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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12화 (13/497)

Chapter 12 - 12. 비밀

수원시.

거주인구 약 100만의 도시.

사태 발발지인 남산으로부터 30km 정도 떨어진 곳.

이 편의점이 운 좋게 털리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여기를 못보고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

주거지역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조차 털리지 않을 정도로 살아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거리가 좀 떨어진 수원조차 이 꼴이면 서울은···.

우리나라 총인구수의 반은 수도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일이 지나서야 이슈가 될 정도로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다면, 대체 얼마만큼의 사람이 죽어야 하는 거지?

서울에만 1000만. 수도권에 1200만.

어림잡아 2200만의 인구가 단기간에 죽어 버렸다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수치인가?

'아니지.'

지금 여기는 그 흔한 비둘기 같은 새들과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날파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사람만 죽은 게 아니다.'

나는 충격적인 사실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하늘에서 빛이 터지더니 막! 파랑이랑 검은색이 막! 싸웠어요!

예린이가 말한 파랑이와 검은색. 그것들이 대체 뭐길래.

나는 그것들이 지금, 이 사태의 원인일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리고 그 원인의 뒤에는 누나와 관련이 있겠지.

누나가 일했던 졸린사 연구소가 있는 남산.

그곳에 진실이 묻혀 있을 것이다.

"···씨! 아저씨!"

귓가에 들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대화하다가 갑자기 멍을 때리는 내가 이상했는지 김지수가 내 볼을 찰싹찰싹 치며 날 부르고 있었다.

"어, 예···?"

"아까부터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김지수는 눈을 흘기며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 눈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김지수.

나를 살려 두고 친구니까 일행으로 다녀야 한다고 한 이유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나를 걱정해 줄 정도로 착한 사람인 건 분명하다. 예린이도 마찬가지고.

"하하···. 그냥 배가 고파서 그런가···?"

"바보도 아니고. 여기 널린 게 먹을 건데. 자!"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한 말에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캔을 내밀었다.

"참치 싫어하는 건 아니지?"

"···음식 투정은 안 해요."

나는 복잡한 심경을 애써 감추며 두 손으로 참치 캔을 받았다.

"오빠. 여기 숟가락!"

어느새 다가온 예린은 한창 먹던 중이었는지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한 채 내게 일회용 숟가락을 손에 쥐어 주고 자리로 돌아가 다시 맹렬하게 먹기 시작했다.

"···고마워."

탁!

정신은 입맛이 없어 못 먹겠다라고 하는데 몸은 아닌지 캔을 따자 풍기는 참치의 냄새에 위장을 거세게 울렸다.

나는 참치를 숟가락으로 크게 떠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입에 확 퍼지는 참치의 짭조름한 맛과 씹을수록 느껴지는 담백한 맛.

"···맛있네."

푸욱

우물우물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우물우물

'남산으로 가야 하나?'

우물우물

'남산까지는 또 어떻게 가게?'

그그윽

"오빠···?"

참치를 다 먹은 것도 모르고 내가 멍하니 숟가락으로 캔 바닥을 긁고만 있자 그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예린이 먹는 것도 멈추고 나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왜 그래요?"

나는 상념에서 벗어나 캔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그냥 좀 피곤하네."

예린과 마찬가지로 날 보던 김지수는 예린의 손을 잡아끌어 구석으로 데려갔다.

'예린아. 저 아저씨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응. 이상하네. 갑자기 왜 저러지?'

'···괴물로 변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야.'

'그럼 왜 저러는 건데?'

나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소근거리는 두 사람이었지만 원체 주변이 조용하기도 했고 편의점 내부도 큰 편이 아니라 그녀들의 말이 그대로 들려왔다.

"다 들려요."

내가 나지막하게 말하자 두 사람은 꼬리가 곤두서는 것처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별거 아니라는 나의 말에 의심쩍게 보던 김지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그 생각이 뭔데 자꾸 멍을 때리는 거야?"

"······."

"별거 아니면 말해 봐. 숨기지 말고."

"······."

"하아. 됐어."

내가 입술만 달싹거리고 끝내 입을 열지 않자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바닥에 떨어진 캔을 주워 가방에 거칠게 넣기 시작했다.

덜그럭-덜그럭-

나와 김지수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좋지 않자 눈치를 보던 예린이는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티가 날 만큼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내가 도와줄게!"

"맞아요. 왜 혼자하고 그래요. 저도 도와줄게요."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들을 바라보다 도와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 내가 세상을 이 꼴로 만든 주동자를 알고 있고, 나와 관련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캔과 생수를 하나씩 가방에 담다 보니 어느새 가져온 2개의 크로스백에 가득 찼다.

배도 채웠고 가방에도 식량을 가득 채웠으니 이제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우리는 침묵에 빠져들었다.

이윽고 김지수가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저씨."

"···네."

"우리가 만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아저씨를 친구라고 생각해."

"······."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데, 그냥 그렇게 느껴져.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것처럼."

그녀는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매우 낯부끄럽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거짓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저도 그래요."

하루라는 시간은 상대방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다. 심지어 우리는 첫 만남도 좋게 시작하지는 않지 않았는가.

하지만 최악으로 남은 첫인상과 지냈던 시간이 겨우 하루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에게 묘한 이끌림을 느꼈다.

