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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6화 (7/497)

Chapter 6 - 6. 푸른빛

나는 상자에 담긴 내용물을 보며 실실 웃었다.

남은 상자는 주전부리 상자였는지 군것질거리들이 채워져 있었다.

초코파이, 육포, 젤리, 생수.

카운터 직원이 먹고 나서 채워 놓지 않은 건지 상자 안에 꽉 차게 들어 있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라는 생각에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빵보다는 고기.'

나는 제일 먼저 육포 봉지를 집었다.

기쁜 마음에 육포 봉지를 들었는데 뭔가 이상하다.

직원이 먹다 남긴 건지 지퍼가 반쯤 열려 있었고 그걸 보니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안에 들어 있는 육포를 손에 탈탈 털어보니 육포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나는 멍하니 곰팡이가 핀 부분을 바라봤다.

'이거 먹으면 죽겠지.'

비록 내가 지금 심한 공복에 시달리고 있다 해도 곰팡이가 핀 육포를 먹을 정도는 아니다.

이건 내가 배부른 투정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살려고 먹는 것이지 먹고 나서 죽는 건 내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물며 멀쩡한 병원도 보이지 않고, 살아 있는 의사도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이 판국에?

나는 육포를 다시 봉지에 담아 뒤로 휙 던져 버렸다.

곰팡이가 핀 것은 이 육포이건만.

내 마음이 더 크게 상처 입었어.

···씁쓸하다.

다행히 아직 먹을 것은 남아 있다.

나는 초코파이 상자로 눈길을 돌렸다.

부스럭-

상자를 들어 보니 유통기한이라고 써진 날짜가 눈에 들어온다.

XXXX.08.14

년도를 나타내는 글씨는 상자 안에서 이리저리 쓸리며 지워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월일만 보였다.

'설마 내가 쓰러진 지 수십 년이 지났다 이런 상황은 아니겠지. 내가 쓰러진 건 3월쯤 이었으니까···. 지금 날씨도 여름철이고. 유통기한 안 지났을 거야. 제발 그러기를 빈다.'

나는 이번엔 내용물이 멀쩡하기를 바라며 상자를 뜯었다.

드드득-

상자 입구를 점선이 나 있는 대로 뜯자 내부에 비닐 포장된 초코파이들이 보인다.

바스락-

나는 그중 하나를 꺼내 포장을 뜯어 초코파이를 꺼냈다.

동그란 빵 과자, 코팅된 갈색의 초콜렛.

하압

흐르는 군침을 닦아내고 나는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었다.

푹신푹신한 빵의 식감, 빵 사이에 끼워진 마시멜로의 달콤함.

초코파이는 멀쩡하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더 참지 못하고 급하게 입에 쑤셔 넣었다.

허업- 합- 하압-

단백질이 아닌 건 아쉬웠지만 탄수화물이 몸에 들어가자 기운이 샘솟는 느낌이 난다.

어느덧 손에 들린 초코파이는 형체도 남지 않고 모조리 내 입안으로 사라졌다.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손에 녹은 초콜렛을 쪽쪽 빨았다.

나는 초코파이 상자를 바라봤다.

'아직 많이 남았으니 조금 더 먹어도···.'

나는 연이어서 포장을 벗겨 초코파이를 입에 밀어 넣었다.

순간 방으로 돌아가서 먹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괜히 움직이다가 위로 올라간 목인의 시선을 끌 것 같았기에 일단 카운터에서 먹기로 했다.

한 개째, 두 개째, 세 개째···.

"케헥-! 커흑!"

꿀꺽-꿀꺽-꿀꺽-

허겁지겁 먹느라 목이 막혀 기침이 나기도 했고, 급하게 생수를 꺼내 마시기도 하는 상황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줄은 몰랐다.

정말이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쏴아아아아아-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밖의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온종일 쏟아지고 있다.

"끄윽."

나는 초코파이 12개 중 7개와 500ml 생수 한 통을 다 비우고 나서야 배가 찬다는 듯 만족스러운 소리를 냈다.

충분한 당분 섭취에 뇌가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와 별개로 배가 충분히 부르자 잠시 미뤄둔 피로가 몰려오기도 했다.

아직 잠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먹구름 가득한 하늘 때문에 어두운 상황인데 시간을 더 지체했다가는 밤이 와 모텔이 완전히 어둠에 잠겨 한 치 앞도 못 보는 상황이 오기 때문이다.

