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0화 (11/497)

Chapter 10 - 10. 원인과 결과

머릿속이 복잡했다.

세상이 이렇게 괴물 천지가 된 원인이 누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니 숨까지 턱 막힌다.

'누나.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산으로 가야 하나? 하지만 이 아이들이 나를 데리고 다닌다고 했는데 내가 갑자기 남산으로 가자고 하면 미친놈 취급하겠지?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데 예린은 세상 걱정 없다는 듯 김지수의 어깨에 기대 색색거리며 자고 있다.

나도 모르게 자는 예린을 너무 쳐다봤는지 눈을 감고 있던 김지수가 눈을 뜨며 말했다.

"왜 안자? 배고파서 그래?"

"아, 아뇨. 배 고픈 건···."

꼬르르륵

배고파서 쳐다본 게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눈치도 없이 위장이 울음을 토해냈다.

나는 붉게 물든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어두워서 내 얼굴이 보이진 않겠지만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를 보니 숨고 싶은 기분이다.

위엄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어른이라니.

아니다. 나는 어른이 아니라 이 아이들의 친구다···친구.

아무런 연결 고리도 없이 어설프게 만들어진 관계지만, 지금만큼은 이것보다 튼튼한 연결 고리도 없었다. 그만큼 현실이 변했다는 이야기였다.

"배고파도 오늘만 참아. 당장 우리도 먹을게 떨어졌어. 비 그치면 나가서 먹을 걸 구하면 되니까. 이 모텔은 얻을 게 없더라."

내가 자괴감에 몸부림치는 것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김지수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모텔에 얻을 게 없었다고요? 목인은 어쩌고요?"

언제 모텔을 탐색했나- 싶은 마음에 말을 걸었지만, 다시 눈을 뜬 그녀는 이제는 약간 짜증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없었어. 이 모텔에 돌아다니는 나무 인간은 내가 도끼로 골통을 쪼갰고. 그러니까 이제 좋게 말할 때 자."

움찔-

나는 그녀의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김지수의 목소리에는 약간 허세가 섞여 있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 굳이 그녀를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우리가 있는 다락방에는 오직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와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이 남아 침묵이 유지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침묵에 기대 잠들고 싶었지만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에 남아 나를 괴롭혔다.

쏴아아아아- [···아···히···]

[키······엑···]

빗소리.

백색 소음이라고 했던가···.

백색 소음은 머리의 잡생각을 없애 숙면에 도움을 준다고 하던데 나는 해당이 안 되는 건지 빗소리를 뚫고 간혹 들리는 나무 인간들의 소리가 들려서인지 잠은 오지 않고 답답함은 더해만 갔다.

하지만 나는 애써 그런 것들을 무시한 채 억지로 눈을 감아 잠을 청했다.

내일을 위해서.

깊어가는 밤이었다.

***

톡톡톡

"···빠. 일···나요."

"으으-."

나는 누가 내 얼굴을 찌르는 느낌에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비가 그치고 햇빛이 보이는지 말간 빛이 눈에 비쳐 시야가 흐릿하게 보인다.

머리가 개운하다.

분명 자기 전까지는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였는데 막상 잠에 드니 아주 푹 잔 모양이다.

저벅저벅-

누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어깨를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저씨. 빨리 일어나. 밥 먹으러 가게."

나는 흐릿한 시야를 들어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시야를 가득 메운 호박색 눈동자에 순간 놀란 나는 몸을 들썩거리며 대답했다.

"···일어났어요."

내 앞에 툭 하고 떨어진 물티슈 한 장.

"그걸로 대충 닦아."

나는 얌전히 시키는 대로 얼굴을 마사지 하며 구석구석 꼼꼼히 닦았다.

얼굴 근육이 풀리면서 눈을 뜨는 게 한결 가벼워진 나는 고개를 돌려 지수와 예린을 바라봤다.

준비를 끝마친 채 나를 기다리는 그들은 일견 답답해 보이기 까지 하는 복장 그대로였다.

어제와 차이가 있다면 오늘은 얼굴을 조금 더 드러냈다는 점이다.

김지수는 갓 성인이 되어 보였고, 예린은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사이로 보였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제 이 주변 보니까 가까운 곳에 편의점 있더라. 오늘은 거기를 갈 거야. 거기서 식량도 얻고 아저씨 신발도 구해 보자."