연인이 되기 전의 호감 같은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것보다 보다 더 근본적인, 마치 부모 자식 같은 느낌을 받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아저씨."

"네."

"몇 살이야?"

"···갑자기요?"

뭔가 지금 상황에서 맞지 않는 질문을 들어서 내가 황당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 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아니, 뭐. 그냥 이름만 알고 나이는 안 물어본 거 같아서."

"제 나이는···."

가끔 그런 적 있지 않나.

막상 나이를 말하려니 '내가 몇 살 이었지?'하는 생각에 멈칫거리며 굳은 적 말이다.

"···나이는?"

"어···."

실시간으로 김지수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기억이 안 나는 느낌이다.

'내가 96년생이니까 96년생이면···. 아!'

나는 그녀가 폭발하기 전에 겨우 기억해낸 내 나이를 다급하게 말했다.

"몇-!"

"26살! 26살이에요!"

"후우-. 뭘 그렇게 뜸을 들여? 난 21살이야."

"오빠! 전 14살이에요!"

"아저씨. 나한테도 말 편하게 해. 나보다 나이 많으니까."

"그래. 그래."

나는 예린이 때와 달리 이번에는 냉큼 말을 놓았다. 내가 기다렸다는 듯 바로 말을 놓자 지수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왜. 뭐."

"···에휴.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야. 예린아."

"응!"

지수는 예린을 부르더니 서로 무어라고 속삭였고 얘기가 끝났는지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리고 그녀들은 머리를 꽉 감싸고 있던 두건을 풀었다.

그렇게 내 눈에 들어온 건 검은색 머리와 쫑긋거리는······동물 귀?

"···뭐야."

나는 당황해하며 불쑥 튀어나온 동물 귀와 지수와 예린의 눈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봤다.

쫑긋-

쫑긋쫑긋!

가짜가 아닌 진짜 귀인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동물 귀는 자꾸만 쫑긋거려 존재감을 드러냈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나는 멍하니 머리에 솟은 귀를 쳐다 봤다.

"어휴. 이제 좀 시원하네!"

"······."

"···역시 아저씨가 보기에는 이상한가?"

그녀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꺼냈다.

하지만 내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으니 지수는 불안하게 떨리는 눈을 하고 고개를 푹 떨구었다.

나는 순식간에 기가 죽은 그녀를 달래기 위해 급하게 말을 꺼냈다.

"아냐! 안 이상해! 진짜로! 그러니까···그래. 귀엽네! 귀여워!"

"···진짜?"

"그럼!"

다행히 귀엽다는 내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지수는 배시시 웃었다.

매번 툴툴거리는 모습만 보다가 얌전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귀여워 보인다.

"사실 조금 더 친해지면 보여 줄 생각이었어."

"동물 귀를?"

"응. 눈을 떠보니 이런 모습이었고 괴물 같아서. 사람한테 동물 귀가 달린 건 이상하잖아? 또 아저씨는 기억을 잃었다고 했으니 이런 모습이 낯설 것 같았고."

"안 이상하고 귀엽다니까?"

"그래? 그럼 이건?"

지수의 말과 함께 그녀의 등 뒤에서 퐁 하고 튀어나온 꼬리.

나는 여기서 더 놀랄 게 있다는 것에 입을 떡 벌렸다.

"···꼬리도 있네?"

꼬리가 있다. 그것도 살랑살랑 움직이는.

"오빠. 나도 있어요!"

예린도 지지 않겠다는 듯 자기 꼬리도 내세워 보였다.

지수의 꼬리가 털이 풍성해 보이는 꼬리라면 예린의 꼬리는 털이 얄상해 일자로 보이는 꼬리였다.

개와 고양이 차이인가?

내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지수는 상관없다는 듯 이어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을 보여 준 이유는 하나야."

"······."

"우리 친구잖아. 친구 사이에는 비밀이 없어야 해. 뭐, 어설프게 만들어진 친구지만. 아무튼 아저씨가 우리랑 다니고 싶다면 알려줘."

지수와 예린이 갑작스럽게 그녀들의 비밀을 공개한 이유는 나한테 있었다.

내가 자꾸만 무언가를 숨기려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얘들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모르겠고, 얘들이 왜 내게 그나마 친근하게 대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가진 비밀을 강제로 털어놓게 하는 것이 아닌 먼저 자신들의 비밀을 밝힘으로써 자연스럽게 내 비밀도 말할 기회를 준 것이었다. 그녀들 입장에서는 나는 믿을 만한 놈처럼 보이지 않을 텐데 말이다.

사실 김지수가 도끼를 내밀어 강제로 내 입을 열게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현실이다.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진행된 이상 나도 언제까지고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우리의 관계가 이후에 어떻게 변화하든 감당할 것이라며 다짐하고 내가 가진 비밀을 털어놓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려고 했다.

휘이이이이이이-!

철그럭-철그럭-철그럭- 철그럭- 철그럭- 철그럭- 철그럭- 철그럭- 철그럭- 철그럭-

갑작스럽게 불어온 셔터가 요란하게 요동칠 정도의 돌풍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끼이익-끼익-끼이익-

그리고 편의점 내부의 창고로 이어지는 문 너머 무언가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불길하게 퍼지는 소리에 화기애애하게 이어지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입을 꽉 다물고 살며시 일어나 문 너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끼익- 끼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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