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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9화 (10/497)

Chapter 9 - 9. 생존 수칙

"좋아요. 현우 오빠. 이제 서로 이름도 알았으니 남은 얘기 마저 해요!"

"남은 얘기요···?"

"오빠가 정말 기억을 잃은 것이 맞다면 궁금한 게 엄청 많을 것 같은데~."

그래. 저 여자애···아니 최예린의 말이 맞다.

길 한복판에서 눈을 뜬 후, 그 뒤는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의 연속이었다.

누군가 내게 답을 알려 줬으면 하고 바라긴 했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나는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지 고민했다.

세상이 왜 이렇게 됐는지.

그 원인은 무엇인지.

언제부터 변했는지.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있는지.

내가 지금까지 만난 괴물들은 사람이 맞는지.

사람이 맞다면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군대는 뭐하는지.

정부는 뭐하는지.

물어보고 싶은 건 산더미인데 물어볼 수 있는 입은 하나뿐이라 자꾸만 버벅거리게 된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여기-."

그때 갑자기 최예린의 옆에 앉아 있던 김지수가 벌떡 일어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김지수는 이 공간의 유일한 창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서 킁킁 거렸다.

'개도 아니고 뭐 하는 거야?'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어 김지수를 멍하니 바라봤다.

"습한 냄새가 나."

"그래?"

"응. 다시 비가 내릴 거야."

"그럼 오늘도 여기 있어야겠네. 비 그칠 때까지."

입을 살짝 열린 채로 굳어 버린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대화를 나누는 김지수와 최예린을 보고 있는데 최예린이 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자기 언니는 신경 쓰지 말라는 몸짓을 하며 말했다.

"뭐 물어보려고 했어요?"

나는 최예린의 말에 서둘러 다시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비가 오는데 왜요?"

내 두서없는 말을 예린이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내가 먼저 묻고 싶었던 것은 이게 아니었다.

하지만 저 말을 내뱉는 게 내 최선이었다.

'이 병신!'

분명 질문할 것은 논리적으로 머릿속에 정리해놨건만. 막상 발표할 때가 와서 말하려니 목에 걸려 나오지 않는 기분이다.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내가 무어라 보충해서 다시 말하기 전에 창가에 서 있던 김지수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정말로 기억을 잃은 건지 잃은 척하는 건지. 그 질문은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물어보지 않을 질문이긴 하네. 그동안 했던 행동도 그렇고."

"왜요?"

"비가 오면 숨어야 한다는 것을 모두가 몸으로 배웠으니까."

몸으로 배웠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몸으로 배웠다고요?"

"밖에 있는 나무들 봤을 거 아냐.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게 자란 나무들, 건물 벽면을 전부 뒤덮은 넝쿨들, 괴물로 변해 버린 사람들···. 비가 오면 그것들은 활발하게 활동해. 좀 더 예민해지고, 강해지지. 어제 온종일 비 와서 아저씨도 이 정도는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김지수의 말에 새벽의 일이 떠올랐다.

방 내부를 전부 뒤덮은 넝쿨들은 끝도 모르고 성장하다가 비가 그치니 성장을 멈췄었다.

'이러다가 넝쿨에 압사당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잠식했었지.'

"비가 오는데 밖을 함부로 돌아다닌 사람들은 다 죽었어. 다양하게도 죽었지."

김지수는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툭-

후두둑

내가 재차 입을 열려고 할 때 창문에 빗방울이 튀긴다.

한 두 방울씩 떨어져 창문을 두들기던 빗줄기는 조금씩 굵어지기 시작한다.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비를 보던 김지수는 반쯤 열린 창문을 확실하게 닫았다.

무언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도록.

"계속 물어봐. 우리도 아는 선에서는 대답해 줄 테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시간은 많아. 어차피 비 그칠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하고."

나는 김지수의 말에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해도.

"왜 이렇게 잘해주세요?"

현 상황에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이들에 내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유일하게 갖고 있었던 식량인 젤리마저도 최예린이라는 여자애가 먹어치웠고 지금의 나는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다.

날 죽이려면 진작 죽였을 것이고, 내게 원하는 것이 있으니 지금 이렇게 살려둔 것일테지.

그렇다면.

내게 대체 뭘 바라는 걸까?

내가 툭 내뱉은 말에 그녀들은 서로 마주 보더니 나에게 다가와 내 앞에 털썩 앉았다.

"내가 말 안했던가? 아저씨는 이제부터 우리랑 같이 다닐 거야."

"맞아요! 서로 이름도 나눴으니 우린 친구라구요."

친구? 누가? 내 의사는? 나는 같이 다니자고 말한 적이 없는데?

나는 부당한 행사에 항의하기 위해 입을 열다가 멈칫했다.