간단하게 오늘 목표를 말해주는 지수와 그런 지수 옆에 꼭 붙어 있는 예린.

"밖에 돌아다니는 목인들은 어떻게 해요?"

"당장은 물을 충분히 먹어서 구석진 곳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커. 그리고 내 수첩 안 봤어? 체취만 숨기면 바로 들키진 않아."

지수는 수첩을 돌려달라는 듯 손을 까딱거렸고, 내가 수첩을 주머니에서 꺼내 돌려주자 다시 소중히 품속에 넣어 보관했다.

"오빠. 저 배고프니까 빨리 와요."

"그래. 알았어. 이제 가자. 완전히 정신 차렸어."

배고프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예린의 모습에 나는 허둥지둥 움직여 그녀들이 서 있는 바닥문 앞으로 갔다.

다락방이라 그런지 옆에 계단이 따로 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닥문에 붙어 있는 사다리로 내려갈 수 있는 구조였다.

'바닥문···.'

끼이익-

지수가 바닥문을 잡아당기자 경첩이 녹슨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바닥까지 이어지는 사다리가 펴졌다.

쭉 내려진 사다리를 보고 있자니 기절한 나를 다락방까지 끌어올렸을 지수의 괴력에 감탄이 나왔다.

역시 그 정도는 해야 저 도끼를 휘두르는구나 싶다. 까불지 말아야지. 진짜로.

삐거억

지수, 예린, 나 순으로 한 사람씩 차례대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는데 한 칸씩 내려갈 때마다 무게에 짓눌린 사다리가 죽어가는 소리를 냈다.

이제 우리는 그나마 안전했던 다락방을 벗어나 사방을 경계해야 하는 위험지역으로 들어왔다.

현재 위치는 모텔 4층.

내가 떨리는 눈으로 사주 경계를 하자, 지수는 내게 안이 비어 있는 검은색 크로스백들을 건네며 말했다.

"벌써 그럴 필요 없어. 닫힌 문만 함부로 열지 않으면 적어도 위험해지지는 않을 거야."

"닫힌 문이요? 어제 모텔 다 둘러봤다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의문스럽다는 듯 말하자, 지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후에 대답했다.

"어제 비 왔잖아. 그래서 위험해 보이는 문은 굳이 열지 않았어. 느낌이 괜찮은 곳은 열쇠로 열었고. ···느낌과는 다르게 얻은 건 없었지만."

김지수는 내게 답해주는 한편,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손가락에 끼우고 빙빙 돌렸다.

작은 너구리 인형이 달린 열쇠.

내가 카운터에서 찾은 마스터키였다.

'기절했었을 때 내가 가지고 있던 마스터키로 잠긴 문을 열었구나.'

내가 어딘가 허망한 얼굴로 김지수의 손가락에 걸려 빙글빙글 돌아가는 열쇠를 쳐다보고 있자니 누가 내 손목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든다.

"오빠."

빨리 가자는 듯 재촉하는 예린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3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 복도로 한걸음 내딛었다.

소방 도끼를 들고 있는 김지수가 선두에 섰고 가운데는 예린이가, 후방에는 가방을 메고 있는 내가 위치했다.

비록 여자 둘과 남자 하나였지만 막상 이렇게 무리 지어 진형을 갖춘 채 조금씩 움직이니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심리적 안정감이 크게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3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섰다.

휘이이이이-

바람이 계단 아래에서부터 밀려 올라와 휘파람 소리를 낸다.

그때, 김지수가 말을 툭 내뱉었다.

"아저씨. 그냥 한 번에 내려가자."

"네? 왜요? 아직 모텔 다 둘러본 게 아니잖아요?"

내가 다른 방들을 더 둘러보는 게 어떻겠냐는 투로 말하자, 김지수가 계단 아래쪽을 살펴보며 대답했다.

"생존 수칙 4번. 잊지 마."

"······괜히 괴물과 맞서 싸우지 말 것."

"그래. 내가 괜히 써둔 게 아니야. 나무 인간과 맞서 싸우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니까. 꼭 싸워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피하는 게 상책이고."

계단을 내려가기 전 팔다리를 쭉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하던 그녀는 몸이 얼추 풀렸는지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예린이가 뒤따라가고 나도 그녀들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한층 씩 내려가면서 나는 각 층의 복도를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대부분의 호실의 문들은 열려 있었지만 몇몇 호실의 앞에는 문이 닫혀 있다 못해 문 앞에 간단한 바리케이드가 만들어져 최대한 문이 열리지 않게 되어 있었다.