적어도 오늘 목표한 2층은 탐색해서 내 안전을 도모해야만 한다.

나는 바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를 나가기 전 남아 있는 식량 상태를 확인했다.

"초코파이 5개, 생수 한 병, 젤리 2봉···."

뒤늦게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었나 싶어 후회가 들었지만 식량은 더 찾으면 된다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어 후회를 털어냈다.

반쯤 남은 100매짜리 물티슈도 있었는데 비록 물기는 바싹 말라 물티슈로서의 효용은 없어 보였으나 마르면 말라 있는 대로 쓸모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일단 챙겨 두기로 했다.

끝이 휘어진 가위와 반쯤 남은 스카치 테이프도 마저 챙겨 상자에 담았다.

젤리 1봉은 따로 빼내 성냥갑이 들어 있는 상의 앞주머니에 넣었다.

땀으로 축축해진 옷이 성냥갑을 눅눅하게 만들어 쓸모가 없어져 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성냥갑도 상자에 넣어 두면 될 일이었지만 젤리는 이미 앞주머니에 넣었고 이왕 넣은 거 다시 빼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좋아. 일단 내 방으로 돌아가자."

나는 소중한 자원이 들어 있는 PP박스를 챙기고 위풍당당하게 카운터 문을 열었다.

그리고 조용히 한 발자국 내디뎠다.

찰박-

"······어?"

기세 좋게 문을 연 것이 무색하게 나는 문 너머 광경에 얼어붙고 말았다.

모텔 1층 로비에 물이 차 있었다.

콸콸콸-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침수?

비가 그렇게 많이 왔다고?

보통 하수구로 다 빠져나가지 않나?

하수구가 기능을 못하는 건가?

왜?

'지진···?'

비정상적인 땅의 흔들림.

그 지진으로 인해 이쪽 기반이 무너지거나 막혔다면···?

단순 지진이 아니었나?

고개를 돌려 정문을 보니 마구잡이로 쌓인 가구 틈 사이로 물이 밀려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로비가 이렇게 될 때까지 몰랐다니.

음식을 먹느라 정신이 너무 팔린 나머지 방심하고 말았다.

아니,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정신이 다른데 쏟아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물이 차는 소리를 못 들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음소거 당한 것 같잖아.'

그러고 보니 후각도 이제서야 맡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몸의 기능이 정상적인 작동을 위해 한번씩 꺼졌다가 재부팅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콸콸콸 찰박-

찰박찰박

지금은 발만 살짝 잠기는 수준이지만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린다면 어디까지 침수될지 모르겠다.

이대로 물이 계속해서 차오른다면 나는 모텔에 고립될 것이고 내 운신은 곧 생존에 직결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상황이 오고 말 것이다.

내가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지만 결국 당장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다.

내 방으로 돌아가 추후 상황을 지켜보는 것.

나는 물소리를 최대한 내지 않기 위해 발을 끌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했다.

촤륵

촤르륵

최대한 조심해서 걸음에도 물소리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기에 나는 더더욱 사방을 경계했다.

그게 패착이었을까.

내 주위를 신경 쓰느라 정작 아래는 신경 쓰지 못했다.

지진의 여파로 건물이 흔들렸으니 그 과정에서 건물 바닥이 파손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했다. 특히 이상하게 덜덜 떨리는 팔과 다리를 감안해서 더 조심하게 움직였어야 했다.

"엇?!"

내 연이은 방심이 불러 온 결과는 참담했다.

결국 다음 걸음을 내디디려고 할 때 무언가 발에 채여 넘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첨벙-!

첨벙······벙···

내가 수면에 넘어지면서 난 소리가 메아리처럼 모텔에 울린다.

[아아아아아!]

쿵쿵쿵쿵쿵-!

위에서 목인의 포효가 울려 퍼지고 뒤이어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하나가 되자.」

아니,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해.

처음으로 머리를 울리는 속삭임에 반항한 나는 황급히 고개를 뒤로 돌려 카운터를 바라봤다.

카운터에 숨는 방법도 있었지만 바닥에 물이 차는 속도를 보니 카운터에 있다가는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리를 조용히 내는 것을 포기하고 서둘러서 계단을 올랐다.