팅- 팅-

소방 도끼는 언제 또 꺼냈는지 도끼 날을 손가락으로 튕기고 있는 김지수가 나를 서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을 잘하라는 듯이.

'아.'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그렇죠. 저흰 친구죠. 친구는 같이 다녀야 맞죠! 하하하······하아."

내 어색한 웃음은 끝내 한숨으로 끝났지만 가라앉은 분위기는 환기가 되어 한층 가벼워졌다.

"여기는-."

"잠깐! 자꾸 말 끊어서 미안한데 못 참겠어."

"뭘요?"

"···냄새 나."

"냄새요? ······아."

손으로 코를 막으며 말하는 김지수의 말에 나는 내 몸을 둘러봤고, 수긍하고 말았다.

언니의 말을 들은 최예린은 도도도 뛰어가더니 물에 적신 천 조각을 들고 돌아왔고 내게 수건을 건넸다.

"오빠. 일단 이걸로 최대한 닦고 와요. 그리고 저한텐 말 편하게 해도 돼요."

"···고맙다."

바로 말을 놔도 될지 잠시 고민하다가 나보다는 확실히 어릴 것으로 생각해 말을 편하게 놨다.

다락방 구석으로 가서 몸을 구석구석 닦을 때마다 수건의 색이 점점 변해가는 것을 보니 착잡한 심정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더러웠구나.

검은 때와 기름기 범벅된 수건을 들고 오자 김지수가 떨떠름하게 쳐다본다.

나는 창피한 마음에 수건을 뒤로 숨기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제 얘기해도 되죠? 물어보고 싶은 게 많거든요."

"···말해."

"세상이 왜 이렇게 변한 거죠?"

"음······."

내 물음에 그녀들은 잠시 침묵을 유지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아마 처음 시작은 남산이었을 거야."

"남산?"

"그래. 남산. 전기가 완전히 끊기기 전 인터넷에선 어디가 시작이었는지 내내 떠들었으니까. 누구의 책임인가 떠들기도하고. 음모론 수준이었지만."

남산···. 남산이라.

분명 누나가 일하는 연구소가 있는 위치가 남산이었다.

- 내가 연구하는 것도 이상하고, 심지어 우리 아빠도 이상해. 이상해···이상하다고!

마지막으로 본 누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기침을 계속 토해내던 누나.

만약 이 사태가 누나네 가족과 연관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진실을 밝혀? 누구에게? 누구를 위해서? 애초에 진실이 맞긴 해?

일단은 더 들어 보자.

"사람들은 왜 변해 버린 거예요?"

"왜 변했는지는 우리도 모르지. 다만 변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지."

김지수는 그 말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움직였고 나에게 따라오라는 듯 손짓 했다.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창가 옆에 섰다.

쏴아아아아아-

창문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저 아래 있는 것들 보여?"

굵은 빗줄기가 시야를 가리긴 했지만 저 아래 몇몇 목인들이 두 팔을 벌린 채 하늘을 향해 입을 열고 있는 모습은 확연하게 보인다.

"저것들 가까이서 본 적 있어?"

"있어요."

"등에 뭐가 달린 것도 봤겠네?"

"꽃이나 버섯 이런 거요?"

김지수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얘기는 쉽지. 우린 그것들을 변이종이라고 불러."

"변이종······?"

"뭐. 나무 인간, 목인, 감염자 등등 부르는 명칭은 많아.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거든. 정확히는 확실하게 정해지기 전에 세상이 망했지. 그러니까 편한대로 말하면 돼."

나무 인간과 목인이라···.

사람들 네이밍 센스는 어딜가나 비슷한 것 같다.

당장 나조차도 그것들을 보자마자 나무같다는 것을 떠올렸으니 말이다.

"놈들이 움직일 때마다 하얀 가루가 사방으로 뿌려지고 공기를 부유하는데. 그 가루들은 불을 끈다고 해야 하나···먹어치운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달라붙어서 불을 꺼트려. 그리고 열기를 머금은 가루들은 팽창해서 고치 같은 상태가 돼. 그 고치는 나무 인간들의 먹이가 되고."

확실히 어제 내가 새벽에 성냥을 켰을 때 비정상적으로 불이 꺼졌었다.

불이 꺼진 이유가 변이종이 뿌리는 하얀 가루 때문이었다니.

잠깐, 열에 반응···열에 반응한다고?

"자, 잠깐만요. 그 가루들이 열기에 반응했다면 군대는 어떻게 싸운 거죠?"

