 넘어가려고 그 고생을 했는데···. 창문을 창틀에서 잠시 분리해서 들어왔으면 편하게 들어왔겠네.'
쉽게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 뒤늦게 떠올랐지만 나는 애써 어제는 그게 최선이었다며 자위하며 중얼거렸다.
"에휴, 살았으면 됐지."
창밖을 보니 낮이 된 건 분명하지만 먹구름 가득한 하늘 때문에 그리 밝지는 않았다.
고개를 살며시 내밀어 밖을 살펴봤지만 괴물들은 보이지 않는다.
밖은 아주 고요하다.
휘이이이잉-
차가운 바람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가자 내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나는 뒤늦게 내가 옷을 다 벗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어제 벗은 옷을 다시 입기 위해 주웠지만 이내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도 안 말랐잖아···."
습기 가득한 방 안에 젖은 옷이 마르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옷이 젖었으니 속옷 차림으로만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옷을 다시 주워 걸레 짜듯 비틀어 물기를 최대한 짜냈다.
뚝
뚝
주름진 옷을 두어 차례 털어낸 후 몸에 걸쳤지만 여전히 축축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옷을 챙겨 입은 나는 어제는 내 목숨을 구해 준 고마운 창문이었지만, 이제는 차가운 비바람을 새게 하는 것에 불과한 창문을 닫았다.
드르륵-
지금이 몇 시쯤 일까.
이 모텔은 방에 시계도 구비 해 놓지 않은 건지 작은 시계조차 보이지 않는다.
문득 TV에 시선이 갔다.
어제 도시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던 걸 생각해보면 전기가 끊겼다고 예상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원을 눌러보았다.
꾹 꾹꾹-
TV는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에휴."
나는 침대로 돌아와 걸터앉고 생각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정말 나밖에 없는 걸까.
잠결에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기는 한데···.
'잠결에 들을 소리 정도면 내 방에 들어왔-.'
이어지는 생각에 쭈뼛 소름이 돋은 나는 닫혀 있어야 할 방문을 바라보았다.
방문이.
-열려 있었다.
쿵! 쿵! 쿵!
순식간에 긴장감이 차오르고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왜?
문이 왜 살짝 열려 있지?
비바람 때문에 문이 열린 건가?
그러면 내가 들은 두 여자의 대화 소리는?
내 착각?
만약 아니라면?
이 방에 왜 들어왔지?
들어왔다면 왜 그냥 간 거지?
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나?
'씨발. 그럴 리가 없잖아.'
정신이 확 든 나는 방문을 확실하게 잠그지 않고 자버린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말았다.
살아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을 것이라는 안일함에 잊고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직도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내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울퉁불퉁하게 들린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나는 그 소리가 밖에까지 들릴까 봐 심장을 졸였다.
끼익- 달칵
살짝 열려 있던 문을 확실하게 닫고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이 모텔에 다른 인기척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쏴아아아아-
비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고 나는 숨을 최대한 죽인 채 가만히 기다렸지만 내 귀에 들리는 인기척은 없었다.
"후우!"
속으로 1부터 1000까지 세어봐도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맥이 탁 풀리며 안도감에 한숨이 나왔다.
꼬르르륵
긴장이 풀린 몸은 그제야 공복을 알아차렸는지 밥 달라고 아우성이다.
나는 주린 배를 붙잡고 무언가 먹을 것이 있는지 방을 확인했다.
방 안에는 미니 냉장고가 있었고 냉장고를 열어 보니 매실 캔 음료 하나와 500ml 생수 한 병이 놓여져 있었다.
나는 급하게 매실 캔을 따서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도 모자라 남은 생수 한 병도 모조리 마셔버렸다.
갈증은 해결했으나 공복은 여전 했기에 더 먹을 것이 없나 살펴봤지만 아쉽게도 먹을 것은 없었다. 대신 침대 옆 서랍장에 있던 작은 성냥갑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일단 성냥갑을 상의 앞주머니에 넣어 챙겨두기로 했다.
이번에는 화장실로 들어가서 수도꼭지를 틀어보았으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끼릭끼릭 소리만 날뿐.
변기 뚜껑을 올려보니 물이 없어 바싹 말라 있다.
바스락-
계속해서 방을 뒤적이고 있던 나에게 밖에서 무언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즉시 행동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바스락바스락-
그 소리는 한 번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들렸다.
역시 이 건물에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있다.
아니, 사람이 아닐 수도.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확인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에 삐걱거리는 바닥을 걸어 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잡았다.
"어차피 여기서 계속 살 수는 없었어. 사람이라면 빌어서라도 도움을 청하고, 만약 사람이 아니라면···."
-조용히 확인만 하고 오는 거야.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끼이익-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며 녹슨 문소리가 유난히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밖으로 나와 복도에 서자 복도 끝에 크게 2라고 써진 것이 보인다.
'여기 2층이었구나.'
나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기 전에 내 방이 몇 호인지 확인했다.
<206호>
'206호. 확실히 기억했다.'
무언가 밟히는 소리는 1층. 그러니까 아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복도 끝으로 조심스레 걸어가 계단 앞에 섰다.
숨을 죽이고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가 1층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잡다한 가구들로 입구가 막힌 모텔 정문 현관.
