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 8. 두 사람
스으윽 슥-
"······무거···그냥···."
"씁! ······이번···내 말···."
머리가 멍하다.
여자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하고······.
누군가 내 다리를 잡고 끄는 느낌이 들고 있다.
힘겹게 눈을 떠봤지만 시야가 가물가물해 분간이 되지 않는다.
겨우 볼 수 있는 건 널브러진 나를 질질 끌고 가는 사람 2명뿐.
"여기만······계단···."
"하나, 둘! ······아."
스윽 쿵!
"·····컥···."
쿵!
"윽!"
퍽!
"켁!"
조금씩 바닥에 끌릴 때마다 뒤통수가 모서리에 부딪치는 충격에 숨이 턱턱 막힌다.
-슥 끼이익-
아.
더는 못 버티겠다.
나는 그 생각을 끝으로 기껏 차린 정신을 다시 잃고 말았다.
***
빛 한 점 없는 그저 어둠만이 있는 공간.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어둡다.
나는 죽은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내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허탈함에 눈을 다시 감았다 뜨니 컷씬이 넘어가는 것처럼 장면이 바뀌고, 나는 어떤 방 안에 있었다.
저물어가는 하늘이 보이는 창문.
전문가들이 패널로 있는 방송을 내보내는 TV.
오후 6시 34분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
내 자취방.
처음으로 만든 나만의 보금자리.
사실 만들 필요도 없었던 나만의 보금자리.
왠지 모르게 이어질 상황이 예상이 갔다.
이제 곧 누나가 들어와서 잔소리하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시계는 오후 6시 34분을 가리킨 채로 멈춰있다.
나는 다시 눈을 깜빡였다. 장면이 넘어간다.
쓰러진 내가 보이고 울며 내게 뭐라 뭐라 하는 누나가 보인다.
내가 왜 쓰러졌더라.
모르겠다.
'······누나. 울지 마.'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내 손은 그저 누나의 얼굴을 통과할 뿐이다.
그렇구나.
이건 꿈이다.
짙은 후회를 불러일으키는 지독한 꿈.
내가 그렇게 집을 나가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사소한 이유였다. 너무나도 사소해 이젠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사소한.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일을 이렇게 키웠는지 모르겠다.
눈물이 앞을 흐리고 끅끅 대는 울음소리가 나왔지만 애써 억눌러 소리를 죽였다.
쩝쩝쩝
······?
챱챱챱
과거를 반추하며 슬퍼하는데 이 소리는 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고개를 들어 누나를 바라봤다.
쉴 새 없이 입을 오물거리고 있는 누나의 모습.
'······누나. 뭘 그렇게 먹어?'
"헉!"
나는 몸을 들썩거리며 눈을 번쩍 떴다.
이번에도 이런 식으로 깨다니···. 이러다가 평화롭게 눈을 뜨는 법도 잊어 버리게 생겼다.
머리의 두통이 가시지 않고 몸이 이제는 쉬어야 한다며 경고를 내보낸다.
아직 안 돼.
'여기···여기는 또 어디야?'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입을 오물거리고 있는 한 여자애가 보인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쩝쩝쩝
우물우물
'뭘 먹는지는 몰라도 참 야무지게도 먹는구나.'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를 먹느라 마스크를 벗은 그 여자애는 먹고 있던 것을 꿀꺽하고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일어났어요? 오빠 젤리 쩔더라."
일어났냐고? 뭐가 쩔어?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는 무어라 말하기 입을 열어 봤지만 갈라진 목에서 나오는 것은 마른기침 소리뿐이었다.
"켈록-콜록!"
"엇, 잠시만요."
여자애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어디로 사라졌다가 물병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먹여주겠다는 듯 물병을 입가로 가져다 댔다.
"천천히- 조금씩 마셔요."
꿀꺽-꿀꺽-
목을 충분히 적신나는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음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감···감사합니다······."
내 말을 들은 여자애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작게 웃었다. 내 등 뒤를 조금씩 힐끔거리면서.
"와! 오빠는 역시 사람이었네요!"
역시 사람이었다?
나는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어내 몸 상태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손은 등 뒤로 단단히 묶여 있어 손가락만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고, 내가 지금 있는 장소 또한 낯선 곳이었다.
삼각형 형태의 천장과 원형의 창틀이 있는 장소.
넓어 보이진 않는다.
'옥상? 아니, 다락방?'
나는 두리번거리는 것을 멈추고 다시 앞을 봐 여자애를 바라봤다.
밤색의 스카프로 둘러싼 얼굴, 키는 내 허리춤까지 올까.
머리카락도 손도 가려져 그나마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스카프로 가리지 않은 눈이다.
'파란색?'
한국인이 아니야? 아니면 내가 지금 있는 곳이 한국이 아닌가? 눈이 파란색?
나는 당황스러웠다.
"다 둘러봤어요?"
여자애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입가는 보이지 않았지만 눈초리가 휘어 있는 것을 보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저기···."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여자애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된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살려 줘서 감사합니다."
당장 내가 왜 이렇게 묶여 있고? 이 사람이 나한테 뭘 원하는지도 알 수 없지만?
일단 살려 둔 것에 감사해 하기로 했다.
"정말-. 괴물인 줄 알았다니까요?"
"······저는 사람인데요."
"그니까! 완전 신기해."
내가 사람이라는 소리가 뭐가 그렇게 웃긴 지 한동안 킥킥 웃던 여자애는 품속에서 작은 거울을 꺼내 내게 보여줬다.
"자요! 거울로 보면 제가 왜 그랬는지 알걸요? 오빠가 봐도 인정한다, 이건."