나는 불현듯 스친 생각에 김지수에게 다급하게 물어 봤다. 내 말을 들은 김지수는 쯧-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 그것도 문제였지. 처음에 군대를 투입했을 때, 우리 모두 수도권을 뒤덮은 거대한 나무 따위는 금방 불타 사라질 줄 알았어. 이상한 가루들만 아니었다면 사회가 정상화 됐을지도 모르지."

"설마······."

"초반에는 어찌저찌 싸웠던 모양인지 총성과 포성이 난무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더라."

"군대가 졌다고요? 대체 그게 무슨···."

나는 그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군대를 다녀온 남성이라면 알 것이다. 현대 무기의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

현대의 군대가 고작 거대한 나무와 나무 인간들에게 졌다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솔직히 나무들한테 군대가 졌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또 다른 일이 있었던 거죠?"

"아앗! 그건 나! 나! 내가 알아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예린이 손을 들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늘에서 빛이 터지더니 막! 파랑이랑 검은색이 막! 싸웠어요!"

예린은 자신이 본 상황을 표현하고 싶었던 건지 두 손을 이리저리 얽히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나는 이 애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파랑이? 검은색?"

속으로 되뇌이는데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파랑이와 검은색······.

내가 본 푸른 입자와 검은 입자를 말하는 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내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예린이 말을 걸어온다.

"오빠. 오빠도 파랑이로 가득 차 있어요! 그래서 착한 사람이에요!"

내가 푸른 입자로 가득 차 있다고? 그래서 착한 사람이라는 건 또 무슨 말이야?

나는 김지수에게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하기 위해 바라봤다.

"내 동생이 말하는 파랑이와 검은색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몰라. 내 눈에는 안 보이거든. 그래도 얘 말을 들어서 피해 본 적은 없어. 아저씨도 얘가 구하자고 해서 구한 거야."

김지수가 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쏴아아아아-

우르르릉······

밖에서 들리는 비와 천둥소리에 지수는 눈가를 찡그렸다.

"시간이 늦었네. 비 올 때 쉬어두는 게 좋을 거야. 더 궁금한 게 있어도 나중에 물어봐. 어차피 이제 같이 다닐 거니까."

-아니다. 그냥 내 수첩을 보는 게 더 빠를지도.

그녀는 작게 중얼거리고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표지가 헤진 조그마한 수첩을 꺼냈다.

"다 읽고 돌려 줘. 수첩 망가트리면-"

말을 하다 말고 도끼 날을 튕기는 김지수.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한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김지수가 준 수첩을 조심히 받아 펼쳤다.

수첩은 품 속에 있어서 그런지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수첩의 첫 페이지에는 <생존 수칙>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생존 수칙> 1. 기침을 많이 하는 사람은 무조건 피할 것. 언제 괴물로 변할지 모름.

2. 비가 오면 당장 몸을 숨길 곳을 찾을 것. 단, 구석지고 습기 있는 곳은 피해야함. 그것들이 몸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3. 밖을 돌아다닐 때는 넝쿨 체액을 뒤집어써서 체취를 숨길 것.

4. 괜히 괴물과 맞서 싸우지 말 것. 그것들은 생각보다 더 강하다.

5. 푸른빛이 있는 곳은 대체로 안전. 검은빛이 있는 곳은 무조건 위험.

6. 등에 무언가 달린 것들은 주변의 변이를 가속시키는 듯함.

7. 우리처럼━━━━━━━━(거칠게 그어진 볼펜 줄)

수첩을 뒤로 넘길 수록 그동안 김지수가 겪은 경험에 의한 정보들이 적혀 있었고 내가 원하는 정보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정보들이란 걸 알고 있기에 차근차근 하나씩 읽어보면서 넘겼다.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니 이 페이지는 다른 페이지와 달리 살짝 두툼했는데 거기에는 어떤 인터넷 기사 내용이 스크랩 되어 수첩 크기에 맞게 접혀 있었다.

스크랩된 부분을 구겨지지 않게 살며시 펼치자 그 내용을 볼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프린트된 종이가 습기를 먹었는지 잉크가 번져 글씨가 흐려졌다는 것이다.

<···남산 일대 이상 현상···거대한 나무가 집어삼켜·········사람들 집단 혼수 상태······졸린 사 짙은 안개에 휩싸여 연락두절········누구의 책임··········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방역 무용론 제기······군 병력 지원············정부는 무엇을 하는가? ·······연구 인력 부족···········백신 개발 중단············수도권 봉쇄 실패······최후 저지선 돌파···>

전체 내용은 보이지 않았지만 언뜻언뜻 드러난 내용에는 충격적인 진실이 담겨 있었다.

졸린 사.

내 유일한 가족이 일했던 연구소가 있는 곳.

화성 탐사를 목적으로 세워진 기업인 줄로만 알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다만 이걸로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지금 이 사태에는 누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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