마른 나뭇잎들이 잔뜩 쌓여 있는 1층 바닥.
카운터 앞에 서성거리는 실루엣이 하나.
바스락바스락-
그것은 흰색 가운을 입은 여자였다.
나는 여자가 입은 가운을 보며 이 근처의 수많은 약국을 떠올렸으나 약사 가운과는 달라 보인다.
뻣뻣한 약사 가운과는 달리 좀 더 하늘하늘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가운.
흔히 볼 수 있는 모텔 가운인 것 같다.
'모텔 가운이면 외부가 아닌 내부 인원 이라는 건데···. 게다가 여자. 내가 들은 목소리 주인인가? 대체 저기서 뭘 하는 거지?'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 때문인지 실내가 묘하게 어둡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어제 본 이상한 괴물이면 어떡하겠는가. 나는 지금 수중에 무기가 될 만한 것도 들고 있지 않건만.
바로 그때.
「하나가 되자. 나는 널 기다리고 있어. 어서 와.」
나이를 추정할 수 없는 목소리가 다시 내 머리에 울렸다.
'······아, 그래. 확인. ···가서 확인해야지.'
나는 나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전방의 여자에게 시야를 집중했다. 하지만 눈을 찡그려보아도 자세히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조금씩 그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 순간.
번-쩍!
우르르르르릉!
실내를 환하게 비춰주는 천둥번개가 쳤고 여자의 얼굴도 순간적으로 밝아져 볼 수 있었는데···.
그 여자는-
아니, 그것의 얼굴에는 검은색 이끼가 가득 뒤덮고 있었고 두 눈이 텅 비어 있었다.
"흡!"
화들짝 놀란 나는 급하게 숨을 들이쉬며 입을 막았지만 소리가 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끄득-
끄드드득
가운 여자의 고개가 서서히 돌아가며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눈이 없는 게 아니라···나무 껍질 같은 게 눈가를 짓누르고 있잖아. 어깨에 저건 또 뭐야. 버섯이야? 아니, 그보다 내가 왜 움직였지? 대체 왜?'
분명 가만히 있기로 마음먹은 참이 아니던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무색하게 바로 움직인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미묘하게 기억이 끊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여자가 나를 보지 못하는 것에 감사하며 조용히 다시 올라가려고 했으나 하늘이 나를 돕지 않는 건지 여자는 킁킁 거리며 조금씩 내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끼익-끼익-
'이런 시바아알···!'
냄새?
갑자기 냄새로 나를 찾는다고?
이것들 냄새도 맡을 줄 알았어?
대체 무슨 냄새로-
아.
'나 지금 발에서 피나고 있지.'
[으-어어어어.]
킁킁- 킁킁킁-!
끊임없이 냄새를 맡던 가운 여자가 내 쪽을 향해 걸어온다.
'아직 시간은 있어. 빨리 방으로 돌아가서 문 닫고 버티면 어떻게든 될 거야.'
나는 재빨리 계단을 타고 올라 206호로 돌아온 후 재빨리 문을 닫고 입을 틀어막았다.
끼익- 달칵
쿵-삐걱-쿵-삐걱-쿵-삐걱···
여자가 걸을 때마다 바닥은 화답하는 듯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며-
쿵-!
[우으···냄새······.]
내가 있는 방문 앞에서 멈췄다.
'제발가라제발가라제발가라제발가라제발가라제발가라제발가라제발가라.'
나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어제 무사히 살아남은 것처럼 이번에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기를 빌었다.
지금 이것이 꿈이라면 조금이라도 빨리 깨기를 바랐다.
내 몸이 흔들린 것이 진짜 현실에서 누가 내 몸을 흔들면서 생긴 영향이기를 바랐다.
그그그극-
긁는 소리가 들린다.
그 여자가 문을 긁고 있다.
쨍그랑-!
가운 여자가 문을 긁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부수고 들어올까 노심초사하는 와중에 갑자기 밖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으···으우······.]
쿵-삐걱-쿵-삐걱-쿵-삐걱-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그 여자가 문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
"흐."
이번에도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나는 순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난 것을 떠올렸다.
유리 깨지는 소리는 뭐였을까.
다른 괴물이 유리를 부순 걸까?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사람?
모르겠다.
고개를 내려 몸을 둘러보니 식은땀으로 옷이 푹 젖어 있었다.
비가 아직 그치지도 않은 상황에 옷이 또 젖다니.
'옷이 마를 새도 없이 또 축축해졌네.'
뭐, 옷 정도가 젖은 게 무슨 대수라고.
이런 걸 신경 쓰는 것도 살아있어서 할 수 있는 거다.
나는 불평보다는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나는 침대로 걸어가 풀썩하고 몸을 뉘었다.
하루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지만 반복되는 긴장과 이완에 벌써 진이 다 빠져 지쳐 버렸다.
꼬르르르륵
'배고프다.'
멍하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니 위장이 요동친다.
배가 조금씩 꼬이는 느낌마저 든다.
힘이 들어서 더 배고픈 것일까.
배고파서 더 힘이 든 것일까.
확실한 건 이대로 가다간 굶어 죽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변해 버린 걸까···. 치킨에 맥주 마시던 게 엊그제 같은데. 누나도 찾아야 하고···. 누나는 살아 있겠지···?'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괴롭혔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다.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