내민 거울을 돌려가며 내 모습을 보여주는 여자애.
기름에 완전히 떡진 머리.
피곤에 찌들어 붉게 충혈된 눈.
누리끼리하고 여기저기 해진 환자복.
신발을 대용하기 위해 천 쪼가리로 대충 감싼 발.
영락없이 정신병원을 탈출한 환자 같은 몰골인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이런 꼴 인데도 오빠라고 불러 주는 것에 고마워해야 할지.
나는 허-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여자애는 거울을 다시 품속에 넣고 말을 건넨다.
"사실 중요한 건 오빠가 무슨 꼴인지가 아니에요. 제가 알고 싶은 건 오빠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거든요."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 어···음. 저기 믿으실 지는 모르겠지만···. 그- 제가 눈 뜬 지 얼마 안 됐거든요?"
"저도 알아요. 방금 눈 떴잖아요."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괜한 머리 굴리지 말고 그냥 말해요."
"머리 굴리는 게 아니고···."
여자애와 나는 맞물리지 않은 톱니바퀴처럼 대화가 평행선을 그리자 서로 답답해했다.
"제 기억이 3월 이후부터 없어요!"
나는 답답한 마음에 소리쳤다.
여자애는 내 말에 눈을 가늘게 뜬 채 물었다.
"기억이 없다뇨? 오빠, 제가 머리 굴리지 말고 다 말하라고 했잖아요. 계속 이런 식이면 재미없어요."
"아니, 진짜 억울-."
나는 말을 하다가 멈췄다.
여자애는 내가 눈치 못 챘다고 생각하는지 내 등 뒤로 눈짓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다 무슨 신호를 받았는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린다.
확실히 내 뒤에 누가 있다.
"흐음. 기억을 잃었다고요?"
꿀-꺽
나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네."
"그럼 그냥 아는 거라도 말해 보세요. 듣고 생각해 볼게요."
듣고 생각해? 무엇을? 날 죽일지 말지?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말해 봐요. 전부."
내 떨리는 눈을 바라보던 여자애는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야.'
나는 내가 눈 뜬 이후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씩 꺼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취방에서 쓰러진 이야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길 한복판에 눈 뜬 이야기.
골목에서 목인들에게 쫓긴 이야기.
잡히기 직전 모텔에 겨우 숨은 이야기.
내 부주의에 목인에게 들켜 새벽 내내 숨을 죽였던 이야기···.
나는 그동안 내가 겪은 일들을 모조리 말하고 처분을 기다렸다.
"제가 기억하는 건 이게 끝입니다···."
내가 하는 말을 경청하겠다는 듯 바닥에 앉아 귀를 기울여 듣고 있던 여자애는 내 얘기가 끝나자 벌떡 일어났다.
"이상한 점도 많고, 이해가 안되는 부분도 많지만! 이 정도면······. 어때?"
-언니.
여자애가 덧붙인 말에 나는 흠칫 놀랐고.
쐐에에에엑-!
콰직!
뒤이어 파공음 소리와 함께 내 바로 옆 바닥이 도끼에 패이는 모습에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뭐, 완전히 믿기지는 않지만. 괴물은 확실히 아니네."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여자의 목소리.
"내가 뭐랬어~. 파랑이가 가득 반짝였다니까?"
"흥. 너무 그것만 믿지 마."
"그래두! 이번에도 내 말이 맞았지?"
"그래그래, 알았어."
빨간 도색이 되어 있는 소방 도끼를 어깨에 올리고 여자애와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는 다른 사람.
아마도 내 등 뒤에서 나를 계속 지켜봤을 사람.
나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 사람도 스카프 같은 것으로 얼굴을 싸매 보이는 것은 오직 호박색 눈동자뿐이다.
파란색과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이들에게 호기심보다는 답답해 보이기 까지 하는 복장에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얼굴과 몸을 가릴 필요가 있나?
어제는 비가 와서 오늘은 기온이 서늘한 편이지만 지금이 후덥지근한 여름철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들에게는 뜨거운 기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입어야 하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솔직히 죽을 줄 알았어. 바뀐 상식대로 움직이질 않아서."
대화를 멈추고 뒤돌아 나를 바라보는 도끼 여자.
"그동안 그쪽을 위에서 지켜봤거든."
"절 지켜봤다고요? 어떻게···? 혹시 밤에 제가 있던 방에 들어온 게 당신들입니까?"
"그것도 있고."
도끼를 든 여자는 눈짓으로 여자애를 가리켰다.
나는 대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저 여자애가 어쨌다고? 왜 가리키는 건데?
그 여자는 내 등 뒤로 오더니 묶인 손을 풀어 주었다.
툭-
투툭!
"오해 하지 마. 이걸 풀어 주는 건 아저씨를 믿어서가 아니니까."
키 큰 여자는 도끼 날을 손가락으로 팅팅 치며 경고했다.
"우리가 여자라고 허튼수작 부리는 날에는- 바로 골통 부서지는 거야."
시퍼렇게 빛나는 도끼를 보자니 오금이 저린다.
"······예."
나는 얼얼한 손목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키 작은 여자애는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려고 하는지 밝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우리 아직 서로 이름도 몰랐네요! 저는 최예린이에요!"
그 다음으로는 옆에 있는 여자 보고 말하라는 듯 손가락으로 콕콕 찌른다.
도끼 여자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김지수."
최예린과 김지수···.
들은 이름들을 속으로 곱씹고 있자 예린이 왜 말 안 하냐는 듯 눈치를 준다.
"오빠 이름은요?"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우. 이현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