내려온 목인이 나를 발견해 찢어 죽이는 게 빠를지, 내가 방으로 숨는 게 더 빠를지 타임어택 시작이다.

쿵쿵쿵쿵쿵-!

나는 최대한 빨리 뛰면서 생각했다.

어제 본 이 모텔은 총 4층이었다.

지금 내려오는 목인은 가운 입은 그 여자겠지.

만약 가운 여자가 3층에 있었다면 내 패배.

4층에 있었다면 아직 기회는 남아 있다.

절대 패배해서는 안 된다.

패배는 곧 내 죽음이니까.

"헉-. 허억!"

덜그럭!

달그락!

한 손은 난간을 잡기 위해 다른 한 손은 PP박스를 옆구리에 끼고 격하게 뛰니 상자 내용물이 안에서 서로 부딪치며 소음을 내는 것이 들린다.

그 소리는 결코 작지 않았으니 이 소리도 들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계단을 다 올라왔다.

여기까지 걸린 시각은 5초 정도.

'저 코너만 돌면 바로 206호···!'

내가 목인보다 빨랐다는 생각에 희망이 생긴다.

동시에 목인이 2층 계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헉!"

목인은 손을 쭉 뻗은 채 소리를 낸 먹잇감을 잡으려 팔을 이리저리 휘젓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숨을 들이키고 즉시 모든 행동을 멈췄다.

[안···보여···안 보여━━!]

[아아아아악-!]

목인은 갑작스레 조용해진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괴성을 지른다.

쿵! 쿵! 쿵!

흐읍! 흐읍··· 흡···

격하게 뛰는 내 심장 소리가 들릴까 두렵다.

미처 막지 못한 내 숨소리가 들릴까 두렵다.

식은땀이 볼을 타고 턱에서 똑똑 떨어진다.

서로를 코앞에 두고 대치한 지 몇 초 지나지 않았지만 마치 무저갱 같은 침묵에 빠져든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움직인 건 목인이었다.

킁킁-

킁킁킁!

'아······.'

냄새.

또 냄새였다.

나는 시선을 내려 내 상태를 보았다.

갈아입지 못해 체취가 푹 배인 옷.

지금도 흐르는 땀에 젖어가는 몸.

바로 앞에서 땀 냄새 풀풀 풍기는 먹잇감이 잡아 먹어 달라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나.

나는 낙담해 고개를 떨궜다.

그 때, 바닥을 향한 내 시야에 푸른색의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목인은 킁킁거리며 한 발자국 크게 내디뎠다.

흠칫 놀란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목인이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반짝거리는 것 같은 푸른 입자가 공기 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목인이 나를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나에게 다가오는 손에는 검은색 입자가 휘감겨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순간, 기이한 열기가 나를 감싸 안았다.

「하나가━━」

그리고 잠시뿐이지만 속삭이는 목소리가 사라졌다. 연결이 끊긴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 하루야.'

그래, 겨우 하루.

이제 곧 이틀이라고 해도 짧다.

나는-

여기서 죽을 수 없다.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다.

그리 다짐한 나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PP박스를 2층 복도의 끝 방인 210호 쪽으로 힘껏 던졌다.

휙!

드드득-!

쿵!

PP박스는 흔들리며 날아가다 바닥에 떨어졌고 관성에 의해 바닥을 긁으며 복도 끝에 부딪혔다.

[끼에에에엑!]

쿵쿵쿵쿵-!

목인은 나를 향해 뻗던 손을 집어넣고 내가 있는 곳을 지나쳐 소리가 난 곳으로 쿵쿵거리며 달려갔다.

나는 숨통이 트인 지금이 기회임을 느끼고 재빨리 206호로 달려가 문을 닫았다.

끼이익-

달칵

그리고 문에 귀를 바싹 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쾅! 콰콰쾅! 우드득! 콰직! 드그그그극-! 덜컹덜컹! 콰앙!

[아니야아아아아!]

목인은 기껏 잡은 먹이가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것에 분노하며 주변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괴물이 냄새보다 소리에 더 민감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박살 나는 것은 상자가 아니라 나였기에.

나는 진이 다 빠져 벽에 등을 기댔고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죽을 고비가 수차례 있었지만.

나는 오늘도 살아남았다.

자꾸만 나를 괴롭히는 속삭임으로부터.

계속해서 나를 죽이려 드는 괴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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