김지수의 말에 따르면 저 닫혀 있는 호실 내부에는 목인들이 숨어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어떻게 알았을까?

소리?

냄새?

문득 수첩에 적혀 있던 수칙과 예린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생존 수칙 5번. 푸른빛이 있는 곳은 대체로 안전. 검은빛이 있는 곳은 무조건 위험.

-오빠는 파랑이가 가득해요! 그래서 구했어요!

······검은빛?

나는 시야를 옮겨 내 앞에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언니를 쫓고 있는 예린을 힐끔 바라봤다.

'푸른빛과 검은빛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알 기회가 있을 거야.'

나는 고개를 털어 일단은 당장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한눈팔지 않고 묵묵히 계단만 내려온 우리는 이윽고 2층에 도달했고 그 순간 바닥에 엎어져 있는 목인이 내 눈에 들어왔다.

"흡!"

내가 급하게 숨을 들이키며 놀라자, 김지수는 피식 웃으며 도끼 끝으로 쓰러진 목인을 쿡쿡 쑤셨다.

"뭘 그렇게 놀라? 어제 내가 말했잖아. 돌아다니는 목인 하나 골통을 쪼개 놨다고."

쿵쿵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가까이 다가가니 목인의 머리가 두 쪽으로 나누어져 속살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운을 입고 있는 여성이었고, 나무 껍질이 두 눈을 짓누르고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아 내가 알고 있던 목인이 확실히 맞았다.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였던 목인이 이렇게 죽다니.

나는 다시 한번 김지수에게 까불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거 두 눈이 안 보이는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소리로 유인한 다음 그냥 콱!"

사냥꾼이 전리품을 자랑하듯 도끼를 치켜든 채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그녀가 귀엽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나왔다.

"···웃어?"

미간을 찌푸리며 서늘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웃는 얼굴을 바짝 굳혔다.

"···오해입니다."

김지수는 오해라는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미 기분이 상했는지 몸을 휙 돌려 1층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어느새 내 등 뒤로 온 예린은 손가락으로 나를 쿡쿡 찌르다가 이내 언니를 따라갔다.

겨우 하룻밤 같이 보냈을 뿐인데 두 사람에게 묘하게 친근한 느낌이 든다.

'···친근한 느낌 맞겠지?'

마침내 드러난 1층 로비의 모습은 침수가 되어 물바다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대부분의 물이 빠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물이 빠질 때 로비에 쌓여 있던 나뭇잎들도 쓸려 나갔는지 그 많던 나뭇잎들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나를 더 의문스럽게 만드는 것은 정문을 막고 있던 목재 가구들 또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유리로 된 정문이 깨져서 바리케이드도 무너졌구나 하고 유추할 뿐.

"여기 있었던 정문 바리케이드. 지수씨가 한 거였죠? 아쉽게 하룻밤사이에 없어져 버렸네요."

나는 정문 앞에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김지수에게 슬쩍 다가가며 말했다.

"아마도 비가 오면서 급성장한 넝쿨이 다 주워 먹었을 거야."

"넝쿨이요?"

"응. 본래라면 로비를 넝쿨이 뒤덮었어야 하는데 없는 걸 보니 입구에 쌓인 가구로 만족했나보네."

"아."

나는 그녀의 말에 로비를 둘러봤다. 확실히, 넝쿨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일부 넝쿨들 체액은 일종의 소화액이기도 해서 닥치는 대로 둥지로 끌고 가서 녹여 버리거든."

"무섭네요······."

나는 넝쿨에 대해 몰랐던 무시무시한 진실에 혀를 내둘렀다.

내가 새벽에 넝쿨과의 사투에서 졌다면 나도 끌려가서 먹혔을 거라는 소리가 아닌가.

"오빠! 언니! 나 배고프다구! 언제 갈 거야!"

미간을 찌푸린 채 대화가 언제 끝나나 기다리고 있던 예린은 더 이상 못 기다리겠는지 빨리 가자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런 예린을 달래며 모텔 밖, 화창한 햇볕이 비추는 밖을 향해 걸었다.

어쩐지 오늘은 운수가 좋을 것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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